본문 바로가기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메르스 바이러스, 데카메론의 시간

by 한종호 2015. 6. 1.

천정근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0)

 

메르스 바이러스, 데카메론의 시간

 

 

지금 창궐(?)중인 메르스 바이러스 유언비어 유포의 진원지는 단언컨대 언론이다. 언론이란 결국 기자들이 쓰는 글이다. 그러나 기자들이 작가는 아니다. 기자는 작가처럼 상상력으로 기사를 쓰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 둘의 경계가 분간이 안 될 때가 자주 있다. 문제는 상상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건강성, 곧 독자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기사가 지향하는 현실이 어떤 것이냐이다.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얼마만한 절망과 기원이 담겨야 하는 것인가? 절망 속에 기원을 담아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상상력이어야 하는 것일까? 비단 메르스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계속해서 우리 사회가 마치 재난 영화에 등장하는 현장의 수많은 캐릭터들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심을 잃은 표류 상태다.

 

3차 감염이란 2차 감염자에게서 옮기는 경우를 말한다. 중국 출장 갔던 2차 감염자가 이미 격리되어 치료 중이고 당국은 그와 접촉한 사람들을 추적해서 격리조치 했다. 다른 2차 감염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 가운데 3차 감염자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 ‘3차 감염만은 막아라라니. 어떻게 막는다는 것인가? 기사를 쓰려면 정확히 써야지 책상 앞에 앉아서 소설을 쓰면 어떻게 하나?

 

어느 특정 언론만 그런 게 아니다. 거의 모든 언론이 뽑는 제목들이 이 모양이다. 이러니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진원은 다름 아닌 언론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3차 감염자가 나왔다면 또 다시 4차 감염만은 막겠다고 할 것인가? 3차 감염은 막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3차 감염자가 나올까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될 것이다.

 

 

 

 

현재까지 확진 환자 중 사망자는 없고, 3차 감염자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메르스 바이러스 진원지인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3차 감염 사례는 지극히 적었다. 사우디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보고된 바도 없었다. 또한 이 바이러스의 감염자 평균연령은 47세 이상이다. 어린이 환자는 보고된 바가 없다. 그런데 왜 지금 패닉이니 공황이니 하면서 국민들을 혼란케 하는가? 실제로 벌어지고 국민이 알아야할 엄청난 일들은 확산될까 보도도 못하면서 왜 이런 일에는 먼저 나서 호들갑인가?

 

왜 당국은 지금이라도 현재까지 3차 감염자는 없고, 예상될 확률도 적다이렇게 발표하지 않고 ‘3차 감염을 막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고 발표할까? 아니 언론이 그렇게 쓰는 것인가? 기자들은 왜 정확한 사실과 사례를 살피지도 않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 행위 같은 기사를 써대는 것인가? 그 이유를 가장 너그럽게 봐준다면, 만에 하나 3차 감염자가 나오게 될 경우를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3차 감염자가 나왔다면 벌써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 없다. 이 점이 (지나친 공포확산을 생각할 때) 현재로선 긍정적이다라고 말해야 옳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가 진짜 감염자가 나오는 날에는 바로 그런 당국의 안일함이 3차 감염을 불렀다고 여론의 질타를 당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로인해 정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욱 보수적으로 3차 감염만은 막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동시에 3차 감염의 위협을 세간에 퍼트린 꼴이 돼버렸다. 그런 말을 하느니 하루바삐 2차 감염자들과 접촉된 격리자들을 검사해서 양성인지 판별해 나가는 게 중요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우리 정부는 그럴 준비도 자세도 갖추지 않고 있다. 한심한 일이다. 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인처럼 집밖에도 못 나가고 갇혀 지내고 있는가? 모든 인력을 동원해 3차 감염을 막겠다니, 다시 묻지만 어떻게 막으려는가? 집에 가두어 놓았다가 시간이 흘러 3차 감염자가 나오지 않으면 정부가 잘 막은 게 되는 건가?

 

현재까지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는 모두 1차 감염자에게서 감염된 경우였다. 확산이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전원 1차 감염자 한 사람에게서 감염된 사례들이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1차 감염자와 접촉된 2차 감염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접촉자가 더 이상 없었다면 1차 감염자에게서 추가로 감염될 가능성 자체가 이제는 소멸시점에 도달했다. 만일 이대로 3차 감염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은 확진 환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제1차 감염자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만일 3차 감염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해프닝은 무슨 쓸데없는 호들갑의 낭비란 말인가? 그야말로 누구랄 게 없는 모두의 힘을 합친 공포라는 가짜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난리를 벌인 꼴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재난을 통하여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우리는 얼마나 공허한 사람들인가. 누군가 일부러 원한다면 모를까 도무지 어리석고 불필요한 짓들인 것이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첫째 1,2차 감염자들의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들은 지금 가족들과 떨어져 고립된 병상에 누워 고열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가족들은 또 그들과 떨어져 격리된 상황에서 자기들의 가족의 생사가 어떻게 판가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시각각 일분일초가 잠시라도 내 방심으로 그를 놓칠세라 절망 속 살얼음판을 걷는 기도의 연속이다. 물론 또 실제로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무수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헌신적으로 자신들의 직무에 임하고 있다. 언론은 이런 데 관심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모름지기 그들은 언론의 관심을 절대 사양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제발 우리 모두 정신 좀 차리고 빛 같은 예절과 소금 같은 염치를 차렸으면 좋겠다.

 

둘째 격리 중에 있는 2차 감염자와 접촉된 사람들을 가능한 하루바삐 검사를 통해 안심하게 해주는 일이다. 할 수 없으니 시간만 흘러가라는 자세는 너무나 무책임하다. 국내에서 안 된다면 외국에서 전문가들을 수입해서라도 해야하지 않는가? 이미 1차 감염자에게서 전염 가능성이 사라졌고, 2차 감염자와 접촉한 사람들을 파악해 제대로 격리조치 했다면, 더 이상 3차 감염 확산만은 막겠다는 둥, 초비상, 패닉, 공포확산, 공황, 괴담, 기하급수적 확산하는 등등의 출처불명, 목적 불명의 선전선동을 삼가고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정부가 되어야한다. 언론이 경쟁적으로 선정적 기사를 써대니 당국이 더욱 몸을 사리고 당국이 긴장하니 세간에 공포만 확산되고 이를 다시 언론이 확대 재생산해 퍼트리는 악순환의 대가를 지금 우리 모두가 치르고 있다.

 

지금 언론이 질타하고 있는 당국의 높으신 양반들 빼고 특히 국가지정 병원 의료진들과 질병관리본부의 현장 공무원들은 집에도 못가고 밤잠도 못자고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국민들이 아는지 모르겠다. 진실을 말하고 부정을 비판할 때 비판하더라도 제발 성숙한 사회의 공기로서 희망이 되어주길 바란다. 해야 할 소리를 바르게 전달하고 무엇을 전해야할지를 생각하는 진정한 공적연대의 메신저가 되기를 바란다.

 

남의 고통은 아예 생각도 못한 채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하며 유언과 비어에 흔들리는 사람들도 생각해 볼일이다. 불안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러는 것인가? 왜 이렇게 실속은 없이 이리저리 불안과 공포에 휩쓸리기만 하는 것인가? 그렇게 보이지 않던 사람들까지 천박한 이기성으로 속절없이 돌아가는 꼴을 보는 것은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다.

 

내가 겪지 않는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들, 그에 기반을 두어 자신의 무감각으로 세상을 전체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어가는 사람들, 나에게는 그들이 전염병보다 더 무섭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그러한 무감각으로 인해 언제나 누군가에게는 초비상상태이며, 패닉상태이며, 공황장애를 앓고, 데카메론 같은 음담과 괴담이 성행하며, 간밤의 그것들이 아침이면 기하급수 확산일로에 있다. 어느 것이 1차의 죽음이고 어느 것이 2차의 죽음인가? 육체인가 정신인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인가 죽음의 공포인가? 물론 죽음 앞에 무섭지 않고 그래서 경박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어디있을까마는, 그러나 그건 죽음을 아직 모르는 소치일 것이다. 실제로 죽음과 마주하면 인간은 비로소 사랑이라는 영혼을 지닌 존엄 있는 인간이 된다. 진정한 죽음은 죽음도 아니고 죽음의 공포도 아니다. 죽음 앞에서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삶의 의미를 성찰 할 수 없는 영혼의 무감각이다. 3차 죽음만큼은 진짜 막아야겠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숨은 신? 숨은 신! 숨은 신!!  (0) 2015.07.2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 2015.07.07
폐허의 잔해 위의 남은 사랑  (0) 2015.05.24
삼층천(三層天)  (0) 2015.05.14
죽음에 이르는 병  (0) 2015.04.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