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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한종호 2015. 7. 7.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10)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

 

나에게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나는 정중히 사양한다고 답변해왔다. 말이 정중이지 내 사양은 신경질이었다. 나는 그 인터뷰어들이 내게서 원하는 것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내 말을 빙자하여 그들이 하고 싶은 말들이었거나 혹은 그들조차도 왜 그래야하는지에 관한한 여하간의 성찰도 없이 마치 서로의 역할이 그래야만할 것 같은 세상살이의 상투성으로 나의 신경질은 그 피곤함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일에 동원되어야 한단 말인가. 혹은 이것이 누군가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2.

 

나의 장인은 지난 6월 1일 국가지정격리병동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71세. 공식적으로 메르스로 사망한 첫 번째 케이스였다. 언론들은 앞 다투어 그분이 기저질환을 앓고 계셨다고 썼다. 그분은 폐렴이 악화된 상태였고 수년 전 한쪽 신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사망을 정당화할만한 기저질환은 없었다. 메르스로 확진받기 전 그분은 설사증세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그것은 거의 나았었다. 다른 증세는 전혀 없었다. 메르스 증상이 나타났을 때 설사와는 무관하게 폐렴이 진행된 상태였고 고열과 오한에 시달렸을 뿐이다. 그는 현역으로 일하는 정력적인 CEO였고 주말이면 항상 등산을 다니셨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그는 집에 가서 잠이나 깊이 자고나면 좋아질 걸 괜한 소동을 벌인다고 기운차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메르스 확진 판결을 받고 국가지정격리병동으로 옮긴 그날 밤, 병원측으로부터 상태가 위중해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불과 5시간 전에 그는 걸어서 구급차에 옮겨 타고 우리들과 곧 뒤 따라가 만나겠다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5시간 후 나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수면상태의 기도삽입관에 동의했으며, 그 다음 날에는 ‘에크모’라는 외부혈액순환을 위한 생명유지장치 사용에 동의했고, 그 다음 다음날에 돌아가셨다. 그의 사인이 기저질환 때문이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그분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이 모든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모든 것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급진전 된 것이다. 너무나도 엄청난 일들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순식간에 벌어졌고 처리되었다. 그 사이에 나와 가족들이 겪었던 상황을 어찌 필설로 다 형용할까. 내 가슴엔 천추의 한이 될 말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에 관한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

 

3.

 

나는 국가지정격리병동에서 지난 일주일을 투병하다 엊그제 완치 판정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장인의 장례도 못치루고 격리 상태에 있던 나에게도 결국 메르스 증상이 나타났다. 나는 처음에 극심한 스트레스 탓인 줄 알았다. 식욕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었다. 결국 보건소에 연락해 메르스 확진 판결을 받고 입원 조치되었다. 그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나는 우선 그 이야기라면 무서워서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조차 꺼리게 된다. 언젠가 내가 이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 있게 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독한 약들을 처방받아 내 입에서는 지금도 뱃속에서 넘어오는 약냄새가 난다. 추위, 잠, 악몽 속에서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생의 희망을 놓아버렸을 장인어른을 생각했다. 얼마나 무섭고 춥고 두려웠을까? 그는 어쩌면 일생을 그런 극한에 처해본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처해있는 상황도 잊어버릴 정도의 고통과 절망의 연민을 느꼈다. 그 참혹함이 나를 진저리치게 했다. 이것이 저들이 말하는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저질환이라는 것의 실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그 기저질환의 편리하고 기계적인 판정으로부터 운좋게 살아서(!) 돌아왔다. 휠체어를 타고 죽음의 감염병자가 되어 들어갔던 격리병동에서 다시 휠체어를 타고 회복된 환자가 되어 나올 때, 대기중이던 의료진들이 내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을 때, 나는 잠시 죽음의 권력에게 조롱당하던 검투사처럼 당당히 원수를 거꾸러뜨린 영광의 감격을 맛보았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던 것이다.

 

 

 

                       일러스트/고은비

 

4.

 

집에 돌아온 이후 나는 병원에서보다 더욱 더 극심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내 몸은 너무 쇠약해져 내가 내 형편을 거울로 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몸이 덜덜 떨리고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무엇보다 더욱 더 무서운 건 누군가 다시 나를 찾으러 올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 두려움에 근거가 없는지 있는지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지를 못한다. 모두가 나를 감시하고 나를 예의주시하며 언제든지 나를 고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뉴스가 무서웠다. 거기 나와서 떠들어대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무서웠다. 저들은 심지어 정부를 욕하고 관료들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자들일지라도 나에 관해서라면 같은 냉정한 입장이 되어 협력할 것이다. 단지 내가 그들이 겪지 않은 일을 겼었다는 이유만으로, 단지 그들이 내가 겪은 그것을 겪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정상적인 그들 사이의 떳떳하고 당당한 인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 이 한 달여 못되는 시간에 나에게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신문에서 써 갈기는 한 줄, 페북에서 옮아 다니는 한 줄,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앵무새같은 한 마디가 그것을 겪어내고 있는 당사자에겐 어떤 의미가 되는지 진실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5.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많은 인터뷰 제안이 들어왔지만 다 거절해 버렸다. 역시 정중한 사양의 형식으로 더욱 더 견고해진 신경질을 부린 것이다.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아는 체 하지 말라. 제발 나를 이대로 잊히게 하라. 나는 솔직히 당신들이 너무나 무섭다.’ 그런 말들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금도 메르스로 투병중인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셨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바를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희망이라. 희망이라.’ 나는 일단 알겠노라 생각이 바뀌면 말해주겠다고 해두고 희망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6.

 

나는 사실 희망을 위해 싸운 것도 아니다. 무슨 살아야겠다는 적극적인 희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메르스 사태로 이 지경까지 이르러 여기에 또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나에겐 지나치게 끔찍한 일처럼 생각된다. 무엇보다 그것은 자연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다. 자연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이성엔들 부합할 것인가. 나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는 도리질에 혐오감이 든다. 환멸스럽다. 왜 이렇게 우리들의 생의 집착은 구질구질하고 악착스러운가. 왜 이렇게 비열하고 비굴하고 열심인가.

 

7.

 

메르스 사태가 벌어지면서 우리가 혹은 내가 겪어온 시간들은 내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비현실 그 자체였다. 메르스라는 보이지 않는 괴물. 그것의 가공할 파괴력. 생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인면수심의 살인의지. 그리고 거기에 인간들이 가세했다. 방호복. 마스크. 격리조치. 폐쇄병동. 계엄을 방불케 하는 심각하고 무서운 조치들. 거기서는 모두가 국가였고 관료였다. 관료들의 느리고 확실하고 무감각한 조치들. 그렇다. 그것은 한마디로 ‘조치’들이다. 그 모든 비현실적인 조치의 현실을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몸과 마음으로 감당해 나가는 것은 진정으로 거기서 영원히 소외된 개개인들, 즉 환자와 그 가족들이다.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관료체제에게 위임해 버린 상태에서 그들은 할 수 있는 나머지 얼마 안 되는 인간으로서의 절망과 탄식과 슬픔과 애통 속에서 단지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희망을? 아니다. 어서 빨리 이 비현실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누가 끝내줄 것인지. 어떻게 끝날 것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수많은 목숨들이 이 싸움을 나의 장인처럼, 그리고 나처럼 끝마쳤다.

 

8.

 

그런데 나에게, 그들에게 희망을 주시라고 한다. 무슨 희망을 달라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겠다. 격리병상에서도 나처럼 이렇게 살아나올 수 있으니 희망을 가지라. 버티고 버티면 중동감기정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다. 도무지 이런 거짓을 나에게 말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자연의 부합하는 사필귀정이 될 것이라는 점뿐이다. 그것을 인정할 줄 모르고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자들은 메르슨지 케르슨지도 모르는 대통령과 그런 대통령 얼굴을 열병식하듯 바라보고 있는 관료들 뿐이 아니다. 모든 데이터와 숫자와 모니터로 이 모든 재앙을 가늠하는 자들. 도표로 설명하려는 자들. 그들은 끝없이 이 사태를 이용하느라 혈안이 되었거나, 면피하느라 혈안이 되었거나, 나머지는 이게 현실인지 비현실 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대부분의 하급 관료 같은 인생들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조치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결국 자기도 자기의 조치 속에서 희생된다. 자기의 친구를 희생시키고 동료를 희생시키고 이웃을 희생시키고 삼촌과 조카와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희생시킨다. 얼마나 평등한가? 이 모든 비현실의 끔찍한 현실이 이렇게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도 책임은 지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니 누구의 책임도 아무의 잘못도 아닌 것이다. 나는 마치 나에게 요구하는 희망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을 말해달라는 요청인것 만 같아서 다시 한 번 이 관료주의적 무사안일에 혀를 내둘렀다. 확진 판결을 받고 집에서 병원으로 나를 데려 갈 때도, 완치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때도, 어쩌면 그들은 ‘힘내시라 반드시 이겨내시라’거나 ‘축하합니다. 정말 잘 이겨 내셨습니다’ 인사 한마디가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것만 자꾸 생각난다.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이제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알려주기 위해서 언론에 협조해 주시라는 것이다. 아, 무서워라. 메르스의 얼굴은 이제 나에게 유체이탈화법으로 마법 같은 말을 지껄인다는 어떤 여자의 얼굴만큼이나 무서웠다. 도무지 이것만큼 비현실적인 현실의 무서움이 있을까?

 

 

 

 

9.

 

옛 동화 속 마녀농간의 진정한 무서움은 그런 마녀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마녀의 사술에 놀아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전파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가령 메르스 사태의 초기부터 언론과 세간에서는 모든 정보를 공개해야한다고 난리들을 피워왔다. 이해못할바도 아니지만 처음부터 중요시했어야할 초점에서 이탈되어 흘러갔다. 인기위주의 대중에게 영합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과 반정부적 기회주의 성향까지 여기에 가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정보란 무엇인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잠재적 감염위험자 슈퍼전파자로 의심하고 솎아내고 격리시키자는 것이다. 손모라는 의학전문담당기자는 메르스 사태를 전쟁에 비유하고 감염자를 게릴라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기에 색출해서 차단시켜야한다는 논리였지만 읽다보면 과연 이 기자라는 사람의 정신구조가 의심스러웠다. 감염을 막는 것의 중요함을 내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목적과 수단이 전도됐다. 의학전문담당이라는 그에게는 환자들이 어떻게 치료를 받고 있는지, 받아야하는지, 그것은 얼마나 적확하고 적절한 것인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 그럴까? 단언컨대 그 이유는 그 자신이 결코 감염자가 아니고 감염자의 신분으로 뒤바뀔 수 없으리라는 거의 신앙에 가까운 자만심 때문이다. 사실 이 신앙이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정신이고 우상이며 여기에는 진보고 보수고의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감염된 게릴라들만 색출하고 격리시키는데 성공하면, (아아, 그들이 어떻게 되든지 그것은 그들의 팔자나 운명이고?) 그 결과 자신들만은 안전한 생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것인데, 그것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10.

 

그러나 과연 누가 당신들에게 그러한 합법적이고 독점적인 살아갈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혹은 그 반대의 누군가 당신들로부터 모든 정상적인 삶을 박탈당해도 꼼짝 못할 타당한 이유를 지녔단 말인가? 그것은 국가의 선진국 도약과 발전을 위하여 모든 희생을 다시 희생시켜야한다는 논리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이 점에서 나는 이번에 일부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부류들에게서 심각한 환멸과 경멸을 품게 되었다. 그들이 평소 말해온 인권과 휴머니즘이란 얼마나 취약하고 이기적인 것인지를 알게 됐다. 과연 라인홀드 니버의 말대로 도덕이란 철저히 도덕적으로 독립되어있는 개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회에 속해 그 기호에 버무려지려는 집단속 개인들에게 기대할 것이 아니었다. (그 의학담당 기자라는 매우 똑똑한 사람은 영화 <감기>를 예로 들었다. 나는 똑똑한 그에게 권한다. 그 영화를 다시 보기 바란다. 그 영화의 주제가 말하는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은 바로 그대 같은 인간들이라는 것을.)

 

11.

 

물론 나는 헌신적인 의료진과 불굴의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경의를 표한다. 그들만이 나에겐 진실하고 리얼한 현실의 인간들로서 이 비현실과 맞서 싸우는 용감한 인간들이었다. (나의 주치의였던 서울대병원의 오홍상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가 아니면 나는 이렇게 빨리 싸움을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과 싸운 게 아니었다. 자연에 부합해 삶이든 죽음이든 겪어나가려 온몸으로 이 부당한 비현실을 겪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희망으로서의 자연치유이고 면역력이다. 이러한 인간을 격려해 달라. 부디, 박근혜든 황교안 전도사든 보건소 직원이든 언론사 기자건 네티즌이든 시티즌이든 기독교인이든 그 누구든 이러한 온몸의 싸움으로 자연의 경고와 일치에 부합해 나가는 인간 앞에서 겸손하라. 더 이상 그들의 삶과 죽음을 모독하지 마라. 제발 정직해지라.

 

 

 

12.

 

이상이 내가 하고 싶은 그러나 하지 못한 인터뷰의 변이다. 기력이 없어 더 이상 길게 쓰지 못한다. 울면서 쓴다. 나는 인간으로서 모독 받았고 상처 받았다. 내가 인간으로 받은 모독과 상처들을 나는 지금도 보고 있다. 이 모든 조치들을 참으로 열심히도 수행하고 있는 자들이여. 아느냐. 지금 누가 누구를 격리시키고 고립시키고 어디로 어떻게 데려가는지. 아아, 알지도 못하면서 저마다 떠드는구나.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구나. 나에게 희망을 말하라하지 마라. 희망은 오직 이토록이나 위태롭고 슬픈 가족들 간의 짧은 사랑 속에 있다.

 

13.

 

셋째 날인가 넷째 날, 병상에서 나는 붉고 찬란한 금빛을 빛내며 승천하는 대천사 성(聖)미카엘이 나를 향해 그 빛을 발산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그 빛을 따라가려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가까이 상체를 내밀었다. 그 순간 세마포의 광휘에 가려진 성미카엘 대천사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막내딸이었다. 딸은 나를 향해 성스러운 팔을 뻗쳤다. 나는 딸을 향해 울면서 두 팔을 한껏 펼쳤다. 꿈에서 깨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삶도 죽음도 구하지 않게 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삶과 죽음의 고통은 모두 지나갔다. 나는 겨우 일어나 메모를 휘갈겨 썼다. “사랑 속에 신도 계시고 영원한 생명도 있다.” 나는 비로소 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나도 기꺼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희망인가?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는 것도 죽음이지만, 사랑 속에 생명이 있고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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