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3)


아, 진부령!


소똥령 마을에서 어렵게 점심을 먹고 다시 진부령으로 오르는 길, 갑자기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발은 제법 굵었지만 성근 빗줄기, 그러다가 그치겠지 했지만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산 전체는 비로 가득했고, 비와 함께 천둥과 번개가 하늘과 계곡을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비가 쏟아지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 샌가 달리는 차들은 라이트를 켜기 시작하더니 그래도 더욱 빗발이 거세지자 내남없이 비상등을 깜박이며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 모든 일들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얼른 가방에서 우비를 꺼내 입으며 메고 있는 배낭을 덮개로 덮었지만 거센 빗줄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온몸은 금방 비에 다 젖고 말았고, 신발은 구멍 난 장화처럼 물이 흥건했다.


위아래로도 좌우로도 제법 경사가 진 진부령의 도로가 빗물로 가득했다. 그만한 경사라면 당연히 빗물이 아래쪽으로 흘러내려야 할 터인데, 쏟아 붓듯 비가 오니 흘러내릴 새가 없었던 것이다.


개울처럼 변한 도로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자 도로 위에는 아름다운 비꽃이 피어났다. 마치 판화를 찍은 것처럼 아름다운 문양이 피어났다. 빗줄기가 만들어내는 문양을 보며 왜 하필 먹지도 못하는 닭발이 떠올랐을까만, 아름다운 문양이 비로 가득한 도로 위에 가득 피어났다.


황무지에 꽃이 피듯, 그 모습이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상황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도 도로 가득 피어나는 빗줄기의 문양은 대책 없이 아름다웠다.


저 멀리 진부령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 이름이 왜 그리 반갑던지. 먼 길을 걸은 자는 모든 이름이 반가운 것인지도 모른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기 시작한 폭우는 어느 순간부터 우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깨를 때려대는 우박이 제법 따가웠다. 하늘의 안마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깐, 모래 알갱이만 하던 것이 어느새 공깃돌만큼이나 커졌다.


위험하다 여겨져 주변을 살폈더니 마침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물 이동로이지 싶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보였다. 얼른 그 안으로 뛰어가 우박을 피하는데, 바로 앞 수풀 사이에는 금세 우박 알갱이가 소복이 쌓였다.


계곡을 가득 채운 장한 빗줄기,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천둥과 번개, 거기에 더해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날씨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런 악천후를 만난 적은 없었다. 폭우, 천둥과 번개, 우박, 길을 걷는 내겐 어느 것 하나 쉬울 것이 없는데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몸은 다 젖었지만 그래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도로 옆으로 민박집이 눈에 들어왔다. 걷기를 중단하고 민박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여겨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안전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손을 들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진부령을 넘을까 싶기도 했는데, 비에 다 젖은 나를 태워줄 이가 누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이내 마음을 정했다.


그냥 걷자!


그냥 걷기로 했다. 이런 시간이 내 생애 언제 또 찾아오겠는가 싶었다. 어쩌면 내 생애에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악천후,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고스란히 맞으며 그 속을 걸어가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느닷없이 찾아온 악천후가 그렇듯이 그 속을 걷는 일 또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유일한 순간일 것이다.


천둥과 번개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계곡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아주 모르지 않기에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몇 번인가는 바로 머리 위에서 비단 천을 찢듯 번개가 갈라지고, 잠깐 멍해 있는 사이 고막이 찢어질 듯 천둥이 울려대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계곡 어디선가 우르르 쾅쾅 요란한 굉음을 내며 커다란 바윗덩어리들이 굴러 떨어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상황인데도 나는 손엔 스틱을 잡고 있었고, 다 젖은 바지 호주머니 속엔 핸드폰과 보조배터리가 있었다. 서툰 지식에도 번개에게 좋은 표적일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너무 무식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막무가내로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을 곤란하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가기도 했다.


더없이 위험하고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빗속을 그냥 걷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비를 만난 그 날은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이런저런 날씨를 이유로 걷기를 중단한다면 길을 걸을 수가 없을 것이라 여겨졌다.


길을 떠나기 전 마음속으로 했던 대답도 떠올랐다. 비가 오면 비를 맞을 거냐고,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을 두고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맞겠다고, 비를 맞을 터이니 대신 이 땅의 가뭄을 끝내 달라고 대답했었다. 이 땅에 이어지고 있는 가뭄이 지독한 가뭄이라면 장한 비를 맞는 것이 맞겠다 싶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마침 그날은 살아오며 만났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떠올리며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걸으면서 떠올렸던 사람들, 누구의 삶도 쉬운 삶이 없었다. 힘겨운 삶을 떠올리며 기도를 바치기엔 오히려 그런 악천후가 제격이다 싶었다.


진부령에서 만난 시간은 내 생애 가장 심한 악천후였다. 그 시간을 통과하듯 지나자 다른 날씨는 얼마든지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차를 운전하며 폭우 속을 달리는 이들은 폭우 속에 진부령을 오르는 내 모습을 보며 필시 이상한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다. 이상해도 여간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비도 아니고 우박과 천둥과 번개가 온통 난리인데 그 속을 걸어 진부령을 넘다니, 세상에는 참 희한한 사람도 다 있구나 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기 그지없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니!


빗속을 걸어가며 마음속에 찾아든 엉뚱한 생각이 있었다. 혹시 지나가는 어떤 이가 차를 세우고 타겠느냐 묻지 않을까 싶었다. 폭우 속 진부령을 걸어 오르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재난상황에 가까웠다.


혹시라도 누가 물으면 대답해야지, “저는 괜찮아요, 저는 됐으니 그냥 가세요, 하지만 그렇게 물어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환하게 웃으면서 얼마든지 그렇게 대답해야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차는 없었다. 단 한 대도 없었다. 돌발적으로 닥친 위험한 상황을 속히 벗어나려는 듯 비상등을 켠 채 빗속을 내달릴 뿐이었다. 비의 양을 감당하기 힘든 와이퍼만 미친 듯이 돌아가며 차들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다.


만약 내가 폭우 속에서 운전을 하다가 나처럼 빗속을 걸어가는 사람을 만났다면, 나라면 차를 세웠을까 생각을 하다가, 누가 목사 아니랄까, 이어진 생각은 이랬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차를 세우고 거센 빗줄기가 안으로 들이치는 데도 차에 타지 않겠느냐 물을 때, 문득 열려진 차창을 통해 룸미러나 대시보드에 있는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면, 그 십자가의 의미는 얼마나 절실하게 와 닿을까, 싶었다.


이 다음 언제라도 폭우 속을 운전하다가 나처럼 빗속을 걸어가는 사람을 만난다면,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려 이렇게 말을 건네야지, 빗속을 걸어가며 다짐을 한다.


“혹시라도 내가 도와드릴 일이 없나요?”


마침내 진부령 정상, 두 시간 이상 이어지던 악천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러가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산 아랫동네의 일이라는 듯 진부령 정상은 내가 걸어온 시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 젖은 몸과 배낭, 오늘은 어디서 잠을 자야 하나, 그런 걱정을 해야 했지만 내게는 그런 생각을 할 기운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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