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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잊힌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by 한종호 2016. 3. 24.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0)

 

잊힌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北便) 땅에서 인도(引導)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中)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孕胎)한 여인(女人)과 해산(解産)하는 여인(女人)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引導)함을 입고 간구(懇求)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河水)가의 바른 길로 행(行)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長子)니라”(예레미야 31:8-9).

 

여기 내 마음

가라앉을 만큼 가라앉아

거반

눈물에 닿았으니

오십시오, 주님

비로든

바람으로든

폭풍우로든

무엇으로라도 오십시오

파란 떨림

나는 당신을 예감합니다

 

-어느 날의 기도

 

늘 그럴 수야 없어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라 해도 돌짝밭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지나갈 때가 많지만, 더러더러는 마음에 닿아 마음을 뜨겁게 하기도 하고, 부끄럽게 하기도 하고, 눈물겹게 하기도 한다. 말씀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시간이다.

 

 

 

지금 주님은 뜻밖의 이름을 호명하신다.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을 부르신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에 속한 지파이다. 지금 주님은 북이스라엘을 부르고 계신 것이다.

 

 

남 유다가 BC587년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것에 비해 북이스라엘은 BC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했으니,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어림잡아 셈을 해도 100년이 지난 일이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긴 채 앗시리아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 세월이 100년이 넘은 것이다. 100년이라면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충분히 잊히고 말았을 시간이다. 그들을 기억할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흩어진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관심을 갖는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북이스라엘을 떠올리며 땅 끝에서부터 불러 모으시겠다 하신다. 땅 끝이라는 말은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낸다. 그 어떤 회복이나 변화가 불가능한 곳이다. 그런 점에서 땅 끝에서부터 불러 모으시겠다는 말은 주님이 베푸시는 회복과 구원의 완전함을 나타낸다.(박동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앙을 등진 이들이 있다. 교회를 더나간 이들이 있다. 뿔뿔이 흩어진 그들은 어느새 우리에게서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럴수록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잊었을지 몰라도, 주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들이 돌아올 것을 포기했을지 몰라도 주님은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신다.

 

우리에 양 아흔아홉 마리가 있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목자이다. 주님은 그 한 마리를 ‘찾도록’ 찾으신다. 체면치레로 찾는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라 찾을 때까지 찾으신다. 찾은 뒤에는 화가 나서 질질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 기뻐서 어깨에 메고 온다.

 

땅 끝에서 불러 모으는 이들 중에는 소경과 발을 저는 사람과 임신을 한 여인과 해산을 한 여인이 있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먼 길을 걸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땅 끝에서부터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행여 그들이 지칠까 물이 있는 곳으로 이끄신다. 지치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도록 도우신다. 결국 그들은 울면서 온다. 울지 않을 수가 없다. 자격 없는 이들을 부르시니, 포기했던 이들을 부르시니, 돌아오는 걸음걸음을 지키시니 기쁨과 감격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잊어버린 이들의 이름을 부르신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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