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11)
숨은 신? 숨은 신! 숨은 신!!
내가 건강하고 평안했을 때 하느님은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도 내 곁에 계셨다. 그러나 정말로 그의 도움이 나에게 절실했을 때 그분은 웬일인지 철저히 침묵하셨다. 그럴지라도 나의 지성으로 그가 아니 계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의 부재가 아니라 그의 항구여일한 존재하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존재가 엄위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그의 철저한 침묵과 외면 가운데 진행되는 비생명의 현실이 늘 있어왔다. 단지 내가 아직 살만하고 여유를 부릴 만 했으므로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존재하시는 방식과 그를 믿는 방식에 있어서 중대한 착오와 착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나에게 그러한 나의 신학과 신앙에 대하여 제고를 요청하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고 용납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집에 돌아와 그것을 계속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서 마당과 나무들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격리가 해제되지 않아서 딸들은 내가 바라보는 마당에 나와서 서성 거렸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큰 딸(고1)은 숙성한 연인처럼 넝쿨장미 앞에서 슬퍼했고, 둘째 딸(중2)은 갓 사귄 애인처럼 실시간으로 “아빠 밥 먹었어?” “맛없어도 밥 꼭 먹어야 돼.” “아빠 많이 아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따위의 문자를 보냈고, 막내딸(초3)은 여왕처럼 느긋하게 할머니 방에서 그동안 제 엄마의 잔소리에 못 본 드라마들을 섭렵했다. 나는 딸들이 마당에 나와서 노니는 모습이 좋았다. 애들이 받았을 충격과 표현 할 수 없는 상처들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아팠지만, 이것도 다 그들의 인생에 자양분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 끝에 울컥하는 깨달음이 들곤 했다.
숨은 신. 숨은 신. 숨은 신. 하느님은 부재하시는 게 아니라 언제나 비현실 같은 현실 가운데 숨어 계신다. 그것이 그의 존재하시는 방식이고 그것은 일종의 시험 같은 것이다. 어떻게 무엇으로 그 시험을 통과할까? 어떻게 그의 숨은 부재를 드러낼까? 나는 그것이 인간의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딸들과 나의 사랑 가운데 그 책무는 무거운 의무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지극한 정성과 담대한 용기로 드러난다고 생각되었다. 숨은 신은 그렇게 사랑 가운데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열애 가운데서 진리로 자기를 드러내는 거라고.
나는 이제 조금 안심이 된다.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멍에의 쉬움과 짐의 가벼움을 찾은 것 같다. 상처받은 치유자? 아니다, 그것도 아닌 것이다. 완치 판정을 받은 상처 입은 자가 맞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의 결말처럼 모든 고난과 고통이 끝나고 모든 상실이 회복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가 아니다. 소유가 회복되고 자식이 다시 슬하에 자란다 해도 어찌 영원한 상실이 만회된단 말인가. 나는 그런 불굴의 신앙을 가져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을 앓는 욥과 같이 살아갈 것처럼 생각된다.
그것은 슬프고 자유로운 길이다. 자유롭고 고독한 길이다. 고독하고 날카로운 길이다. 날카롭고 관용적인 길이다. 그것은 버려져 있으나 괘념치 않는 길이다. 숨은 신과 동행하려면 그에 맞는 믿음이 필요하다. 거기서는 그에 대한 반항과 항거가 도리어 뜨겁고 그리운 법열이 되리라. 아무렴 어떠하랴. 숨어서 짐짓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하느님이여 이제야말로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기꺼이 또 아니라한들 어찌할까요.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기 1:21). 다만 한 가지! 사는 것 죽는 것이 이리 무서울 지라도 당신 앞에선 두려움이 없게 하소서. 아아, 지금도 숨어계신 이여. 당신이 저를 찾으실 때까지 저는 쉴 수가 없습니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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