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1)
생활 속 경전 읽기
경전(經典, canon)
어쩌면 우리는 이 이름을 무겁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위엄 있는 책장에 속한 서물(書物)들 중에서도 가장 버겁고, 혹은 가장 훌륭한 치장 속에 출중한 권위를 만끽하고 있는 금박의 책들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들어 과연 ‘경전이란 무엇인가?’에 생각을 집중해보면 잠시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도 쉽게 부인하지는 못한다.
지금껏 지구라는 이름의 땅덩어리에 수없이 많은 전통과 문화, 그리고 종교들이 생멸 해왔고, 또 그만큼 많은 양의 경전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전 자체에 대해 던지는 진지한 질문에는 너무 인색하지는 않았는가. 바로 이러한 경전 자체에 던지는 우리의 질문과 궁금증이 이 조그만 글을 통해 떠오르게 된다면 글을 쓰고 있는 이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우선 경전(canon)이란 말을 살펴보면 그리스 말 ‘kanōn’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본래 ‘갈대’를 뜻하는 명사였다. 그러다 뒤에 가서는 ‘정밀함’, ‘정확함’이라는 뜻으로 그 범위가 확장된다. 아마도 이러한 의미의 전용은 당시 사람들이 갈대를 가지고 바구니나 저울대 그리고 물건을 측정하는 자와 같은 물건들을 만들었던 것에 기인할 것이다. 저울대나 자와 같은 물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재고 측정하는 것이고, 또 갈대라고 하는 식물이 가지는 곧고 바른 모습이 이 단어를 정밀하다는, 그리고 정확하다는 의미로까지 확장시킨 듯이 보인다.
그 후 사람들은 점차 이 단어를 건축 상의 먹물 줄, 즉 직선을 측정하는 줄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드디어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 행위의 규범, 원칙, 표준이 되는 의미로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다 종교 조직이 형성된 이후에는 교회가 인정하는 신의 계시와 언어가 기록되어있는 성스러운 책이라는 의미가 보태지게 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캐논(canon), 즉 경전이다.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유사한 용어로서 경(經)이란 단어가 있는데, 이는 서구어 캐논에 대한 번역어가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권에 이미 존재했던 단어이다. 경이라는 의미가 피륙 따위의 세로로 놓인 실로서 기준을 잡는 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아울러 측정하고 잰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단어가 책을 의미하는 전(典)이라는 단어와 함께 성현들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서적을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졌다. 서구나 동아시아 전통 모두에서 이렇게 경전이란 단어에 ‘기준’과 ‘측정’이라는 의미가 중첩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뭇 흥미롭다.
인류는 역사가 시작한 이래 수없이 많은 경전들을 만들어내며 인류의 문화유산을 확장해 왔다. 각개의 경전들은 다양한 언어와 또 형식 스타일들로 꾸며져 있지만 그들에게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은 그것을 믿고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책으로 숭앙된다고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궁금증 하나를 만나게 된다. 과연 무엇이 이 경전들을 그처럼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가치를 지닌 서적으로 만들어주는가 하는 것 말이다. 물론 따지지 않고 그저 일러준 대로, 암기한 대로 경전의 의미를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잠시 우리의 맹목적 흐름을 멈추고 역사적 정황에 기초해 이 질문에 집중해 보았음 한다.
우선 편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경전은 종교의 교조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내용이기에 그처럼 중요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도 하다. 자신의 위태로운 존재와 실존적 위기를 완벽하게 해소해준 종교 전통의 교조가 자신의 신도들에게 전해준 언어이니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겠는가! 사족을 달지 않아도 이런 유의 이해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뜻하지 않는 결론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손에 전해져 있는 대다수 많은 종교전통의 경전들은 그들 교조의 손에 의해 직접 쓰인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 복음서의 경우 예수의 언행을 충실히 전해주고 있다 곤 하나, 그것도 마태, 누가, 마코 그리고 요한이라고 하는 예수의 제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에 의한 간접 기록일 뿐이다. 바울의 서신은 말할 것도 없다.
불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싯다르타 역시 자신의 가르침을 문자로 남기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마가다어와 관련이 있던 팔리어로 선생의 가르침을 기억에 의존해 남긴 것이 최초의 불경이다. 그 후 불경의 전통은 당시 아시아 대륙의 공용어라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와 한자로 번역되어 동아시아의 중요한 종교유산으로 자리 잡는다.
유교 역시 이 경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교의 창시자로 인정되고 있는 꽁쯔(孔子) 스스로가 자신은 선대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고 선언하였다(述而不作, 이전 周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전하나 스스로는 어떠한 종류의 새로운 문화도 창출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유명한 언설). 물론 《춘추》(春秋) 등 공자 자신이 직접 저술했다고 여겨지는 책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의 핵심적인 사상들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인 《논어》(論語) 역시 공자 자신의 작품은 아닌 것은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경우는 약간 다르긴 하다. 이슬람의 경우는 무함마드에 의해 꾸란(Qur‘ãn, 코란이라고도 불리나 원 발음은 꾸란에 가깝다. 약 7만 8천자의 아랍어로 기록되어졌고 그 분량은 대략 신약성서보다 약간 짧은 정도이다)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북쪽으로 수마일 떨어져 있는 히라(Hirã)산 밑의 한 동굴에서 계시를 통해 이 경전을 기록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그리스도교의 예수나 불교의 붓다, 그리고 유교의 공자와 같은 위치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슬림 전통에서 무함마드는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일 뿐 이슬람교의 교조나 창시자는 아니다. 그는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해준 예언자일 뿐이다. 철저한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는 무함마드는의 위치를 그 이상 높게 보고 있지 않으며, 그보다는 알라 계시의 결정판이랄 수 있는 꾸란을 더 중시하고 숭앙한다. 따라서 이슬람교를 무함마드교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슬람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결코 적당한 호칭이 아니다. 무슬림 신앙의 대상은 유일신 알라이지 예언자 무함마드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다양한 종교 전통의 경전은 교조에 의해 직접 쓰인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경전의 중요성이 교조에 의해 직접 쓰였기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교조와 그에 해당하는 이들의 언어와 행적을 담고 있긴 하지만, 교조 자신의 직접적 서술은 많이 않다는 사실! 바로 이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고민을 이어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경전의 중요성은 무엇으로 인해 보장받을 수 있을까? 눈을 잠시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자. 개별 종교 전통의 교조들보다는 바로 경전을 기록했을 사람들의 시각으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전을 기록한 이들은 그들이 속한 전통의 교조나 혹은 그에 해당하는 이들, 그리고 더 나아가 각 전통에서 신앙하고 있는 최고신이나 절대적 가치와의 접촉 혹은 만남이 있은 후 그 체험을 글로 남긴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들이, 바로 경전을 기록했을 그들이 우리와 동일한 육체와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 역시 우리들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호흡하며 부대끼며 그리고 고민했던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이 이야기는 경전은 신화 속에 머무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바로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조우하게 된 절대자, 그리고 그를 전하는 예언자를 만난 후 그 경험의 생생함을 문자로 적게 된 것이 경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이러한 경전을 읽고 있는 우리들 역시 경전이 담고 있는 생생한 현장감과 구체적인 역사성, 그리고 경전을 기록했던 신앙의 선배들이 만났던 신앙의 근거되는 ‘절대자’에 대한 ‘체험’이 우선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는 경전을 대할 때 경전을 기록한 이들이 살았던 역사적 현장과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추상적인 법전처럼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전통의 교리내용이나 행위규범 등을 찾아보기 위한 서적으로 경전이 추락되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경전을 기록하게끔 했던 원동력, 즉 각 종교 전통의 절대자와의 만남이 선행되는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다양한 종교의 경전이 해당 전통의 정보만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라는 말과 연결된다. 그리스도교의 바이블은 야웨에 대한, 예수에 대한, 혹은 성령에 대한 정보들로 채워진 책만은 아니다. 불교의 수많은 경전도 붓다의 개인적 성격이나 그에 대한 묘사만으로 충일한 서적이 아니다. 우리는 논어를 통해 공자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만을 취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경전들을 통해 야웨를 만나고, 예수를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고, 붓다의 가르침에 깨우침을 얻고, 알라의 자애로움을 경험하며, 그리고 공자의 지혜에 감복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전을 읽기 위해 우리가 먼저 거쳐야 할 통과의례는 ‘종교적 체험’, 혹은 ‘각성’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존적이고 종교적인 ‘고백’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고백이 공유되지 않는 경전 읽기는 자칫 교조적 내지는 독단적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경전의 정황과 그 안에 살아있는 고백보다는 글자와 자구에 집착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고백이 사라진 문자에의 집착은 예상치 못한 재앙을 가져오기도 한다. 교단이 분열되고, 일방적인 잣대로 신앙을 표준화하려는 시도로 인해 많은 수의 선남선녀들이 희생되기도 하며, 심지어 물리적 분쟁의 고통도 감내해야만 한다. 바로 경전 안에 살아있는 고백에 충실하기보다 문자에 대한 집착이 빚은 참극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전이란 서적이 가지는 ‘고백적 성격’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경전은 그저 먼 나라의 누구누구에 관한 이야기나, 아득한 동화책 속에서나 등장하는 마법의 성에 갇힌 공주와 왕자의 이야기가 아닌, 그저 흘러 다니는 풍문 속에 저도 몰래 먼지처럼 쌓여버린 틀에 박힌 교조 아무개의 모습을 정보로서 담고 있는 책도 아니다. 경전은 역사와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살아있는 절대자를 만나고 체험한 이들의 고백과 절절한 사연을 담은 책이다. 따라서 그러한 절대자와의 만남과 조우가 없이는 경전은 제대로 이해하기 곤란한 책이 되고 만다. 그러한 만남과 조우가 없이 읽혀지는 경전은 수백, 수천을 반복해도 그 안에 살아있어야 할 절대자의 모습은 간데없고, 오직 그에 대한 정보만 늘어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전 읽기는 결코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경전은 우리의 일상사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연애편지와 유사한 성질의 것이라 여겨진다. 연애편지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도 타인의 객관적인 판단으로 이해하기가 무척 곤란하며, 그 안의 글귀와 느낌들 역시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제대로 짚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해독력을 지닌 이라 하더라도 제 3자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연애편지의 느낌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사자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사랑이란 감정으로 이어져 있는 이들의 눈에는 다른 이가 보기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라 하더라도, 혹은 문법에도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형식의 스타일이라 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경전도 그와 같다. 경전은 절대자와 그를 고백한 이들 사이를 이어주는 연애편지와 같은 성격의 것이다. 그들 신앙의 선배가 만나고 고백했듯이, 지금의 우리 역시 경전을 통해 절대자를 만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경전 속의 절대자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당사자’가 되어야만 한다. 경전 속의 우리 선배들이 당사자가 되었듯이 우리 역시 경전을 통해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경전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전을 읽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경전에 대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은 그 전통의 절대자를 만난 이들의 것이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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