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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딸들에게 주는 편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by 한종호 2016. 7. 11.

딸들에게 주는 편지(6)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심령이 가난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태복음 5:3).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7장 29절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첫 구절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시나이 산에서 모세로 부터 율법을 받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새로운 계명으로서 산상수훈을 반포하셨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한복음 1:17).

 

‘은혜와 진리(grace and truth)’는 같은 말이다. 은혜 따로 진리 따로가 아니라 은혜가 진리고 진리가 은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리가 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로 이런 자의식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왔는가? 그건 단순한 일차적 생각이다. 종교적 자각(自覺)은 차원이 다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한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 아빠는 왜 날 낳았어?’라고 물을 때 ‘우리가 낳은 게 아니라 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야’라고 대답하듯이. 훗날 그 아이 자신이 그걸 스스로 깨닫게 될 때, 나는 나의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나왔지만 깨닫고 보니 그것이 아닌 것.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세상에 다시 존재하게 된 나다.”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복음’이란 그 기원이 한 사람에 의해 선포되었던 모세의 율법과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모세의 율법이란 일종의 불가피한 수단으로서 인간의 악함(연약함)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복음은 그에 반해 하나님이 그리스도(로고스)를 통해 인간의 악과 연약까지 담당(용서, 없이 하심)하심을 일깨운다.

 

이처럼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은혜와 진리의 가르침인데, 그 처음을 ‘팔복(八福)’이라 불리는 한편의 시로 시작한다. 팔복은 운문으로 된 시요 노래요 전체에 대한 서문이고 선언이다. 거기 또 여덟가지 행복이 열거되고 있지만 그 첫 구절이 가장 의미심장하다. 대개 여러 가지 사례를 열거할 때 첫 번째로 거론되는 것 속에 가장 크고 중대한 대의가 들어있고 그 다음부터는 첫 번 피력한 사례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을까? 심령(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질투는 나의 힘

 

팔십 년대에 기형도(奇亨度, 1960년 3월 13일~1989년 3월 7일)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생전에 그때까진 없었던 독특한 스타일의 시편들로 이름을 얻었었는데 스물아홉 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된 《입속의 검은 잎》이란 시집 속에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가 있다. 이 말은 아마 기형도를 통해서 세상에 나왔지만 그 후 그의 시와는 상관없이 세상 사람들이 자주 써먹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인은 자신이 가진 것이 탄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희망의 내용은 다 질투의 소산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그것은 미친 듯 사랑을 찾아 헤맨 것이었으되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시인의 고백은 깨우침이기도 하고 성찰이기도 하고 반성이기도 하고 그보다는 회한 가득한 슬픔이기도 하다. 그 짧은 삶(29년의)의 무엇을 위하여 나(시인)는 그렇게 많은 마음의 공장들을 지었는가. 여기서 시인이 사용한 ‘공장’이라는 말은 본래 거대하고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군집체를 의미하는 콤플렉스(complex)를 연상 시킨다.

 

기형도는 60년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다른 시에서 자신은 그 나이에 벌써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쓰고 있다. 기형도의 갑작스런 죽음(그는 종로의 어느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진 채 발견 됐다)은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스무 살에 그의 신작이 수록된 문예지들을 복사해 가지고 다니며 읽고 외우고 또 흉내를 내기도 했는데, 군대시절 휴가를 나와 벌써 한 계절이 지나간 다음에야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유고 시집이자 첫 시집인 《입속의 검은 잎》을 읽으며 말할 수 없는 생각에 젖어 고뇌하며 군대로 복귀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의 고백들은 팔십 년대 젊은이들의 가난과 어둠, 욕망과 좌절의 상처와 고통을 대신해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때 우리들(우리사회)은 무엇에 의해, 왜 그토록 많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마음속에 저마다 콤플렉스와 같은 복잡하고 거대한 열망들을 품었던 것일까? 아니 그 힘의 진정한 내용은 무엇일까? 시인이 ‘질투’라고 표현한 것은 정확하고 정당한 것일까? 그는 스물아홉에 1990년대를 맞기 직전 스러졌지만 그 이후를 살아온 우리들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사람의 그러한 질투의 포화상태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헬 조선’이라 표현하는 증오사회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디서 왔나

 

한동안 몸이 아파서 고생을 했다. 그래 그랬는지 고통에 관한 책들을 꽤 읽었다. 그 중에 ‘고통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 속에 원함이 많기 때문’이라는 한 줄이 기억에 남아있다. 원함이 고통을 만든다는 것이다. 원함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기가 막혔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혹은 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혹은 사회와 세상을 향해 마치 사랑을 갈구하듯 갈망하는 어떤 원함이 있을 때, 거기서 고통이 발생한다. 그러면 아무 것도 기대하거나 계획하거나 원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좀 미루어 두고 우선 그대로 밀고 나가 보자.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 만년을 보낸 타히티 섬에서 그린 연작 중에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그림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절친이기도 했던 고갱은 그와 함께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 화가라 불린다. 그들은 당시 탐욕으로 물들어 가는 유럽 문명에서 회의 느끼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유사한 정신으로 문명의 비정성과 부조리 세속성, 속물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고흐가 기독교적 세계 속에서 구원을 찾으려 했다면 고갱은 원시적인 낙원 곧 기독교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고갱은 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가서 원시적 자연과 삶속에 들어갔다. 그는 타히티 섬의 원주민들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했다. 물론 그곳에서도 그가 만난 것은 유럽 제국주의 문명의 탐욕과 타락의 전파였다. 거의 모든 당대의 예술가들이 그랬지만, 그는 왜 기독교 문명이 건설한 유럽에서 구원을 발견치 못했나? 유럽과 타히티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령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세계와 우리들의 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탄허록》에 보니까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에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조사(祖師, 불교의 높은 스승)는 병을 어떻게 고칩니까?” 아픈 나로서는 매우 반갑고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탄허는 이렇게 답했다.

 

병종하래(病從何來)오 병종업생(病從業生)이니라

업종하래(業從何來)오 업종망생(業從妄生)이니라

망종하래(妄從何來)오 망종심생(妄從心生)이니라

심종하래(心從何來)오 심본무생(心本無生)이니라

심본무생(心本無生)이어니 병종하래(病從何來)오.

 

병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병은 업으로부터 왔습니다.

업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업은 망상으로부터 왔습니다.

망상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망상은 마음으로부터 왔습니다.

마음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마음은 본래 나온 곳이 없습니다.

“마음이 본래 나온 곳이 없는데, 병은 어디에서 왔는고?”

 

이렇게 말함(깨우침)으로써 병이 마음에서 뿌리 채 뽑힌다는 것. 조사들은 이런 식으로 병을 고친다고 답했다. 비록 그런 경지까진 이르지 못할지라도 이 내용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해준다. 지금 우리 사회, 사실은 온 세계가 창세기 6장 노아 홍수의 전야처럼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여 ‘땅에 포악함이 가득’하다. 약한 사람, 없는 사람, 선한 사람, 무죄한 사람들이 악인들과 악한 권력자들에 의해서 날마다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런 무례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한 폭력들이 어떻게 생겼나? 가령 어머니의 몸 밖으로 태어나는 어린 아기들을 생각할 때, 본래 그들에게 없던 것으로부터 어떻게 이토록 많은 병(病)이 나왔단 말인가? 오늘의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인가(우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원죄, 이분법, 탐욕

 

성서는 처음부터 이 신앙이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탐욕에 관한, 탐욕에 대한 형벌과 구원에 말씀인 것을 선포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의 타락이란 탐욕의 발생에 의한 새로운 인간조건 곧 인간의 마음의 탄생이 그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탐심이라는 것이 발생하고, 그것을 자기 동일시하고, 그것이 자신의 본질(영혼)과 상관없이 스스로 자아(自我)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때, 거기서부터는 성서에 기록된 모든 문제가 그의 일생에 나타나게 된다. 곧 죄와 형벌과 구원의 문제다.

 

아담과 화와는 뱀(사단)의 유혹에 빠져 금지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딴)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즉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마음이란 다 개별적인 ‘딴 마음’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자기본위의 자기 밖에 위할 줄 모르는 닫힌 정신, 꽂힌 열정이다. 그 내용은 선악(좋고 나쁨)의 이분법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분별심이라고 해야겠지만 그 분별이란 사려 깊고 신중하고 정당하다는 의미에서의 분별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에 의해 변덕을 부리는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나눔이다. 이것을 자기분열이라고 하는데, 이미 분별이 인간의 기본 조건이 돼버렸기 때문에 하나의 분열은 순식간에 수십 가지로 분열된다. 인간이란 그렇게 해서 끝내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도 헤아릴 수 없고 결국에는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치달리게 되어 있다.

 

곧 탐욕이 마음의 근본적인 동력이자 작용이다. 지금 어떤 무식한 기독교인들은 사단이 따로 존재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세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이렇게 말씀 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44).

 

우리를 만들어 온 것은 우리들의 탐욕(욕망)이다. 마음은 곧 탐욕인데 거기서 온갖 불만과 불만족과 그로인한 원한과 모략과 반항과 폭력성이 생기고 자라났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탐욕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말의 의미는 지금 우리를 병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비틀리게 하고 파괴하는 모든 파행적인 사태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스스로의 탐욕의 결과라는 말이다. 부디 이 말을 엉뚱한 곳(자학 혹은 변명 혹은 기독교 도사 같은 무정한 논리)에 가져다 쓰지 말기를! 어떤 부패한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도리어 약한 자를 절망시키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디서든 발견되는 죄와 폭력이다. 가장 시급히 복음을 깨우쳐야할 자들이 있다면 언제나 시급히 저지시켜야할 죄와 폭력의 자아 정체성을(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가진 자들이다.

 

탐심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하고 영적(본질적)인 설명이고 과학적인 해설이다. 특별히 어떤 악인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신의 탐심의 결과로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십계명>에 열 개의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 한마디는 ‘탐내지 마라’는 한 말씀에 다 들어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 했고(골로새서 3:5), 율법의 모든 조항을 뭉뚱그린 상징으로 탐심에 대한 금지(로마서 7:7)를 언급한다.

 

거기엔 영적이고 본질적인 원리가 내재해 있다. 다만 세세한 설명이 없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색하지 않거나 사색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런 근원적인 자기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혹은 그중에 무식한 사람은 다만 ‘탐내지 말라’는 문자에 매달리는 것이다. 무엇이 탐내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몇 가지 탐내지 않는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를 모르는 채 ‘나는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지’ 라고 스스로 흐뭇해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은 가르침을 즐겁고 달게 받아 그 원리에 이른다.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남에게 양보하고 탐내지 말라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도(道,원리)에 이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이것이 유교(儒敎)에서 말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명대(明代)의 사상가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은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을 ‘양지양능(良知良能)’이라고 정의했다. 벌써 깨우친 본성, 이미 가진 재능, 본성의 자각이다. 그래야 거짓이 없는 진실의 지행합일이 누구든지 그의 품성에서 나온다. 양지(良知)는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양반 천민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본래 성인도 범부도 있을 수 없다. 자기에게 양지가 본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사람은 양지를 지닌 사람, 그것을 자각한 사람, 거기를 향해가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양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비록 열 수레의 글을 읽어 박식한 박사라도 끝없이 공자나 주자, 부처나 예수의 말씀이나 인용하고 읊조리는 위선자가 되고 만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일체의 비결’이라는 말이다. 만족과 자족이란 하나님이 주신 상태로 만족한다는 의미다. 있는 그대로 감사하고 자유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평안이고 행복이다. 그러나 거기엔 그럴만한 일체의 비결이 있다. 왜 그러한지, 그것이 가능한지 원리를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왜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상황이 호의적일 때는 감사하고 만족하고 자족하며 탐심을 절제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영락없이 옛날 자기의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만족케 하심을 신뢰 못하는 것이다. 왜 예수께서는 그의 첫 말씀을 ‘심령이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했을까?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간다. 여기서 천국은 미래적이 아니라 현재적이다. 내 심령이 가난하다면 나는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지 못하다면 나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그 곳간이 비었다는 뜻이다. 곳간이란 무엇의 직유인가? 말할 것 없이 마음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첫 조건으로 마음의 빔을 설파하는 것이다. 마음이 비었다! 헤아려 보면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누가 마음이 빈 사람인가? 어느 때 우리는 마음을 비우게 되는가? 무언가를 결국 얻지 못할 때, 해도 해도 안 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즉 포기할 때이다. 우리는 그럴 때 ‘나 마음 비웠어’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 가난해 질 때만 사람은 마음을 비우게 된다. 부자인 사람이 가난한 척을 하면서 하는 비움이란 위선이나 기만이나 허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로 가난했을 때, 그 가난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온전한 상태에서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그럴 때 가난은 피치 못할 쪼들림이 아니다. 쪼들림마저도 하나의 탐심으로 자각하고 그것마저 비운 상태다. 곧 자발적이고 자각적인 존엄한 가난이 된다.(우리는 그렇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서 신적 존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복음의 원리를 생각해야지 ‘그렇다고 어떻게 마음을 실제로 싹 비운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 현실을 고집해선 이 ‘비결(祕訣)’에 도달할 수 없다. 바로 그러한 집착이 탐심인 것을 아는 때에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 앞에 내가 여전히 주가 되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사사로운 이득을 바라고 도를 좇는 사람을 ‘삯군’이라고 했다. 비유하자면 스스로 주인이 못되어 밤낮 일생을 삯받는 직원으로 산다는 말이다. 누구의? 있지도 않은 자기 마음(탐심)의 하수인 말이다.

 

참 사람의 일생

 

고향에 사니 동창들의 부모님의 부음(訃音)에 문상을 가게 된다. 가서는 나는 대개 고인들의 삶과 인생 역정 그리고 최후의 병상 죽음의 순간 등에 관해 묻는다.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일생은 지독한 가난과 가혹한 노동과 무명(無名)과 별것 없는 소득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그 빛 없는 무명(無明) 속에서 생의 희망(빛)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분들은 일생을 그토록 힘겹게 분투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일생의 노고를 생각할 때 진정 하나님께 그들을 받아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보상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 한편 이런 의문이 든다. 그들은 어쩌면 이제부터 인생을 비로소 살아볼 만 해졌는데, 왜 하필 살만해지면 인생이 끝나게 되는 것인가? 인생은 왜 이렇게 배반적인가?

 

마음을 비운다, 만족한다, 자족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욕심이 없다? 아니다. 우리는 더 큰 욕망을 품어야한다. 진정으로 자기를 위하는 욕망, 자기를 완성하는 욕망, 본래 완성이었다는 것, 결국 그 주신 완성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에 현혹됨 없이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 그 상태를 유지해 나가려는 욕망, 모든 사람을 그렇게 보고 볼 수 있는 한결같은 안목을 가지는 욕망. 그러므로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 따위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라. 오로지 자기 안으로 자기를 살펴 하나님의 진리(은혜)의 말씀에 따르는 성(誠, 성실)과 경(敬, 외경)에 이르자. 모든 아프고 눈물 흘리는 모든 존재들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하는 고귀함의 천국에 들어가 살자. 이제부터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다. 본래 충만하신 그리스도가 나의 힘, 이 완성을 향해가는 행복의 힘이 너희의 힘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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