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신학-교학 어떻게 만날까?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2)

 

종교학-신학-교학 어떻게 만날까?

 

 

철지난 과제?

 

“종교학-신학-교학 어떻게 만날까?”는 사실 낡은 물음이요 철지난 과제이기도 하다. 1870년 영국 왕립연구소에서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가 새로운 정신과학으로서 종교학(science of religion)을 선언할 때 이미 저 물음은 뜨거운 이슈였고, 그때가 이미 백 년도 더 된 옛날이다. 뮐러의 선언적 작업 이후 많은 초기 종교학자들이 독립학문으로서 종교학의 자립을 위해 모학문이랄 수 있는 신학, 교학과의 자리매김과 역할 분담을 위해 가열하게 경쟁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 결과 지금 종교학은 종교를 연구하는 경험학문으로 나름대로 학문적 입장을 정리했고, 신학이나 교학에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미 오래전이다. 아울러 연구의 대상도 종교전통이나 현상에만 국한하지 않고 문화 일반으로까지 확대해가고 있다. 그렇게 지금의 종교학은 전통적인 종교연구에서 대중문화연구에 다양한 인접 전공과의 학제적 결합을 통해 광대한 학문적 영토 정벌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백여 년 전의 과제와 물음을 반복하고 있다? 왜인가? 아마도 이는 특정한 시공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리라. 즉 우리 주제는 ‘지금의 한국’이라는 매우 특정한 시공의 영역 내에서 유효한 물음이 될 것이며, 그리고 그렇게 범위가 특정될 때 저 질문과 과제는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우리의 물음을 새겨보자면, 현 한국의 종교연구는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종교학이 분과학문으로 태동된 지도 이미 백여 년이 지났고, 국내 대학에 종교학과가 설치된 것도 꾀 오래전인 1926년(경성제국대학)이다. 그런데도 지금 국내 학계에서 종교학이라는 분과학문이 보여주는 외형적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2백여 개를 헤아리는 4년제 대학들 중 종교학과를 설치한 곳은 겨우 한 손 안에 꼽을 정도이며, 일반 학계에서 보여주는 종교학에 대한 이해도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인구의 반 이상이 종교인이며, 특정 종교가 다수를 점하지 않고 다양한 종단들이 균형을 맞추고 있는 한국 사회로서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진리담론, 혹은 이해담론?

 

어쩌면 이는 한국사회가 가지는 매우 독특한 특징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종교학은 서구 사회가 계몽의 세례를 받고, 낭만주의의 자극을 통해 배태된 경험을 연구의 주된 대상으로 삼게 된 독특한 정신과학이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설명’을 토대로 기존 정신과학을 압박하고 있을 때, 종교학은 재빨리 ‘이해담론’을 강조하며 종교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인간의 경험을 검증적으로 살필 수 있는, 그렇게 해서 이해를 위한 도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종교학이라는 분과학문은 바로 그 점에서 종교의 진위에 집중하는 진리담론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종교학은 종교의 진위나, 참된 종교의 존재 여부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님을 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선언은 서구 사회가 계몽의 세례를 받고 주체적 자아를 발견하여 새로운 세계, 즉 근현대로 진입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사회는 조선(1392~1910, 고종은 1897년 조선을 버리고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지만 정권의 주체가 바뀐 것은 아니기에 1910년 일제강점의 시작까지를 조선시대로 보았다)이라는 왕조사회의 장벽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제대로 우리 손으로 왕조 사회를 마무리 하지 못했다. 서구 사회가 프랑스 혁명(1789~1794)을 통해 자신들의 통치자를 단두대로 처리하면서 지금껏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주체적 자아를 찾아낸 것과는 달리, 우리는 여전히 왕조를 역사적으로, 의식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는 독립된 주체적 자아라는 마인드를 사회적으로 확보하고 있지는 못하다. 즉 서구가 ‘그리스도 보편국가’의 주술을 계몽의 힘으로 넘어선 것에 반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주자학적 보편국가’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일원 지향적 세계관에 집중하고 있고, 그래서 쉽게 진리담론을 포기하지 못한다.

 

하나의 이념, 하나의 가치관, 하나의 왕조에 오래도록 집중되고 노출되었던 우리의 에토스는 아직 제대로 된 개별적 자아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기에 이해담론 중심의 종교연구가 못내 불편하다. 종교하면 진리논쟁이 되어야 하고, 당연히 참된 종교에로 집중되어야 하는데 이해만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라고 하는 것은 왠지 밋밋하고, 제대로 된 연구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서 종교와 관련된 연구는 쉽게 진리 논쟁에 매몰되어 버리고, 3자적 관점의 탐구나 연구는 불필요하거나, 혹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학문적 사치가 되어 버린다. 이런 에토스적 환경에서 이해담론이 설자리는 난망이다.

따라서 종교학자의 발언은 목적지를 잃고 방황한다. 해당 종교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못된다고(진리담론이 아니기에) 외면하고, 인근 연구자들은 종교라고 하면 그냥 고리타분한 주제라 간단히 방치해 버린다. 이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제대로 된 계몽의 강을 넘어서지 못한 결과라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의 종교학은 (서구의 경우처럼) 계몽의 수혜자가 아니라, 계몽의 개척자가 되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잘못된 만남?

 

우리 사회에서 종교학이 정작 그들이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종교계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것은 시작부터 포인트가 어긋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개신교를 중심으로 풀어보도록 하겠다. 한국 사회의 개신교의 이념적 성향은 보수적이다. 그렇게 된 연유는 한국 개신교가 19세기 후반 형성된 미국의 보수적 부흥 운동의 연장 속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계몽주의의 거센 도전을 체험적 신앙운동으로 극복하려했던 미국의 보수적 교회들은 성령체험 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선교 지향적 신앙인들에 의해 아시아 선교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는 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따라서 당연히 전래자의 보수적 성향을 ‘근본’인양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유주의적 경향이나 접근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저항정서를 지니게 된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런 정서적 환경 속에 최초 종교학적 연구를 신학분야에 소개하기 시작한 이들은 ‘종교 간 대화’나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한 갈래인양 종교학을 인용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보수적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서는 ‘종교학은 곧 종교다원주의’라는 등식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는 종교학이라는 경험학문에 대해 거부적 반응으로 일관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종교학의 지향점이 종교 간의 대화도 아니며, 종교다원주의 신학도 아니다. 물론 종교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는 현대 사회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다문화 환경에서 종교다원주의가 별스러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가치론적, 혹은 윤리적 종교접근은 신학적이지 종교학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종교학은 종교 간의 대화를 주도하는 학문은 아니며, 또 그럴 의무도 없다.

 

다만 종교학은 개별 신학과 교학이 그들만의 용어와 문법에 매몰되어 상호 이해의 벽을 넘어서지 못할 때 나름의 기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개별 종교나 종단의 특수 용어가 아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그리고 가급적 보편지향적인 언어를 가지고 각자를 해석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자간의 소통의 다리를 놓는 것. 바로 그것이 종교학이 해야 할 책무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학은 통역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딱 그 점에 멈춰 있을 뿐, 양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무언가를 도모하는 중재자의 위치를 주장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최초 종교 간의 대화를 주도했던 이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종교학은 그 스스로가 진리담론에 속한 학문이 아닌데도, 그렇게 낙인찍히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정작 서로가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통역가의 역할도 무시되어 버리고, 자신들의 신앙을 훼손하거나 변질시키는 문제덩어리로 오해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점차 종교학의 입지는 정작 가장 많이 활용되고 요청되어야할 종교계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버리게 되었다.

 

이런 잘못된 만남이 종교학이나 신학(교학)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 버렸다. 서로에게 등을 돌린 상호 보완적일 수 있는 두 학문 분야들은 서로에게 독점적이고 배타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학은 보다 보편학문에 가깝다는 자부심으로 신학의 종교연구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자신했고, 신학분야는 특정 종교전통 연구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고수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개설되어야 하는 종단 학교 내의 종교학 과목도 정작 전공자가 아닌 신학연구자들에 의해 강의되는 경우가 허다해졌다.

 

애초에 종교학자가 아닌, 신학자들에 의해 그것도 의도된 목적 하에 소개된 것이 한국 학계 종교학의 입지를 매우 좁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 그러니 종교학이 갖는 이해담론적 특징이 제대로 소개되기도 전에 가치 평가를 미리 받아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각 종단 학교에서 실제로 요청되는 종교학의 수요도 정작 종교학자가 아닌 신학자들에 의해 점유되는 이상한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실제로 개신교 계열의 종단 학교 신학전공에는 적지 않은 수의 종교학 과목들이 개설되고 있다. ‘종교학 개론’, ‘세계종교’, ‘비교종교학’, ‘종교와 과학’, ‘한국 종교’ 등. 하지만 대부분 이 과목들은 종교학 전공자가 아니라, 선교학이나 종교신학자들이 강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비전문가에 의해 종교학은 뒤틀리고 곡해되는 일이 반복된다.

 

거기에 더하여 동일하게 종교를 다루는 규범적 철학분야가 더해져서 한국의 종교연구는 좀체 이해담론의 단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중국철학, 인도철학, 혹은 동양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전통으로 해석될 수 있는 유교, 도교, 힌두교 등이 규범적으로 풀어지면서 이들 전통에 대한 이해적 차원의 해석이 끼어들 여지가 세속 대학의 강의에서도 줄어들고 있는 것이 또 한편의 그림이기도 하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종교학은 종단과 세속 모두에게 홀대받으며 힘겹게 자신의 자리 지키기, 내지 확대하기 싸움에 임하고 있다.

 

대안은?

 

문제는 제기되었다. 이제 이를 풀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차례이다. 작금 한국 사회의 종교학-신학-교학은 만남의 문제가 아니라, 제 자리 찾기가 시급하다는 것이 이 글의 분석 결과이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 분과 학문들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대안은 학문 연구 분야가 아니라 중등 교육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지금도 36개의 교육기관에서 종교과목 중등교사를 양성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배출된 종교교사들의 진로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육기관의 수는 2011년 기준 11,347개교에 달한다. 그중 종립학교는 574개 정도이다. 따라서 종교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갈 수 있는 학교 수는 574개의 사립 종단학교로 제한된다. 그리고 이들 종립학교들은 대부분 설립의 주체가 되는 특정 종교에 치우친 교육을 하고 있고, 이에 대한 교육부의 관리도 매우 부실한 형편이다.

 

그런데 2007년도에 고시된 교육부 지침에 따르면, 고등학교 현장에서 교육되는 9개의 선택과목들(철학, 논리, 심리, 교육, 종교, 경제, 건강, 진로와 직업, 그리고 환경) 중 종교교과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국내 공립학교에서도 종교과목을 교육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구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종립 학교 이외 공립학교에서 종교과목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미 다문화의 길로 들어선 한국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종교교과에 대한 필요성은 적지 않음에도 현실에서의 냉대는 무자비할 정도이다. 그러니 매년 적지 않은 수의 종교교사들이 배출되어도 이들을 위한 임용고사는 좀체 열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양질의 종교연구가가 지속적으로 양성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종교학의 이해담론이 제대로 발효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환경이 지속된다면, 그나마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고등교육기관의 종교학과와 종교연구가들의 미래도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학계는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공립학교에서 종교교과를 개설하고, 종교교사를 임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등교육 현장부터 이해담론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종교학-신학-교학이 서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종교교과는 철저히 ‘문화이해’ 과목으로 입장이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대다수 교육 현장에 있는 지도자들은 종교교과를 인성과 덕성 함양을 위한 도구로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가 파생되는데, 현장 학교장들 입장에서는 이를 위해 이미 윤리과목이 존재하기에 따로 종교교과를 선택할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사실 근자에 종교교과를 독립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종단학교 교직과정은 윤리교사를 배출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런 중첩된 현실 덕분에 인성 내지 덕성 교육의 일환으로 종교교과목을 한정시킨 다면, 종교교과의 선택은 계속 요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교과는 다문화 환경에 대한 객관적 지식과 정보의 제공이라는, 즉 문화교육이라는 명목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공립학교의 선택과목들 중 종교를 지정토록 하고, 그 결과로 중등교사 임용고사에 종교과목이 채택되도록 한다면 국내 종교학의 입지는 보다 선명해지고 여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문화교육을 위해 전문적인 종교학자들은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종교교과서를 펴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도 여러 종류의 종교교과서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특정 종단에 속한 이들에 의한 교리 및 역사 서술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 제대로 종교학적 훈련을 받은 이들이 여러 종류의 종교교과서를 편찬해내고, 이를 공립학교의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종교학회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기안하여 시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종립학교와 공립학교에서 공히 사용할 수 있는 종교교과서를 프로젝트 차원에서 펴내고, 이를 갖고 공개 강연을 제공하여 문화교육으로서 종교과목이 갖는 특장 점을 널리 알릴 필요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객관적 종교연구의 결과물을 수용할 수 있고, 그것이 학생들의 현실 교육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것이 입증되어 간다면, 자연스레 우리 사회에서 종교학의 자리가 잡혀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앞서 제기했던 종교학-신학-교학의 제 자리 찾기와 본격적 만남의 마당은 눈앞의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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