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1)
묻기 전에 따르고, 따른 뒤에 묻는
“주(主) 여호와여 주(主)께서 내게 은(銀)으로 밭을 사며 증인(證人)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城)은 갈대아인(人)의 손에 붙인바 되었나이다”(예레미야 32:25).
모든 일엔 때가 있다. 어떤 일을 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일을 하기에 적합한 때가 있고, 어떤 일을 삼가기에 적합한 때가 있다. 어떤 일을 해야 할 때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때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밭을 산다. 선지자가 밭을 사는 것 자체가 낯설거니와, 밭을 살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벨론이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시점, 곧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터인데 밭을 사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 밭을 사는 것은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일, 밭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헐값에라도 얼른 팔아 돈이나 식량을 준비하는 일이 현명한 때였다. 더더군다나 예레미야 자신은 지금 왕궁 시위대 뜰 근위대 마당에 갇혀 있지 않은가,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일을 예레미야가 몰랐을까?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 세상 물정에 어둡다 해도 그 정도의 일은 분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밭을 산다. 위기의 상황이라 하여 헐값으로 산 것도 아니었다. 은을 저울에 달아 정확히 값을 치른다. 그리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매매계약서까지 작성을 한다.
밭을 사는 예레미야의 모습 중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대목이 있다.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 하지만 예레미야는 주님이 명하신 일을 모두 마친 뒤에 주님께 질문을 하고 있다. 기도를 통해서 말이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슬프도소이다”(17)로 시작된다. 슬프다는 말 속에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예레미야의 당황스러운 심정이 담겨 있다. 그의 기도가 이어지는데 예레미야가 정말로 아뢰고 싶었던 것은 25절이다.
“주 하나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도성이 이미 바빌로니아 군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저더러 돈을 주고 밭을 사며, 증인들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새번역>
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따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레미야는 주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아무리 이해를 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답답함이 느껴진다.
그럴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밭을 샀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처음부터 주의 말씀을 외면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도를 한 뒤에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주님의 뜻을 거절했던 것도 아니다.(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기도를 드린 후 마음이 편안한 것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밭을 사는 일은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일이었고, 자신 또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지만 예레미야는 그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주님이기에 주님의 명을 따른다. 따른 뒤 기도로써 왜 그렇게 하라 했느냐며 묻고 있다.
그렇게 하는 예레미야의 모습 또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인정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레미야의 믿음이 지극하다. 묻기 전에 따르는 믿음, 따른 뒤에 묻는 그 믿음이.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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