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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반(反)동성애 전도사에게

by 한종호 2015. 11. 22.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18)

 

반(反)동성애 전도사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이 노래는 의외로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非)신자들도 많이 부른다. 여기서 ‘사랑 받는다’ ‘사랑’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에겐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일 테지만 비신자들에겐 이 노래를 불러주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보편적 의미가 더 클 것이다. 그러나 다시 묻고 싶다. 하나님의 사랑이건 인간의 사랑이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박정희를 다니엘의 반열에 올린다?

 

에로스니 아가페니 하는 분류법이 있지만 사실 사랑은 전부 다 아가페고 에로스가 아닐까? 사랑의 본질은 똑같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사랑의 최고 형태나 그 반대를 논증할 때면 언제나 남녀관계(신랑 신부)를 비유로 사용했다. 신혼방의 비유를 직설적으로 풀어 본다면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이다. 곧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최상의 비유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이지 본질은 아니다. 그 본질을 바울은 ‘하나 됨’, ‘한 몸 됨’, ‘한 영혼 됨’이라 표현했다. 한 영혼이 된다는 것은 각자 자기를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서로를 향한 지극한 섬김. 그것이 신과 인간이든 남녀 간이든 몸이든 정신이든 영혼이든 그 어떤 것이든 사랑의 최고 형태는 자기를 잊고 섬김으로 상대와 하나 됨에 있다.

 

세상살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사랑 안에서 발견하는가, 시기· 질투 속에서 발견하는가? 하나됨 가운데 발견하는가, 분리 가운데 발견하는가?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도무지 이런 사랑을 모를까? 나는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진짜 문제를 삼을만한 것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 하나, 사랑 없음이다. 오로지 사랑에만 서로에 대한 분리와 정죄가 없다. 그런데 하필 사랑을 문제 삼을까?

 

인류는 모든 정죄의 율법을 사랑과 인권과 비폭력으로 바꾸는 진보를 거듭해 왔다. 인간이든 인격이든 진보의 본질은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말할 것 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을 보증해 주는 근거도 이 사랑이다.

 

일전에 박정희 전(前)대통령을 구약성경의 다니엘에 비유했던 친구가 있었다. 다니엘이 적국인 페르시아의 궁정에서 고관까지 된 것은 조국을 위한 것이라 했다. 그는 페르시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자기민족의 신앙을 굳게 지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이 어떻게 박정희와 나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백 번을 양보한다 해도 죽은 박정희가 산 우리들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그가 다니엘의 신앙과 같은 민족을 위한 신념으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했던 것도 아니다. 단 하나 가능한 유비가 있다면 페르시아와 일본이 각각 유대인들과 한국인에게 적국이었다는 사실일 텐데, 다니엘이 언제 쿠데타를 일으켰었나? 박정희가 언제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던가? 박정희를 다니엘과 나란히 놓고 본다는 발상은 참으로 특이한 견해였다. 그런데 교회의 전도사

가 웬 박정희 옹호일까? 그러던 전도사가 이제는 반(反)동성애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나는 전일에 그 친구가 다니엘을 빌어 박정희를 옹호하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없는 말을 지껄여대는 사람일지라도 잘 들어보면 하나의 일관성이란 게 있다. 박정희의 친일 전력 옹호와 동성애 반대 사이의 일관성은 무엇일까? 신의 율법에 대한 문제인가? 권력 추종에 관한 문제인가?

 

 

 

에고, 아빠는 너희들에게 쪽팔려 못살겠다

 

어떤 사람의 주장이나 행위를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는 게 내가 살아온 세월의 교훈이다. 글이든 말이든 행동이든 예술작품이든 인간의 본질은 그것과 무관할 수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 대중에게 가장 존경을 받는 거룩한 성자도 바로 그 거룩한 체하는 제스처 때문에 추종자들을 질식시킨다. 아무리 온 세상이 온 교회가 온 조직이 그렇다고 연역의 못을 박아놓을지라도 내 가슴과 양심에서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닌 것이고, ‘저건 아닌데…’라고 느껴지기만 해도 그것은 대개 벌써 아닌 것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속담처럼 비록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아니라 반박하진 못하더라도 집에 와서라도 ‘오늘 기분 참 더럽다’ 말할 순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 자리에선 ‘감사합니다! 대단하십니다! 지당하십니다!’ 허리를 숙였을지라도 집에 와 아내와 둘이 있을 때조차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본래 그런 거야. 그런 정도의 신중한 사려는 갖추어야 세상을 산다’ 가르칠지라도 ‘아빠는 사실 너희들에게 쪽팔려 못살겠다. 너희가 내 원수를 갚아다오’하고 말할 순 있어야 한다. 만일 부부의 침실에서도 아이들과의 식탁에서도 정말 그런 척을 한다면 그것은 인격이 훌륭한 것도 신앙이 좋은 것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저 구제불능이다.

 

스스로를 속여선 안 된다. 직관과 사실을 속이고 호도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점점 위선자가 된다. 기독교인은 마땅히 이래야한다는 누군가에게 받은 암시에 의해 누가 누가 잘하나 더 훌륭한 앵무새 노릇 경주론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랑에 도달할 수 없으니 항상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말만 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왜 허무주의자가 없으며, 기독교인이라고 왜 우울증이 없겠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 사십년 동안 허무주의자이며 우울증에 신경질을 부리며 산다. 자랑하는 건 아니다. 예전 나를 좀 가르쳐 주셨던 어느 분께서는 ‘내 앞에서만 이렇게 정직히 말하고 다른 데 가서는 그런 식으로 자기 속을 낱낱이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정직이란 무엇인가? 포살자가 붙잡으러 와서 숨어있는 가족을 어디에 숨었는지 대라고 윽박지를 때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저기 있다고 가리켜주는 게 정직인가? 살다보면 눈앞의 정직보다 더 근본적인 정직을 위해 부정직해져야 할 때도 있다. 어쩌면 그런 경우가 더 많다! 만일 정직하게 산답시고 속에 드는 마음대로 ‘여보 정직히 말해서 당신은 결코 예쁘다고 할 순 없어’라고 주착을 떨거나, ‘친구야 너의 우쭐거림은 잘난 척에 불과하고 나는 네 과대망상을 볼 때마다 아니꼬워서 역겨움을 느끼곤 해’라고 핵직구를 날린다면 그것은 정직일까? 그러나 즉각즉각 바로바로 그런 직구를 딱 부러지게 던질 줄 몰라서 어느 날 부정직한 인간으로 규정되고, ‘그동안 네가 한 말과 행동은 다 거짓에 불과하다’는 인간실격의 선고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다. 그럴 땐 ‘오직 하늘이 나를 아신다’하고 수납하고 퇴거하는 수밖엔 도리가 없다. 그렇더라도 나의 양심으로 인해 내 일관됨이나 충성됨이 망가지진 않는 것이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내가 깨친 한 가지 획기적인 영감은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을 나타냄이라는 관점이다. 과연 그러하니 이런 신앙은 깊어질수록 인생이 관대해지고 넓어지며, 정말로 나의 모든 삶과 삶의 방식이 내 믿는 신의 현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식으로 발전되어 간다. 비록 내가 허무주의자에다 우울증을 앓고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살지만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달마다 사랑에 충만해지고 해마다 드넓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실천적 실현에 괄목 익숙해진다. 예전에 내가 문제로 삼았던 허무하고 우울하고 신경질을 유발하던 것들이 그것들의 현상태와 상관없이 점차 내 사랑 안에서 치유되고 화해되고 용서되어 융합된다.

 

나는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길로만 가려는 사람들을 본다. 성경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랬다고 그들은 진짜로 좁은 문으로 기어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은 대도무문(大道無門) 세상의 대로를 활보하며 세계를 평정하노라, 오직 자기 외에는 모를 비전(祕傳)의 기개로 자신만만들 하다. 그가 무엇인들 가지지 못했을까? 그러나 특히 주님을 위한 사랑을 가졌다며 바로 그 사랑을 핑계로 자신의 습성화된 권력 추종을 변명 강화하려 한다. 그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은 그대의 신앙인 기도응답이나 받는다는 말인가? 왜 이렇게 기독교가 유치해 졌는가?

 

사랑의 형태는 달라도 사랑의 본질은 같다. 신에 대한 사랑이든 이성간의 섹스든 동성 간의 섹스든 자식에 대한 사랑이든 친구간의 우정이든 인간간의 의리든 숭고한 신념에 대한 사랑이든 그 어떤 사랑이든. 그러나 사랑은 집착은 아니다. 집착에는 소유와 지배, 탐욕과 폭력이 따른다. 가학적 폭력성은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대상과 일체를 이뤄 섬기려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방식으로 일원·획일·정당·강제화한다. 거기서는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타인의 평화나 안전에 대해서조차 까닭도 이유도 없이 맹렬한 시기 질투가 따른다.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권력에 의지하고 권력을 추종한다.

 

애송이 크리스천 친구여.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자기 강화의 권력을 사랑하는 자들을 미워한다. 거기에는 지성이 없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공부가 없다. 지식을 갖든 라이선스를 갖든 명성을 얻든 항상 마찬가지다.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점점 굳어지고 퇴보한다. 노인들뿐만이 아니다. 루쉰(魯迅, 1881~1936) 은 ‘나는 늙은이들만 죽으면 중국이 새로워질 거라고 믿어왔다’고 썼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이들도 얼마든지 보수적이고 노회할 수 있다.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1910)는 젊은이들이 기성사회에 잘 보이려 권력자들을 추종할 때 오히려 나이든 사람들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말이야 바른 말. 공부도 안 하고 학식도 없고 상상력도 부족하고 연륜도 짧은 자들이, 단지 장로(長老)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자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경력을 쌓으며, 뻔뻔하게도 그것을 신을 위한 충성이라 주장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십자군 나신 건가? 과연 우리가 식견이 모자라 그에게 매번 가르침을 받아야 되겠는가? 전일에 박정희를 전도했던 옹색한 흔단의 논리로 이제는 반동성애 전도의 기치를 내세워 우리의 향도가 되려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친동생이라도 선생노릇은 못하겠더라. 못할뿐더러 나는 그의 선생이 아니라는 사실만 깨닫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간 선생 노릇으로 신뢰를 잃은 나의 형 노릇으로써 사랑을 회복하는 길뿐이다. 반성하고 반성한다.

 

내가 서울대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돌아와 마당가 의자에 앉아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헐떡거릴 때, 퇴근한 동생이 돌아왔다. 우리는 싸운 일도 없지만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경제적인 눈인사로만 지내왔다. 동생도 적이 무뚝뚝한 녀석이긴 하다! 그는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손을 훼훼 저으며 ‘가까이 오지 마라’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그때까지 내게 바이러스가 남아있어 가족들이 전염될까 무엇보다 그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동생을 위해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자 동생도 손을 휘젓고 얼굴을 찌푸리며 신경질을 냈다. “괜찮어. 괜찮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알어?” 그렇게 쉽게도 죽더라만, 나는 그만 기가 죽고 동생은 용기를 내 다가와 내 손을 움켜잡기까지 했다. 그러나 변변한 말을 못해 고개를 외로 꺾는다. 우리는 잠시 무언가 치밀어 울먹거리며 자기들이 이깟 일로 운다는 사실이 창피해 신경질을 부렸다. “그래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아냐? 걱정 마라. 가서 밥 먹어.” 알겠는가? 애송이 크리스천 친구여.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사랑이 언제까지 우리를 방치해 둘지 모르겠다. 제발, 머리를 박박 깎고 제복을 입고 외박을 나온 새내기 군인 같은 전도사여. 늙은이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것은 사랑의 공부이지 사랑의 방식에 대한 분류가 아니다. ‘당신은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식으로 묻지를 마라. 그것은 ‘당신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와 동격이다. 성경을 들추어 동성애를 반대할 것 같은 구절을 찾아내거나 반대로 지지할 것 같은 구절을 찾아내는 일체의 과장된 논쟁과 소란들을 나는 무의미한 뻘짓으로 본다. 앞장선 어리석음이 아직 그만큼 어리석지 않은 자들을 종내 어리석게 만든다. 어리석어지는 게 충성이라니! 무엇보다 그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일을 하신다는 그 허무맹랑한 오만함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신의 말씀이라도 하루 종일 떠들고 집에 가면 공허하지 않던가? 너무 공허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꽉 끌어안고 싶지 않던가? 누군가의 품에서 ‘나 정말 힘들어’ 하면서 위로 받고 싶지 않던가? 그것이 사랑이다. 그대가 그로 인해 아내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눈다해도 그 누가 그대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보지도 못한 그대들의 침실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 타인의 침실을 엿보는 자여, 친박정희 전도와 반동성애 전도가 어떻게 그대 안에서 일관성을 이루는지나 연구해 보게나. 설교란 나 같은 목사가 하는 것이지 자네 같은 야망꾼이 하는 게 아니라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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