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9)
만년필을 고치며
만년필을 고치는 곳이 있다는 기사를 우연히 접하고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만년필이라면 대개가 정이 들고 귀한 물건, 어딘가 문제가 있어 못 쓰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겠다 싶었는데, 실은 나 자신에게 그랬다. 못 쓰는 만년필이 두어 개 있었다. 두어 개라 함은 만년필 하나가 잉크를 넣는 필터가 고장이 나 못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인근에서 모임이 있는 날, 조금 일찍 길을 나섰다. 만년필 고치는 곳을 꼼꼼하게 메모해둔 덕분에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찾아갈 수가 있었다. 좁다란 골목에 들어서서 기사에서 본 곳을 찾아가는데, 그새 달라진 상호가 제법이었다.
이쯤이겠다 싶은 건물의 계단을 긴가민가 하는 마음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간판은 없었고, 통로는 좁았고, 분위기는 허술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올랐는데, 그러기를 잘했다. 마침내 작은 사무실 하나를 찾을 수가 있었다.
기대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웬일로 왔냐고 묻기에 만년필을 고치러 왔다고 했더니 대뜸 이곳은 만년필 연구소지 만년필을 고치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기사를 보고 왔다 했더니 누가 글을 썼는지 나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지었더니 어디 만년필을 보기나 하자고 했다. 가방에서 세 개의 만년필을 꺼냈다. 하나씩 살펴보더니 처방을 내려주었다. 필터를 고치는 일은 가능하면 포기하라 했는데, 만년필 자체가 짝퉁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만년필은 뚜껑에 문제가 있었는데, 뚜껑 속에 끼어 있는 링을 꺼내 주었다. 집에 가서 링을 만년필 본체에 접착제로 붙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만년필은 그야말로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한 만년필이었다. 책에 서명을 할 때 쓰라고 아이들이 선물로 사 준 만년필인데, 글씨를 쓸 때 처음 촉이 닿는 부분이 제대로 써지지를 않았다. 이름이 명확하게 써지는 대신 희미한 자국이 먼저 남으니 영 아쉬웠던 참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촉을 살핀 주인은 만년필촉을 살피며 몇 번인가 세밀한 페이퍼에 촉을 갈았다. 그러더니 나더러 글씨를 한 번 써보라고 했다. 글씨를 쓰는 모습을 유심히 살핀 그가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각도였고, 하나는 세기였다. 만년필을 잡는 각도를 조금 바꿔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글씨를 너무 세게 눌러 쓰고 있다면서 손으로 힘을 주지 말고 만년필의 무게로만 글씨를 써보라고 했다. 일러준 대로 글씨를 쓰니 그동안 아쉬웠던 문제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신기했다. 고마운 마음으로 수리비를 물었더니, 이곳은 수리하는 곳이 아니라면 굳이 돈을 받으려 하지를 않았다. 정말로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만년필을 써왔지만 그동안 잘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오래된 잘못된 습관이 또 무엇이 있을까, 좁은 계단을 내려올 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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