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5)
한국교회의 문둥이들
“그 분은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실 수 없었고, 바깥의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마가복음 1:40-45).
“목자와 맹견이 서로 물어뜯는 동안 목자도 맹견도 양떼를 돌보지 않지. 그래서 양떼의 일부가 밖으로 나가 버리게 돼… 농민이면서도 농민이 아닌 경우… 시민이면서도 시민이 아닌 경우… 문둥이처럼 바깥에서 목숨을 부지해 왔지…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이들이 양떼가 아니지. 양떼밖에 있는 무리야. 그래서 증오하지. 양떼는 모든 문둥이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지… 성 프란체스코가 이 점을 깨닫고는 제일 먼저 문둥이들에게 가서 함께 살기로 결단을 내렸지. 하느님의 백성이란 이런 추방된 무리를 다시 품에 받아들이지 않는 한 변모가 불가능해… 문둥이란 일반적으로 추방의 상징이야. 문둥이라고 할 때 우리는 추방되고, 농촌에서 근거를 잃고, 도시에서 억압받는 부랑자, 빈민, 단순한 사람이란 개념을 떠올리게 되지….”
금세기 가장 훌륭한 종교 문학이요 철학 소설로 꼽히는,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문둥이를 받아들이라! 아니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이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이래 가톨릭 안에서 부단히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다.
(출처: Republic of Korea (http://www.flickr.com/photos/koreanet)
하지만 자랑스러운 중산층 신앙인답게 우리는 솔직히 문둥이가 가까이 오는 것이 역겹다. 그들이 교회에서 얻어가는 은혜야 기껏 미사에 참례해서 영성체하고 죽어 갈 때 병자의 성사를 받는 것이 전부겠지만, 문둥이가 감히 우리와 나란히 무릎을 꿇다니 심사가 매우 불편하다.
마가복음 1장 40-45절을 읽노라면 주님이 문둥이를 낫게 한 사건은 찾아 볼 수 없고 대신, 예수께서 더러운 문둥이를 만져 부정을 탔으니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실 수 없었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는 대목이 걸린다.
가난한 인생과 온갖 고초를 함께 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교회가 ‘사회적 문둥이들’을 어루만져 온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반성하고 싶다. 사회가 쫓아낸 문둥이를 얼싸안는 이와 그 공동체는 항상 교회 밖 외딴 곳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라징거 일행이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과 현실에 참여하는 성직자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경멸하는지 온 인류가 목격해 왔다.
한국교회 상당수 지도층은 일단 사회정의와 인권, 통일과 경제 분배, 노동자의 권익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불순한 이데올로기를 옮기는 문둥이로 취급해 왔다. 만약 그 문둥이가 사제라면 교구의 변두리로 귀양 보내 듯 따돌린다. 교회 언론기관은 그들을 ‘금기 인물’로 낙인찍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 역사의식을 가진 젊은이가 교회와 본당을 떠나 버릴 때, 진보적인 지식인이 교회를 등질 때, 보프 신부처럼 비분강개한 사제가 성직을 버리고 떠날 때 교회의 보수적인 지도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쾌재를 부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 문둥이들은 '가톨릭'이라는 이름마저 로얄티를 물고 써야 한다니 그들은 사실 한국교회에서 이단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윌리암 수사가 내리는 경고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추방된 무리의 원상회복은 권력을 가진 무리의 특권의 제한을 요구하기 때문에, 추방된 상태를 의식하는 추방된 무리는 교리야 어떻든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야만 되는 것이야… 어떤 운동이든 내세우는 신앙은 문제가 아냐. 핵심은 운동이 제공하는 희망이지. 모든 이단은 추방이라는 현실의 깃발을 내걸고 있지. 이단을 파헤쳐 보면 거긴 문둥이가 있어”(《장미의 이름》).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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