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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덕의 '유대인 이야기'

유대인의 안식일(1)

by 한종호 2015. 1. 22.

최명덕의 '유대인 이야기'(4)

유대인의 안식일(1)

 

이스라엘 유학중의 일이었다. 성공적인 수술로 죽을 고비를 넘긴 아내는 예루살렘의 샤아르 쩨덱 병원에 입원중이었다. 수술 후 며칠이 지난 안식일이었다. 그날도 늘 그러던 것처럼 유대인 간호사가 환자들의 상태를 검진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매일 혼자 들어와 체온과 혈압을 재고 기록하던 간호사가 그날은 이상하게도 아랍인 간호조무사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소와는 달리 혈압과 체온을 직접 기록하지 않고 아랍인 간호조무사에게 받아 적게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록하는 것은 창조 행위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아랍 사람에게 글을 쓰도록 시키는 것이 위선처럼 보였다. 그러나 단순히 위선으로 보기엔 너무나 번거로왔다. 아랍 사람을 따로 고용하여야 하고 그에 따른 비용도 무시못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유대인의 이러한 모습은 종교적 위선에 지나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유대인은 안식일을 그렇게 철저히 지키는가? 유대인의 샤밧(안식일)에 대하여 좀더 깊이 알아보자.

 

모르데카이 카플란은 샤밧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가가 쉬지 않고 계속 붓질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붓질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그리고자 하는 주제가 캔버스에 제대로 표현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삶도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샤밧(안식일)은 붓을 멈추고 우리의 삶을 관조(觀照)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삶이라는 화폭에 새로운 시각으로 신선한 힘을 공급하게 됩니다.

카플란의 샤밧에 대한 위의 문장은 샤밧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사는 동안 겪었던 일들 중 잊기 힘든 경험 가운데 하나가 샤밧이다. 샤밧이 되면 예루살렘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버스도 다니지 않아 학교도 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매주 토요일은 집에 갇혀 있어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주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샤밧에 대해 고마움마저 느끼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히려 삶에 큰 활력이 되기 시작했다. 샤밧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유대인 친구인 다윗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의 초대는 거의 매주 계속되었다. 그의 집에는 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가족이 있었다. 딸 둘에 아들 하나, 샤밧의 다윗의 가정은 언제나 부드럽고 안락하고 편안하고 즐거웠다. 샤밧에 그의 집에 가면 우리 가족도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의 책과의 전쟁도 그날만은 휴전을 선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깝기만 하던 시간들, 그러나 차츰 그것이 필요한 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쉼을 통하여 보다 더 성공적인 유학 생활이 가능해졌다.

이스라엘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간 후에도 토요일 오후 서너 시간은 가능한 한 가족과 함께 보내도록 힘썼다. 덕분에 삭막한 유학 생활에서도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샤밧에서는 교육적으로 배울 것이 많이 있다. 탈무드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브라츨라브의 하시딤 랍비 나흐만은 어느 날 아침 창 밖을 내다보다가 길거리를 달려가는 그의 하인을 보았습니다. 랍비 나흐만은 창을 열고 하임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하임은 안으로 들어왔고, 나흐만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임, 자네 오늘 아침에 하늘을 보았는가?" "아니요, 선생님." "그래? 그럼 자네가 오늘 아침 길거리에서 본 것을 이야기해 보게." "저는 사람들, 마차들, 상인들을 보았습니다. 또 저는 상인들과 농부들이 오가며, 사고 파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임, 50년 후에, 또 100년 후에도 자네가 보는 이 길거리와 시장은 그대로 있을 것이네 그러나 나나 자네는 여기 없을 것이네. 그렇다면 하임, 내가 한 가지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가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녀서 유익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늘 한 번 볼 시간도 없이 말일세."

오늘날의 세계는 랍비 나흐만이 이야기하던 18세기보다 수십 배 더 바쁜 시대다. 현대인은 당시의 하인보다 더더욱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이것은 자기의 삶을 올바로 조명할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유대인의 샤밧은 일상의 일을 떠나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유대인들에게 샤밧은 자기가 이루어 나가는 삶을 뒤로 물러서서 살펴보며 쉬는 시간이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유대인의 삶은 재조명되며 재구성된다. 유대인들의 독특성과 창의력은 그들이 지키는 샤밧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의 아하드 하암은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이 샤밧을 지켰다기보다는 샤밧이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유대인들은 매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이 안식일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샤밧'이라 한다. 이 용어는 '쉬다' 또는 '중지하다'라는 뜻을 그 어근으로 가지고 있다. 이날이 되면 모든 가족들이 일을 멈추고 가정에 모여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관조하며 즐기는 시간을 갖는다. 이날이야말로 완전히 쉴 수 있는 날이다. 한 예로, 돈에 대한 거래가 금지된 날이기에 빚에 쫓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날 하루만으 빚쟁이들의 빚 독촉을 피할 수 있다. 유대인의 샤밧에 대하여 좀더 알아보자.

기원과 유래

어떤 학자들은 유대인의 샤밧이 고대 바벨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 바벨론의 문헌을 보면, 어느 특정한 달의 특정한 날들은 다른 날들과 다르게 구별되어 있다. 곧 일곱째 날, 열넷째 날, 열아홉째 날, 스물한째 날, 스물여덟째 날이 그것이다. 이날들은 달 모양의 변화, 또는 신성한 숫자로 여겨진 칠(7)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다. 열아홉째 날이 다른 날과 구별된 것도 7자와 관련이 있다. 전달의 30일에 19일을 더하면 49일이 되는데, 이는 7을 일곱 번 곱한 것과 같은 숫자이다.

이러한 날에는 금지된 일들이 많았다. 왕은 불에 구운 고기를 금하였다. 옷을 갈아 입지 않았고, 마차를 타는 것도 금하였다. 옷을 갈아 입지 않았고, 마차를 타는 것도 금했다.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것도 금했다. 제사장들은 신탁(神卓)을 금했고, 의사들은 환자를 받지 않았다. 이날들이 부정한 날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있어 이날들은 실수하기 쉬운 날이므로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날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단지 왕, 제사장, 의사들이 이날을 부정한 날로 지켰다. 그러나 유대인의 샤밧이 바벨론에서 유래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논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타당성이 없다.

첫째로, 바벨론에서 이날은 쉬는 날이 아니었다. 단지 고대의 미신적인 믿음과 결부된 부정한 날일 뿐이었다. 이날은 왕, 제사장, 의사가 활동하기에는 부정한 날이었다. 둘째로, 유대의 안식일이 전 국민과 관련된 행사인데 반하여 바벨론에서는 이날이 일부 특권층에만 관련된 날이었다. 셋째로, 유대의 샤밧이 매주 일곱째 날인데 반하여 바벨론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매월 일곱째 날이 아니라 일년 중 어느 특정한 달에만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유대의 샤밧이 바벨론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최명덕/조치원성결교회 목사, 건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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