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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아무래도 직선으로 살아야할까 보다

by 한종호 2015. 12. 27.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20)

 

나는 아무래도 직선으로 살아야할까 보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목사님적 목사님’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보수적 스탠스로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분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과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근엄함과 엄숙함이다. 그것은 대체로 그러한 태도에서 자신의 말에 권위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차이점은 한 편은 그대로 보수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편의상 중립을 표방하는 것이고 다른 한 편은 그 반대의 경우다. 그런 의미에서 두 편이 표방하는 중립이라는 것도 전혀 다른 내용일 수 있다.

 

이재철 목사님은 아마도 전자의 가장 대표적이며 성공적인 사례가 아닐까. 순전히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신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 1위. 종교를 뛰어넘어 일반인들에게도 정신적 멘토로 받아들여지는 목사님’이라는 수사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건 아니라고 본다. 그건 일찍이 미하일 바흐친이 설명해준 소설미학의 다성성(多聲性, polyphony)이라는 이론에 따르면 그만큼 그 분이 ‘목사님적 목사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령 이런 식으로 바꾸어 대입해 볼 수 있다. ‘경찰적 경찰’, ‘군인적 군인’, ‘정치가적 정치가’.

 

바흐친에 따른다면 소리(설교)의 생산자(수신자도)나 그 소리 자체는 벌써 어떤 사회적 맥락에 속해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특별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특정한 사회나 특정한 언어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 중립을 말하든 무엇을 말하든 그는 벌써 자기가 속한 직선적 사회상황의 개체인 것이다. 그 나머지 하고픈 말의 핵심을 둘러싼 중립의 포오즈란 근엄과 엄숙, 권위의 도구이자 변명의 방호벽이 아닌가.

 

뼛속까지 보수주의자, 엘리트주의자

 

모르겠다. 나는 이 기사의 첫줄을 잘못 읽었다. ‘직선(直線)’이라는 강력한 말이 이분의 삶을 명료하게 소개하는 칭찬의 말인 줄 알았다. 내 생각에 이 분의 저간의 설교야말로 오로지 직선적 사유의 산물(産物)이라고 보이는데. 왜 <중앙일보>가 이 시점에 이런 인터뷰 기사(12월 25일, “청춘들, 직선 인생 살면 불행해요 … 원으로 살아야 늘 선두”)를 실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맨 먼저 꺼내는 말씀이 금수저, 은수저의 좌절과 박탈에 대한 고상하신 설교다. 금수저, 은수저가 기회와 혜택을 다 차지해 버리는 데 대한 비판은 없고 금수저, 은수저에게 좌절과 박탈감을 느끼는 흑수저들의 불만을 향한 훈계만 있다. 한마디로 니들이 선두주자가 되지 못하는 건 니가 못난 탓이 아니냐는 것이다. 선두주자 경쟁에서 새로운 가치로 승부를 걸어 이기든지, 선두주자가 못되어도 가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갈 수 있는 데 뭔 불평불만이냐는 말씀. 그런데 흙수저의 불만이 단지 선두주자가 되지못한 이른바 ‘루저들’의 불만이던가?

 

 

새로운 가치라 하는 데 묻고 싶다. 그래 금수저, 은수저의 좌절과 박탈로부터 선두주자가 아니어도 좋을 360도 원의 어떤 새로운 가치를 만드셨는지. <스타워즈> 시리즈의 조지 루카스에 대해선 자세히 모른다. 스티브 잡스라면 좀 알고 있긴 하지만, 자주 이런 성공한 사람들을 자기 동일시 생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훈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점 이 목사님은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인데다가 엘리트주의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그들이 이 분의 말씀처럼 뒤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자기부인의 삶에 입각한, 본인 자신처럼 엄숙하고 근엄하게, 360도 원의 정신으로, 또 그러면서도 이쪽저쪽 모두를 품은 관용의 정신으로, ‘그래 네 입장도 생각해 보겠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는지 의문이다. 그분이 설교에 인용하는 인물들의 진짜 인생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설교에 인용된 그들의 일화는 설교를 위한 단순한 예화에 불과하여 어떤 경우는 그들의 전체 인생에 대한 심각한 왜곡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러스트/고은비

 

 

비약에 의지한 센티멘털리즘

 

이 목사님의 설교에 인용되는 인물들에 관한 이런 사례는 개인적으로 내게 기억할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십 년 전쯤 ‘비전의 사람’이라는 설교로 이 목사님은 당시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키셨다. 그 주된 선풍의 원인은 청중에게 결단의 감동을 주는 탁월한 말솜씨였다. 그중의 압권이 일본 기독교의 저명한 지도자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의 스승이었던 나가노 목사의 이야기다. 교인 한 사람 없는 목사였던 나가노 목사가 어느 날 자살직전 찾아온 폐병환자 청년과 한 상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각혈한 그의 오물을 치우고 다시 함께 밥을 먹었다는 일화다. 그 청년이 가가와였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그 후 나가노의 영향으로 빈민굴의 목회자가 되어 변비 환자의 항문을 입으로 빨아내기까지 하는 고귀한 희생으로 목회를 했다는 것이다. 나가노의 비전이 도요히꼬를 낳았다. 대충 이런 설교였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쓴다 해도, 입으로 똑같이 옮긴다 해도 이 목사님이 기립박수의 답례를 받았다는 감동은 결코 재현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기막힌 예화를 기막히게 사용하시는 설교자들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내 초등 동창 중에 개그맨 뺨치는 입담을 지닌 친구가 있다. 뒤늦게 예수를 믿고 신앙이 열렬해진 친구는 교회생활을 좀 해 보더니 내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정근아 니가 나 정도의 이빨만 가졌어도 천용기가 됐을 텐데.’ 나 역시 성경해석이나 신학적 문제와는 별개로 이 ‘비전의 사람’ 설교에 매료됐었다. ‘그래! 결심했다. 나도 나가노 목사나 가가와 목사가 되어야지.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지.’이렇게 결심했을까? 그런 건 아니다. 나가노 목사와 가가와 목사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리고 놀라움과 허탈함 내지는 이건 아니다 싶은 일종의 배신감이 들었다.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1888~1960)를 인터넷에서 찾으면 여러분은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목사라는 프로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일제 파시즘의 광기가 압도하던 시대에 빈민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사회선교사업을 벌였고, 노동운동에 가담해 가와사키 조선소 노동쟁의를 지도했다. 그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기독교 복음적 ‘신국(神國)운동’을 제창했다. 1940년에는 반전(反戰)운동으로 투옥되었으며, 패전 후에는 일본 사회당 건설에 참여했다. 나가노 목사와 가가와 목사는 사회주의자였던 것이다.

 

이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아니다. 심각한 문제다. 대천덕(1918~2002)신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느 복음주의 기독교 잡지에 그에 관한 특집이 실렸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에서 발행하는 잡지가 대천덕을 언급하는 내용이 궁금해 읽어보았다. 기사는 구구절절 그를 위대하고 숭고한 기독교인의 사표로 추앙했다. 그러나 그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예언자적 메시지라 할 수 있는 토지정의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었다. 그분의 삶은 위대하고 숭고했지만 그 삶의 진짜 내용은 그리 중요치 않았던 것이다.

 

이 목사님의 설교로 나가노 목사와 가가와 목사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졌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똑같은 내용을 얼마든지 읽어볼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이 일화 이외에 나가노나 가가와의 일생에 관한 보다 진실한 내용을 추적해 이야기하는 기독교인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무엇과 싸웠는지가 없다. 심지어는 나가노가 나가오로 가가와가 우찌무라로 바뀌어있는 업그레이드된(?) 버전도 보았다. 그렇다면 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가노와 가가와의 목회자적 헌신과 희생에 고무됐던 그 수많은 청중들은 정작 나가노와 가가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어떤 관계의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 정작 이 목사님은?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비약은 비약인 것. 비약에 의지한 센티멘털리즘으로 그들의 삶을 뒤좇아 갈 수는 없으리라. 외람될 진 모르나 나도 비약을 해보자면 나는 감동적인 일화에 감동받기보다는 이런 말씀에 유념한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12).

 

‘보수주의자적 보수주의자’의 중립적 훈계

 

세리 출신 마태와 열심당원 시몬을 좌·우 보수·진보의 틀에 놓고 대입하는 비약에도 식상한다. 과연 마태가 시몬에게 제거대상 1호인 탐관오리였을까? 시몬을 천하대세를 모르는 철부지 아이로 보는 것은 이 목사님 자신이 아닐까? ‘두 사람이 예수의 테이블에는 나란히 앉았다.’ 이건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의 문학적 표현일 것이다. ‘그건 예수의 무엇 때문인가?’ 라고 묻는 건 그래서 좀 웃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가. 결국 또 다시 판에 박힌 ‘보수주의자적 보수주의자’의 중립적 훈계다.

 

한 테이블에 앉은 제거 대상 1호 탐관오리와 천하대세를 모르는 철부지 열심당원의 비유에 교회 안 여와 야, 진보와 보수, 경영자와 노조의 원관념이 대입된다. 아하, 분명 한쪽은 제거대상 1호의 탐관오리이고 하나는 천하대세를 모르는 열심당이겠다. 이 둘이 예수로 인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교회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이런 말씀에 반대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동의한다.

 

그러나 내 생각을 말한다면 그들이 예수의 테이블에 함께 앉을 수 있었다는 건 예수가 그들 모두를 그대로 품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 여야 진보 보수 경영자와 노조가 다 있어야 하고, 교회가 어느 편을 편향적으로 들어선 안 되고, 그들 모두를 있는 그대로 다 품어야한다는 설교에 인용될 사례로는 앞선 가가와의 사례처럼 건너 뛰어버린 내용적 비약이 심하다는 말이다. 정치결사대로 전락하는 교회에 대해서라면 나도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사회 갈등의 원인인 기득권의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는 완고한 보수주의와 엘리트주의가 전제된 상태에서 휴머니즘적이고 경영적 중립주의의 도덕설교가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편향돼 보여도 선명히 보이는 굵은 직선이다. 각양 갈등의 내용과 원인들을 헤아리려는 360도 원의 디지털 정신이 아니라 내게는 지난 10년간 더 한층 무디게 강화된 일방적 보수주의의 아날로그적 직선으로만 보인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마태와 시몬이 예수의 테이블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예수가 자기의 노선이 없이 모두를 품었기 때문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그들에게 서로의 노선을 인정하고 입장을 들어보아야 한다고 설교했기 때문이 아니다. 세리던 열심당이던 좌든 우든 보수든 진보든 예수께로 왔을 때, 그의 메시지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간 입장을 양해한 게 아니라 마태는 세금징수원직을 버렸고 시몬도 열심당을 버렸다. 세리도 열심당도 하나가 되게 했던 예수의 분명한 노선이 있었던 것, 그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야지, 그 외 다른 이유가 없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마태와 시몬이 예수의 테이블에 앉았을 때 예수는 30세가 갓 넘었고 제자들은 그 보다 어렸었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얘들아’ 이렇게도 불렀다. 과연 우리나라의 70년도 넘은 진보와 보수, 여와 야, 좌와 우의 갈등을 풀어내려면 어떤 젊고 새로운 혁명적 정신이 필요한 것일까? 그걸 풀어낼 예수의 테이블에 앉을 제자들은 누구일까? 뒤에 이어지는 자식들 먹일 쌀이 무거울수록 가볍더라는 이 눈물 나도록 감동적 일화는 과연 진짜 써먹으시려면 어디에 대입해 써먹었어야 했을까? (그 얘긴 생략하겠다.)

 

설교자야말로 철저히 ‘권위 없는 자처럼’이 되어야

 

나도 27살부터 교회에서 설교를 해왔지만 설교에는 설교자에게만 설치된 함정이 있다. 아무리 쌀을 도정하는 것과 같은 자기를 깎아내는 자기부정을 설교하더라도 바로 그런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그런 설교를 지닌 자신만은 거기서 예외가 되기 쉽다. 전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설령 거기서 벗어나도 얼마간 양해가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말로써 다 이루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독선적인 자기도덕에 입각한 자기강화의 직선적 집념 안에서 일종의 기독교 도사와 같은 이미지가 탄생한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온 것 같은. 대개 이런 대가(大家)를 이룬 분들은 흔히 수준 낮은 무당들을 낮게 보지만 자신이야말로 품격 높은 변종의 도덕적 무당이 될 수 있음을 모른다. 그야말로 언제부터 형성됐을지 모르는 고매하고 거룩한 종교지도자 이미지에 철저히 부합하는 배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연기가 완벽할수록 우리는 진정한 배우라고 칭찬해준다. 그러나 진정한 배우에게 진정한 삶이 무엇일지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모든 것. 심지어 죽음마저도, 죽음의 위력마저도 결과적으론 자기부정이 아니라 도저한 자기긍정에 바쳐지며 그것은 항상 타인들을 향한 매혹적이고 감동적인 설교가 될 수 있다. 그런 직선. 그러나 유감이다. 그것이 죽음을 예감하고 투병하는 설교자에게서 나오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015년 이 땅(대한민국)의 현실에 오시는 예수를 만나는 문으로서 외눈박이 짝눈을 회복하는 진정한 ‘자기 부인’은 누구의 어떤 짝눈일까? 오른쪽 짝눈과 왼쪽 짝눈 사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중립의 눈이 이 목사님에게 있을까? 나는 솔직히 회의가 든다. 그리고 그분이 ‘신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 1위. 종교를 뛰어넘어 일반인들까지 정신적 멘토로 받아들여지는 기독교의 대표 설교자’라는 사실에 더욱 실망한다. 나도 안다. 도덕은 힘이 세다는 것을. 도덕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경우에 딱히 들어맞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을 진 모르겠지만 나만은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도 바울의 이 한 마디를 나의 친구들에게만 읽어 드리고 싶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라디아서 5:11-12).

 

나도 설교를 좀 해보자면 십자가란 거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 나 외에 다른 사람을 향한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야말로 철저히 ‘권위 없는 자처럼’이 되어야 한다. 곧 나는 여하한 설교를 어디까지나 설교자의 고백으로 들으며 고백으로서의 가치를 따진다. 암에 걸렸어도 하루 네 번씩 그것도 다 외워서 설교를 하는 게 십자가의 자기부인의 삶이라 은근 광고하고 싶은 모양이나 그런 건 고백이 못된다. 그럴 량이면 나는 차라리 집에서 쉬시면서 치료에 전념하시기를 권하고 싶다. 그것이 신적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자기부인이 아닐까? 외워서 하는 설교가 무슨 대수인가? 내 경우라면 나는 설교를 작성하는 데 진을 빼기 때문에 외울 시간이 없다. 매끈하게 설교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용을 확실히 전달하는 데 목표를 둔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청중들이 그렇게 여겨줬으면 싶은 건 내가 아니라 설교의 내용이다.

 

나는 아무래도 삶을 직선으로 살아야할까 보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도 고매하고 훌륭하신 목사님을 깎아내린다고 욕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고매하고 훌륭하고 타인의 상반된 입장도 그대로 다 품어주어야 한다고 설교하시는 너무나도 점잖으신 우리시대의 존경받는 대표적 목사님들에게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이미지와 실제가 다른 두 얼굴의 고통을 당했던 동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전인류는 수월히 사랑하지만 한 인간을 사랑하기엔 크나큰 장애를 겪는 것 같다.

 

그런 생생한 ‘수난곡’을 들어주어야할 때마다 내가 내리게 되는 결론은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라는 격언이다. 그리고 진실로 똑같이 가슴 아프고 분통이 터지지만 그 친구들에게 ‘용기를 내라. 저 완벽한 배우들이 저렇게 완벽한 연기력으로 아카데미상의 명성을 드날리면서 뒤로는 그 진짜 인격의 역동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용기를 주지 않느냐? 이 또한 통쾌하지 않으냐?’고 말해준다.

 

인간의 도덕은 늘상 진리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달라 자기 자신 안에서조차 서로 사맞디 아니한다. 표면에 완벽한 사랑과 관용의 도덕적 얼굴을 하고 있을수록 이면에는 집요하게 이기적이고 잔혹하고 독선적인 폭력성을 지닌 경우가 많다. 탁월한 엘리트는 무얼 해도 탁월한 엘리트가 아닌가.

 

부디 우리의 일생을 설파해온 모든 바리새적인 말씀들이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들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대중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경멸과 멸시로 몸과 맘에 상처를 주었던 누군가를 꼭 기억하고 늦기 전에 회개하기를. 인터뷰 말미의 이 말씀이 멋지다. “삶은 강물이다. 계속해서 흘러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머물려고 한다. 왜 그럴까. 집착 때문이다. 머물고자 할 때 늘 두려움이 생긴다. 머물면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죽음이 두려운 까닭도 똑같다.” 존경스럽다. 나는 아무래도 삶을 직선으로 살아야할까 보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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