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32)

 

아낌만 한 것이 없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마태복음 18:12-13)

 

군대에서 야간 독도법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낮에 이미 나침반과 등고선이 그려진 지도를 들고 지정된 좌표를 찾아가는 훈련을 받았지만, 밤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제법 많은 동료들이 지도를 잘 읽는 나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캄캄한 밤이라 산세나 지형을 읽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방향을 잃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칠 수도 있는 위기를 몇 번씩 넘겼다. 등골에 땀이 흘렀다. 산은 말이 없고, 캄캄한 어둠과 고요는 확고하게 우리를 에워쌌다. 등성이를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면서, 여차 하면 산에서 노숙을 하면 되지 하는 배짱이 생겼다.

 

그런데 저편 어딘가에서 불빛이 하나 반짝이더니 이내 여러 개의 랜턴 불빛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이미 도착 지점에 도착한 다른 동료들이 예정된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우리 팀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별빛을 찾아 탄생하신 구세주를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우리는 깊이 안도했고, 한 점 불빛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깊은지를 절감하며 목표 지점에 당도했다.

 

                                    임종수 그림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18:12)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는 않다. 아흔아홉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기들을 불편하게 만든 그 한 마리를 비난하기 쉽다. 그를 찾기 위해 허비되는 시간과 기회, 비용, 그리고  어쩌면 자기들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위험까지 계산하며 차라리 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있다.

 

변혁을 지향하는 이들 가운데 자기들과 보폭이나 속도가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더 나은 조직 혹은 사회를 만드는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면 그들을 무시하기도 한다. 효율성 혹은 생산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세상의 살풍경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효율성에 목을 매지 않는다. 경쟁력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성이고, 효율성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는 따뜻함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반드시 뒤쳐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을 기다려주고, 찾아나서고, 따뜻하게 반겨줄 수 있어야 한다. 예수 정신은 그 ‘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낌만 한 것이 없다(治人事天 莫若嗇치인사천 막약색)”고 말했다. 그런 아낌을 경험할 때 사납고 무정한 세상을 건널 힘이 우리 속에 유입된다.

 

*기도*

 

하나님, 급하게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느릿느릿 걷고 있으면 화가 납니다. 그가 마치 나를 방해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작 그는 자기 속도대로 가고 있는데 우리의 급한 마음이 그를 부정적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아파 보아야 아픈 사람의 사정을 알고, 길을 잃어보아야 길 잃은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되는 게 우리들입니다. 주님,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를 포기하지 마시고 끝내 찾으시어 기쁨의 잔치에 동참시켜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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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1)

 

달 따러 가자

 

윤석중 선생님이 만든 ‘달 따러 가자’는 모르지 않던 노래였다.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동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지금도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가 있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2절이 있는 줄을 몰랐고, 그랬으니 당연히 2절 가사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저 건너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도 못한다더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 달아 드리자”

 

 

                             쉘 실버스타의 달 따는 그물

 

 

1절은 2절을 위한 배경이었다. 낭만적으로 재미 삼아 달을 따러 가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장대 들고 망태를 멘다고 어찌 달을 따겠는가만, 달을 따러 가자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밤이 되어도 불을 못 켜 바느질도 못하는 순이네를 위해서였다.


2절 가사를 대하는 순간 마음으로 환한 등불 하나가 켜지는 것 같았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따뜻한 기운이 울컥 마음속으로 퍼져갔다. 누군가의 어둠을 밝힐 달을 따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뒷동산에 올라도 좋겠다 싶었다.


둥실 밝은 달이 뜰 때면 달을 따러가자 말하고 싶다. 얼마든지 무동을 타라고, 내가 고개를 숙일 터이니 무동을 타라고, 혼자서 손이 닿지 않으면 또 한 사람 무동을 태우자고, 마침내 장대를 뻗어 달을 따선 망태에 담고 어서어서 순이네로 달려가자고, 순이 엄마 마음껏 바느질을 할 수 있도록 어둔 방 전구 달 듯 달을 달아드리자고.


이 땅 곳곳에 드리워진 어둠을 지울 수 있는 길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모일 때마다 이 노래를 더운 마음으로 불러 노래하는 이 마음마다 달 하나씩 떠올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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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3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3:34-35)

 

과거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아리엘(Ariel, 하나님의 암사자), 하나님의 번제단, 다윗의 도시, 시온, 평화의 도성이라 불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기 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추분이 되면 해가 자기들의 바로 앞에서 떠나 등 뒤로 진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바로 그 도성을 세상의 축이라 여겼고, 태양신 샤하르(Shahar; 일출의 신)와 샬림(Shalim; 일몰의 신)의 거주지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 도시를 ‘샬렘 신의 집’이라는 뜻을 담아 예루샬렘(Jeru-Shalem)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도한 후 ‘샬렘’이 평화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롬’과 혼동되어 예루살렘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이 도시는 지금도 분쟁의 땅으로 남아 있다. 통곡의 벽 앞에서는 유대인들의 눈물 서린 기도소리가 들려오고, 담장 너머 황금돔 사원에서는 기도 시간인 ‘아잔’을 알리는 ‘무에진’의 낭랑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던 자리로부터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14처에는 기독교도들이 행진하며 찬송가를 부른다. 세 종교가 긴장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기에 신성하게 여겨졌다. 성전을 지어 바쳤던 솔로몬도 성전 그 자체를 신성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열왕기상 8:27) 솔로몬은 다만 주의 백성이 어디에서든 성전을 향해 부르짖으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성전과 더불어 형성된 성전 체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말았다. 

 

성전 체제가 사람들의 신심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착취를 일삼고, 권부의 핵심으로 자리잡자 성전 체제는 더 이상 토라가 가장 주목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예언자들이 나서 예루살렘의 죄를 꾸짖었지만 기득권을 누리던 이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언자들을 제거함으로 소리를 잠재우곤 했다. 예수님은 그런 예루살렘을 보고 탄식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누가복음 13:34) 그 결과는 버림받음이다. 

 

거룩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한 법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구원의 방주’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문을 굳게 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루살렘을 보고 탄식하셨던 주님의 그 슬픈 음성을 들어야 한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도처에 밝혀진 붉은색 십자가, 사람들은 과연 그 십자가를 마치 폭풍우 이는 바다에서 등대를 만난 것처럼 따뜻하게 바라볼까? 

 

*기도*

 

하나님,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지고, 굳었던 마음이 봄눈 녹듯 녹아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의 고향인 셈입니다. 우리의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얼크러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장소도 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보고 탄식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본을 버리고 말을 붙드는 성전 체제는 주님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주님,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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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0)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며칠간 기도주간을 보내고 돌아와 갖는 새벽기도회, 오랜만에 나누는 말씀이 새롭다. 마가복음서의 순서를 따라 주어진 본문이 8장 22~26절, 벳세다에서 한 눈먼 사람을 고쳐주시는 이야기였다. 두어 가지 생각을 나눴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고치면 소문이야 금방 멀리 퍼지겠지만, 예수님은 소문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다.

 

 


그를 따로 만나신 것은 그에게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눈을 고치신 후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실 때도 마찬가지다.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신다. 집집마다 들러 소문을 내라 하지 않으신다. 사실 집으로 돌려보내며 마을로는 가지 말라 하시는 것은 모순된 말로 들린다. 집으로 가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니 말이다. 이제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니 옛 존재로 돌아가지 말라는, 옛 시간이나 습관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 아니었을까? 눈을 뜨는 것보다 중요했던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손을 얹으신 후 무엇이 보이느냐 묻자 눈먼 이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가 아니라 도중에 시력을 잃은 것 같다.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을 하신다. 다시 한 번 손을 얹으신다. 그제야 그는 모든 것을 밝히, 똑똑히 보게 된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이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물처럼 보이는 것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것일 뿐 밝히 보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다시 한 번 주님의 손길이 필요했다.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사람을 사물처럼 바라보는 세상, 마치는 기도를 드리는 마음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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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30)

 

아름다운 소문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는 우리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1:6-8)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사랑과 깊은 신뢰 속에서  발화되는 말은 듣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반면 증오와 불신을 드러내는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거친 말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시대에 사는 이들은 누구나 다 피로를 느낀다. 말의 난장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곤 한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1972년에 발표한 소설 『소문의 벽』을 통해,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 진실을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처한 곤경을 그려냈다. 진실을 드러내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시대에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곤고한 일인지 이청준은 자술서를 쓰듯 그리고 있다. 

 

‘소문’은 자유스러운 의사소통이 차단될 때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때로 벽이 되어 사람들을 갈라놓기도 한다. 소문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어떠하든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법이어서, 소문은 산과 들과 계곡을 넘어 바람처럼 달려간다. 소문이든 풍문이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다. 복음의 씨를 뿌렸지만 싹이 온전히 트기도 전에 떠나야 했었기 때문이다. 젖먹이 아이를 두고 먼 길을 떠나온 엄마처럼 늘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궁금해 하고 있던 차에 그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교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6-7)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에서부터 솟아나 존재를 가득 채우는 기쁨이기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시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진리 앞에 마음을 개방한다. 따라서 늘 배우려는 마음을 품고 산다. 저절로 삶의 변화가 따를 수밖에 없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변화된 삶의 이야기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일대에 두루 퍼져나갔다.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선교는 매력의 감염’이다.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는 어떠한가? 

 

*기도*

 

하나님, 말이 넘치는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따뜻하고 소박한 말을 듣기 어려운 시절입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산다면 모르겠지만, 거친 말과 폭력적인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 영혼은 찢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재로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 자체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말 걸기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겸손하지만 당당한 삶으로 주변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도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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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샐각(89)

 

사랑을 한다면

 

화장실 변기 옆에 시집 몇 권이 있다. 변기에 오래 앉아있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라는데, 잠깐 사이 읽는 한 두 편의 시가, 서너 줄의 문장이 마음에 닿을 때가 있다. 시(詩) 또한 마음의 배설(排泄)이라면, 두 배설은 그럴 듯이 어울리는 것이다.

 

변기 옆에 놓여 있는 시집 중의 하나가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이다. 이대흠 시집인데, 구수한 사투리며, 농익은 생각이며,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중의 하나가 ‘성스러운 밤’이었다.

 

 

 

삼십 년 넘게 객지를 떠돌아다니다 갯일에 노가다에 쉰 넘어 제주도에 집 한칸 장만한 홀아비 만수 형님이 칠순의 부모를 모셨는데, 기분이 좋아 술 잔뜩 마시고 새벽녘에 들어오던 날, 그 때까지 도란거리던 노인들이 중늙은이 된 아들놈 잠자리까지 챙겨놔서 젖먹이 때인 듯 살포시 잠이 들었던 아들은 잠결에 무슨 소리인가를 듣게 된다.

 

“꿈결인 듯 아닌 듯 파도 소리가 막 들려오더래요 처음엔 파도가 파도를 베끼는 소린 줄 알았다가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는 소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몸이 몸을 읽어가는 소리였는데요 칠십 줄 넘은 노인들이 한 오십년 읽어왔던 서로의 몸을 다시 읽는 소리였는데요 처음에는 얼굴이 붉어졌는데 가만 생각하니 너무 성스러워 고맙고 고맙더래요 애 낳기에는 늦어버린 허공이 된 몸들이 애를 쓰고 있었는데 그 소리에 더 묻히다 보니 거기서 나오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혼자 노는 게 아니더래요 그래요 그것은 우주가 알 스는 소리였는데요 우주의 숨을 낳고 기르다가 다시 우주로 돌려주는 것이었는데요”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스님의 새벽 독경 소리처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소리, 그 소리를 듣는 아들, 맞다, 그 소리는 우주에 알이 스는 거룩한 소리였다.

 

사랑을 한다면 세월이 무슨 상관일까? 허공이 된 비쩍 마른 몸이 무슨 상관일까? 몸이 몸을 읽는 데는, 여전히 우주에 알이 스는 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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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8)

 길


창밖 동쪽으로 집 한 채를 새로 짓고 있다. 연립주택이지 싶은데 몇 층까지 올리는 것인지 제법 높이 솟아올라, 창 하나를 거반 다 가렸다. 창을 통해 내다볼 수 있었던 하늘이 조금 좁아지게 되었다.

 



저렇게 높은 건물이 서면 달라지는 것은 풍경만은 아닐 것이다. 바람의 길도 달라질 것이다. 바람에게 어디 정해진 길이 따로 있을까만, 이후로 바람은 자연스레 저 건물을 비켜 지나갈 것이다.


새들의 길도 달라질 것이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날아나던 공간을 이제부터는 조심해서 날아야 한다. 익숙한 대로 날다간 벽에 부딪치고 말 일, 더 높이 비상하여 지나든 옆으로 돌아가든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한 듯 어떤 일을 할 때에도, 누군가는 그 일로 인하여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정한 길로 인하여 누군가가 그의 길을 바꿔야 한다면, 그것은 아예 무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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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5)

 

비아 돌로로사

 

정릉교회 현관 앞 주차장 옆으로 작은 마당이 있다. 예배당을 지으며 마을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마당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들과 두 개의 파고라가 설치되어 있어, 규모는 작지만 정겨운 느낌을 준다.

 

사순절을 보내며 마당에 ‘비아 돌로로사’ 14처를 만들기로 했다. 비아 돌로로사는 ‘고난의 길’이란 뜻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신 길을 일컫는 말이다.

 

 

 


공간이 협소한 까닭에 아쉬운 선택을 해야 했다. 터가 넓고 형편이 된다면 각 처소마다 그곳에 알맞는 조형물을 세우고 싶은 일, 14처를 알리는 내용을 코팅하여 파고라 기둥에 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제 저녁이었다. 창을 통해 바라보니 누군가가 파고라 기둥 앞에 서서 거기 붙어 있는 내용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기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있었다. 마당에 만들어 놓은 비아 돌로로사는 허술해도 누군가는 십자가의 길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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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6)

 

가장 위험한 장소

 

아이들의 사망 원인 1위는 ‘금 밟고 죽는 것’이고, 어른들의 사망 원인 1위는 ‘광 팔다가 죽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웃고 말 일을 설명하는 것은 멋쩍은 일이다.

 

광 팔다 죽는 것이야 금방 짐작이 되지만, ‘금 밟고 죽은 것’이 뭘까 갸우뚱할지 모르겠다. 놀이를 하다가 밟은 금을 말한다.

 

 

 

엉뚱하게도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다.


“침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이다. 80% 이상의 사람들이 거기서 사망하니까.”

 

이만한 역설과 통찰이라면 삶이 단순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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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29)

 

향방 없는 방황을 그치라

 

주님께서 이 백성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기를 좋아하고, 어디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나 주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들의 죄악을 징벌하겠다.’(예레미야 14:10)

 

원망하는 것은 소인배의 버릇이라지만 혹독한 현실 속에서 바장이다보면 자기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누군가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생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를 때 낙타처럼 묵묵히 걸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바람과 현실의 간극이 클수록 비애감도 깊어간다. 니체는 자기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고통까지도 자기 삶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이 창조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멋진 말이다. 하지만 자기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성찰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강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온 재난 앞에서 전전긍긍이다. 오랜 가뭄으로 땅은 척박해졌고 먹을거리는 다 떨어졌다. 기력을 잃은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성읍에 가득찼다. 마실 물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귀족들은 물을 구해오라고 종들을 내보내지만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온다. 짐승들도 애써 낳은 새끼를 포기하는 형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 외에는 그 곤경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을 배신했던 자기들의 삶을 용서해달라며 하나님의 선처를 부탁한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지 않으면 그 시련의 시간이 지나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간절히 하소연을 하다 보니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시냐고,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구해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느냐고 묻는다. 물음이지만 이것은 항의이다. 언약을 지키라는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 백성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기를 좋아하고, 어디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나 주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들의 죄악을 징벌하겠다.’”(예레미야 14:10)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방황은 자기 굴레를 벗어나 더 큰 세계에 접속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황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들을 찾아 나섰고 강대국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 분주했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내달리다보면 방향을 잃는 것은 불문가지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징벌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삶이 힘겨울수록 근본을 살펴야 한다. 시련과 고난은 우리 삶을 돌아보고 재조정하라는 일종의 초대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잎사귀를 떨구는 나무처럼 덧정없는 욕망을 덜어내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기도*

 

하나님, 옛사람은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이치를 궁구하며, 이드거니 한 자리에 머물라 가르치지만,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고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우리는 피곤함만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박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깊은 샘에 두레박을 드리우고, 그곳에서 길어낸 샘물로 마른 목을 축일 뿐 아니라,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이웃들에게도 잔을 건네며 살고 싶습니다. 이런 우리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꼭 붙들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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