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는 사람

김기석의 새로봄(130)

 

길을 찾는 사람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립보서 3:7-11)

 

바울은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 영적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느라 늘 노심초사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선망하는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다. 명문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에다가,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이전에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심지어는 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이전에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은 한결같이 그의 자아를 강화해주는 것들이었다. 가문, 학식, 신분, 종교적 열심…. 이런 것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소중한 것들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많다. 신앙이란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과정이다. 자랑스러운 게 많은 사람 속에는 하나님을 모실 공간이 부족하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바울의 내면에 비쳐드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게 지푸라기 강아지(芻狗)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늘 막힌 듯 답답하던 정신의 지평이 툭 트였다. 

 

 

 

 

그 때부터 그는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어떤 고난도, 시련도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벗어던지려고 했던 약함과 고통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겼다. 자신의 약할 때가 곧 주님의 은혜가 유입되는 순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움과 해로움이 이렇게 자리를 바꿨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말하지만,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5:10)라고 고백한다.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사람들은 바알과 맘몬을 숭배하고 있다. 한완상 박사는 한국의 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교회의 위기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이렇게 분석한다. 

 

“교세의 양적 팽창과 대외적 선교열을 그토록 자랑하는 한국 교회와 교인의 삶 속에서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위기라 하겠습니다. 그분의 체취, 그분의 숨결, 그분의 꿈, 그분의 정열, 그분의 의분, 그분의 다정한 모습을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밑바닥 인생의 그 억울한 고통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사랑과 공의의 새 질서를 몸소 보여주셨던 갈릴리 예수가 더욱 그리워집니다.”(『예수 없는 예수 교회』, 7쪽)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 거룩한 지향을 다시 회복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이웃들과 더불어 생명의 춤을 추며, 살아 있음을 경축하며 살고 싶습니다. 기쁘게 일하고, 신나게 놀고, 뜨겁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잿빛 우울에 감싸여 있습니다. 세상의 인력이 하늘을 향해 도약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곤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진정한 자유인이 된 바울 사도가 부럽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기다리오니, 성령이여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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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그리고 함께

김기석의 새로봄(129)

 

홀로 그리고 함께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9-12)

 

서양의 정신사는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자유란 남들에게 아무 것도 강제당하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자기의 자발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경우 ‘타인’은 늘 우리의 자유에 걸림돌로 작용하기 일쑤이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서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홀로 자족적인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술과 마약, 그리고 쾌락으로 도피한다. 때로는 배타적이 되고, 이웃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로움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소금물을 들이킨다고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는 법이다. 요즘 우울증이 늘어나는 것은 타자들과의 소통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전도서는 혼자보다는 함께 일하는 게 효율적이고, 혼자 걷는 것보다는 함께 걷는 게 좋고, 혼자 눕는 것보다는 함께 눕는 게 따뜻하고, 혼자 싸우기보다는 함께 싸우는 게 승산이 높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참 진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를 피하여 지나갔고,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 이야기 끝에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셨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누가복음 10:36) 주님은 ‘이웃’의 경계를 설정하거나 범주화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이웃 되어주기’를 사유하도록 하셨을 뿐이다. 종교, 문화, 피부색, 나라도 이웃의 경계일 수 없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이 세계에 회복시키려는 마음이다. 

 

제랄드 메이는 『사랑의 각성』이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는 아주 괴팍한 노인이었다. 아이들이 뒷마당에서 놀기 시작하자 노인은 철조망을 치고 자기 집 마당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하루는 아들 폴의 고양이가 그 집 장미 덩굴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폴은 고양이가 그 집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며칠 후 고양이의 주검을 발견하고 말았다. 노인이 쥐약을 먹였던 것이다. 가족들 모두가 분노해서 뭔가 복수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폴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매우 외로운 분일 거예요. 우리가 그분에게 생일 파티 같은 것을 해드렸으면 좋겠어요.” 이 어린 천사는 우리에게 이웃 되어주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려 할 때 우리를 사로잡는 외로움 혹은 우울은 안개처럼 흩어진다.

 

*기도*

 

하나님, 남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무겁다고 느낄 때마다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곤 합니다. 피부가 상한 자리에 스치는 모든 것들이 다 고통을 안겨주듯이 삶에 지친 우리들은 작은 일에도 비명부터 질러댑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이들을 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는 다른 이들의 속 깊은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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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

김기석의 새로봄(128)

 

아나니아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사도행전 9:13-19)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울에게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나니아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거라’라는 명령이 거듭되자 아나니아는 그 명령에 순종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사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그는 말씀에 의지하여 사울을 찾아간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게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란 비록 이해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 대해 ‘아멘!’ 하는 것이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던 이스라엘은 적을 목전에 둔 길갈에서 전투에 나설 젊은이들에게 할례를 행했다.(여호수아 5장) 전투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에 순종해 그렇게 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던 기드온은 군인들이 너무 많다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처음엔 이천 명을, 그리고 그 다음엔 만 명을 돌려보내고 오직 삼백 명만 데리고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사사기 7장)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아나니아는 ‘곧은 거리’에 있던 유다의 집을 찾아가 사울과 만난다. 그는 사울이 경험하고 있는 어둔 밤의 체험은 오히려 그의 생을 바로 세우기 위한 창조적 혼돈임을 깨우쳐 주었다. 지금까지 사울은 맹목적 열정에 사로잡힌 채 살았다. 그것은 눈 먼 자의 행로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그릇된 열정을 변화시켜 복음을 위한 열정으로 변화시키려 하셨다. 아나니아는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사도행전 9:17)라고 말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부른다. 형제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델포스(adelphos)는 ‘자궁’을 뜻하는 델푸스(delphus)에서 나온 말이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골육지친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사울도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자궁에서 새롭게 태어난 혹은 태어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울의 몸에 닿은 아나니아의 손길은 어쩌면 주님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 그릇된 열정의 비늘, 편견과 경쟁심의 비늘, 자기 의라는 비늘이 떨어져 나가자, 그는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영혼의 어둔 밤에서 벗어나자 그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세상을 감격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새로운 생의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미움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바심도 없었다. 궁극적인 평안과 기쁨이 그의 내면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의 하나니아(hananiah)와 연결된다. 세상에는 이처럼 은혜를 매개하는 이들이 있다.

 

*기도*

 

하나님, 만나기 꺼려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이나 지향이 다른 이들을 만나면 본의 아니게 불쾌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맞는 이들과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가라 하십니다. 아나니아는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매개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세우신 사람들을 우리 멋대로 판단하고 도외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넓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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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수 없는 기억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90)

 

 버릴 수 없는 기억 

 

교우들 가정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는 대심방이 진행 중이다. 어제는 따로 시간을 내어 요양원에서 지내는 어른들을 찾아갔다. 한 때는 정릉교회에 출석을 했지만 이제는 연로하여 요양원에서 지내는 몇 몇 어른들이 있다. 연세로나 건강으로나 더 이상 그분들이 교회를 찾는 일은 어렵겠지만, 그럴수록 심방 중에 찾아뵙는 것은 도리다 싶었다.

 

북한산 인수봉 아래에 자리 잡은 요양원은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았다. 공기도 맑게 느껴졌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만난 권사님은 착한 치매가 찾아온 분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나오신 권사님은 얌전히 의자에 앉아 무엇을 물어도 가만 웃으시며 짧은 대답만을 반복하실 뿐이었다.

 

 

 

 

권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권사님이 몸에 두르고 있는 포대기 안에 담긴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천으로 만든 작은 인형이었는데, 얼마나 만졌는지 때가 탄 아기 인형이었다. 

 

권사님은 당신이 살아오신 삶의 많은 순간들을, 어쩌면 모든 순간들을 잊어버리셨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얼굴도 어떤 것도 기억을 못 하신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하신 말씀에 의하면 권사님은 마침내 아이와 같이 되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지만 권사님에겐 끝내 버리지 못한 마지막 기억 한 가지가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버리려야 버릴 수가 없는 기억이다. 자식들 품에 안고 젖을 먹이던, 아무리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도 어린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젖을 물리던 모정인 것이다. 권사님이 포대기를 두르고 가슴으로 안은 작은 아기 인형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권사님이 버릴 수 없는 마지막 기억이 무엇일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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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방석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9)

 

귀한 방석 

 

권사님 집을 찾아가는 골목길은 차 하나가 지나가기에도 좁아보였다. 도중에 차끼리 만나면 누군가는 진땀을 흘리며 후진을 해야 할 듯했다.


운전을 한 전도사님이 차를 세우는 동안 한쪽에 서서 기다리는데, “어서 오세요” 하며 다가오시는 분이 있다. 마중을 나온 권사님이었다.


“제가 사는 집은 이래요.”


권사님은 그렇게 인사를 하며 집으로 들어섰지만, 권사님 성품을 닮아서인지 집안은 깨끗했고 단정했다.


미리 준비해 놓으신 상 주변으로 앉았다. 상 주변으로 방석까지를 가지런히 깔아 두셨다. 예배를 드리기 전 마주앉으신 권사님을 바라보며 가만 웃었던 것은 권사님이 나를 보며 빙긋 웃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권사님이 한 마디를 하신다.


“목사님이 앉으신 방석은 지금까지 목사님이 오실 때만 쓰던 방석이에요.”

 

 

 


 

 

권사님 말씀을 듣고 다시 보니 내가 앉은 방석은 예쁘게 수를 놓은 방석이었다. 방석덮개는 칼칼하게 풀을 먹여 다린 상태였다. 권사님이 시집오실 때 손수 만든 방석이라고 했다. 권사님은 그 방석을 따로 보관을 했다가 목사가 심방을 오면 그제야 꺼내 놓으셨다는 것이었다. 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으셨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이 방석엔 몇 명의 목회자가 앉았을까, 몇 번이나 앉았을까, 나는 몇 번이나 이 방석에 앉을 수 있을까, 할머니의 기다림과 방석의 쓰임은 얼마나 어긋나지 않았을까, 혼자 사시는 할머니 권사님의 구별된 기다림에 나는 얼마나 대답할 수가 있을까,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도 마음으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지나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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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여겨보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8)

 

 

눈여겨보면 

 

동네 골목은 재미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심방 길에 동네 골목에서 만난, 전봇대에 붙어 있는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제목도 없이 네 줄이었는데 마치 운율을 맞추듯 첫 글자가 모두 ‘개’로 시작되었다.

 

 

 

 

개 주인은
개 때문에
개 망신 당하지 말고
개 똥 치우시오

 

단조롭고 시시해 보이지만 눈여겨보면 동네 골목에는 전봇대에도 시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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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7)

 

 파격 

 

조심스러운 선택이었다. 아무리 광고 시간이라 하여도 주일 예배시간에 일상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튼다는 것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광장,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있는 한 사람 앞에서 한 소녀가 리코더를 연주하는 일로 영상은 시작이 된다. 검은 안경을 쓴 채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있는 이는 소녀의 연주를 받아 세상의 모든 음을 떠받치고도 남을 것 같은 저음으로 연주를 하고, 그러는 사이 평상복을 입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씩 자신의 악기를 들고 모여들어 연주에 참여를 한다. 그들이 연주하는 곡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마침내 누가 합창단원인지 일반 시민인지 구별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이 합창에 동참을 한다.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광장에 둘러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생각하지 못한 연주를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기도 하고, 뽕나무로 오른 삭개오처럼 가로등에 올라가 바라보기도 한다. 잠깐 사이 지나가는 모습이었지만 헤드폰을 끼고 있던 한 소년이 연주를 듣기 위해 헤드폰을 벗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연주는 서로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인터넷과 전자 메일, 휴대전화 등의 연락을 통하여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모여, 짧은 시간 동안 주어진 놀이나 행동을 취하고는 금세 제각기 흩어지는 일종의 플래시몹이었다.


마침 전교인수련회의 주제를 ‘나보다 아름다운 우리’라 정했고 교우들에게 수련회를 알리는 시간, 서로의 마음을 합할 때 놀라운 결과가 가능함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영상을 보는 교우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거룩한 예배 시간에 이런 영상이 웬일이냐며 불편해 하는 교우들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영상이 모두 끝났을 때 박수를 치는 교우들이 적지 않았다. 박수는 충분한 공감의 의미로 다가왔다.


광장 한복판에서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거리에서 함께 드리는 예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악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온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격을 깨는 파격破格이 필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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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놓는 사람

김기석의 새로봄(127)

 

다리 놓는 사람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내가 호렙 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말라기 4:4-6)

 

신앙인은 다리 놓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와 나 사이에 무너진 다리를 놓아,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문장론은 ‘法古創新(법고창신)’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변화를 주어 새롭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인간관계에 적용해보면 젊은이들은 삶의 경험이 많은 어른들에게 여쭐 줄 알아야 경박함을 면할 수 있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고루함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세대 간의 갈등이 심각한 이 시대가 치유될 수 있을까?

 

말라기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야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자 하나님을 등지고 풍요의 신을 섬길 때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끈 사람이다. 그가 와서 할 일을 말라기는 생각보다 소박하게 소개한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말라기 4:6)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서로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보냄을 받은 자가 할 일이다.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세대 간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것, 선진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 세대는 과거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신앙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낯선 타자처럼 바라보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부모공경이 인간 윤리의 기본임을 가르친다.

 

 

 

 

 

박노해 시인의 시 <거룩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를 노래한다. 서울에서 고학을 하던 그의 형은 방학이 되면 몸이 허약해져서 고향에 내려오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애지중지 기르던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에 피를 묻혀가면서 맛있는 닭죽을 끓여 객지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먹이셨던 것이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두려워 떨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곤 했던 시인은 어머니를 통해 배운 삶의 지혜를 이렇게 노래한다. 

 

“사랑은/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사랑은/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사랑은/자신의 피와 능(能)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부모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이 부모에게 향하고, 마침내 고마워하고 대견해하는 마음이 가족의 경계를 넘어 사회로 파급되기까지 온몸으로 불통 세상과 맞서는 노고가 필요하다. 담을 허무는 분으로 사셨던 주님이 우리에게 그 일을 함께 하자 부르신다.

 

*기도*

 

하나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을 우리는 날마다 실감하며 삽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마음에 맞게 행동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바람이 무너질 때 서운한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적대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부끄럽지만 이기적이고 편협한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좁아진 마음을 넓혀 주시고,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이 닦아 주십시오. 먼저 용서하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말을 건넬 용기를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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