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15)
국정교과서, 사무엘의 혼백을 불러올리랴?
큰딸과 함께 영화 <사도(思悼)>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영화엔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삼대가 등장한다. 마지막 정조의 등장은 불행한 아버지에 대한 미화인가, 아니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화해일까? ‘자식이 출세하면 붓으로 조상을 키운다’는 말이 있다. 정조의 아버지 추숭은 사도세자에 대한 미화일 가능성이 많다. 사실적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도저히 그대로 왕위를 이을 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니까. 그러나 적어도 영화에서 정조의 분량은 파괴된 역사의 화해를 말하는 듯하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감독은 아마도 이것을 화해라 제시하려는 듯하다.
감독의 의도야 어쨌든 정조대왕의 아버지 존숭은 개인적으론 자신의 과거와의 화해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왕조체제의 입장에서 국왕의 이러한 화해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화해일 수도 있다. 그러면 정작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이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딸과 함께 그 얘기를 나누었다. 딸은 신통하게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까지 해댄다. 이것은 역사를 배제한 한 가정의 비극인가? 진정한 역사는 이것을 어떻게 볼까? 역사란 무엇일까? 이러한 다양한 관점의 논의가 정리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혼란을 줄 뿐인 것 같았다.
가령 이것을 한 국가의 통치자인 국왕의 가정사가 한 국가의 역사와 중첩되는 것이라 보면 어떠한가? 이것을 역사라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것은 왕조사일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역사는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역사로 가는 하나의 정류소일 뿐이다. 따라서 이것이 가지는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영화는 흥행할지 모르지만 흥행의 폐해는 그대로 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술이 진실을 보여준다지만, 바로 그 예술 때문에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 되고 본질이 가려지는 경우들이 있다. 왜 예술은 좀 더 극단적이고 치열하게 숨은 진실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까? 예술가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적 학문으로서의 역사란? 숨은 진실을 낱낱이 드러냄으로써 각개 역사적 정류소가 전체 하나의 역사적 플랫폼으로 귀속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역사 또한 종교와 다를 바가 없고 철학과 다를 바가 없고 위대한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또한 과학으로서 자연 법칙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교과서의 문제는 역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반역의 문제다. 이점을 분명히 해 두었으면 싶다. 그녀의 사욕의 시도가 여러 사욕과 맞물려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그 교과서로 교사들이 가르칠 수도 있고 학생들이 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사라지는 것인가? 역사가 바뀌는 것인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이것은 역사를 놓고 벌이는 전쟁일지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필패를 장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그 폐해는 엄청날 것이다. 이명박의 대운하가 4대강 사업으로 둔갑하여 그 욕망을 끝내 실현했듯이 박근혜 국정교과서는 박정희 일족의 대물린 야망과 탐욕의 표출이다. 말하자면 그녀 나름대로 자기 자신과의 화해의 모색이고 역사와 박정희 시대의 화해의 모색이기도 하다. 물론 심정적으로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고 그 시대에 습득된 후진적 국민 정서가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의 미더움은 결국 그런 것으로 역사가 후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박근혜와 그녀의 정권은 세월호 때 이미 파산 선고를 받았다. 그녀의 무능과 파렴치함과 뻔뻔함은 그때 이미 바닥을 쳤다. 소위 OECD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에서 그녀처럼 무능한 국가 지도자가 어디 있을까?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역사교과서는 결국 다시 수정될 것이다. 정녕 그렇지 않는다면 역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역사가 아니던가! 우리는 만일 이것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카프카스 산록 어디쯤 봉건 영주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간단히 그런 국가는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버릴 것이다. 남북의 가계 우상화는 스탈린도 하지 않은 짓으로 이미 시대의 보편적 상식을 넘어서 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하니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하니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하는지라.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사무엘상 28:5~20)
국가의 지도자로 리더십의 궁지에 몰린 사울은 마침내 자신이 금지했던 영매에 의지해 사무엘의 귀신을 불러올리라 한다. 자기 시대의 역사를 발견해 나가도 모자랄 판에 역사의 귀신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불려 올라온 것이 어디 사무엘이랴. 그것은 사무엘의 망령이었다. 당연히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을 불러들였다. 사울은 절망에 엎드러져 일어나지를 못한다.
도스또옙스끼의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보면 살아 있는 성인으로 추앙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자 곧바로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신부들은 서둘러 교회의 모든 문들을 닫아건다. 그를 추앙하던 민중들이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경외감이 사라질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처럼 성스러운 것은 썩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인데, 작가는 여기서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것의 착각과 진정 성스러운 게 무엇일지를 반성하게 해준다.
진정 성스러움과 거룩함이란 그토록 위대했던 인간들마저도 썩는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발견된다. 당자들로서는 억울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억울함을 푸는 게 역사는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김일성과 김정일을 내세우는 것은 자기들로서는 뚫고나갈 비전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희망과 상관치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이미 자연으로 돌아간 그들의 영혼을 괴롭히는 일이다. 남보다는 무능한데 탐욕은 남보다 월등한 자들의 역사를 거스르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비단 정치뿐인가, 교회는 어떤가? 국정교과서 문제나 근현대사의 역사적 퇴행에 관련된 대부분의 국가 관료들이 특히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보수주의 교단들과 인사들이 여기서도 앞장서 가세하고 있다. 기독교의 궁색한 위상과 현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독교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이집트의 파라오도 로마의 황제도 한낱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마귀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의 역사가 마귀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直視)토록 해줬던 것이 기독교였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5:3).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서 6:12).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근거나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있다면 자기모순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데는 지금 교회가 놓인 현실에 그럴만한 요인이 있다. 그것을 그들은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전쟁이든 사람을 죽이는 것이든 반드시 그럴만한 요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무서운 질병! 이 신념! 그러나 어디를 뒤져봐도 요인은 없다. 탐욕과 야망이 있을 뿐. 무능한 뱃속은 탐욕스럽고 뻔뻔한 내면은 파렴치하다. 여기쯤 교회든 국가든 지도자들이 죽은 이들을 들먹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기가 그만 못하기 때문이고 그를 이용해 자기들의 무능함을 가려야 하는 필연적 요구다. 하물며 사무엘 같은 지도자도 아니고 이승만이며 박정희일까?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온갖 기회주의와 갖은 잔혹함 정도? 국정교과서로 불려 올려 질 귀신이 어떤 귀신일지 상상이 간다. 내 혼(魂)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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