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11)
묵은 땅을 갈아엎어라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播種)하지 말라"(예레미야 4:3).
학원을 운영하는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면 학원으로 들어서는 아이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오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는 가볍고 뜀박질을 하듯 경쾌하단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부모의 강요에 떠밀려서 오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는 무겁고 처진단다. 마지못해 오고 있다는 것이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것이다.
표현이 뭣 하지만 풀을 뜯기 위해 햇살 좋은 들판으로 나가는 소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발걸음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농촌에서 목회를 할 때 어렵지 않게 들었던 말 중에 ‘언구럭을 떤다’는 말이 있었다. 내게는 아주 낯선 그 말을 마을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언구럭’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사특하고 교묘한 말로 떠벌리며 남을 농락하는 짓’이라고 풀고 있었다.
언구럭이라는 말을 들으며 은근히 마음이 찔렸던 것은 혹시 오늘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언구럭을 떠는 것 아닐까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학원선생님이 아이들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학원을 찾는 아이들의 마음 상태를 헤아리는 것이라 한다면 하물며 하나님이실까? 하나님은 결코 언구럭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릴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께서는 주님께로 돌아오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묵은 땅을 갈아엎고서 씨를 뿌려라.”
주님께로 돌아오려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왜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일까?
돌아오는 시늉을 하는 것과 진정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보기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걸음과 표정과 말이 엇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그의 마음속을 바라보고 계시다.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시덤불로 인해 싹이 제대로 자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씨를 뿌렸다고는 하지만 거둘 것이 없다. 결국 가시덤불에 씨를 뿌린다는 것은 씨 뿌리는 시늉만 내는 것을 의미한다.
묵은 땅을 그냥 둔 채 씨를 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묵은 땅 위에 씨를 뿌리면 딱딱한 흙으로 인해 씨는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새들의 눈에 띄어 좋은 먹이가 되고 말 뿐이다. 뻔히 그럴 줄 알면서도 묵은 땅에 그냥 씨를 뿌리는 것은 역시 씨 뿌리는 시늉만 내는 것이다.
마땅히 버려야 할 마음들, 가시덤불과 같고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갈아엎지 않은 채 씨앗을 뿌리는 시늉만 내는 것은 주님께로 돌아서는 이의 바른 모습이 아니다. 돌아서는 시늉만 낼 뿐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을 뽑아버리는 것이고, 묵은 땅을 갈아엎듯 굳은 마음을 갈아엎는 것이다. 손에 가시가 박혀도 가시덤불을 뽑아낸 뒤에, 손에 군살이 박혀도 묵은 땅을 갈아엎은 뒤에 정직한 씨앗 뿌리기를 원하신다. 믿음은 결코 장식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묵은 땅을 갈아라”는 말씀은 호세아 10장 12절에도 나온다. 그러고 보면 묵은 땅을 내버려 둔 채 씨앗 뿌리는 시늉만 한 것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늘 이 시대는 어떨까?
묵은 땅을 내버려 둔 채 그 위에서 믿음의 언구럭만 떨고 있는 것은 혹 아닐까?
‘하농(下農)은 잡초를 가꾸고, 중농(中農)은 곡식을 가꾸고, 상농(上農)은 땅을 가꾼다.’ 했는데, 묵은 땅을 눈물로 갈아엎고 군살 배긴 정직한 손으로 씨앗을 뿌릴 자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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