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본 슬픔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26)

 

헤아려본 슬픔


"당나귀야! 이를 악물고 지나가자. 오르지 못할 산이 없고 지나지 못할 강이 없단다." -모옌, 붉은 수수밭.

 

광풍 같은시간들

 

1년이라는 시간의 매듭을 통해 광풍과 같이 치달렸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본다. 충격과 고통과 슬픔들이 다시금 내 몸과 맘에 재생되는 듯하다. 그 공포스럽고 견딜 수 없었던 감각들이 가족들의 내면에 어떤 상흔들을 어떤 방식으로 남겼을지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다. 그토록 가혹하게 우리를 휘몰아쳤던 세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도 위로도 외면한 채 잠잠하기 야속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세상에게 그런 걸 기대할리도, 한다할지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기억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것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일 터이다.


 

 

지난해 5월 28일(목) 아버지(장인)께선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고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 하셨다. 병세가 빠르게 악화돼 당일에 기도삽관 다음날 신장투석 그 다음날 외부혈액순환장치(에크모) 사용에 동의하게 됐다. 그날 비로소 상황이 진정 중대하고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됐다. 청천벽력. 어찌해야할 줄 몰랐다. 5월 31일(일)에 우리 부부는 격리중임을 무릅쓰고 서울까지 갔었지만 의사의 불허로 면회를 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다시 다음날인 6월 1일(월) 어머니를 모시고 재차 상경해 아버지를 뵐 허락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무의식 상태에서 생명유지장치를 통한 생존을 겨우 유지하고 계신 상태였다. 그 정상을 무엇으로 다 기록하랴. 그러나 정신의학자 칼 융은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의식은 작동한다고 말한바 있다. 비록 기계의 도움을 받고는 있었지만 심장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나로선 그때의 상태가 일반적인 혼수상태와는 달랐으리란 생각이 든다.

나는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께 어머니와 가족들의 이름과 안부를 일일이 불러드렸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드리지 못했던 감사와 회한의 말씀들을 생각나는 대로 드렸다. 그리고 나의 믿는바 복음의 소망을 말씀드리고 세례를 드렸다. 마지막으로 통곡 속에 큰 절을 올렸다. 모름지기 그분은 가족들이 밖에 다 있는 줄 아셨을 것이다. 나는 가족들이 아버지와 이별하기 어려워 나만 들어왔노라 말씀을 드렸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그날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밤 11시 23분.

그날 이후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내 자신에게 드는 의구심이 있다. ‘왜 나는 그것이 마지막이라 단정 지었던가?’ 물론 최후가 임박했다는 의사들의 결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마지막 인사가 아니라 다시 일어날 생명의 의지를 마지막으로 보다 강력하게 일깨워드렸더라면, 왜 거기까진 생각도 못했나, 하는 자책에 자주 빠졌다. 그때, 의식은 없으신 채 몸은 통나무처럼 차갑고 딱딱했지만, 가슴과 얼굴을 쓰다듬고 잡은 손을 놓기 까지 가슴으로부터 손끝까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전류 같은 게 찌르르 흐르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어떤 반응, 무슨 말씀을 하시려 했을까?

더욱 안타깝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최후의 시간들을 지켜 드리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과 그 다음을 타인들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장례를 모시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서 저지당해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던 일이 끝내 한스럽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고통스런 일들이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에게 있었다. 격리와 입원, 생사를 넘나들던 고비들, 그것을 고스란히 겪어낸 아내와 어머니와 아이들. 그것은 지은 죄 없는 끝없는 자책과 슬픔이다. 돌아가신 분을 향한 미안함과 그분을 상실한 공허감. 비현실성. 그리고 문득문득 다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고인의 육체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그 모든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인 상황 중에 놀랍게도 우리에게 매순간 담대한 용기를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가 어떻게 풀무불 같은 용광로의 시련을 통과해 냈는지. 그것을 기억할 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조차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보다 굳건하고 튼튼한 생활로, 삶으로 우리를 굳세고 깊어지게 해 주셨다고 믿고 싶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동시에 아버지의 선물이라고. 다만 전혀 차원이 다른. 그분은 이제 세상을 떠나 그런 세계에 속하신 거라고. 충격과 공포와 고통과 슬픔이 우리를 거의 죽도록 몰아친 다음 서서히 회복될 때, 나는 옛날과 동일하며 달라진 차원의 마음과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 자신이 그렇게 되심으로써.

죽음의 모습은 낯설고 섬뜩하게 느껴질 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무서운 것이라 생각지 않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그것을 마지막이라 여기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아버지께서는 삶을 사랑하셨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물론 두려워하셨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자신 안에서 두려움을 다스렸다. “이제 곧 치료를 받으시면 괜찮아 지실 겁니다.” 라고 말씀 드렸을 때 그분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쉽지 않을 거야.”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왜 ‘아닙니다. 진짜 좋아질 겁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분은 자주 모든 것은 ‘팔자’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럴 때 그 말은 비관적 운명론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낙관적 수용을 가리키신 뜻으로 이해된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만큼 내면이 담백하여 굴절된 양심에 의한 죄책감과 심판의 두려움이 적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이런 것. 신앙이란 교리적으로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과 양심에 작용하는 빛과 어둠, 그 굴절에 관한 문제라는 본질이다. 양심에 있어 거리낌이 없고 떳떳하다는 것은 굴절된 죄의식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아는 한 아버지께서는 그런 분이셨다. 물론 그는 우리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치부해 버리셨지만.

고지식한 내 인생, 상도 벌도 주지 마오

기억나는 게 한 가지 있다. 장모님은 목사인 사위 앞에서 그런 노래를 튼다고 타박을 하셨지만, 아버지 차에는 즐겨 들으시던 뽕짝 시디가 몇 장 있었다. 나는 사실 그런 노래를 좋아했다. 그중 가장 좋아하셨던 노래가 <사는 동안>이라는 노래다. 그 가사가 이렇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내 몫만큼 살았습니다.
바람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은 채로
이별 없고 눈물 없는, 그런 세상없겠지마는
그래도 사랑하고, 웃으며 살고 싶은
고지식한 내 인생, 상도 벌도 주지 마오.
.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뿌린 만큼 살으렵니다.
가진 만큼 아는 만큼, 배운 대로 들은 대로
가난 없고 그늘 없는 그런 세상없겠지마는
그래도 사랑하고, 웃으며 살고 싶은
고지식한 내 인생, 상도 벌도 주지 마오.


여기서 제일 좋아하셨던(혹은 내가 가장 좋아한) 가사가 마지막 절이다. ‘고지식한 내 인생에 상도벌도 주지 마오’ 이게 말하자면 그분의 인생철학이고 생사관이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 후서 5:8~10)


인간이 죽음을 향해 줄달음치는 것을 사도 바울은 그것을 지향하는 거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왜 그렇게 질주하는가? 하루빨리 심판대 앞에 나아가 선악간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고자 함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 이 상태가 불안정하니 속히 이 불안상태를 끝내고 온전한 평안의 상태가 되기를 원한다, 그것이 영혼의(인생의 본질적) 소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심판받는 것의 연속인 인생살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게 된다. 그게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다. ‘상도벌도 주지 말라’ 역시 심판과 판단을 벗어난 자유 상태의 소망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됐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율법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다 이 말이다. 그분은 얼핏 굉장한 율법주의에 권위주의자로 비칠 수 있는 분이었지만 실상은 따스한 인정주의에 자유로운 낭만주의자였던 것이다.


 

 이제 다 지나갔으니 무서워하지 말아라


격리병동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나온 이후 가장 괴로웠던 것이 육체의 슬픔이다. 의식하셨든 돌아가셨든 그분이 경험하셨을 육신의 마지막 과정. 그것을 통해 그의 육체는 아주 비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공허감. 그것은 흡사 사라진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새롭게 생겨나 내 몸에 달라붙은 낯설고 이상하고 무섭고 무기력하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비현실이었다. 나는 그 육체의 슬픔과 공허를 체감할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다. 그가 돌아가셨음을 다시 확인할 때마다 새롭게 그 비현실감 때문에 절망했다. 부재한 육체의 슬픔은 많은 곳에서 확인 되곤 했다. 비슷한 연배의 어른들을 볼 때, 비슷한 음성을 듣게 될 때, 내 몸의 팔 다리를 감각할 때,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그의 육체에 대한 상실의 슬픔이 휘몰아쳐왔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집에 돌아와서도 자주 그런 낯설고 비현실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죽음의 예감 같았다. 가만 누워있으면 더 절망스러워 차를 끌고 집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혼자서는 충동적으로 다리 아래로 뛰어들 것 같아, 아이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어느 날. 우리는 안성 근처까지 갔다. 거기 함께 밥 먹으러 다녔던 낯익은 지명들이 나왔다. 그중 ‘안중터널’이라는 터널을 지나가게 됐을 때, 그 비현실이 마침내 현실로 느껴지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안중의 그 식당들.(그분은 우리에게 밥 사주시는 걸 무슨 인생의 낙처럼 즐기셨었다!) 이제 다시는 그분과 함께 식사하러 다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우리가 당한 현실이 너무나 슬프고 비참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을 꿨는데, 바로 그 안중터널을 막 들어가려던 순간이 꿈에서 재현됐다. 슬프고 비참해 울부짖었는데 한쪽 하늘에서 초월적인 모습으로 장인께서 생전에 가장 즐거우실 때 짓던 얼굴로 환하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제 다 지나갔으니 무서워하지도 말아라. 그 터널을 통과해 지나가라.’ 입고 계신 잠바는 나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이었다. 고동색 초겨울 잠바. 무슨 따스한 놀이 공원 같은 꽃이 핀 동산(거기는 추위 따위가 없으리라!)에서 내게 손짓을 하셨다. 꿈에서 깨고 난 후, 그때부터는 최후의 아버지 모습을 생각해도 전혀 무서운 생각이 나지 않고 더 이상 비참한 생각도 들지 않게 됐다. 나는 이런 게 칼 융이 말한 신적이고 예시적인 꿈이라는 걸 알겠다. 그의 따스함, 인간애와 사랑, 자애로움은 돌아가셨다고 사라진 게 아니다. 그에 대한 기억이 내게 살아있는 한 그는 여전히 살아있어 산 우리에게 삶에 대한 사랑과 격려로 영향을 끼치신다.


비록 그분은 혹독한 시련 가운데 외로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나에겐 여전히 자애롭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살아계신 것이다. 오히려 신적인 의미로 우리의 사랑과 기억 속에 함께 하시는 것이다. 육신은 비록 산화되어 유골이 땅에 묻히셨지만, 존재의 신비,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여전히 살아있음을 나는 믿게 된다. 그 살아있음의 약속은 그 어떤 종교적 공로를 통해 획득되는 게 아니라 했다. 본래 우리 영혼의 소망에 따라 값없이 주어지는 은총이라 했다.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고, 죽음이 없는 믿음 안에, 심판의 두려움이 없는, 상도 벌도 주지 않는, 부활의 세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예기치 못한 고통의 시련을 통해 거기에 가까이 가 봄으로써 거울 너머의 그 세계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짐작할 수 있고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나를, 그리고 모든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살아있는 우리를 새롭게 살게 해준다.


언젠가 우리 모두 거기서 만날 때. 이 모든 지상의 의혹과 의문들이 풀릴 것이다. 이 공허와 값없음과 비현실이 그만큼 의미롭고 값지고 뚜렷한 것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 하여 나는 아버지께서 그러셨듯이 내 삶에 계속 충실하고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해야겠다. 이 모든 지상의 슬프고 아픈 이별에 대한 보상으로서 다시 만나 이어갈 기쁨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죽음을 모른 채 질주하는 이 세상은 그런 것에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것을 품고 살아가야겠다. 바라건대 부디 나는 아버지께서 꿈꾸었으나 못다 가셨으리라 생각되는 길을 이어가고 싶다.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 자명하다. 다시 한 번. 지난 2015년 6월 1일 메르스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돌아가신 나의 장인 고(故) 조경현(1944~2015)님을 애도하고 다시 만날 세상을 미리 기념한다. 죽음아, 우리게서 떠나거라. 당나귀야, 이를 악물고 지나가자. 오르지 못할 산이 없고 지나지 못할 강이 없단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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