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23)
이재철 목사, 죄인 중에 괴수인가 율법의 선생인가
-자기 도덕의 우상과 기독교 신앙의 착종-
(디모데전서 1:1-16)
‘성경’ 본문을 들여다보면
<인간에 대한 환대>라는 주제로 연속해 말씀을 나누고 있다. 우리는 ‘성경’ 말씀(메시지)을 ‘영혼의 양식’이라 부른다. 양식이란 먹어서 살고 힘이 생기는 음식이자 치유하는 약(藥)이다. 목사로서 내 설교가 과연 주리고 목마르고 아픈 세상의 음식이자 음료이자 양약이 되는 건지 늘 반성을 하게 된다. 제 처음 계획은 따뜻하고 온정 넘치는 기독교적 화해와 용서의 소박한 식탁을 준비하고 싶었다. 가뜩이나 각박한 생활에 시달린 성도들에게 하루나마 관대한 위로의 말씀으로 쉼과 힘과 용기를 격려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런 게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직면하는 이상한 현실이 있다.
설교자마다 준비과정에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대개 하나의 힌트가 되는 말씀이나 의제를 묵상하며 설교로 숙성시킨다. 그런데 매번 그 영감을 준 ‘성경’ 본문을 들여다보면(심각하게 다른 것은 아닐지라도) 내 의도와 성령의 의지가 다름을 항상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인생행로와 같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다르다. ‘성경’이 나를 지지해주지 않는 건지, 내가 뭔가 ‘성경’을 오해 내지 착각하고 있는 건지. 어떨 땐 정반대의 자기를 부인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성경’을 우리의 필요와 주제와 묵상에 맞출 것인가, 우리를 ‘성경’에 맞출 것인가? 내가 애써 준비한 주제가 아까워 그에 적당한 다른 본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도 결국 마찬가지가 될 공산이 크다. 이상하다. 왜 꼭 그렇게 될까?
지금 교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환대> 시리즈는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심리적 온정적 감동보다는 인간 환대라는 복음 원리의 확인, 인간 현실의 직시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졌다. 내 성향 탓인지 ‘성경’ 본문에 대해 정직해야하는 불가피함일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매번 후자를 의지해 ‘성경’이 이끄는 곳으로 가보기로 한다. 거기 진실하게 우리들 자신을 깨뜨리고 다시 세우는 성령의 의지와 역사가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족들 우상시하면 안 돼?
오늘 본문에서 나에게 처음 영감을 준 부분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라는 바울의 고백이었다. ‘죄인의 두목’, ‘우두머리’, ‘가장 큰 죄인’이라 번역 돼 있다. 모두 죄인과는 어울리지 않게 영광스런 호칭이다. 왜 이 본문을 생각했는가? 어떤 이퇴계(李滉, 1502~1571) 선생만큼이나 저명하고 고매하신 기독교 선생의 훈계 때문이었다. 있는 그대로 정직히 소개하자면 이재철 목사님(백주년기념교회, 이하 존칭 생략)이 목회자 멘토링 집회 질의문답시간에 하신 대답 때문이었다. 강연의 주제는 “교회란 무엇이고 목회란 무엇인가”였다.
(전문은 여기: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331)
한 참석자가 질문을 했다. “오늘 아침 세월호 유가족과 대화 시간이 있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사건 속에서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유가족을 보면서 목사님은 이들의 투쟁과 행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현재 정권이나 사회 풍토를 보시면서 한국교회가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지 조언의 말씀을 구한다.” 세월호 사건의 미해결과 유가족의 거리의 항의가 계속되고 있는 불행한 현실 가운데 기독교인(특히 목회자와 교회)의 바람직한 태도와 조언을 구하는 질문이었다. 질문 자체 속에 대답이 예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였다.
이재철 목사는 “세월호는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했고 지금도 아픔에 동참하고 있는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싶다. 슬픔을 당할 때 그 슬픔에 동참하는 것,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단체든 우상이 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세월호 유족들이 슬픔을 당했기 때문에 그분들의 모든 것이 ‘언터처블(untouchable, 건드릴 수 없는)’, 아무도 터치할 수 없는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모든 분들이 다 슬픔을 이야기하고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달리 말씀드릴 필요가 없고,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을) 조명을 하고자 할 때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충분히 해야 하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을 언터처블한 우상으로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거기에서 깨어 있는다면 우리의 동참,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진선미를 전해 주는 좋은 통로가 되리라 생각한다.”
우선 내 눈에 뜨인 대목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믿음”이라는 인용문이었다. 아마도 로마서 12장 15절을 인용한 듯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웬만한 목사나 기독교인이라면 비교적 어렵지 않게 기억할 이 구절의 인용이 틀렸다. 정확한 문장은 이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왜 그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반대적 평행구를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라’는 동의적 병행구로 바꾸어 말했을까? 더구나 세월호 사건이 기쁜 일이거나 즐거운 일과는 전혀 다른 사건임에도 말이다. 중요치 않은 것 같지만 전체 발언 내용을 생각해볼 때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칼 융이 밝힌 무의식적 역동의 단어연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물론 중요한 건 그런 따위가 아니다.
그는 ‘아픔에는 동감한다. 아픔에 관해서라면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좀 달리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세월호 유가족 단체에 대한 ‘언터처블’(건드릴 수 없는)한 우상시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세월호 유가족은 언터처블한 우상이 되었다는(혹은 그렇게 될까 우려된다는?) 판단이 그의 인식이다. 그 결과 기독교인으로서 아픔과 진상규명 노력에 지지를 보내고 동참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비교적 선명했던 질문자의 요청은 상당히 복잡해져 버렸다. 말하자면 동참을 유보하고 세월호가 우리 사회 안에서 우상시 되고 있느냐 아니냐의 동떨어진 논쟁과 성찰로 초점이 바뀐 것이다.
이재철 목사는 세월호가 우상시 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거기(우상시)에서 깨어 있는다면 우리의 동참,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진선미를 전해 주는 좋은 통로가 되리라 생각한다’는 말 역시 어떻게 하라는 건지 여전히 애매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애매한 채 우상시되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만 남게 되었다. 아마(종교인 중에) 세월호에 대해 ‘우상시’라는 종교 교의적인 용어(교의는 힘이 세다!)로 규정한 사람도 이재철 목사가 처음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의 파장은 컸다.
찬반 혹은 분노와 배신감과 성토를 떠나 내가 느낀 건 착종(錯綜, 이것저것이 뒤섞여 엉클어짐. 이것저것을 섞어 모음)의 곤혹스러움이었다. 맞는 말 같은 데 아닌 것, 아닌 것 같은 데 맞는 것. 그 사이 혼합과 혼동. 그러면서 바로 이 구절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떠올랐다. 물론 질의문답의 현장성을 고려해야 하고, 기사가 그의 말의 진위나 뉘앙스를 어느 정도로 정확히 전달했느냐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엔 오해의 소지가 그다지 크진 않다. 내가 이 성경 구문을 떠올리도록 힌트를 준 부분은 그의 거듭된 이런 전제의 언급이다. “세월호는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했고 지금도 아픔에 동참하고 있는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싶다.”, “모든 분들이 다 슬픔을 이야기하고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달리 말씀드릴 필요가 없고…” 나는 바로 이 유별난 개인적 태도와 관점 및 고백이 기독교 신앙과 자기도덕의 착종의 출발점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떠올리게 했다.
기독교 신앙의 착종
기독교 신앙과 자기도덕이 착종된 혼합과 혼동의 생산자이자 첫 수혜자는 누구보다 이재철 목사 자신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 모든 사람이 동참하고 있는 보편성, 일반성에는 관심이 없다. 거기 동참하고 싶지 않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말을 하고 싶다. 같은 말을 해야한다면 달리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왜 그는 자기는 남들과 달리 말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유난한 태도를 기독교 진리의 입장이라는 물러설 수 없는 철칙의 강고함으로 관철한다. 그러나 세월호 가족 단체가 우상시 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태도가 어떻게 성경적인지 그 근거를 대진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믿고 주장함으로 그것은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것, 곧 진리다.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있다. 세상의 보편적 민심이 세월호에 대해 연민과 슬픔과 분노와 진상규명에 일반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이 우상시 되고 있다는 진단의 근거다. 그래서 그것은 기독교 진리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애굽기 20:4-5)는 십계명(제2계명)에 위배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성경’의 실제 텍스트와 그것을 사용하는 실례의 갭을 본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싶다. 첫째는 그의 강고한 진리관이 과연 기독교 신앙의 진리관인가 하는 문제다. 정녕 그렇다면 그의 그 다음 발언의 내용은 비판자들의 비난과 상관없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의 발언은 한낱 ‘성경’의 진리를 빙자한 자신의 도덕률이 된다. 그리고 그가 선생 노릇을 많이 하는 만큼 그 폐해는 크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환대’가 아니라 까닭도 이유도 없이 ‘인간에 대한 환대’에 대한 한 비틀린 개인의 꼬인 ‘심술’이거나 투기하는 ‘적대’가 되고 만다. 문제는 개인의 심술과 적대로 그치는 게 아니다.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와 동일한 심술과 적대의 우(愚)를 범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걸 우선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해 보려고 했다. 쉽게 말해 바울의 고백은 적절히 자기를 치장하는 겸양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의 복음이 자신의 죄인 됨, 그것도 괴수와 같은 죄인으로서의 실존적 자백으로부터 나온다는 신학적 고백이다. 그것은 다시 그가 타인들을 대하고 관계를 맺고 복음을 전하는 모든 방식, 곧 인간에 대한 전체적 태도에 관계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신학적 태도로부터 야기된 불가피한 현실상황(반대자들에 의한 오해, 고립, 비방, 핍박 등)을 자기 제자인 디모데에게 밝히고 있다. 복음(기쁜 소식)을 전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곤란한 지경에 놓인 자신에 대한 제자를 향한 스승의 과장된(!) 역설적 자랑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몰이해에 대한 불가피한 해명과 이해이기도 하다.
나는 ‘세월호(유족)를 우상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재철 목사의 진리관은 사도 바울의 ‘죄인 중의 괴수’의 고백과는 그 출발 혹은 토대가(표면적으로는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짚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엔 선행되는 조건이 또 따른다. 즉 그의 말처럼 세월호(유가족 단체)는 우상시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혹은 그렇다고 말하고 혹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안이라 할 수도 있다. 이에 관해 우리는 유사한 사례들을 대조해 봄으로써 쉽게 이 논전을 정리해 볼 수 있다.
가령 위안부는 우상시 되었는가? 용산은 우상시 되었는가? 쌍용은 우상시 되었는가? KTX여승무원들은 우상시 되었는가? 천안함의 희생자들은 우상시 되었는가?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은 우상시 되었는가? 4.19희생자들은 우상시 되었는가? 6.25 희생자들은 우상시 되었는가? 4.3 희생자들은 우상시 되었는가? 일제 희생자들은 우상시 되었는가?(그 희생자들은 물론 그 유족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재철 목사가 일일이 그렇게 말했다는 건 아니다. 기독교 진리관의 고수라는 입장에서 유일성의 집중력이 분산될 정도라면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가 말하고 싶은 우상시를 배제한 기독교적 믿음의 집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역시 도무지 애매할 뿐이라는 점은 미루어 두자.)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거론된 세월호(유족도 마찬가지)는 희생자들이라는 점이다. 전원 사망의 실책은 물론 사고에 이른 진상규명, 인양, 여러 의혹들에 대한 조사 등등. 도무지 시원하게 해결 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그들은 희생자들이고 희생당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새 우상시 되는 경계까지 받고 있다. 그것도 시정의 무식하고 무감각한 무뢰한이 아니라 이 시대의 멘토(지도자, 리더, 우두머리)라 불리는 기독교계의 지성에게 말이다. 그들이 우상(시)이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아니 그들이 우상으로 비칠 정도의 비정상적인 현실을 만들어 가고 있는 세력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그들은 우상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살아있는 신적 권력이라 불러야할 것이다. 그 권력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리워야단처럼 자기 몸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오만함이다. 즉 ‘인간에 대한 환대’의 가장 큰 적은 ‘인간에 대한(특히 약자에 대한) 오만함’이다. 무엇보다 이재철 목사가 바로 이 인간에 대한 오만함, 곧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능가하는 오만함을 우상이라 지목하고자 했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우상이 되어가고 있는 건 세월호가 아니라 그 희생을 여전히 희생시키고 있는 살아있는 권력이어야 했다. 그리고 이재철 목사정도라면 그 정도는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 자리에 그를 ‘죄인 중의 대표 선수(괴수)’로 세운 하나님의 그리고 성경적 성령의 의지이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정반대의 입장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의 진리관이 잘못되었다는 점, 그럼으로써(다른 답변들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지만) 거기서 나온 세월호 우상시, 주장 자체가 비틀리고 착종된 결론이라는 점, 나아가 그것이 성경적 진정성을 가지려면 그 반대가 되었어야 했으리라는 점, 그 심리적·신학적 착종의 동기가 오만함이라는 점 등을 성서를 인용해 간접증명해 보고자 했다. 그런데, 내 기획은 다시 성경 본문을 들여다보면서 달라졌다. 디모데전서가 이재철 목사를 향해 쓴 글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가? 아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이재철 목사와 같은 교계의 대표주자에게 직격하는 말씀이었다! 나는 설교를 처음부터 바꾸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본보기는 대단히 실용적 공부가 되리란 생각에 본문이 이끄는 대로 가 보기로 했다.
자기도덕의 우상화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기까지는 사도 바울이 늘 즐겨 사용하는 관용적인 인사말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디모데의 임무(힘써야 할 것)를 환기 시킨다.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어떤 사람들인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다른 교훈이란 분별력이 요구됨을 뜻한다. 분별력이 없으면 다른 교훈에 넘어가 그 초점이 다른 것이 돼버린다. 그 매달리는 다른 초점이 무엇인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 꾸며낸 이야기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관념적인 투쟁)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더러 있으니 그런 일을 금지시키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떤 존경스럽고 대단하다는 일화, 신비로운 이야기, 기적, 그리고 유대인들의 족보 찾기, 족보 이어붙이기 같은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것들은 사는 실제 이야기가 아니다. 쓸데없는 논쟁이나 일으킬 뿐이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의 정신의 집중된 바가 논쟁, 시시비비, 남의 잘못 들쑤시기, 지적하기, 끝없이 그런 관념에 대해 떠들어대기, 아는 체 잘난 척 하기에 있다면, 그를 대면하는 사람들 역시 그 집중된 바가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에 들어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처럼) 논쟁, 시비, 지적, 떠들기, 아는 체 잘난 척 하기에 있게 된다. 그러나 교훈(복음)의 진정한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맑은 양심과 순수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이다.
복음의 목적은 높고 잘난 지식과 강고한 신앙 수호자의 입장을 획득하고 고매한 선생이 되어 타인들의 대표선수가 되는 데 있지 않다. 그런 것은 계속 떠들어대고 아는 체를 하고 시비를 따지며 자기도 살기 어려운 일에 대해 타인을 훈계하는 일이다. 그런 얼치기 도사나 성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도사인 줄 성자인줄 믿고, 그들의 가르침이 진짜 가능한 구원의 가능태일줄 믿고, 계속 거기 매달려 그것을 확대 재생산해 나간다. (가령 세월호와 같은 진정한 현실에는 우상이 될까봐 눈을 감고 말이다.) 그러나 복음의 진정한 목적은 그 반대다. 깨끗한 마음, 맑은 양심, 순수한 믿음 그런 것에서 우러나오는 소박한 사랑의 실천에 있다.
여기서 가장 강조된 것이 무엇이겠나? 소박이다. 한 벌거벗은 인간으로서의 소박함,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 겸손함, 거기서 출발하고 끝나는 단순함, 거기서 행동으로 나오는 사랑. 그것은 개인의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과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즉각적 선행, 곧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그릇 떠주는 것과 같은 작은 연대와 동참이다. 세월호가 우상시 되었느니, 하나님의 진선미니 하는 전도(轉倒)되고 뭔 소린지 모를 그런 꽈배기 정신이 아니다. 거기선 모든 사안이 분명하고 모든 지향이 실천 가능하고 순진한 기쁨이 있다. 세월호 우상시 발언의 심리적·신학적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이 소박과는 얼마나 다른가. 끝없는 신화와 족보에 착념한다는 말이 무엇일지 그 욕망의 너무 멀고 높고 집요함에 아찔함마저 느끼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현실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마치 거기 뭔가 고매하고 깊은 뜻이 있으리라 여긴다. 미상불 높으신 선생님의 그 자신도 연원을 이해 못할 이설(異說)을 통해 자기의 단순한 직관마저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복음의 목적에서 벗어나 길을 잃었다. 쓸데없는 관념토론이나 쓰레기 안 버리기 같이 유치한 캠페인만 일삼고 있다. 그것이 자기모순에서 비롯됐음으로 율법의 교사로 자처하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주장(선생노릇)만 있는 것이다. 진리에 관해서라면 가장 잘 안다고 상담가를 자처하는 율법의 선생, 랍비들인 그들이 말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잘 읽어보면 여기서 바울은 율법의 선생들을 비꼰다. 아까 말한 끝없는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며 계속 말과 논쟁만 일삼고 아는 척과 잘난 체를 통해 자신을 전파 확대해 나가는 자들. 그들이 자기를 치장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게 ‘율법’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런 율법이 필요한 자들이 누구인가? 불법자, 불복종자, 불경건자, 죄인, 거룩하지 않은 자, 아버지 어머니를 죽이는 자, 살인자, 음행자, 남색자, 인신매매범,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들이다. 이해가 가는가? 바울의 이 이중적 논법을. 쉽게 말해 율법의 선생들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이런 자들로 만들고 있다. 자기들은 한없이 높아지고 타자들은 한없이 낮아진다. 자기들이 주장하고 떠들어대는 모든 것을 도덕화(moralize)한다. 그 도덕엔 타자에 대한 사랑이 없다. 자기가 강화된 도덕, 자기가 가미된 자랑, 자기를 높이는 자긍, 타인에 대한 경멸, 타인을 향한 질타와 훈계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타인이란 항상 약한 자들이다. 우리는 왜 그 대상자가 약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이유가 없다. 스스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것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유감이나 반감을 갖지 않는 것이다. 곧 낮은 것에 대한 경멸, 자기에 대한 우상화다.
나는야 죄인 중의 괴수
바울이 비꼬는 율법의 선생들이 사용하는 율법은 성경적 용도가 아니다. 형식만 그렇다. 바울은 진정한 율법이라면 그 용도가 다를 것임을 밝힌다. 문제는 뭔가? 그런 율법을 해당도 안 되는 자들에게 들이댄다는 것이다. 우상시 되는 게 문제라면 세월호 보다는 그들을 여전히 희생시키고 있는 권력자들을 향해야 마땅하다. 그들에게 율법을 들이대야 한다. 그런데 엉뚱한 자들에게 들이댄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이 한 줄이 문제적이다. 그 모든 율법의 선생들과 자신의 차이를 이 한 줄로 요약한다. 그들이 그런 일들로 복음을 혼잡케 할지라도, 이 교훈(복음의 교훈)은 그들이 아닌 나에게 맡기셨다.(내가 맡았다!) 즉 내가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류 행복(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복된 소식이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한다. 디모데야.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한다.
“건전한 교설이란 복되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복음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나는 이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자의식. 디모데에게 강조하는 바. 디모데가 분별해야하고 밝혀나가야 할 지향. 우리는 그런 걸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언젠가 완성시킬 유일한 복음의 길(방식)이라는 점이다. 곧 개인의 소박함, 거기서부터 나오는 순수행동, 거기에 입각한 겸손한 태도. 그것은 저 선생노릇 자아실현 자기강화로 어느덧 기독교 도사요 진리의 성자요 시대의 멘토가 돼버린 미숙하고도 위대한 교사(괴수)들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바울이 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부르는 지 이해할만 하다. 그것은 결코 겸양의 표현이 아니다. 과거에 그랬었다는 말도 아니다. 그는 늘 자기를 생각할 때 마다, 자기를 인식할 때마다, 하나님을 묵상 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죄인 됨, 그것도 가장 중한 죄인의 괴수 같은 실존적 죄인 됨을 발견한다. 거기에 자기 사역의 뿌리가 놓여있고, 자기 복음이 근거한다. 동시에 그 죄인의 괴수됨은 자기로 하여금 남들은 감지도 못할 자긍심이 쏟아져 나올 괴수됨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 중의 나는 대표주자다. 선두주자다. 멘토다. 선생이다. 나를 보라. 바로 이 나를 통해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셨다!’
나는 이재철 목사의 ‘세월호(유족)를 우상시해서는 안 된다’는 훈계를 듣고 이 ‘죄인의 괴수’라는 바울의 역동적 자기고백에 대한 대조적 영감이 떠올랐다. 그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복음주의 기독교계의 대표주자로 통해온 분이다. 동의까진 안 됐지만 그를 기독교계의 이퇴계라 부른 친구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죄인의 수괴’라는 영광스럽고 막중한 제1번 자리에 올라서있다. 목회자들의 멘토로 초빙 받은 이유도 그러한 인정에 의한 것일 테다. 또 듣기로 그는 암투병도 하고 있다. 그러면 뭔가? 그의 고통은 ‘죄인의 수괴’로서 제1의 대표주자로서 만인의 고통을 앓는 것이다. 그의 사다리를 통해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의 본이 되게 하시려는 뜻이라 감히 말하겠다. 그런데 세월호를 우상시해선 안 된다니…. 자기는 올라간 사다리에 죽음과 고통에 몸부림치며 오르려 애쓰는 자들은 올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치우겠다는 뜻인가? 함께 죽어 함께 사는 죄인의 수괴가 아니라 홀로 높아 성자의 왕이 되시려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그가 정말 ‘죄인 중의 수괴’ ‘은혜 받은 자의 대표주자’인지, 만인의 존경을 탐하는 두 얼굴의 선생인지 생각해야겠다. 그러나 그런 건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성경’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한 개인, 한국교회, 그리고 만세의 복음의 근거를 누군가 그리 말한다 대충 그렇겠지 소홀히 생각지 말자.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라 하지만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이런(사방으로 에워싸인) 입장에 서있는가? 과연 모두에게 존경받는 율법의 교사가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로 자기를 자랑할 드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별과 실천 가운데 성경적 제 위치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자기 강화와 자기 확대와 자기자긍의 세태에 어느덧 흡수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오만하고 높은 곳을 지향하기 때문에 낮은 자들을 대해 겸손할 수가 없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의 마음으로 사도 바울의 흉내를 낸 설교라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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