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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세월호 이후

by 한종호 2016. 4. 17.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세월호 이후

- 세월호 고의침몰의혹사건 2주기를 맞아 -


세월호를 구하다


세월호(고의침몰의혹사건)는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다. 세계가 우리의 충격과 참담에 동참했다. 그러나 여기엔 우리 국민만이 느끼고 있는 어떤 곤혹스러운 진실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것을 부정하는 자들이나 긍정하는 자들이나 분단된 대한민국 남쪽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지하고 있는 어떤 진실. 실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히브리서 11:3)다. 보이는 것 뒤에는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고, 존재할 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실체(實體)가 있다. 그 실체엔 우리 국민의 개성적 특질이라 할 수 있는 고질적 악과 잔인함, 비굴함과 비겁함, 무기력과 무감각, 저속함 같은 데서 발달한 명민함 같은 특성들이 들어있다.


도스또옙스끼는 세계사에 앞장섰던 민족들에게는 자신들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는 민족적 우월감과 높은 자의식으로 연합된 자존감이 있다고 했다. 이 자의식에서 타민족들에 비해 진일보한 국민성과 건강한 태도가 나타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 세계의 한부분에 참여하고 있다는 능동적 태도 내지는 사명감을 가지고 산다. 반면 많은 경우의 사람들은 오로지 탐욕에 의해서만 살아간다. 이것은 가시적이고 사회적인 지위의 문제일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말로 신앙 곧 개인의 의식의(자각)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자각된 신앙과 깜깜한 우상숭배는 어느 시대나 대립돼 왔다.


의식의 문제란 여하한 자각(自覺)되고 깨어나는 것에 관련된다. 참된 신앙인은 늘 자각되고 깨어있어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부부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친구들 친척들 세상살이, 의회 재판소 경찰 주민자치센터 병원 교회 어디서든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 속에, 자각되고 깨어날 때만 우리는 구조화된 속물성과 세속성을 벗은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 순간 영적(본질적)인 의미의 영역(예술적 철학적 상상력)이 열린다. 그렇지 못하면 개개인의 직관과 견해를 발전시키지 못한 채 속물적이고 세속적인 상태에 머물러 속물로 퇴행되어갈 뿐이다. 도스또옙스끼가 말한 선진적인 민족들의 특질이란 비록 겉으론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자각의 영적인 경합이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건강성을 의미한다. 거기선 속물로 퇴행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을 처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분위기가 벌써 그런 무의미한 것들이 삶의 표면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제지할 정도인 것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언 29:18).


세계사에 앞선 민족들만 자의식이 있는 건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스스로 자기를 발전시켜 나가는 건강성이 결여됐을 때, 예를 들면 현재 남북한 사회처럼 꼭 막힌 권력의 윤리가 강제 지배를 하게 될 때, 이상하게도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오히려 방자해진다. 하고 싶은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고 하고픈 말들을 가리지 않고 탐욕이 노골화된다.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자체 속성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게 타락의 양상이다.


우리는 특히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나라 기득권층의 뻔뻔스러움과 후안무치한 잔인성을 보았다. 그것은 가령 ‘세계인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하는 식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세계야 어떻든, 우리는 이게 가능하고 당연하다고 여긴다. 여기는 유럽이 아니고 미국도 아니다.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이게 맞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그런 주장에 부화뇌동하는 많은 사람들, 그들의 적대와 훼방, 그 까닭 없고 이유 없는 약자에 대한 천대와 악의를 우리는 볼 만큼 보았다. 그래서 심지어 ‘세월호의 희생 학생들이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아니라 강남 부유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어떤 고등학교였다면, 그 희생자들이 부유층의 자녀들이었다면 어땠을까’하는 가정을 해보기까지 한다. 우리들의 수준과 비굴함을 드러내기에 이보다 적당한 가정은 없을 것이다. 


세월호가 후진적인 박정권과 남한사회에서 일어난 한 비극적 사건을 넘어 인류적인 의미를 주는 사건으로 기억되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어떤 타락과 싸우고 그것들을 넘어서야할지 생각케 해준다. 그 의미란 역사 속에서 박근혜 정권이나 더 나가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경계보다 더 오래고 확고하게 세계인에게 남을 사건이라는 영속적 의미이다. 세월호에 종북 딱지까지 붙이는 저들의 물불 안 가린 만행이야말로 이 싸움의 숨은 의미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어리석은 저항은 결국 소용없을 것이다. 그들은 남한에, 박근혜 정권 자신과 같은 노후하고 취약한 기득권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일어난, 비극적이고 유감스러운 수많은 사건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이 자주 결론 내리듯 선주와 선원들과 해경의 무능으로 빚어진 해상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 사건을 이름 지으려 한다. 우리는 그러한 비(非)영성, 반(反)성찰의 악의와 그것을 용인하는 타락과 싸워야 한다. 여전히 우리는 세월호를 구해야 한다.





의미를 묻는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1903~1969)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쓰는 게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이 말은 시를 쓰지 말라거나 아직도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을 경멸한다는 말은 아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사람들은 시를 쓸 뿐만이 아니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사업을 하고 심지어 멀쩡한 일상생활을 영위해 왔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의미란 박물관의 역사, 유대인, 그것도 희생된 당사자들과 유가족들의 오랜 후유증인지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그런 망각과 무감각이야 말로 인간의 진정한 화해와 희망인지도 모른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영적이고 의미가 깊은 것 같은, 그런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를 실제로 들추어 본 사람이라면, 정작 성서가 그런 뜬구름 허무주의를 조장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분명하다. 만일 그런 식으로 신의 정의를 흐리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그 저의가 반성서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세월호 같은 충격적 경험을 겪고도 겪지 않은 것처럼 하자는 태도와 같다. 오히려 신께서 주시는 성찰의 기회를 무위로 돌려버리려는 짓이다. 오늘날 우리는 쌍방 간의 화해니 평화니 주장하면서 진실과 정의 자체를 실종시켜 버리려는 교묘한 시도들을 빈번히 본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화해나 평화 비폭력 같은 개념들을 절대시(우상시) 하는 율법적 태도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


우리는 이런 가정을 해볼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통해 가공할 범죄를 막을 수 있다면. 만일 희생자(사망자)나 그 생존 유가족들이 모종의 같은 보상을 합법적으로 상대방에게 돌려줄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이런 걸 비합법적이라고 여기고 있는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그걸 나쁘다고 여길까? 안 된다고 여길까? 비합법이라 여길까? 물론 나중에 법적인 문제로 치환됐지만, 󰡔성서󰡕는 이에 관해 분명히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기본 법칙을 정했다. 모든 법률이란 이 간단한 보상률을 근거로 한다. 만일 현대의 법이 이 근본적인 보상률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무슨 짓을 해도 가능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무의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걸 망각하고 그 천부적 권리와 의무를 상실하고도 그 상실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가 확인코자 하는 것은 물리적 타격을 주는 보복의 정당성 같은 게 아니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형태의 보복(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가령 나치를 단죄하는 독일의 태도를 보라. 그러나 일본이나 국내 친일파의 후예들이 하고 있는 대응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반대하며 극구 막으려 하는지를 알게 된다. 간단한 문제다. 무엇이 그리 어렵고 복잡하겠는가. 따라서 독일과 같은 적절한 보복을 할 수 없을 때에는 그에 맞는 영의 싸움이 필연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싸움이 그러한 보복을 포기한 것일 수는 없다는 점을 언제나 분명히 해야 한다.


세월호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의 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답답함은 그런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한 영원한 철칙을 상실하고 망각한(망각하게 하는) 하나마나한 엉뚱하고 무기력한 조사(弔詞). 우리는 희생자들의 복수를 도무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다. 복수 같은 말은 아예 해당이 안 되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적절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하고 넘치는 보복을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지, 어떤 형태일지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세월호의 의미이고 세월호를 구하는 길이다. 그것이야말로 성서의 교훈이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가 남긴 이러한 보복적 의미를 묻고 있다. 죽은 아벨들이 산 가인들들에게 정의를 묻고 있다.(혹은 양심을) 때문에 아우슈비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금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반드시 인간이 무엇인가에 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철저히.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아우슈비츠와 나치의 만행으로부터, 세월호의 진실로부터, 아주 낱낱이 세부적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철저한 진실의 조사와 진상 규명 가담자의 색출, 지휘명령 실행의 과정, 부역자들에 대한 법적 도덕적 윤리적 단죄와 처벌이 확실히 이루어져야한다. 그것을 우리의 담당된 역사의 의무로 보아야 한다.


의미란 다른 어떤 추상적인 형태의 것이 아니다. 연례행사와 기념식 추모의전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는 반드시 적절한 보복을 통해서만 찾아진다. 이게 영적인 원리다. 물론 이런 생각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전혀 달라질 게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런 일을 겪고도 달라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차피 이 세상은 달라질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인식의 자각을 통해 자신의 세상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람의 인식이야말로 진정 종교적인 것이다. 새로운 삶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요청한다.


시편 9편

-지휘자를 위하여 <아들의 죽음을 위하여>에 맞춘 다윗의 시-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감사는 유효한가


구약성경의 감사(感謝)는 히브리어 ‘야다(yadah)’로 ‘고백하다’는 의미이다. 고백이란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충동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다. 가령 누군가에게 ‘마땅히 감사해야한다’거나 ‘감사할 줄도 모른다’는 말을 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감사의 고백이 나오질 않는 것을. 고백을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


세월호 이후 기독교인들의 기독교적·성서적 싸움에 대해서는 이미 정리해 드렸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세월호 이후 우리 한국 기독교는 이 부분을 애매하게 건너뛰어 버린 느낌이다. 너무나 지당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당혹스러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자면 ‘세월호 이후에도 하나님께 감사가 가능하냐?’하는 것이다. 이 말은 각종 다른 방식으로 변주될 수 있다. ‘세월호 이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가능한가?’ ‘세월호 이후에도 구원의 믿음이 가능한가?’


물론 김삼환 목사같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위해 세월호 학생들을 통해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이재철 목사같이 엉뚱하게도 세월호 유가족이 우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견해라면, 이런 고통과 고뇌어린 질문은 나올 이유가 없다. 그들은 아마 그들 자신의 논리대로라면 그들 자신이 세월호처럼 희생돼 죽는 순간이 온다할지라도 그것이 대한민국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믿도록 놔두자. 우리는 안다. 그들이 그런 담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그 담대함이란 사실 그들이 희생자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뿐이 아니겠는가. 

  

시편 9편을 통해 우리는 아직도 유효한 감사의 이유와 근거를 본다. 이 시에는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아들의 죽음(알 무트라벤)>이란 곡조에 맞춰 부른 다윗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아들의 죽음>이란 노래가 어떤 노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제목만은 남아 이 시가 그 노래와 동일한 곡조로 불렸음을 말해준다. ‘아들의 죽음’이다. 아들의 죽음을 당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다. 그리고 그 첫 줄이 놀랍게도 ‘감사’로 시작된다.





이 시편은 세월호 이후에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내용을 가졌을지, 어떻게 가능한지 가늠하게 해준다. 그것은 저 목적 없는 평화주의, 목적 없는 화해주의, 목적 없는 소통, 목적 없는 착한 척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저 침묵하고 회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라는 기독교를 빙자한 모독의 말, 상처를 후비는 말들을 교정해주고 치유해준다. 그런 것이야말로 사람들을 계속 수탈하고 죽이는 여러 가지 방식 중의 하나이자 기계 중 하나일 뿐이다. 그 방식과 기계 하에서 사람은 자발적 고백이 아닌 거짓된 명분과 인사치레의 감사 외엔 할 수가 없다. 거기서 하나님은 약한자 희생자를 위해 보복해주시는 정의의 하나님, 공의로운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해자든 피해자든 결국엔 현실적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을 들어주고야마는 폭력적인 신이 되고 만다.


제가 온 마음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당신의 모든 놀라운 일들을 전할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의 이름을 찬송할 것입니다.

제 원수들이 뒤로 물러날 때

그들이 당신 앞에서 넘어져서 망하리니

이는 당신께서 제 공의와 제 재판을 행하시니

보좌에 앉으셔서 의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나라들을 꾸짖으시고 악인들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지우셨습니다.

그 원수는 영원토록 완전히 황무하게 되었고

성들은 당신께서 뿌리 뽑으셨으니

그들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셔서

심판을 위하여 그의 보좌를 준비하시고

의로 세상을 심판 하시며

공평하게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호와는 억눌린 자를 위한 피난처시니

환난 때의 피난처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아는 자들이 당신을 의지하리니

이는 당신께서는 여호와 당신을 구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에 사시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가 행하신 일들을 백성 가운데 전하라.

참으로 피흘림을 갚으시는 분이 그들을 기억하시니

온유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

여호와시여 제게 은혜를 베푸십시오.

저를 미워하는 자로부터 당하는 제 괴로움을 보십시오.

죽음의 문들로부터 저를 높이 드시는 분이시여.

그리하여 제가 당신의 모든 찬양을 전하게 하시고

딸 시온의 성문들 안에서 당신의 구원을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나라들은 그들 자신이 만든 구덩이에 빠지고

그들 자신이 숨긴 그물에 그들 자신의 발이 걸린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행하신 심판으로 알려지시나

악인은 자신의 손으로 행한 일로 올무에 걸린다.

악인들이 쉬올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나라들이 쉬올로 돌아가니

참으로 궁핍한 자가 영영 잊혀지지 않고

온유한 자의 희망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사람이 승리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방나라들이 당신 앞에서 심판 받게 하십시오.

여호와시여. 그들에게 두려움을 놓으셔서

이방나라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인간임을 알게 하십시오.


성서에 입각하지 않은 기독교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폐해를 낳고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의 현존하는 악과 그 악에 연대한 자들이 끝없이 성서를 자기들 입장대로 바꾸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대로 가짜가 진짜 그리스도인척을 하며 환영받는 것이다. 성서를 갖다 코앞에 들이밀어도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호 같은 비극적인 사건은 우리들에게 진정 성서와 신앙을 제고해 보게 한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시대와 세태에도 유효한 것일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계시며 구원하시는 생명이 되는가?


이 시는 세월호 이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죄악이 창궐한 절망스런 세상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의롭게 존재할 수 있음을 설명해 준다. 곧 세월호는 아우슈비츠가 그렇듯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적어도 두 가지 대립된 신앙의 모습을 분리시켜 주었다. 그 하나는 의미를 구원하려 싸우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하나님 나라에 대항해 싸우는 다른 나라(이방) 곧 우상과 미신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는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절망에 대해 낱낱이 그분께 호소하고 탄식하며 우리와 함께 절망하고 분노하며 싸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 세월호 이후 많은 유가족들이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실망해 떠났다고 들었다. 참담한 일이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라 권하고 싶다. 오히려 교회의 예배당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기대를 가지라 권하고 싶다. 그것이 어디일까?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박완서 작가의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본래 시인 김현승의 「눈물」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온 자전적 소설이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주인공 여인의 아들은 80년대 대학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그녀의 아들은 적극적인 운동권도 아니었다.) 아들이 죽고 어머니는 민가협이라는 유가족 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며 열사의 어머니요 투사가 된다. 그녀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잃고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그때까지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겨 온 것이 중요해진 것’이라 말한다. 곧 전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는데 이젠 내가 보고 느끼는 내가 더 중요하며, 전엔 장만하는 게 중요했는데 이젠 버리는 게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고백을 성서적 언어로 번역하자면 종말론적 삶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이런 표현들.


“전에는 형체가 있어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그 후엔 아니었어요. 눈에 안 보이는 걸 온종일 쫓은 적도 있어요. 아녜요. 육체와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건 나한테는 너무 거창해요. 장미꽃과 향기의 문제예요. 장미꽃은 저기 있는데 향기는 온 방 안에 있다. 향기는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 걸까? 고작 그 정도예요.”


‘육체와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 장미꽃과 향기의 문제’라는 표현은 그녀의 인식의 변화가 지적인 논쟁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성) 자체에 닿았음을 말해준다. 아들을 잃기 전까지 그녀는 이런 삶의 본질적인 상태에 도달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세계에는 이런 것과 전무하게 살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한 무감각과 무신경의 지배. 거기서 경찰은 경찰, 군인은 군인, 재벌은 재벌, 권력은 권력 이외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통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무신경 무자각을 성찰케 하는 변화에 직면하게 되고, 실제로 그러한 인식 상태에 도달한다. 그 목표는 무엇일까? 혹은 무엇이어야 할까?


소설은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다른 동창을 방문했던 경험으로 이어진다. 동창은 식물인간이 되어 모든 일을 자신이 대신 해 주어야 하는 아들을 향해 ‘이 웬수, 빨리 많이 처먹고 죽어라, 네가 나 먼저 죽어야지 내가 먼저 죽으면 어떡하냐’ 등등의 욕설과 한탄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그 친구를 보며 혀를 찬다. 지옥이 따로 없겠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들을 능숙하게 공기돌 굴리듯 씻기고 먹이는 친구를 보면서 그녀의 욕설 속에 들어있는 아들에 대한 무한한 자애의 모성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비록 식물인간일망정 눈앞에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부러워 그녀는 그동안 참아온 울음에 북받친다. 그리고 그 울음을 통해 그동안 기를 쓰고 꾸며온 투사의 어머니인 자신으로부터 놓여난 해방감을 맛본다.


그녀는 그 후로는 울고 싶을 때 실컷 우는 낙으로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소설의 모든 내용은 전화상의 대화다.) 마지막 장면은 전화기 너머 이 모든 수다를 들어주던 주인공 여인의 손위 형님이 같이 울고 있다는 것으로 끝난다. 아들을 잃은 손아랫동서를 어찌 대해 줄지 몰라, 자신의 아들은 성공하고 멀쩡히 잘 살고 있는 현실에서, 예의상이라도 늘 절벽 같은 침묵과 딱딱하게 꾸민 목소리로 일관해야 했던 형님이 마침내 함께 운다. 울음 속에서 그녀들은 하나가 된다. 인간의 비애에 무슨 회피할 명분이 있는가? 순수한 슬픔의 눈물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공감과 치유의 새로운 장을 열어준다. 인간의 가장 나중 지닌 것은 무엇인가? 눈물이다. 눈물을 넘는 새 나라의 소망은 요한계시록의 전망이 아닌가.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는 이러한 눈물의 서정(抒情)을 얼마나 빨리 메마르게 하고 상실하도록 할 수 있는지 온갖 비열한 경험을 다했다.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관료들과 의원들과 대통령 언론 매체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인간다움의 정서를 빨리 상실하기 위해 상실케 하기 위해 얼마나 기를 쓰는지 환멸스럽고 진저리치도록 깨닫게 해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정말로 그날 304명의 아이들을 눈앞에서 죽도록 손 하나 써보지 못한 기막힌 현실의 현실성으로부터 오는 눈물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성공했다. 정말 철저히 보이는 자취에서 눈물들은 보이지 않도록 감추어졌다. 무엇보다 그 악함과 적의의 사악함을 기억해야한다. 마치 자기들의 명운을 걸고 모든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총동원해 세월호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이 간단한 사회적이고 공적인 복수(의미)를 가로막으려 결심한 듯 싶다. 효과를 발휘해 많은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귀찮고 곤란한 사안으로 변질돼 있기도 하다.


이러한 온전한 서정의 파괴, 감정의 비정상적 전도(轉倒)는 같은 종류의 사건들 속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세월호의 싸움은 이러한 인간다움의 최종 지닌 눈물의 귀중함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싸움이기도 하다. 그 눈물이 우리의 구원이므로 모든 노력을 총동원해 우리도 그 눈물이 함유한 진정한 슬픔의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 벌써, 다시 2주년이다. 20년이 지난들 이 처절한 슬픔이 상쇄되겠는가? 다행히 선거결과에 기대를 걸게 한다. 주께서 당신의 공의를 부지런히 행하시기를 바란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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