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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by 한종호 2016. 3. 18.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49)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너를 사랑하던 자(者)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罪)가 수다(數多)함을 인(因)하여 내가 대적(對敵)의 상(傷)하게 하는 그것으로 너를 상(傷)하게 하며 잔학(殘虐)한 자(者)의 징계(懲戒)하는 그것으로 너를 징계(懲戒) 함이어늘”(예레미야 30:14).

 

청령포를 찾아가네

가느다란 실핏줄이 동맥처럼 변한 길

다시 찾아가네

손바닥 만한 배 잠깐 사이 몸 비틀면

이내 딴 세상

솔숲엔 바람도 그늘도 달지만

너무 일찍 마음이 쇤 한 소년의 탄식과 눈물

가만 듣고 본 관음송이 말해주듯

어디나 송진 같은 응어리

손과 발 굳이 묶지 않아도 꽁꽁 갇힌

지상에서의 유폐

저 멀리 기차가 지나가고

강물 여전히 푸르게 흘러도

어디에도 내려놓지 못한 삶의 무게와 통증

행여 거기 아닐까

잃은 길 찾듯

청령포를 찾네

 

언젠가 청령포를 다녀오며 끼적인 글이다. 예전 같으면 세상을 끝을 향하듯 굽이굽이 실핏줄 같은 길이었을 텐데, 이제는 쭉 쭉 동맥처럼 길이 변했다. 국도도 고속도로와 크게 다르지가 않아 강원도 영월이 아주 멀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야말로 배 한 번 몸을 뒤척였을 뿐인데 지척을 두고 다른 세상이었다. 청령포는 육지 안의 고도(孤島)였다. 굳이 몸을 묶지 않아도 상관없는 유폐된 땅이었다. 아무리 솔밭이 아름다워도, 아무리 강물이 맑게 흘러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고, 찾아갈 사람 없는 곳이었으니까.

 

 

 

주님의 심판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비참하다. 상처는 고칠 수가 없고, 맞은 곳은 치유되지 않는다. 송사를 변호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종기에는 치료약이 없어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다. ‘약이 없다’(13절)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이 모든 일들은 그들 스스로가 불러들인 일이다. 허물이 크고, 죄(罪)가 수다(數多)하기 때문이었다. ‘죄가 수다(數多)’ 하다니, 조용한 찻집을 찾아 차 마시고 발품 팔아 좋은 식당을 찾아 밥 먹으며 수다 떨기를 좋아할 뿐 수다한 죄를 헤아릴 줄 모르는 이 시대에 ‘數多한 罪’라는 말은 느낌이 새롭다.

 

그러고 보면 화도 복도 가만 앉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복도 짓는 것이고, 화도 짓는 것이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상처를 입었다고 부르짖고, 고통이 가시지 않는다고 호소를 한다. 마치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괜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투다.

 

죄와 허물로 인한 주님의 심판 중에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 ‘너를 사랑하던 자(者)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하는 구절이다.

 

그래서 너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너를 잊고, 더 이상 너를 찾아오지 않는다. <새번역>

 

네가 잘나갈 때 어울리던 친구들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너를 등지고 떠났다. 너를 이렇게 때려눕힌 이는 바로 나다. <메시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잊는다는 것,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살아가며 그보다 쓸쓸한 것이 무엇일까?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철저한 고립과 단절, 큰 집이 무슨 소용이 있고 산해진미에 무슨 손이 가겠는가.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잊힌다면 그것은 더욱 쓸쓸한 일이다.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텅 빈 삶, 영락없는 천하의 외톨이, 그저 하나의 부호나 기호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거니와, 주님을 등진 삶의 결국은 사랑하는 이의 발걸음이 모두 끊기는 것,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잊히는 것, 철저한 고립과 쓸쓸함이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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