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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

이가봇의 어머니, 비극의 시대를 통찰하다(1)

by 한종호 2015. 12. 6.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8)

 

이가봇의 어머니, 비극의 시대를 통찰하다(1)

 

1. “이가봇의 어머니.” 우리는 비극적인 시대를 살다간 한 여인, 한 슬픈 어머니 이야기를 하려 한다. 누구보다 예리하게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고 신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여인. 어리석고 탐욕스런 남자들이 제 멋대로 주도하다 결국 망쳐놓은 비극적 상황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바꿀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던, 그러다 몰락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사라져야 했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2. 사무엘상 2장에서 7장까지는, 당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다스리던 막강한 엘리 가문이 어떻게 삽시간에 멸망하고, 에브라임 산지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 한나가 성전에 의탁한 사무엘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성경기자는 엘가나 집안 사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실로를 중심한 제사장 세력을 엘리가 아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끌었음을 일부러 밝힌다.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사무엘상 1:3). 한나가 기도하는 장면에서는 엘리가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당시에 모든 것을 관장했다는 것이다.

 

3. 2장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하는 한나(1-11절), 비행을 저지르는 엘리의 두 아들(12-17절),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무엘과 출산의 복받은 한나(18-21절), 두 아들을 꾸짖는 엘리(22-26절), 엘리에게 멸문지화를 예고하는 하나님의 사람(27-36절)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사무엘과 엘리의 두 아들을 극과 극으로 대비한다. 한나가 사무엘을 성전에 바치는 이야기는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사무엘상 2:11)로 끝난다. 그리고 12-17절은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로 시작해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로 끝난다. 이러한 대비는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더라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의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25-26)에서 절정에 이른다.

 

 

 

 

4. 이렇게 성경기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무엘과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엘리의 두 아들을 대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무엘은 승승장구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엘리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할 것임을 독자들로 하여금 예측하게 한다. 이런 의도를 강하게 보여주는 문학적 구조와 전개로 인해서, 독자들은 엘리를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비난하고 사무엘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엘리와 사무엘,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의 두 아들을 대비하면, 전혀 그렇게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엘리를 비난하고 사무엘을 칭송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5. 성경기자는 사사 엘리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엘리가 나약하고 무능한 지도자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성경기자는 전성기의 엘리가 아닌, 나이 들어 무능하고 무력한 엘리의 모습만을 보여줌으로써, 엘리를 매우 희화화하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 역시 엘리 가문의 몰락과 사무엘의 상승을 대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엘리가 나이 들자 두 아들, 즉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여러 지파들을 다스린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기자는 엘리 아들들이 사사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 몰두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것은 사무엘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다(사무엘상 12:1-5).

 

6. 이 경우 역시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비교하는 것이지만, 엘리와 사무엘을 비교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사무엘이 매우 청렴하게 산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12장 1-5절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사무엘은 청렴 콤플렉스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청렴하게 살았음을 스스로 밝힌 다음, 백성들에게 그것을 확인하고, 그런 다음 주님을 증인 삼아서 다시 자신의 청렴결백을 입증한다. 두 아들이 저지른 비리로 인해,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사무엘 집안을 조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무엘은 “털어서 먼지가 안 난” 것으로 보인다. 엘리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두 아들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7. 그런데 젊은 시절에 명성을 날렸던 사무엘 역시 나이가 들면서 엘리와 별로 다를 바 없게 된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사무엘상 8:1-3). 그리고 사무엘의 두 아들들에 대한 평가는 엘리의 두 아들들에 대한 평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엘리의 두 아들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멸문지화를 예고하고 경고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엘리와 두 아들들을 즉각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후로도 엘리와 두 아들들은 사사직을 계속 유지했다.

 

8. 하지만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경우가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8:4-5). 사무엘이 아닌 두 아들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서 사무엘 가문을 축출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정치체제를 왕정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9. 여기서 보는 대로, 사무엘이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였다 해도, 세월에 장사 없다고, 사무엘 역시 나이 들면서 무력한 노인에 불과했다. 엘리도 그랬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법궤 사건 이후 일이고, 사무엘상 2장의 상황에서는 엘리가 더 나이 들면서 문제가 매우 심각해진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2:22), 엘리가 두 아들들을 구구절절 옳은 말로 나무라는데, 그들은 아버지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런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성경기자는 사무엘의 경건함과 엘리의 두 아들들의 불경함을 대비하고, 그로 인해서 엘리 가문이 몰락할 것을 하나님의 사람과 사무엘을 통해서 확실하게 들려준다.

 

10. 이미 가파른 내리막길을 브레이크 없이 치달리는 엘리 가문을 저주하면서, 하나님은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2:33-34)고 말씀하신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엘리 가문과 이스라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독자들은 엘리 가문이 이런 끔찍한 저주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엘리 가문에 이렇게 욕 얻어먹어도 마땅한 남자들만 있는 게 아니다. 여자들도 있고 아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저주는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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