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큰 사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0)

 

간도 큰 사람

 

 



창밖으로 내다보니 권사님이 일을 하고 있었다. 올 들어 가장 무덥다는 날씨, 장마가 소강상태여서 습도까지 높아 그야말로 후텁지근하기 그지없는 날씨였다. 그런데도 권사님은 교회를 찾아와 소나무 다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경위원회 일을 맡으신 뒤론 시간이 될 때마다 들러 예배당 주변을 가꾸신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 두 개를 챙겨 내려갔다. 권사님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일에 열중이었다. 


“잠깐 쉬었다 하세요.”


손을 멈춘 권사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조경 일을 하는 권사님은 하루 일을 마친 뒤 집에 가서 땀범벅인 옷을 갈아입고 다시 교회로 달려온 것이었다. 지금이 소나무를 다듬기에는 적기라며 예배당 초입에 서 있는 소나무 가지를 다듬는 중이었다. 소나무가 오랜만에 이발을 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권사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했다.


“참 간도 커요.”


무슨 이야긴가 싶어 물었더니, 다시 꽃 이야기였다. 예배당 마당에 심어놓은 꽃을 캐가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민 끝에 파고라 기둥에 CCTV를 설치해 두었다. 누가 캐 가는지를 밝히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카메라가 충분한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권사님의 말에 의하면 여전히 꽃을 캐가는 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전히 좋은 꽃만 골라서 캐간다는 것이다.




간이 너무 커져서 내가 원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 CCTV 다음의 대답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문제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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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뜻은 사라지고

김기석의 새로봄(118)

 

나의 뜻은 사라지고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요한복음 21:15-17)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는 여섯 살부터 온 유럽을 떠돌며 연주를 해야 했다. 그는 마치 곡마단의 동물처럼 왕들 앞에 구경거리로 내세워지고, 아첨을 받고, 선물을 받고, 두루 귀여움을 받았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자신에게 흥미를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천진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나를 사랑하세요? 나를 정말로 사랑하세요?"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할 때만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한다. 그의 연주를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레기날드 링엔바하, <하나님은 음악이시다>, 30쪽)

 

어린 모차르트는 어른들의 대답이 상투적이어도 만족하여 연주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던진 질문은 참 중요하다. 그 느닷없는 질문은 청중들에게 음악을 듣는 자세를 가다듬게 만들었을 것이고, 모차르트는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연주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사랑 없이는 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우리가 그분의 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은 "네가 나를 믿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예수님은 오직 그것만 물으셨다. 이 질문이 참 무겁다. 소설가 이승우는 <사랑의 생애>에서 사랑하는 자는 알아가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 자라고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하는 이는 그 사랑의 대상을 앞으로 알아갈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상투적일 수 없다. 창조적 긴장에 따른 설렘이 그 사랑의 기쁨이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는 일을 성심껏 해낸다. 찬송가 5402절 가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주여 넓으신 은혜 베푸사 나를 받아 주시고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지금은 어긋나는 부분이 많지만 내가 다듬고 또 다듬어 주님의 뜻과 일치하기를 비는 것이다. 이 곡의 원래 가사는 더 극적이다.  “나의 영혼이 확고한 희망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나의 뜻이 당신의 뜻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Let my soul look up with a steadfast hope, And my will be lost in Thine”. 찬송 시인은 나의 뜻당신의 뜻안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내 양 떼를 쳐라명하셨다주님에 대한 사랑은 양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 확인된다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는 "이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말했다. 우리가 맺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현전하신다

 

*기도*

 

하나님, 예수님은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던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지친 그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가없는 사랑은 두려움과 공허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의 마음을 심연에서 끌어올리는 줄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과 마주하고 보니 가슴에 전율이 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낯선 이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따뜻한 사랑으로 맞이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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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고치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9)

 

만년필을 고치며

 

 


만년필을 고치는 곳이 있다는 기사를 우연히 접하고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만년필이라면 대개가 정이 들고 귀한 물건, 어딘가 문제가 있어 못 쓰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겠다 싶었는데, 실은 나 자신에게 그랬다. 못 쓰는 만년필이 두어 개 있었다. 두어 개라 함은 만년필 하나가 잉크를 넣는 필터가 고장이 나 못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인근에서 모임이 있는 날, 조금 일찍 길을 나섰다. 만년필 고치는 곳을 꼼꼼하게 메모해둔 덕분에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찾아갈 수가 있었다. 좁다란 골목에 들어서서 기사에서 본 곳을 찾아가는데, 그새 달라진 상호가 제법이었다.


이쯤이겠다 싶은 건물의 계단을 긴가민가 하는 마음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간판은 없었고, 통로는 좁았고, 분위기는 허술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올랐는데, 그러기를 잘했다. 마침내 작은 사무실 하나를 찾을 수가 있었다.

 

 

 

 


기대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웬일로 왔냐고 묻기에 만년필을 고치러 왔다고 했더니 대뜸 이곳은 만년필 연구소지 만년필을 고치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기사를 보고 왔다 했더니 누가 글을 썼는지 나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지었더니 어디 만년필을 보기나 하자고 했다. 가방에서 세 개의 만년필을 꺼냈다. 하나씩 살펴보더니 처방을 내려주었다. 필터를 고치는 일은 가능하면 포기하라 했는데, 만년필 자체가 짝퉁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만년필은 뚜껑에 문제가 있었는데, 뚜껑 속에 끼어 있는 링을 꺼내 주었다. 집에 가서 링을 만년필 본체에 접착제로 붙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만년필은 그야말로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한 만년필이었다. 책에 서명을 할 때 쓰라고 아이들이 선물로 사 준 만년필인데, 글씨를 쓸 때 처음 촉이 닿는 부분이 제대로 써지지를 않았다. 이름이 명확하게 써지는 대신 희미한 자국이 먼저 남으니 영 아쉬웠던 참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촉을 살핀 주인은 만년필촉을 살피며 몇 번인가 세밀한 페이퍼에 촉을 갈았다. 그러더니 나더러 글씨를 한 번 써보라고 했다. 글씨를 쓰는 모습을 유심히 살핀 그가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각도였고, 하나는 세기였다. 만년필을 잡는 각도를 조금 바꿔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글씨를 너무 세게 눌러 쓰고 있다면서 손으로 힘을 주지 말고 만년필의 무게로만 글씨를 써보라고 했다. 일러준 대로 글씨를 쓰니 그동안 아쉬웠던 문제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신기했다. 고마운 마음으로 수리비를 물었더니, 이곳은 수리하는 곳이 아니라면 굳이 돈을 받으려 하지를 않았다. 정말로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만년필을 써왔지만 그동안 잘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오래된 잘못된 습관이 또 무엇이 있을까, 좁은 계단을 내려올 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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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핀 꽃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8)

 

 소나무에 핀 꽃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 책상에 앉아 다음날 새벽예배 설교를 준비하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녁 무렵 예배당 초입에 선 소나무를 손질하는 권사님께 시원한 물을 전해드리고 왔는데, 권사님의 작업은 그 때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권사님은 아예 나무 위로 올라가서 전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따로 돕는 이가 없어 혼자서 작업을 하는데도 나무 위로 올라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중심을 잡는 것인지 소나무의 정중앙 꼭대기 부근에 자리를 잡고 가지를 치고 있었다.
 
올해 권사님의 나이 일흔셋, 그런데도 소나무 꼭대기에 올라 앉아 가지를 치고 있는 권사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소나무가 꽃을 피운 것처럼 보였다. 소나무 꼭대기에 자리 잡은 권사님의 모습이 소나무의 꽃처럼 보였다. 어쩌면 권사님이 한평생 품었던 믿음이 그렇게 꽃으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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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뗀 아이처럼

김기석의 새로봄(117)

 

젖뗀 아이처럼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131:1-3)

 

나는 시름없고나 이제부터 시름없다/님이 나를 차지하사 나를 맞으셨네/님이 나를 가지셨네 몸도 낯도 다 버리네/내거라곤 다 버렸네 어음”.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이다. 언제 불러도 참 좋다진실한 믿음은 우리를 안식의 세계로 이끈다.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내 거라고 생각하던 것을 버리는 것이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하나님께로 돌아간 영혼의 평안함을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2절)라고 노래하고 있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젖을 먹는 아기를 생각해 보라. 아기의 눈은 엄마의 눈을 응시한다. 엄마도 호수같이 맑은 아기의 눈을 사랑스레 바라본다. 아기와 엄마 사이에 무언의 교감이 일어난다. 아기는 한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어느 결에 살포시 잠에 빠진다. 염려도 근심도 시름도 없다. 참 맛있는 잠이다

 

 

 

시인 김기택은 그런 아기의 잠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시인의 감탄은 계속된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푹 자고 일어난 아기의 청신(淸新)한 얼굴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시편의 시인은 아기들의 그 거룩한 평안함을 자기가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 어머니의 품안에서 말이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첫 번째 비결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오만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안팎에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교만과 오만이다. 교만은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을 뜻하고, 오만은 "젠 체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음"을 뜻한다. 이것보다 더 큰 영혼의 질병이 없다. 그것을 버릴 때 우리 영혼에 자유가 유입된다

 

두 번째 비결은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소극적인 삶처럼 보인다. 우리는 큰 소리에 익숙하다. 세상은 우리에게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지레 자기에 대해서 절망하고 풀이 죽은 채 지내지는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 큰 꿈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남보다 앞서고,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에 남보다 먼저 오르기 위해 자기 발 밑에 누가 밟히고 있는지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전락이 아닌가. 그런 이들은 승자처럼 보여도 실은 패자이다. 인간됨이라는 소명을 저버렸으니 말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무지의 어둠을 물리쳐주십시오.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어둠이 짙게 밴 우리 마음은 심연을 향해 추락을 거듭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마음은 시커멓게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교만함으로 때로는 비굴함으로 상처를 숨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빛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작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크심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늘 빛 고요를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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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단순성

김기석의 새로봄(116)

 

성스러운 단순성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디모데전서 6:6-9)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남이 누릴 몫까지 누리며 사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만족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저질 코미디이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 이 말을 하면 그것은 소중한 충고가 된다. 바울은 가난했다. 굶주린 때도 많았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 생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절대적 결핍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유혹은 자족할 줄 모르는 마음에 깃드는 바이러스와 같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8). 평준화된 욕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누리라고 권하기도 한다. 짧은 인생을 너무 우울하게 살 것 없다고 말한다. 이 유혹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거미줄에 포획된 곤충 신세가 된다.

 

 

 

 

욕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그럴 때 생은 선물이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정확하게 필요한 때에 우리를 찾아온다. 물론 필요 이상의 것은 주시지 않지만 꼭 필요한 것은 결코 빠뜨리지 않으신다.” 교황 요한 23세가 한 말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기에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꼭 필요한 것을 주신다. 그 때와 방법은 물론 그분께 속해 있다. 요한 23세는 풍요를 누리는 이들의 불행을 이렇게 요약한다

 

모자라는 것이 없이 풍요롭게 지내게 될 때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열병에 걸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처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계획들을 세우게 되고, 그때부터 가난하지만 만족스럽게 살던 성스러운 단순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성스러운 단순성을 잃어버릴 때 삶은 복잡해지고 그 아름답고 찬란하던 세상은 무채색으로 변한다. 바울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디모데전서 6:9)라고 말했다.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돈의 영향을 줄이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는 사람이 많다. 노자는 "족함을 아는 사람은 부유하고, 힘써 행하는 자는 뜻이 있다”(도덕경 제33)고 말했다. 생명도, 건강도, 생의 기회도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할 때 우리는 이미 부자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가끔 가난했던 시절을 낭만적으로 회상합니다. 궁핍했던 그 시대가 아름답게 회상되는 것은 현실의 비애로부터 거리를 확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만 삶의 만족감은 한결 줄어들었습니다. 성스러운 단순성을 잃어버린 채 욕망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 눈을 열어 하나님의 광휘가 깃든 장엄한 세상을 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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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살림의 정치

김기석의 새로봄(115)

 

생명 살림의 정치

 

왕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두 여자가 서로, 살아 있는 아이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고, 죽은 아이를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다.’ 왕은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 오게 하였다. 신하들이 칼을 왕 앞으로 가져 오니, 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그러자 살아 있는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 올라, 왕에게 애원하였다. ”제발, 임금님,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안 될 테고, 네 아이도 안 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하고 말하였다. 그 때에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 있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아이를 양보한 저 여자에게 주어라.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열왕기상 3:23-27)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창녀들이다. 그 여인들은 사흘 간격을 두고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그만 자다가 한 여인이 자기 아기를 깔아 죽였다.  그 부주의한 어미는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기를 바꾸자.' 그 여인은 다른 여인이 곤히 잠들어있는 틈을 타서 아기를 바꿔치기 했다. 잠에서 깨어난 진짜 엄마는 곧 사태를 파악했고 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둘은 솔로몬에게 가서 시비를 가려 달라면서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의 아들이고, 죽은 아이는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우겼다”. 누가 보아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은 솔로몬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열왕기상 3:25)

 

왕의 냉정한 선언을 듣고 두 여인은 아주 다른 태도를 보인다. 진짜 엄마는 아기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라서 스스로 아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설사 그와 함께 살 수 없다 해도 아기의 목숨을 끊는 일이 차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반면 가짜 엄마는 어차피, 내 아이도 안 될 테고, 네 아이도 안 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고 말한다. 생명이 우선인가? 산술적 공정이 우선인가

 

 

 

 

 

솔로몬의 지혜로움의 예증으로 선택된 이 이야기가 기록된 곳은 바벨론이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다가 결국은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는 망하고, 국민들은 바벨론에 잡혀간 희망 없는 처지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했다. 그것만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재판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 속에는 이스라엘이 겪어온 참담한 기억과 아울러 미래를 어떻게 기획할 지에 대한 암시가 녹아들어 있다

 

창녀인 두 어머니는 신랑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타락과 죄악의 길을 걷다가 망해버린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상징한다. 이야기꾼은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남과 북으로 갈라져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이 최우선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를 두고 벌이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이득이라도 챙겨보려고 나라를 나누고 가르는 것은 결국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꾼은 전하고 있다.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솔로몬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려는 이가 진짜 엄마라고 선언했다. 오늘의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에게 절실한 것은 당리당략이 아니라 생명 중심적 사고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어리석음을 꾸짖어 주십시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는 반갑게 손을 잡고 따뜻한 웃음을 나누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면 가까웠던 이들에게도 싸늘하게 등을 돌리곤 하는 게 인간의 세태입니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는 동안 우리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 이익이 아니라 신의를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생명을 훼손하면서까지 제 욕망을 채우려 드는 사악한 마음을 우리 속에서 도려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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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순간

김기석의 새로봄(114)

 

아름다운 순간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누가복음 16:10)

 

개울을 건너는데 징검다리가 필요하듯이, 우리가 시간의 강물을 건너는 데도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면 우리의 기억 속에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는 순간들이 있다. 슬픔과 기쁨이 갈마드는 인생이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세월과 더불어 잊혀진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어쩌면 점점 더 생생해지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가슴 뿌듯한 순간일 수도 있고, 남에게 밝히기 어려운 부끄러운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런 기억들은 알게 모르게 삶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쳐서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곤 한다. 

 

 

 

 

콜택시 기사였던 토니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새벽에 시내 어떤 주소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어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마치 40년대 영화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복장에 모자까지 단정히 쓴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방에는 가구가 다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차에 탄 할머니는 주소를 내밀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돌아서 가는 건데요. 할머니.” “괜찮아요. 난 시간이 아주 많아.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난 식구도 없고, 의사선생님 말씀이 이젠 갈 때가 얼마 안 남았다더군요.” 

 

어둠 속에서 할머니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토니는 요금 미터기를 껐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토니와 할머니는 함께 조용한 크리스마스 새벽 거리를 드라이브 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엘리베이터걸로 일하던 빌딩, 처음으로 댄스파티에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 등을 천천히 지났다. 때로는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냥 오랫동안 어둠 속을 쳐다보기도 했다. 어슴프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이제 피곤해, 그만 갑시다”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토니는 몸을 굽혀 할머니를 안아 작별인사를 했다. “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아주 행복했다우.”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노인이 된 토니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난 그날 밤 한참동안을 할머니를 생각하며 돌아다녔지. 그 때 내가 그냥 경적만 몇 번 울리고 떠났다면?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당번이 걸려 심술 난 다른 기사가 가서 할머니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더라면…. 돌이켜보건대 난 내 일생에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해 본적이 없어.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아마 그렇게 중요한 일은 하지 못했을지 몰라.”(2002년 8월 24일자 중앙일보 「삶과 문화」에 실린 장영희 칼럼 중에서)

 

토니가 요금 미터기를 끈 그 순간이야말로 위대한 순간이었다. 자기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불러낸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이윤 동기에서 일하던 그가 한 할머니의 외로움과 쓸쓸함에 공감하는 사람으로 바뀐 그 변화의 순간은 또한 은총의 순간이기도 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누가복음 16:10)

 

*기도*

 

하나님, 큰 일을 꿈꾸면서도 작은 일은 소홀히 하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기독교인들은 온 세상을 사랑하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적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사랑은 누군가와 연루되는 것이고, 수고를 통해서만 입증되는 것임을 잘 압니다. 이제는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순간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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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더운 이발사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7)

 

미더운 이발사

 

강화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그중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이는 이희섭 목사였다. 감신 후배로 그가 오래 전 원주청년관에서 사역할 때 독서모임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그는 강화남지방 선교부 총무를 맡고 있었다.


연합성회는 선교부가 주관하는 행사여서 그는 여러 가지로 많은 수고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강사를 픽업하는 일이었다. 숙소와 집회가 열리는 기도원과는 차로 20여 분 거리, 그는 때마다 나를 태우고 숙소와 기도원을 오갔다. 오는 길에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는 자상함도 보여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이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 그는 미용봉사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변에 있는 요양시설을 찾아가 그곳에 계신 어르신들께 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라오스에 선교를 다녀오며 자신도 뭔가 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미용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미용 가위는 칼보다도 날카로워 손에 상처를 입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전문가에게 서너 달을 배워 봉사를 하는데도 막상 깎고 나면 전문가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머리를 깎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일까? 사람마다 두상이 다르고 원하는 스타일도 다를 것, 한 가지 기술이나 한 가지 스타일만으로 될 일은 아닐 것이었다. 목회일정도 만만하지 않을 텐데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내어 봉사를 한다니, 마음이 훈훈해지는 이야기였다.

 

미용봉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뭉클하게 다가온 이야기가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한 말이었는데, 자신은 누군가의 머리를 깎아주는 시간을 그를 위해 ‘안수’를 하는 시간으로 생각을 한다고 했다.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한 자리에 앉아 꼼짝없이 머리를 맡기는 시간, 머리를 깎으려면 수없이 머리를 만져야 하는데 그런 시간을 안수로 생각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깎는 시간을 단지 머리만 깎는 시간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아름다움을 넘어 거룩함으로 다가왔고, 듬직한 체구의 이 목사가 더욱 미덥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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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 기도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6)

 

마리산 기도원

 

강화남지방 연합성회에 다녀왔다. 강화 길상면과 화도면에 소재한 28개 교회가 한 지방을 이루고 있었다. 강화남지방 연합성회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는데, 집회를 마리산기도원에서 갖는 것이다.


‘마니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기도원 이름은 ‘마리산’, 무슨 차이가 있을까 궁금했다. 설명을 들으니 ‘마니산’(摩尼山)의 ‘니’가 ‘비구니 니’(尼), 그러니 본래의 뜻을 따라 ‘머리’를 뜻하는 ‘마리산’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내용이 기도원 앞에 있는 ‘마리산 성령운동 100주년 기념비’ 설명문에도 담겨 있었다.


“마리산(摩利山)은 마니산(摩尼山)의 본래의 바른 이름으로 강화군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해발 472.1m) 마리산은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과 같이 ‘우두머리 산’이란 뜻으로 우리나라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앙이 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집회는 나흘간 모두 10번을 모였다. 새벽, 낮, 저녁 하루에 3번을 모이는 집회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추세, 그런데도 강화남지방은 꿋꿋하게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어가고 있는 것은 집회의 횟수만이 아니었다.

 

 

 

 


마리산 중턱에 있는 기도원, 저녁이면 몰라도 새벽과 낮에 누가 이곳까지 찾아올까 싶었지만 기우였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교우들이 산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진지하고도 즐겁게 말씀을 경청했다. 집회 기간 내내 이어진 지방 청년들의 찬양 인도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아예 숙소를 정하고 찬양을 인도했는데, 집회 기간에도 청년들의 자리는 개별 의자가 아니라 맨 앞  자리 기도원 바닥이었다. 그런 청년들의 모습 또한 오랜만에 대하는 모습으로 미더웠다.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주 청년들에게 눈이 갔다.

 

강화남지방은 오래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마리산은 1915년 당시 내리교회 권사였던 정윤화 사역자가 장봉도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부흥회의 마지막 예배를 마리산 정상에 올라 드린 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부흥회의 마지막 예배를 마리산 정상에서 드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밤새 기도하다가 큰 은혜를 경험했던 것이다.


시간이 될 때마다 불철주야로 기도하던 성도들에게 마리산 정상은 잠시 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알고 선원교회 신흥군 장로(의사)가 사재를 털어서 여러 성도들과 함께 산 아래에서 돌을 가져다가 기도처를 지었는데, 그것이 ‘거룩한 은혜를 사모한다’는 뜻의 ‘성모관’(聖慕舘)이었던 것이다.

 

매번 산 위로 올라오는 일이 번거롭지 않을까 했지만, 교우들의 모습 속에서 그런 마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소중한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은혜를 사모하여 산 위로 오르는 교우들, 말씀을 전하러 간 내게는 그런 모습 자체가 큰 은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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