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2)
나오미, 노년에 진정한 어머니가 되다(1)
1.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서 모압으로 갔다. 그는 모압에서 죽으려고 간 게 아니다. 살려고 갔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이국땅 모압으로 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죽었다. 먼 이국에서 눈을 감는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온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사랑하는 아내를 이국땅에 두고, 또 장가도 못 보낸 두 아들을 남겨놓고 떠나는 가장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쩌면 그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온 것을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고, 나오미와 두 아들이 그를 모압 땅에 묻었다.
2. 성경기자는 그런 상황을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았다”(룻기 1:3)라는 말로 표현한다. 남겨진 사람들.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면서 그를 모압 땅에 묻고 그래도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나오미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남편을 그리워하고 또 원망했을까? 그리고 말론과 기룐도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그리움과 악의 없는 원망 속에서 그렇게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3. 성경기자는 엘리멜렉이 죽은 다음, 나오미가 두 아들을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과부가 외국에서 두 아들을 키우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고통스러운 그 삶이 우리 눈에 선하다. 나오미는 남편 잃은 슬픔을 이겨내면서 아이들을 키웠을 것이다. 그렇게 키운 그 아이들을 드디어 장가보낸다. 나오미는 모압 여자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인다. 성경기자는 두 며느리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 며느리 이름은 오르바, 둘째 며느리는 룻이다.
4. 두 며느리를 얻은 나오미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두 아들을 장가보내는 날이 나오미에게는 가장 기쁜 날이면서도 또 가슴 아픈 날이었을 것이다. 다른 어느 날보다 남편 생각이 더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오미는 이제 호강할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통 끝 행복 시작!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5. 하지만 사람일이라는 것은 정말 모를 일이다. 행복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다시 부고장을 받는다. 그것도 두 장을 동시에 받는다. “말론과 기룐 사망.” 성경기자는 나오미의 두 아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아들”이라는 말 다음에 말론과 기룐이라는 이름을 이어 붙인다. 엘리멜렉이 죽었을 때는 “엘리메렉, 즉 나오미의 남편이 죽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의 두 아들, 즉 말론과 기룐이 죽었다”고 한다.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사소한 차이에서 나오미가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더 슬퍼했음을 짐작한다. “말론과 기룐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고, 그의 두 아들, 즉 그토록 사랑했던 두 아들, 남편 죽은 다음 고생고생 다하면서 키워 장가보낸 두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나오미가 자식 잃은 어머니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6. 말론과 기룐. 이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홀로 남은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고생고생하면서 자기들을 키워서 장가보내고 늙어 가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그 젊은 아내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이 비통한 죽음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죽었다.
7. 이 죽음 앞에서 넋을 잃은 나오미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는 흘릴 눈물도 없을 나오미.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몸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두 아들을 땅에 묻을 때, 나오미는 자신의 삶도 그곳에 묻었을 것이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압 땅에 묻으면서, 실은 자기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살아보려고 그곳에 온 그 사람들. 하지만 모압은 삶의 땅이 아니고 죽음의 땅이었다. 나오미는 얼마나 원통했을까? 성경기자는 이런 나오미 모습을 ‘두 아들과 남편은 떠나고 그녀 홀로 남았다’는 말로 표현한다. 홀로 남겨졌다는 이 말에서 우리는 가슴 저리는 슬픔과 고독을 느낀다. 그런데 여기서 ‘두 아들’은 ‘두 아이’이다. 말론과 기룐은 아무리 장성해서 장가를 갔다고 해도, 나오미에게는 여전히 ‘아이’라는 것이다.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아이’라고 하는 데서 우리는 어머니 나오미가 겪는 그 참척의 아픔을 더 크게 느낀다.
8. 그런 아픔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다. 그런데 길을 가던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을 불러 세운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한다. 각자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룻기 1:8). 대체로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는데, 나오미는 왜 “어머니의 집”이라고 했을까? 그들이 모압을 떠나올 때,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친정어머니들이 두 딸들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모습, 딸들과 영영 헤어지는 그 어머니들의 아픈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두 아들을 먼저 잃은 나오미는 그 아픔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 어머니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 것인지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가슴아파하며 평생 동안 딸을 그리워하면서 지낼 그 어머니들 모습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국땅으로 가지 말고, 친정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9. 하지만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며느리들이 완강하게 버티자, 나오미는 다시 말을 한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들이 돌아갈 곳은 유다 베들레헴이 아니고 바로 너희들의 어머니 집이다.” 두 며느리들이 돌아갈 곳이 어디냐는 것이 논점이다. 나오미는 “너희들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두 며느리는 “우리는 어머니와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가는 것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어머니”라는 말에 주목한다.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나오미는 여전히 어머니이다. 그는 말론과 기룐의 어머니였을 뿐만 아니라, 오르바와 룻의 어머니이기도 했던 것이다.
10.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두 며느리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자기가 했던 말을 풀어서 다시 설명해준다. “내가 무슨 소망이 있어서 오늘 밤에 한 남자를 만난다고 하자. 그래서 아들들을 낳았다고 하자.” 이런 이야기까지 하면서 나오미는 어떻게 하든지 두 며느리들을 그들의 어머니에게로 보내려 한다. 눈물범벅의 우여곡절 끝에 오르바는 친정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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