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22)

 

산사(山寺)의 풍경소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제목으로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는 산사(山寺)에 맡겨진 한 동자승의 성장기와 자연의 흐름이 서로 겹쳐 있는 묘미를 보여줍니다. 아직 그 어린 아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커가게 될 지모를 인생의 계절에서부터 시작해서, 많은 상처와 고달픔을 끌어안고 돌아온 사나이의 현실을 통해 영화는 인간이 살아가는 희로애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작품이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영화의 흥미로운 전개도 전개려니와 연못 한 가운데 서 있는 아름다운 정자 같은 사찰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환경의 아름다움 도 크게 한 몫 하고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풍경과 함께 인간사의 온갖 우여곡절을 담아내려 한 감독의 기량은 그래서 세계적인 주목도 아울러 받았습니다.

 

“업”으로 시작된 한 아이의 안타까운 운명, 그리고 그것이 뜨거운 피가 넘쳐 끊을 수 없는 욕망으로 뒤덮인 청춘의 시간을 지나 분노로 점철된 시간의 언덕을 힘겹게 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비워 보낸 겨울과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봄의 의미가 그 안에 녹아 있습니다. 홀로 산사를 지키는 노승(老僧)은, 이 모든 계절의 윤회와도 같은 시간의 신비한 맥박을 짚어내는 수도자처럼 그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실로 절이 있어도 스님이 없으면 그것은 이미 죽은 사찰일 것입니다. 하지만 스님이 계시다 해도 그 스님 안에 법이 없으면 그 사찰은 사찰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자승은 살생(殺生)을 금하는 가르침을 그의 몸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그 나름의 고행을 요구받기도 하고,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선을 월경했을 때 그 절을 떠나는 기로에 서기도 합니다. 모두 불법(佛法)의 소리에 몸을 숙이라는 일깨움과 닿아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속의 어지러움을 피해 사람들은 사찰의 풍경소리에 마음을 비우며 밤의 적막을 조용히 흔드는 독경(讀經) 소리에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겸손하게 합장하는 스님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며,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고승(高僧)의 발걸음을 목격하고 득도(得道)의 깊이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됩니다.

 

불도(佛道)를 따르는 자이든 아니든, 산사(山寺)의 위엄과 그로 인한 그윽한 권위는 우리에게는 사뭇 오래 전부터 단절되지 않은 정신적 혈통에 속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기독교와 서양이 함께 이 땅에 들어와 거의 모든 문화적 영토를 장악하고 말았다고 생각되었을 때에도, 사찰은 범접할 수 없는 성역(聖域)처럼 버티어 주었습니다.

 

그곳은 그래서 서러운 이들의 피난처였고, 속세의 일로 마음이 무너진 이들의 위로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도시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 일으켜 세울 문명적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아픔을 껴안고 한을 씻어주는 사찰의 전통은 그래서 우리에게 단지 종교적 영역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으며, 그로써 누구든 경내(境內)에 들어서면 자신이 마치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양 느끼도록 만드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허나 종교라는 껍데기가 너무 두꺼우면, 그래서 일상(日常)의 삶과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하면 그것은 자신의 본체를 숨기고 마는 은폐와 위선의 권위가 되어가고 맙니다. 정작 이루어져야 할 바는 사라지고 이미 세상 밖으로 내어놓은 명분과 자랑, 그리고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에 힘을 모으기 마련입니다. 사찰은 사라지고, 그 자체적 이해관계가 더 중요해지는 종교기관만이 남고 마는 것입니다.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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