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3)
인문학 진흥과 대학의 학과들…
인문학 붐이 한창이다. 한쪽에서는 대학의 인문학과가 죽어간다고 난리를 치고, 또 한편에서는 각종 인문학 강좌들이 예서제서 하루가 멀다 하고 국내외 명사들을 초청하여 향연을 펼친다. 이런 어색한 불균형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지도 제법 된 것 같다.
정부로서도 세상의 기초학문(?)이라 불리는 인문학을 살리고자 다양한 정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세운 것인 이른 바 인문한국(HK) 프로젝트였다. 당시 이 정책은 인문학자들로서는 혹할 정도로 후한 인심 쓰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젝트에 당첨(?)이라도 될라치면, 장장 10년 동안 HK교수는 월 4백, HK연구교수는 월 3백을 보장하고, 정부의 지원이 종료된 이후에는 심사를 거쳐 HK교수들은 해당 학교에서 정년을 보장받는 것이니 상당한 정도의 지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투입되는 자금이 1년에 200억씩, 줄잡아 2천억을 헤아리니 정부로서도 인심 한번 두둑이 썼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인문학 진흥이라는 것이 대학의 관련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대부분 학제 간 연구, 그러니까 순수 인문학도 아닌 해당 시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주제를 뽑아 관련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논문이나 저술 집필 후 제출로 갈음하는 방식에 10년 동안 무려 2천억을 투자하는 식이니 이 정책의 성공 여부는 이미 시작부터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인문한국 프로젝트 후속 사업에 대해 이곳저곳에서 참견하는 소리와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는 현 인문한국의 수혜를 받고 있는 학교와 연구소들의 숫자만 봐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철학자 플라톤
현재 인문한국 프로젝트로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는 곳은 29대학의 43개 연구소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4년제 대학의 수는 2백을 헤아린다. 따라서 통계만 놓고 본다면, 인문한국은 고작 한국 대학 인문학 전공 인력의 10%정도만 수혜를 받는 특혜 중의 특혜이고, 그것도 어느 정도 연구소를 운영할만한 규모를 갖춘 중대형 급 이상의 대학들에게 주로 돌아가는 제한된 수혜이기도 하다. 그러니 혜택을 받지 못한 대학의 연구소나 전공자들의 볼멘소리가 잦아질 수도 없는 구조이다.
내가 보기에 제대로 된 인문학 지원은 연구자 개인별로 주워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운영도 계획안이 아니라 연구의 결과물을 심사해서 지원하는 방법을 택하면 된다. 혹은 인문학 연구자의 학위논문을 평가하여 지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형식적인 계획서 작성보다는 철저히 결과물 위주로 포상하고, 그 경력을 교수나 연구원 임원에 어드밴티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리고 교수 승급과 정년 심사를 질적으로 강화해서 교수사회의 세대교체 내지는 분발을 강화해야 하며, 아울러 외래 강사들의 신분보장과 실질적 강의료 인상으로 생계대책을 세워줘야 한다.
이런 종합적 대책 없이 그저 몇몇 사람 선발해서 그들에게 지원금을 집중하는 지금과 같은 식의 정책은 오히려 인문학을 몰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지원은 연구자 개개인의 능력과 아이디어 보다는 기관과 조직의 개입, 혹은 로비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며, 충실한 결과물보다는 화려한 계획서 작성에 더 몰입하게 되는 기현상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신한 능력을 갖춘 인문학자들을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드는 현실로 나타날 뿐이다.
이런 우려(?)대로 10년 전 1차로 선정된 연구 주제들을 보면 사실 좀 아찔했다. 예서 구체적으로 적시하기는 곤란하지만, 예를 들어 ‘한국적 인문학의 양성을 통하여 다원성과 보편성을 총괄하는 어쩌고저쩌고…’ 뭐 이런 유의 것이 대부분이다. 다원성과 보편성이라는 상호 이질적 패러다임이 하나로 퓨전 되는 순간이다. 마치 ‘둥근 네모’, ‘검은 백마’와도 같은 수식처럼 들리는 것이 비단 나 하나뿐이랴! 도저히 인문학적 사고의 결과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비문과 비논리적 글들이 가득하고도 수십억짜리 프로젝트 선발에 무사 안착하는 것을 보는 것도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최근에는 인문한국 프로젝트에 이어 ‘인문학 진흥 종합’을 위한 법안 마련을 한다고 교육부, 문화부, 한국연구재단, 학술단체들이 분주하던데, 제발 특정인들만을 위한 돈 잔치로 끝나지 않았음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인문학 이야기가 나온 김에 대학의 학과 이야기도 하나 보태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대학의 철학과에는 동양철학이라는 전공이 있다. 심지어 몇몇 학교에는 그것이 아예 독립된 학과로 설치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솔직히 난 동양철학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올곧은 전공이 있기나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참고로 서구 대학의 철학과에는 동양철학이란 전공이 없다. 내가 공부한 독일에서도 철학과에는 이른 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유럽대륙을 거쳐 영국과 미국으로 확장되며 형성된 ‘서구’ 철학만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동양철학은? 아예 그런 과목이 철학과에는 잘 개설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사상에 관해서는 내가 공부한 종교학과나 지역학과에서 전담하고 있다. 그러니 국내에서 활동하는 명사들 가운데 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았다고 하면서 중국이나 동양 쪽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하는 이는 그 전공이 종교학이나 지역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Ph.D.라는 학위는 해당 분야의 전문 박사라는 의미이지. 철학을 전공으로 한 박사라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동양철학이라는 개념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미 ‘동양’이라는 용어가 작위적이고, 정치적이며, 그리고 제대로 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동양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적시하는 단어일까? 애초에 서구에서 사용되던 동양(orient)이란 ‘해가 뜨는 곳’이란 의미로 지금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아우르는 단어였다. 이것이 점점 확장되어 지금은 아시아 전반을 통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양이라면 앞서 지적했듯이 여러 나라와 민족들을 거쳐 가긴 했지만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사상의 맥락을 일정하게 뽑아낼 수 있다. 즉 헬라어에 기반을 두어 형성된 소위 철학이라고 하는 사유의 구조물이 일정한 구성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동양은 어떠한가? 말 그대로 서구적 관점에서 바라 본 동이 뜨는 지역 전체를 아우른다면 동양철학, 혹은 동양사상에도 서구의 것과 같은 일정한 사유 패턴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일단 중동지역은 잠시 잊어버리자. 그럼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버마, 캄보디아, 필리핀, 스리랑카 등등 여러 나라가 떠오르고, 그들 사회의 주도적 사유체계를 꼽아보자고 하면? 아예 현기증이 나버린다.
이처럼 아시아의 경우는 여러 국가를 아우르는 특정한 보편 사유체계를 찾아내기 어렵다. 서구가 중세 이후 단일 신앙체계로 그리스도교를 선택한 것과는 달리,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오래전부터 다원적 사유체계의 환경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국만 해도 유교, 불교, 도교, 무교 등등 동양사상이란 이름 아래 꼽아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수고는 우리 외에도 중국, 인도, 일본 등 앞서 거론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니 동양철학, 혹은 동양사상이란 말은 엄밀한 학술적 용어라기보다는 일상 속에서나 쓸 수 있는 통칭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동양철학 전공 내에는 유교학이나 불교학, 혹은 유교철학, 불교철학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전공은 실제로는 철학이라 보기 힘들다. 그리스에서 생겨난 필로소피(philosophy)하고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전공’들이고, 방법론 역시 서구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시각이나 입장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들 전공은? 내가 보기에 ‘신학적’ 혹은 ‘교학적’이다. 이들 전공은 서구의 세속적 철학과는 달리 유교신학, 불교신학, 혹은 불교 변증학, 유교 변증학에 가깝다. 그러니까 국립대학이나 (특정한 종단이 세우지 않은) 세속적 사립학교에서 유교나 불교 등의 특정 종교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심히 ‘포교적’이고 ‘변론적’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세속 대학에서도 그런 종교들을 가르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편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대부분 동양철학 전공에서 행해지는 해당 분야의 강의나 연구 내용이 단순 정보제공과 역사적 전개의 검토에 멈춰 있지 않고, 특정 종교의 교리적 변론에도 집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에 상응하여 그만큼 국립대학에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철학 전공자는 교수로 채용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는 심각한 종교간 형평성을 깨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철학과에 동양철학 전공이란 이름으로 유학자, 불교학자들을 채용했다면, 역시 그리스도교학자도 그리해야 하는 것이 균형에 맞지 않겠나. 물론 이는 국립대학에만 해당하는 말이다. 사립대학이야 각각의 설립 취지에 따라 자율적으로 채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런 지경이니 철학, 종교학, 종교철학, 종교신학, 윤리학, 유교학, 서양철학, 동양철학, 중국철학, 인도철학 등등 분과학문에 대한 세밀한 개념구분이나 계보적 파악 없이 편의에 따라 사용하는 행태가 아찔하다. 이처럼 한국연구재단을 위시한 정부나 관공서의 분과학문 분야 구분을 볼라치면 어지럽기 짝이 없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학문 구분을 한 것인지….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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