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15)
여름, 물의 신화 태양의 소설
짧은 봄이었습니다. 그만큼 아쉬움의 그림자는 깁니다. 5월은 그렇게 새로운 계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퇴장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름이 성큼 와버리는 기운에, 여전히 봄인 줄 알고 있던 꽃들도 혹시 놀라지는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름은 아무래도 봄에 비해 때로 난폭할 때가 있습니다. 봄에 길들여진 마음으로는 난데없는 기습을 당하는 처지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도 그렇고 까맣게 하늘을 덮는 구름이 쏟아내는 장대비도 다소 우격다짐의 모양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름은 우리를 밀폐된 곳에서부터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가장 개방적인 계절입니다. 닫혀 있던 문을 열지 않고서는 지낼 수 없는 시간을 겪게 합니다. 내성적이었던 우리의 영혼이 차츰 마음을 놓고 자신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설득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광장에서 지쳐 있던 마음들이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을 때에도, 여름은 그렇게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무기력해질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누리는 기회가 감사하고 또한 특별하기도 하지만, 그건 자칫 자신의 기력을 우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이 붉은 이 계절은, 우리로 하여금 더 시원하고 더 광활하고 더 환한 공간이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합니다. 흙냄새 풋풋한 땅의 철학만이 아니라 그 땅을 적시는 물의 신화에도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달의 전설만이 아니라 태양을 품은 청춘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소설의 위력도 알게 합니다.
여름은 갑자기 꺼리길 것이 없어집니다. 은폐에 익숙해 있던 몸이 오랜 습관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미세했던 움직임이 커다란 원을 그립니다. 다소곳한 여인이 어느새 열정을 뿜어내는 비밀도 드러내고, 말이 없던 사나이가 빛나는 눈빛으로 그 여인을 향해 손을 뻗는 광경도 보여줍니다.
여름에 떠나는 열차는 시가 됩니다. 이름 없는 여행자가 되어 어느 시골 간이역에서 내리는 이는 언제나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는 화가가 되기도 하고, 작가가 되기도 하며 또한 어린 시절 추억의 파편을 확인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귀향한 중년의 세월이 되기도 합니다. 여름의 나그네, 그 표정에는 그래서 가식이 없습니다.
아카시아 향기 흩날리는 숲 속에서 여름은 봄의 옅은 화장기를 지우고, 자신의 생기 넘치는 육체를 적나라하게 과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감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원시적이며 동시에 쾌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향해 닫혀 있던 눅눅한 시간에서 해방됩니다.
이 여름이 그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그 사이 우리가 만든 각자의 작품이 그 열차의 선반에 올려지는 즐거움이 있다면 하는 꿈을 꾸어봅니다.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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