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21)
비만의 도시가 허기진 까닭은
날이 갈수록 비만해져만 가는 도시를 남모르게 허기지도록 하는 것은, 결국 산과 나무와 강, 그리고 하늘의 별에서 그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외로움일 수 있습니다. 그 고독은 무서운 속도로 시간을 삼키는 분주한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어느새 시(詩)를 잃어버린 시인의 영혼이자, 생계를 위해 화구(畵具)를 팔아버린 화가의 눈매를 닮아 있습니다.
때로 무엇으로도 좀체 갈증을 식힐 수 없는 여름의 난폭한 야만의 밤은 길들일 수 없는 맹수처럼 우리의 휴식을 소리 없이 습격하고, 동창(東窓)이 밝아오는 새벽녘에야 줄어드는 그림자를 이끌고 비로소 물러서는 기척을 냅니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인사도 없이 황망하게 사라져가는 밤의 뒷모습은 처음의 무례함과는 달리, 정겨운 아쉬움이 역력합니다.
이슬에 젖은 노고지리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없고, 저 너머 사래긴 밭을 갈 이유도 없는 시각에 눈을 뜬 도시의 농부는 서로 얼굴을 알지 못하는 인파(人波)가 몸을 밀착시키며 휩쓸고 갈 경사진 지하도를 내려가는데 필요한 만큼의 힘을 내고 일어나지만, 미리 맞추어놓은 날카로운 자명종(自鳴鐘)에 의존하는 문명의 습관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육신이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물끄러미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거울 속에는 밤사이에 낯설어진 사나이가, 또는 화장기 없이도 부끄럽지 않은 여인이 그 거울을 보는 자를 마주보며 마감기일을 넘긴 숙제를 점검하는 까다로운 선생님처럼 미간을 잠시 찌푸립니다.
이는 어김없이 반복되는 순서이면서도 어찌 보면 존재 전체를 건 엄숙한 예식에 가까운, 언제나 새로운 검문과정이 되는 무시할 수 없는 순간입니다. 걸핏하면 돌팔매질을 서슴없이 하는 세상의 헛소문과 모략의 늪에 유인하려는 음험한 시선에 대비하여 빈틈없는 정장(正裝)차림의 외출신고를 하기에 앞서 빠뜨려서는 아니 될, 슬픈 수행(修行)의 풍속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그곳에 분명 있는데 자기에 대한 난데없는 실종신고를 해야 하든가, 아니면 타인의 사진이 붙은, 잘못 기입된 신원증명서를 다시 작성하고 지겹도록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면서 통과승인을 받아야 하는 소모적인 절차를 거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무 의심 없이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려면 그에 필요한 미소와 분노, 그리고 무표정이 연습되어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흙냄새가 차단된 거리로 나가는 발걸음은 잘 훈련된 병정의 구보(驅步)보다 빠릅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지점을 향한 진격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본능적인 선택입니다. 머뭇거리는 것은 어리석음과 통하고, 느린 것은 죄악이 될 수 있는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때 도시는 자신에게 완벽한 보호자가 되는 것을 확신하게 되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를 포기하고 용기를 접고 희망의 수준을 끊임없이 낮춘 끝에 도달한 굴종을 전제로 하는, 대가가 생각보다 큰, 그리고 언제 부서지게 될지 자신할 수 없는 모래 탑 같은 안전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실 이미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할 수 없다는 절박감, 그리고 살아남는 자가 성공하는 자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流言蜚語)의 밧줄이 우리를 마법 술사의 주문처럼 묶고 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온 우주의 기를 호흡하며 자라나는 비밀을 배우지 못하는 인생과 바람이 숲을 애무하듯 지나는 밤에 별을 헤며 혼자서라도 산책하는 법을 망각한 도시, 그리고 흐르는 강에 마음을 적시는 종교를 상실해버린 시대는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실로 이 자유를 진귀한 은총으로 여기는 지혜의 샘을 길어 올리고 싶습니다. 그리되면 우리의 도시는 더 이상 외로울 수 없는, 우리의 아름다운 마을이 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사방에 퍼져나가는 여름 밤 들판에서 그 상상의 경계선을 모르는 꿈을 꾸는 소년이 되어봅니다.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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