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근본주의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

 

종교와 근본주의

 

 

사람들은 왜 종교를 택할까? 다들 행복하자고 하는 일일 텐데, 때로는 종교 때문에 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겨나기도 한다. 다들 생각이 있고 뜻도 있어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일 텐데, 그런 주장 행위 때문에 적잖은 아픔과 균열, 그리고 분쟁이 생겨난다. 때론 그것이 구호나 추상적 이념 논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으로 나아가 실질적 피해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또 근본주의가 문제라는 서늘한 비판이 회중의 입에 오르내린다. 왜 그럴까? 행복하자고 택한 종교인데. 왜 그 때문에 괴롭고 힘든 상황이 펼쳐지는 것일까?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종교는 커다란 벽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들 인간에게 종교는 어떤 것이고, 또 어떤 역할이나 기능을 해 왔던 것일까? 예서 우리는 먼저 그 종교를 선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해 집중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속한 주변 환경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려하는 묘한 속성이 있다. 주어진 환경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생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이해의 영역 속에 넣으려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기준으로, 그것의 진행방향을 예측하려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즉 주변이 예상할 수 없는 상태로 있다면,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쉬 가셔지지 않을 것이다.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만큼 사람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재구성하며, 설명 가능한 그 무엇으로 만들고자 애쓴다. 자신이 속한 환경이 이해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면 그제야 사람들은 안식을 얻는다.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있어야 사람들은 평안하고 안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미지의 환경에 대한 적절한 설명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종교를 통해 그리고 종교 안에서 사람들은 하늘과 땅의 시작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물과 대지 사이를 메우고 있는 거대한 물구덩이의 정체를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왜 하늘 위의 태양은 하나만 빛나고 있는지, 낮과 밤은 어떻게 나뉘게 된 것인지, 그리고 인간은 왜 땅 위에 발붙이고 살 수 밖에 없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정리된 세계를 반복하여 뇌리 속에 새겨 넣으며 사람들은 알지 못함으로부터 얻게 되는 불안을 이겨내게 된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설명을 빠뜨리는 종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세계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종교의 역할이 멈추지는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한 세계 안에서 살////하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은 곤란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런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또 다시 종교를 요청한다. 이렇게 종교는 사람에게는 좀체 떨쳐낼 수 없는 매우 가깝고 또 요긴한 것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 있다면 종교가 그처럼 오래도록 사람들 곁에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앞서 설명한 상황적, 실존적 필요뿐만 아니라 종교는 또 다른 매력 포인트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바로 '경험'이다. 물론 종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반복적인 경험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들은 상호간의 소통, 그도 아니면 애완동물들과 삶의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경험은 무언가 제한적이고 가변적이고, 또한 임시적이다. 이와는 달리 종교에서 말하고 권장하는 체험은 인간에게는 보다 본질적이고 뿌리 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종교체험을 제대로 했다면, 이후 자신의 전 존재를 투자하더라도 계속 그것을 유지하고, 또 이어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적잖은 종교학자들이 체험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요아힘 바흐(Joachim Wach, 1898-1955)는 일찍이 이 종교체험의 보편적 특성을 4가지(궁극성-전체성-강렬함-행동)로 설명했다. 종교체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궁극적인 체험이다. 그리고 그 체험은 인간 전존재와 관련된 전체성을 갖으며, 강렬함은 다른 어떤 것이 따를 수 없고, 그것은 또한 매우 실제적이고 경험한 인간을 행동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이는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이를 루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거룩한 것’(Das Heilige)의 체험으로 보았고, 그 속성을 신비’(mysterium)로 이해했다. 종교체험의 신비는 인간에게 피조물의 감정을 강요하는 전율을 수반하지만, 아울러 참 존재와의 조우를 다루기에 포기할 수 없는 매혹적인 것으로 다가온다고 보았다. 이렇게 세계를 설명하고, 인생을 살아가도록 힘을 보태는 종교의 핵심에는 체험이 자리한다.

 

무엇에 대한 체험일까? 그것은 참된 것. 비어있지 않고 꽉 찬 것. 우리가 진리라 부르는 것, 아니 그렇게 무어라 규정할 수조차 없는 참 존재에 대한 경험이다. 바로 그와 같은 참된 존재와의 만남이 종교를 종교답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그렇다면 여러 번 양보해도 종교는 체험적, 아니 적어도 체험 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진리를 만나는 것이기에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독적이다. 그래서 옷토는 이를 두렵고 떨리지만 포기할 수 없이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 정리한다. 이렇게 종교의 참된 뿌리는 체험이 담보하고 있다.

 

그런데 이 종교가 지금 분쟁의 씨앗이 되고, 촉매가 되고, 주범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근본주의란 레테르가 등장한다. 왜인가? 도대체 근본주의가 무엇이기에 그런 갈등을 불러일으키는가? 예서 다시 길고긴 근본주의의 역사를 복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왜 촉발되어 현실세계 속에 나타났는지를 살피도록 하자.

 

근본주의는 뿌리로 돌아가자’, ‘본디 있던 것을 되찾자는 말이다. 그 뜻만으로는 도저히 부정적 뉘앙스를 찾아낼 수가 없다. 하지만 작금 이 말은 상당 정도 부정의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다. 근본주의라 하면 마치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혹 따르지 않으려 애쓰는 움직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본질로 돌아가자는 이 뿌리 찾기 운동에 그런 부정의 딱지가 붙게 된 것일까?

 

사실 근본주의는 변화에 대한 거부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사회, 특히 미국에서 불붙은 종교에 대한 합리적 이해 시도가 자유주의의 물결이 되어 큰 기둥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거센 흐름을 기존 자신들이 신봉하던 신앙의 변질로 해석한 일단의 무리들이 <근본: 진리증언>(Fundamentals: A Testimony to the Truth)라는 12권의 소책자를 펴내면서 근본주의 운동은 바야흐로 역사 속에 그 면모를 드러낸다. 이들은 주로 성서무오설축자영감설을 주장하며 성서의 문자적 해석 이외의 시도를 단호히 거부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른 바 근본주의자들이 돌아가고자 하는, 혹은 유지하고 지키려했던 뿌리가 무언지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주어진 객관적 자료에 대한 끝없는 확신이다. 즉 근본주의는 경전을 적힌 글자로만 그 뜻을 새길 뿐, 그밖에 다른 어떤 해석도 용인치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양보할 수 없는 몇몇 종교적 교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는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종교적 진리라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이 그렇게 반감을 갖고 넘어서고자 하는 상대는 과연 누구였나? 이른 바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고, 세속주의에 물든 자들이었고, 성서를 조각내어 그 의미를 훼손시킨 고등 비평가들이었다. 물론 근본주의자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이른 바 세속주의자들의 행동을 살피자면, 그렇게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변화된 세계, 확장된 인식영역에서 그들이 참이라 여기는 종교적 진리를 새롭게 담아낼 그릇을 찾고 있었던 것일 게다. 상식도 세대가 변하면 바뀌기 마련, 그 사이 정신없이 질주한 과학적 분석과 인식들이 기존 신앙을 설명해내던 문법을 낡은 것으로 바꿔버렸다. 더 이상 상식인의 수준에서 그 문법은 통용되기 어렵고, 또 그를 통해 믿음의 본질을 해석해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그들은 보았다. 하여 새 술은 새 부대로! 그들은 변화된 세대에 새로운 문법으로 본질적 신앙을 담아내려 애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한쪽의 행동이 다른 쪽에서는 자신들을 주변으로 밀어내버리는 정치적 행위로 읽혀진다. 그래서 그 주변화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저항을 쏘아붙이게 된다. 그 역시 지극히 정치적 행위로! 이래서 서로 공격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총구를 들이댄다. 이제 종교는, 신앙은, 믿음은 평화와 행복을 위한 문이 아니라 갈등과 다툼, 그리고 분쟁의 도화선이 되어버린다. 문법은커녕 말도 바뀌어서는 안 되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문구 역시 수정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본디 있는 그대로 더 이상 손대서도 안 되고, 아울러 그동안 자신들이 누리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 역시 훼손되어서도 안 된다. 바로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고, 거룩한 것이다. 절대적 영향력이 훼손되지 않고 사회의 중심으로 유의미한 중심을 차지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돌아갈 곳이고 뿌리인 것이다.

 

대 사회적 영향력 훼손에 대한 예민한 종교적 저항은 지금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이는 꼭 19세기 후반 미국 개신교 특정 운동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이슬람의 하마스 운동이 그렇고, 힌두교의 RSS가 그렇다. 실론의 불교 역시 그렇고, 급진 시크교 역시 근본주의의 영역에 충분히 들어가고 남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많은 근본주의적 운동 가운데 정말 뿌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운동은 몇이나 될까?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린 종교의 본질적 특성을 언급하면서 체험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하였다. 종교를 종교답게 만들고 종교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체험이라고 우리는 이미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그 체험은 참된 실재와의 만남을 통해 촉발되는 그 무엇으로 대상이 있는 생활 세계적 경험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근본주의 운동들 역시 그러한 종교의 참된 뿌리로의 회귀를 주장해야 할 터! 그들 역시 그들이 주장하는 참된 존재와의 조우에 최선의 경주를 다하는 것을 전면에 내세워야 할 터!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기에 작금 보이는 근본주의적 운동의 지향점은 너무도 정치적이다.

 

오히려 지금 근본주의적이라 불리는 많은 운동들은 그들 믿음의 뿌리를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종교 체험에 집중하기 보다는 대사회적-정치적 영향력 축소에 대한 강박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되묻게 된다. 그래서 때론 영향력 유지의 구체적 방법으로 정당조직 구성을 강행하려 하기도 한다. 때론 신의 나라를 지상에서 실현하기 위해 총포로 무장하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동일한 피가 흐르는 인간을 이교도란 이름으로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도 주저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근본을, 뿌리를 잘못 이해한 것에 비롯된 것은 아닐지. 종교의 뿌리는 신-진리체험-궁극의 체험에 있다. 우주의 주재자요, 진리의 근거요, 창조자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온 몸으로 만나고 있다는 것만큼 중요하고 본질적인 뿌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종교도 그 기저에는 수양론적 요청’(혹은 수도적 요청)을 빠뜨릴 순 없다. 때론 그것이 전례, 순례, 기도행위로 드러나긴 하지만, 결국 끊임없이 자신의 온 몸으로 신 혹은 절대적 진리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포기할 수 없는 종교의 뿌리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근본주의 운동을 하자면, 그것은 수양(혹은 수행) 지향적이어야 한다. 참된 뿌리로 돌아가기 위해 반복해서 그들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 신체험을 기원하고 구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진리 수호에 더 가깝다.

 

그런데 작금 근본주의라 불리고 평가되는 대부분의 운동들은 그런 뿌리로의 집중에는 소홀하다. 종교를 종교답게 하며,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해 줄 수 있는 제대로 된 뿌리보다는 그 때문에 부수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파생물에 더 기대하고 몰입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그러다보나 갈수록 근본주의적 운동은 비종교적이고, 반 체험적이고, 정치적 투쟁의 중심이 되어간다. 그런데도 그들 운동 전면에는 종교적 진리를 내세워야 하겠기에 좀체 가시화하기 어려운 내적 체험보다는 외적 대상들을 앞세운다. 그래서 문구에 집중하고, 교리에 몰입하고, 신조를 전면에 내세운다. 결국 진리를 주창하지만, 내면에는 영향력 축소에 대한 불만과 정치적 입지 약화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할 뿐이다. 그래서 정작 해야 할 종교 수련의 길보다는 손쉬운(?) 세속적 영향력 확대의 길을 택하게 된다. (權力)으로, 돈으로, ()의 힘으로!

 

어쩌면 그런 근본은 제대로 된 근본이 아니다. 그리고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종교적인 것도 아니며, 성스러운 것도 아니다. 물론 본질적이라 하기도 그렇고 애초 그들이 말하는 믿음, 신앙의 핵심과도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본주의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종교 근본주의가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다 구도자적인, 수양론적인 자세와 집중을 전면에 내세워야 할 것이다. 몇몇 구절 암송에 신앙의 전부를 보장받으려하기보다는 매 순간 자신들이 소리 높여 부르는 바로 그 분을 지금 여기 자신이 속한 생활세계 내에서 모시고’, ‘느끼는작업에 최선의 경주를 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애초에 목적했던 제대로 된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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