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먹함

하루 한 생각(50)

 

먹먹함

 

‘가버나움’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상영하는 곳이 많지 않아 극장을 찾는 수고를 해야 했다.

‘먹먹하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옆에 앉은 여자는 어느 순간부턴가 내내 울면서 영화를 봤다.
여자의 훌쩍임이 화면과 섞여 먹먹함을 더하게 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승강기를 기다릴 때였다.
“뭘 먹을까?”
데이트를 하지 싶은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을 때, 여자가 대답을 했다.
“저녁을 먹는 것도 사치인 것 같아.”

도무지 허구 같아서 먹먹한.
그런데도 허구가 아니라서 더 먹먹한.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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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박사박

하루 한 생각(49)

 

사박사박

 

전남 곡성군 입면 탑동마을,
평생을 흙 일구며 살아오신 할머니들이 우연한 기회에 한글을 배우게 되었다.

한글 공부는 시로 이어졌다.
인적 끊긴지 오래된 묵논처럼 평생을 묵혔으니
툭툭 하는 말이,
슥슥 지나가는 생각들이 모두 시일지 모르겠다 싶은데
역시나 웅숭깊다.

 

사박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영화 '시인할매' 스틸 컷 (사진=이종은 감독 제공) - CBS 노컷뉴스

 

윤금순 할머니(82)가 쓴 <눈>에선 눈이 내린다.

잘 살았다,
잘 견뎠다,
펑펑 내린다. 


내가 골(글) 쓰는 걸
영감한테 자랑하고 십다
여 함 보이소
내 이름 쓴 거 비지예(보이지요)
내 이름은 강금연
칼라카이 영감이 없네

 

서툴게 적은 글을 누군가 시라 하면,
아뿔싸 손사래를 치며 이리 시시한 게 뭔 시라요 할 것 같은 투박한 글이다.
하지만 ‘내 이름은 강금연’에서 울컥 목이 멘다.
그 한 마디 하기까지의 세월이 아뜩하다.


할라카이 대신 칼라카이가 된 건 목젖이 칼칼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둥근 곡선이 날카로운 직선이 된 ‘칼라카이’에선 먼 산을 본다.
팔십오 년 세월이 흐린 하늘 속으로 흐트러진다.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눈이 내릴 만하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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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기

하루 한 생각(46)


물러서기


오병이어의 기적만큼 놀라운 일이 기적 뒤에 이어진다.


기적을 행한 후 예수는 혼자 산으로 물러간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밝힌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복음 6:15)



혼자, 다시 산으로!
놀랍고 환하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일을 꾸미고 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우리네 흔한 삶을 두고, 불에 덴 듯 깜짝 놀라 물러나는 모습!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人生在世間) 

나아가고 물러서기 참으로 어려워라(出處難自爲)’
조선시대 박은의 시 한 구절이 문득 그윽하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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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하루 한 생각(45)


기적


새벽기도회 시간에 마가복음을 읽는다.
조금씩 아껴 읽는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는 장면이었다.


빈 들 해질녘, 우리 삶이 그럴 때가 있다.
주님은 시간을 잊고 말씀을 들은 이들을 먹이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할 때 겹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시험 받은 일이다.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빵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40일 금식 끝이기도 했고, 대번 자신의 존재를 알릴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절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첫 번째 시험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드러낸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그러나 누군가를 살리는 일엔 얼마든지 기적을 행한다.
주저 없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능력인지도 모른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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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愚)

하루 한 생각(44)


우(愚)


내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쉽게 범하는 우(愚)가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기도 하다.


‘접인춘풍, 임기추상’(接人春風 臨己秋霜)’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대하고,

자기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릿발처럼 대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거꾸로 한다.
‘접인추상, 임기춘풍’이다.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당연한 듯이.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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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1)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1 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성찬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성찬의 자리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몹시 근심하는 목소리로 주여 나는 아니지요(Herr, bin ich's)?’라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수난곡 117~19

마태복음 26:23~29

음악듣기 : https://youtu.be/9IWgq3cTick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3. Er antwortete und sprach:

23.대답하여 이르시되

대사

예수

Der mit der Hand mit mir in die Schüssel tauchet, der wird mich verraten.

24. Des Menschen Sohn gehet zwar dahin, wie von ihm geschrieben stehet; doch wehe dem Menschen, durch welchen des Menschen Sohn verraten wird. Es wäre ihm besser, daß derselbige Mensch noch nie geboren wäre.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5. Da antwortete Judas, der ihn verriet, und sprach:

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대사

유다

Bin ich's, Rabbi?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Er sprach zu ihm:

대답하시되

대사

예수

Du sagtest's.

네가 말하였도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6. Da sie aber aßen, nahm Jesus das Brot, dankete und brach's, und gab's den Jüngern und sprach: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대사

예수

26. Nehmet, esset, das ist mein Leib.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7. Und er nahm den Kelch, und dankete gab ihnen den, und sprach:

27.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대사

예수

Trinket alle daraus, 28. das ist mein Blut des neuen Testaments, welches vergossen wird für Viele, zur Vergebung der Sunden. 29. Ich sage euch: Ich werde von nun an nicht mehr von diesem Gewächs des Weinstocks trinken, bis an den Tag, da ich's neu trinken werde mit euch in meines Vaters Reich.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코멘트

소프라노 서창

Wiewohl mein Herz in Tränen schwimmt,

Daß Jesus von uns Abschied nimmt,

So macht mich doch sein Testament erfreut:

Sein Fleisch und Blut, o Kostbarkeit,

Vermacht er mir in meine Hände.

Wie er es auf der Welt mit denen Seinen

Nicht böse können meinen,

So liebt er sie bis an das Ende.

예수께서 떠나신다니 내 마음 눈물 속을 맴돕니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 기억하며

내 마음이 또한 기뻐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

그 고귀함을 내 손에 얹어 주셨으니

주께서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에게 베푸셨던 사랑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 사랑은

세상 끝날 때까지 변함없을 것입니다.

기도

소프라노

아리아

Ich will dir mein Herze schenken,

Senke dich, mein Heil, hinein.

Ich will mich in dir versenken,

Ist dir gleich die Welt zu klein,

Ei, so sollst du mir allein

Mehr als Welt und Himmel sein.

내 마음 당신께 드리오니

나의 구세주시여, 내 마음에도 오시옵소서

나 자신을 당신께 바치오리니

당신께 비하면 세상 모든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온 세상과 하늘보다

당신은 내게 더욱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근심과 당황을 깊이 숨긴 채 잠잠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한창 시끄럽게 예수께 묻고 너니 내니하면서 소란스러울 때, 조용히 눈동자를 굴려가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엽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Bin ich's, Rabbi)?’

 

그가 선택한 계산의 결과는 다른 제자들과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자신을 숨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 끝자락에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랍비여라는 호칭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이 부분을 놓치기 쉽습니다만, 우리말과는 달리 헬라어와 독어 성경에서는 랍비여라는 호칭이 질문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질문에 집중하다가 마지막의 호칭에서 본심이 튀어나온 것이지요. 22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Herr)’로 부르고 있지만 유다는 랍비(선생)’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수를 존경하기만 하고 따르지 않는 신앙인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유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듣자마자 즉흥적으로, 사뭇 거칠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달랐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는 신중했고 말과 행동보다 계산을 먼저 했습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신중한 것이 미덕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따름에 있어서 때로 우리는 투박하고 단순할 필요가 있습니다. 투박하고 단순할지언정 진실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대부분 그런 부류였습니다. 예수께서 기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1958년 리히터 음반의 아쉬움 중의 하나는 유다의 목소리가 육중한 악당의 목소리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은 그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1958년은 아직 선과 악이 명확하게 나뉘던 시대였습니다. 오히려 리히터의 1971년 영상에서 지그문트 님스게른이 들려준 간사하고 날렵한 유다나 1998년 녹음된 헤레베헤 음반(HARMONIA MUNDI 레이블)의 최대한 자신을 숨기고 있는 조심스런 유다도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앞선 예수의 말씀에서 기록된 대로(wie von ihm geschrieben stehet)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Es wäre ihm besser...)은 예수 자신과 유다,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하나님에 의해 강제 된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께서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선택했듯이 유다 역시 그의 가치관과 자잘한 삶의 일상들이 집약되어 예수를 팔아넘기는 일을 운명처럼선택 했던 것입니다.

 

에반겔리스트의 레치타티보로 장면이 이어집니다.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성찬은 이어집니다. 우리말 성경 26절은 그들이 먹을 때에라고만 기록하고 있지만 루터 성경은 여기에 접속사 'aber(그러나)'가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aber'라는 접속사가 다시금 성찬의 식탁을 정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예수와의 거룩한 교제를 막을 수 없습니다. 성찬은 계속 되어야합니다! 

 

 

 

                최후의 만찬, 프릿츠 폰 우데(1886)

 

 

빵을 떼어 주시고 잔을 채우시며 성찬을 베푸시는 예수의 음성은 결연하게 들립니다. 바흐는 성찬의 은혜와 따스한 이미지를 음악에 담았고 지휘자 리히터는 성찬의 거룩함에 초점을 맞춰 이 부분을 굉장히 느리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전인적인 감성의 층을 채우기

 

성찬이 끝나고 코멘트와 기도의 역할을 하는 소프라노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이어집니다. 둘째 시간에 성경 본문에는 없는 부분으로서,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고 기도는 말 그대로 그 반응을 응축시켜 외적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레치타티보는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말에 슬퍼하면서도 아버지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 함께 성찬을 나누겠다는 약속에 기뻐하는 내용의 코멘트 입니다. 또한 주님이 손에 얹어 주신 살과 피를 세상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여기어 손바닥에 새기겠노라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아리아는 코멘트에 이은 기도입니다. 우리도 성찬을 받을 때 마다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마태수난곡의 성찬 장면은 이렇게 우리에게 성찬식의 참된 의미와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내 마음 당신께 드리오니

나의 구세주시여, 내 마음에도 오시옵소서

나 자신을 당신께 바치오리니

당신께 비하면 세상 모든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온 세상과 하늘보다

당신은 내게 더욱 귀한 분입니다.

 

마태수난곡에서 모든 솔로 음악은 우리의 개인적 마음의 감정과 결단과 기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알토의 목소리로, 때로는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때로는 테너나 베이스의 목소리로 불러지는데 이 모든 목소리의 음색은 우리 안에 있는 자아의 여러 감성적 층을 의미합니다.

 

소프라노는 순수한 감성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알토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모성적 사랑을 상징하고, 남성파트인 테너와 베이스는 열정을 나타내는데 테너는 보다 감성적인 횡격막 위의 열정을, 베이스는 보다 본능적인 횡격막 아래의 열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여덟 번째 시간에 만났던 베다니 여인의 노래는 알토였고 곧 만나게 될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통에 반응하는 아리아는 테너가 부릅니다. 마태 수난곡 중반부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분노하며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Gebt mir meinen Jesum wieder!’를 부르는 파트는 베이스이며 순수한 감성과 사랑을 나타내는 오늘의 아리아는 소프라노를 위한 곡입니다.

 

남녀나 개인적 성향을 떠나 우리 안에는 이 모든 감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지능지수처럼 감성지수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고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층의 감성을 느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수난곡의 모든 솔로 음악을 여러분 자신의 노래로 부른다고 상상하시며 가사를 음미하며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음치여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말로 하다가 박자가 틀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이 노래들을 여러분은 노래로 부를 수 있다면 전인적 영적 감수성이 깨어나 여러분들을 더 풍성한 신앙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고난을 묵상하면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수난곡에서 이렇게 밝은 노래가 흘러나올 줄은 모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의 수난 속에서도 밝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 사랑이 지금 내게 있고 세상 무엇보다 귀하고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신실하신 주님께서 하신 다시 오시겠노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스런 소녀가 되어 이 밝은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Ich will dir mein Herze schenken!

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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