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6)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누가복음 11:1-13).
성서에는 한 사람이 처한 시간과 장소마다 가슴에 그 뜻이 새겨지는 구절들이 많다. 평소에 그냥 넘기던 구절이 불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히는 순간이 있다. 사람의 손으로는 그 누구도 빼내 주지 못하는 극한 상황에서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시편 l8:2)라는 부르짖음이 나의 기도가 되고, 몇 번이고 까무러치는 고문을 당하는 자의 입술에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시편 22:l)라는 신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의 심장은 “복수의 하느님,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이 언제까지 만세를 부르리이까?”(시편 94:2-3)라는 물음으로 응어리진다.
그러나 자칫하면 기도는 지극히 음흉한 속임수로 전락하기도 한다. 하느님이 아담을 세워 낙원을 돌보게 하시고 만물의 으뜸으로 세우신 뒤로,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팔 걷고 나서 가로채신 적이 결코 없었다. 인간의 도리와 나라를 펴는 법도는 우리 양심과 성서 그 가운데서도 예언서에 다 밝혀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누가복음 l7:l0) 구하면 받을 것이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하지만 겁에 질리고 일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계산 하에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을 조롱하는 짓이다. “누군가 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주겠지”, “누구 누구가 나서 줘야 하는데…”,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 맞받아 때려 누이시고 칼로써 끝장내어 이 목숨 구하소서”(시편 l7:l3)라는 말 속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역사의 현장을 기피하는 간교가 숨어 있다.
하느님은 살인청부업자가 아니다. 세상에 엄청난 비극이 터질 때마다 걸핏하면 “신은 죽었다!”고 부고장을 돌리며 “우리의 하느님이 어찌되었느냐?”(시편 42:12)고 외칠 때에 하느님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는 것이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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