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말랭이가 먹고 싶다는 딸아이

  • 가급적 양약을 먹이지 않으려는 엄마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네요. 딸 아이의 건강이 회복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한길 2019.12.31 19:23
    • 감사드립니다.
      저도 콧물을 훌쩍이다가 가루 한약을 타왔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신동숙 2020.01.01 06:12 DEL

신동숙의 글밭(46)

 

무말랭이가 먹고 싶다는 딸아이


학교를 가야 하는데 딸아이가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목도 따갑고, 코도 막힌다며 이불을 끌어 안습니다. 학교를 가든 병원을 가든 한 숟가락이라도 떠야 움직일 수 있다고 했더니, 담백하게 끓인 김치찌게를 밀어내고는 삶은 계란만 겨우 집어 먹습니다.
 
아이들이 열이 나거나 아프다고 하면 동네에 있는 소아과를 갑니다. 진료를 받는 이유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독감이면 A형인지 B형인지 검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진료 확인서를 제출해야 병결이 인정이 됩니다. 병원에서 처방하는 해열제, 소염제, 소화제, 항생제를 먹지 않고 신종플루와 독감을 지나온 게 어느덧 7년이 넘어갑니다. 그리고 타미플루는 먹은 적이 없답니다.

양약 대신 비타민과 물을 먹습니다. 그리고, 열이 날 때는 학교에서도 등교를 거부하기에 자연스레 집에서 뒹굴거리며 쉬게 합니다. 아마도 이럴 때가 직장에서 일을 하는 엄마들은 가장 마음이 무거운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에게 양약을 먹이고 싶지 않아도 달리 선택의 방법이 없기에 그저 답답한 마음이리라 여겨집니다. 마땅히 자녀를 맡길 곳도 없다면 그 난감한 마음은 누가 만져 줄 수 있을런지요.

약국에서 파는 비타민 외에, 저희 집에선 천연 비타민으로 히비스커스와 로즈힙을 줍니다. 그리고 제철 음식 중에 비타민이 풍부한 음식은 우리가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겨
울철엔 유난히 비타민이 풍부한 음식이 많습니다. 귤과 대추와 시래기와 무우가 있고요. 특히 무우는 말릴수록 비타민 함량이 높아진다고 하니 그 자연의 조화로움과 세심함에 감탄과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집에서 쉬게 하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비교적 자유롭게 먹이고, 4~5시간 간격으로 비타민과 물만 줍니다. 열이 40도가 다 되어가는 고열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하는 일은 열을 확인하면서 편하게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콧물, 기침 등은 한의원에서 처방하는 국민의료보험 적용이 되는 가루 감기약을 따뜻한 물에 타서 줍니다. 그렇게 아이가 집에서 모처럼 뒹굴거리는 시간은 선물 같은 하루일 테고요.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마음껏 노는 날. 엄마로썬 핸드폰만 없다면 금상첨화고요. 

그렇게 2~3일이 지나면 깨끗하게 낫습니다. 가까운 곳에 이 보험 적용이 되는 가루 한약을 처방하는 한의원이 있다면, 신뢰할 만한 고마운 곳일 겁니다. 대부분은 한의사가 직접 지어주는 한약을 처방하는데, 이 보험 적용이 되는 가루 감기 한약을 처방하는 곳이 잘 없는 이유는, 수지 타산에 맞지 않으면서, 양·한방을 통틀어서 감기에 가장 효과가 좋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아이러니한 양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약은 너무 잘 들어도 안되고, 전자제품은 너무 튼튼하게 만들어도 안되는 그런 이유일 테지요. 참, 비타민과 물 처방은 의사와 약사가 가르쳐준 의사·약사의 가족용 처방입니다.

딸아이는 코가 막혀서 입맛이 없다고 합니다. 죽을 사줄지 끓여 줄지 잠시 고민하다가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으니, 마침 딸아이 눈에 반찬 가게가 들어왔나봅니다. "무말랭이가 먹고 싶어." 무말랭이 3천원 어치를 사갖고 나오면서, 법정스님의 무말랭이 이야기가 문득 맑고 푸른 하늘처럼 떠오릅니다. 

 '오두막 윗목에 종이를 깔고 잘게 썬 무를 말리고 있다. 낮에는 햇볕이 들어오는 곳이다. 겨울 동안 내가 즐겨 먹는 부식인데, 그 어떤 찬거리보다도 이 무말랭이를 나는 즐겨 먹는다.
  
  얼마 전에 장에서 무를 한 배낭 가득 사왔다. 그때 그 무게가 아직도 내 왼쪽 어깻죽지에 남아 있다. 개울물에 씻어서 물기를 말린 뒤 난롯가에 앉아서 삭둑삭둑 썰 때 울리는 도마질 소리가 잔칫집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산중에서 벌어지는 겨울 잔치.

  말린 무를 바구니에 담아 두고 필요할 때 꺼내어 한 단지씩 채워 진간장을 부어 놓는다. 가끔 작은 주걱으로 뒤적여 간장이 고루 베어들도록 해야 한다. 간장이 충분히 배어들지 않으면 질
기다. 꺼내 먹을 때 고춧가루와 참기름과 깨소금 그리고 입맛에 따라 설탕을 조금만 치거나 치지 않아도 된다.

  무말랭이는 조근조근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나처럼 성질이 급한 사람도 무말랭이 먹을 때만은 천천히 씹어 그 특유한 맛을 음미한다. 송나라 때의 왕신민이란 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백 가지 일을 이룰 수 있다.' ( 법정 스님의 '무말랭이를 말리면서', <홀로 사는 즐거움> 中, 샘터, 2004년, 161쪽 >

그러고 보니 딸아이가 딸기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얄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바람에 입씨름만 몇 마디 하다가 밤이 깊었습니다. 이 글을 적는 내내 마음에 걸려서 날이 밝으면 딸기 사러 가야 겠습니다.

오늘은 2019년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읽던 책들을 잠시 덮어두고,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을 넘기면서 조촐하고 그윽한 시간을 보내고픈 그런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고요하게 앉아서 침묵의 기도 속에 잠기는 따뜻하고 충만한 시간을 갖고픈 그런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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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처작주(隨處作主)

  • 아름다운 삶의 흔적은
    세월이 갈수록 무르익어서
    아름다운 빛깔로 영혼까지 물들이는 듯합니다.

    제가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신동숙 2019.12.31 09:08
    • '물들이다'라는 말은 소란하지 않게 소임을 다하는, 나직하고 아름다운 말이지 싶습니다.

      한희철 2019.12.31 21:43 DEL
  • 감사합니다 . 한해 수고하셨습니다.

    이진구 2019.12.31 09:11
    • 멋진 새해를 맞이하게 되기를 빕니다.

      한희철 2019.12.31 21:44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65)

 

수처작주(隨處作主)

 

벌써 여러 해, 한해가 기울어갈 때쯤이면 이어지고 있는 일이 있다. 선생님 한 분이 카드를 보내주신다. 선생님은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이라는 말 앞에 ‘선생님다운’이라 쓰려다가 그만 둔다. 선생님과 선생님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 같은 민망함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말이 오히려 선생님을 거추장스럽게 만든다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늘 자연스럽고 소탈하신 선생님은 필시 그런 수식어를 어색하고 번거롭게 여기실 것이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공부하실 때 외에는 강원도를 떠나지 않고 강원도의 아이들을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강원도를 사랑하신다. 국어선생님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얼, 우리의 문화를 사랑하는 것을 평생 가르치셨고, 몸소 지키셨다.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하신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을 지키신다. ‘지키신다’하면 역시 손사래를 치실 것 같다. 그냥 살고 있다고 애써 그 말을 바꾸실 것 같기 때문이다. 

 

올해에도 선생님은 당신이 찍은 사진으로 카드를 만드셨다. 저 아래로 강이 흐르고, 강 언덕에는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앞으로 억새가 피어난 사진이다. 사람 눈에 가장 가깝다며 굳이 50밀리미터 렌즈를 고집하신 선생님의 사진에선 꾸밈과 가감이 없는 진솔함이 뭉뚝 전해진다. 사진을 보는 나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사진 한 장이 이리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 싶다.

 

 

 

 

 

사진 옆에는 예의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선생님의 필체로 인사말을 적으셨다. 길지 않은 글을 아껴 읽다가 울컥했다. ‘바람과 구름의 길, 부론입니다. 목사님께서 빚어놓으신, 그래서 더 아름다운!’


단강을 사랑한 사람은 적지 않다. 그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분이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글과 방송으로도 큰 족적을 남겼는데, 단강마을의 어르신인 김천복  할머니, 박민하 할아버지 외 몇 몇 분들도 여러 차례 만나셨다. 만나실 때마다 선생님이 보인 태도는 목회를 하는 내게도 큰 가르침이 되었다. 어투에서 몸가짐까지 친근하되 무례하지 않는, 언제라도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내는 따뜻하고 진중한 태도가 선생님은 몸에 배어 있었다.

 

카드를 대하는 순간 문득 마음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었다. 중국 당대의 임제(臨濟)선사가 남긴 말로,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지금 있는 자리가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뜻일 것이다.

 

선생님은 지난 시간을 슬며시 환기하심으로,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하신다 싶었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 주인이 되라고, 지금 있는 이 자리를 진리의 자리로 만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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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고독의 사랑방에서

  • 없는 듯 계시는~~~♡

    한길 2019.12.30 23:09
    • 하나님이시니까요.

      신동숙 2019.12.31 09:26 DEL

신동숙의 글밭(45)

 

행복한 고독의 사랑방에서

 

작은 찻잔에 담긴 차 한 잔이 있습니다. 내려오던 햇살은 율홍빛 속에 머물고, 차향은 30년 전 스치운 푸른 바람 냄새를 아련히 기억합니다.

 

천천히 서너 모금으로 나누어 마십니다. 그리움으로 출렁이던 잔은 빈 잔이 되고, 빈 잔은 하늘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빈 잔 바닥에 내려앉은 햇살은 한 점 하얀 별빛으로. 없는 듯 계시는 빛의 하나님이 잠시 내려앉아 고요히 머물러 쉬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찻잔에 담긴 찻물을 비우는 순간 얼른 들어차는 하늘처럼 허전한 나를 하늘로 채우길 원합니다. 나의 좁은 창문을 열면, 작고 여린 가슴으로 밀려드는 공허감, 무력감, 가난한 내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길 원합니다.

 

이제는 알든 모르든 내 안에 있는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패인 상처와 어둔 골짜기가 하늘로 온통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빈틈도 없으신 하나님, 잠잠히 내 영혼이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러 평온한 쉼을 얻는 행복한 고독의 사랑방에서.

 

호흡지간에 삶과 죽음이 함께 있음을 봅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처음을 살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한 발짝 더 죽음에 가까운 연약한 몸과 마음입니다. 채우려 하기보다 먼저 길고 깊은 날숨으로 비우게 하소서. 비우면 저절로 들어차는 들숨처럼 채워 주시는 은혜 만큼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있게 하소서. 오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기도가 선한 한 줄기의 물길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낮고 낮은 땅, 작고 어두운 집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흘러가게 하소서. 외진 골방에서 눈물로 적셔진 심령이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러 평온한 쉼을 얻는 행복한 고독의 사랑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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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몽치

  •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

    의미있는 말씀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30 09:59
  • 검과 몽치를 들면 자신들이 잡으려는 자와 자신들이 같아진다고 생각하지만, 검과 몽치는 다만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뿐이지요.

    한희철 2019.12.31 07:16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55)

 

검과 몽치


 
그 때 그 순간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둠을 밟고 조심스레 다가오는 한 무리들, 그들의 손엔 검과 몽치가 들렸다. ‘검과 몽치’라는 말은 ‘칼과 몽둥이’라는 말보다도 원초적이고 음험하게 들린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검과 몽치만이 아니었다. 등과 횃불을 빠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빛으로 오신 분을 붙잡기 위해 그들은 어둠 속에서 등과 횃불을 밝힌 채 다가온다.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기름에선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그 모든 것에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보태진다. 횃불보다도 더 강렬했을 눈빛들, 예수가 붙잡히던 그 밤 그 동산에는 온통 광기가 가득하다. 예수의 말씀대로 난폭한 강도를 잡는 현장과 다를 것이 없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다 자기 방식대로 생각을 한다. 자기 방식대로 판단을 하고 행동한다. 검과 몽치를 들었던 무리들은, 예수와 제자들도 검과 몽치를 들고 대비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거칠게 저항할 것이라 짐작했을 것이다. 말고의 귀를 벤 베드로의 검이 있었으니 허황된 생각은 아니다 싶다. 하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 명한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한 마디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리한 칼날처럼 들렸을 것이다.

 
자기를 잡으러 오는 무리 앞에서 보이고 있는 예수의 태도는 수동적이지 않다. 이상하리만큼 능동적이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26:46) 예수는 그렇게 스스럼없이 당신의 길을 간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 한 사람을 두고 그를 붙잡으려 하는 이들은 검과 몽치를 들고 온다.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들고 있는 검과 몽치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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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자연은 단짝 친구

  •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좋은 인연이었으면~~~♡

    한길 2019.12.29 18:09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신동숙 2019.12.30 07:58

신동숙의 글밭(44)

 

말씀과 자연은 단짝 친구

 

 

 

 

허공을 떠도는 외로운 말씀에게
자연을 단짝 친구로 선물합니다

 

먼지처럼 폴폴 발에 밟히는 말씀에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
고독의 방을 선물합니다

 

메마른 사막 길을 잃고 헤매는 말씀에게

눈물이 고여 흘러 넘칠 빗물
침묵의 기도를 선물합니다

 

믿어주지 않아 답답한 말씀에게
언제나 푸른 하늘 산들바람

진리의 자유를 선물합니다

 

추워서 벌벌 떨고 있는 말씀에게
'빛이 있으라' 따뜻한 햇볕

사랑의 눈길을 선물합니다

 

외로운 말씀에게
말씀의 주인이 짝지어 주신
말씀과 자연은 단짝 친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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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멀었다

  • 사랑의 인사를 받듯 배반의 암호를 받으시는 예수님.
    정말로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신동숙 2019.12.29 09:39
    • 숨이 턱 막히고는 하지요.
      하지만 맑은 가르침입니다.

      한희철 2019.12.30 06:51 DEL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29 11:26
    • 반갑습니다.

      한희철 2019.12.30 06:51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54)

 

 나는 아직 멀었다

 

하필이면 암호가 입맞춤이었을까? 유다 말이다. 예수를 넘겨주며 무리에게 예수를 적시할 암호로 미리 짠 것이 입맞춤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예수를 알릴까를 왜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 끝에 찾아낸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만나 입맞춤을 하는 것은 반가움과 존경의 뜻이 담긴 행동,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일이었다. 껄끄러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으니, 그것이 유다의 제안이었다면 그의 머리가 비상하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두려움이 읽힌다.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아서 단단히 끌고 가시오.” 라고 무리들에게 말한다. 단단히 끌고 가라는 말을 왜 덧붙였을까? 예수를 놓칠까 걱정을 했다기보다는, 다시는 예수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일 뒤로 또 다시 예수의 얼굴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유다의 키스로 인해 예수는 그 자리에서 붙잡힌다. 그 대목에 이르면 마음이 먹먹하고 아뜩해진다. 예수가 붙잡혔다는 것은 결국 예수가 유다의 키스를 받아주신 것이었다. 급작스레 도둑 키스를 한 것은 아니었을 터, 만약 유다가 입맞춤을 하려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 같은 분노이든 얼음 같은 측은함이든 뭐라 한 마디를 하지 않았을까? 예리한 칼날이 마음을 베는 것 같은 뼈아픈 말을 건네지 않았을까? 유다의 입맞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를 리 없는 분이 아무 말 없이 유다의 키스를 받는다. 사랑의 인사를 받듯 배반의 암호를 받으신다.  

 

까마득하다. 나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그분을 따르며 닮기 원한다 하기엔, 나는 너무나 멀다.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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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라'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 교회의 담벼락은 세상의 물길을 막기 위한 댐처럼 높기만 했다는 시인의 글에 목사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ㅜ 기뻐하라, 사랑하라는 말씀을 다시한번 가슴에 새겨봅니다

    한길 2019.12.28 09:43
    • 사리사욕이 커지고 서로가 뭉치게 되면 댐도 쌓게 될 테고요. 사리사욕을 녹이는 건 가슴에 품은 예수 밖엔 없는 것 같습니다.

      신동숙 2019.12.28 17:17 DEL

신동숙의 글밭(43)

 

'기뻐하라'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 전서 5:16-18)

 

제 기억 속의 세월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입니다. 잊혀지지 않으며, 잊혀져선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땅 어디에선가 그와 같은 불합리한 일들이 모습을 달리하고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바닷속처럼 다 헤아릴 수 없는 유족들의 가슴 속으로 따뜻한 햇살 한 줄기 비추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따뜻한 말 한 마디, 따뜻한 눈길이 끊이지 않는 파도처럼 우리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일렁이기를 소망합니다.

 

당장에 오늘 내 곁에 우리 집안에서 일어난 일도, 함께 사는 가족의 마음 속 일도 정작 관심을 두지 않으면 먼 나라 딴 세상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곳으로 햇살이 비추듯 사랑은 흘러갑니다. 응달지고 후미진 그곳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햇살을 닮은 관심 어린 작고 따뜻한 눈길일 테지요.

 

하나님이 명령형으로 말씀하신 '기뻐하라', 이 말씀 앞에선 늘 여러 감정이 일어납니다. 우리네 삶에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닮은 희노애구 애오욕(喜怒哀懼 愛惡慾) 7정의 성정이 늘 함께 합니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예수의 성정과도 모순이 없어야 진리의 말씀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항상 기뻐하라'의 뜻이 웃음과 즐거움의 겉모습을 뜻하는 의미만은 아님을 묵상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로 온 나라가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던 그 무렵, 다니던 교회의 주일 학교에선 예정대로 남노회가 주최하는 <신앙 그림그리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햇살을 받으며, 공원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유·초등부 주일 학교 학생들. 해맑은 몸짓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으는 교사들의 낭낭한 목소리. 알록달록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주일학교 어린이들. 그날의 주제 중 하나가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어린이 그림대회라곤 하지만, 상장이 걸린 부분이라 함께 간 부모와 담당 교사들이 알게 모르게 거들거나 큰 애들한테는 지나가는 바람처럼 훈수라도 두고 싶은 그런 날이었답니다.

 

슬픈 동화처럼 세월호 얘기를 들려줬더니, 유치부 아들은 회색빛 검은빛으로 노아의 방주를 그리다 말고는 다 그렸다며 뛰어가 놀기가 바쁩니다. 입상자 중에는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마트 진열대 위에 사탕껍질처럼 색색깔의 예쁘장한 그림이었습니다. 딸아이의 그림이 입상했다는 기쁨은 그때 잠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색색깔 그림의 그림자는 긴 세월 만큼이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날의 주일 학교 학생들은 세월호를 모릅니다. 저 혼자서는 세월호에 희생된 학생들과 유족들을 위한 전교인의 기도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다린 주일 예배, 주일 말씀 중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월호라는 단어가 목회자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일도 지금껏 그늘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주일 설교는 언제나 세상의 아픔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나서 언뜻 스치는 말에 희생자 중에 우리 교인이 없기 때문에.

 

그림그리기 대회, 그날 수백 명이 모인 교회 학교 어린이들. 슬픔을 담은 그림은 눈을 씻고 봐도 아들의 그림 한 장 뿐이었습니다. 마치 하얀 종이에 튄 먹물 한 방울 같이 생뚱맞은 어둠이 드리운 슬픈 배 그림 한 척. 집 근처 대형교회의 벽면이 매끈한 유선형으로 주변의 일반 건축물과는 다른 생소한 모습이라 물었더니, 노아의 방주처럼 지었다고 합니다.

 

 

 

 

 

 

노아의 방주 같은 안전한 교회당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저 홍수 속 출렁이는 세상의 검은 물결일 테지요. 그 험난하고 악한 바다에는 차마 들어갈 수 없다고 믿는 성도들. 그저 불쌍한 세상 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고기를 잡듯 한 생명을 낚아올리려는 전도지와 물티슈. 세상의 아픔과 슬픔 앞에 굳게 문을 닫아 걸고, 입에 담지 않으려 애써 외면하고, 제 손으로 제 귀를 막고, 제 손으로 제 눈을 가리는, 그런 두 손을 모아 새벽기도의 재단을 쌓던 목회자와 중직자들. 그들의 손아귀에 자녀를 맡긴 성도들, 해맑은 주일 학교 어린이들. 5년 동안 제가 본 교회의 모습입니다.

 

물론 시멘트 틈새에도 함께 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이 야윈 꽃처럼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전혜성 박사의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책에서 감동을 받고, 섬기기 위해서 섬김을 배우려고 다니게 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담벼락은 세상의 물길을 막기 위한 댐처럼 높기만 했습니다. 물길이 스며들까 휩쓸릴까 두려움에 몸을 사리며 평안과 천국을 구하는 안전지대, 성도들에게 교회는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기뻐하라', '기쁘다'는 우리의 입말입니다. '기분이 좋다'라는 말은 '기의 분할이 좋다', 온몸의 기가 막힘 없이 원할하게 돌 때 우리는 '기분이 좋다'고 말합니다. 어느 한 곳이든 기와 혈이 막힌 곳이 있다면, 그곳은 아픈 곳, 병든 곳이 될 테지요.

 

가끔 성도들을 볼 때면, '항상 기뻐하라'의 의미를 웃음과 즐거움의 표면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한계를 짓고 마는 건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답니다. 당장에 자녀가 독감에 걸렸는데,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 하십니다. 그때의 기쁨은 달리 해석되어져야 하는 순간입니다. 자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과 나으리라는 희망이 깃든 긍정의 마음이 그 순간  '기뻐하라'의 의미일 것입니다. 아픈 자녀를 앞에 두고 귀와 눈과 입을 막으며 아픔을 외면하고서 해맑게 웃는 부모는 없을 테지요.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깊이 묵상을 하다보면, 세상은 나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님을 느낍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에서 파생된 개체로, 이웃은 '또 하나의 나'가 됩니다. 그처럼 교회 밖의 세상은 이웃이 되고, '또 하나의 나'가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곳입니다.

 

저의 헤아림으로 본 '기뻐하다'는 '깨어 있다'의 의미입니다. 삶에는 타이밍이란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 하기 위해선, 상황 판단이 정확해야 하고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눈치라도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고선 어느 시점에서 함께 울어야 하며, 함께 웃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소통하는 페이스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감의 표시인 '좋아요'를 누르는 짧은 순간 조차도 감정을 나타내는 이모티콘의 선택을 두고 잠시 고민을 합니다. 함께 눈물 흘릴 지, 웃을 지, 화내요와 멋져요, 하트를 남길지. 깨어 있지 않고선 '좋아요' 공감의 이모티콘 하나도 허투루 선택할 수 없는, 흔하고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깨어 있어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날씨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민감한 마음을 두고서 맹목적인 믿음과 순종의 미덕만을 강요하는 설교는 양심을 가리는 어리석은 무지일 뿐입니다. 물론 '기뻐하다', '깨어 있다'의 의미가 일희일비(一喜一悲)의 가벼움은 아닙니다. 함께 아파하는 중에도 희망의 씨앗을 볼 수 있는 긍정의 마음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어진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기쁨을 기꺼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의로운 마음입니다. 이웃의 모습에서 나를 보고, 나아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밝은 마음입니다.

 

역사와 현실을 가린 교회 건물 안에서 자라나는 어린 영혼들에게 전깃불이 아닌 태양빛이 비추어 깨어 있는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일처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일이 기의 막힘 없이 돌아가는 기분 좋은 자연의 순환이 되도록. 늘 깨어 있음으로 곧, 항상 기뻐함으로 우리의 의식과 마음과 영혼이 깨어서 숨을 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누가복음 10 : 27) 사랑하면 믿음과 순종은 저절로 따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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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둘 중의 하나

  • 정말로 맞는 말씀임을 공감으로 가져갑니다. 열두 중의 하나!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28 08:54
    • 아프고,
      부끄럽고,
      두려운!

      한희철 2019.12.29 09:26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53)

 

열둘 중의 하나

 

예수를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를 두고 4복음서 기자는 모두가 같은 표현을 쓴다. ‘열둘 중의 하나’라고 말이다.(마태복음 26:14, 47. 마가복음 14:10, 20, 43. 누가복음 22:3, 47. 요한복음 6:71)

 

 

 

예수를 배반하여 팔아넘긴 자는 예수와 무관한 자가 아니었다. 예수를 모르던 자도 아니었고, 믿지 않던 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와 가장 가까이에서 지냈던 가장 가까웠던 자였다. 돈주머니를 맡겼으니 어쩌면 가장 신뢰받던 자였다. 분명한 것은 열두 중의 하나였다.

 

열두 중의 하나, 그 하나로 인해 나머지가 덩달아 부끄러워지는 걸 감내하면서 복음서 기자들이 그 일을 기록으로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약속이나 한 듯 굳이 덮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가까운 자가 예수를 등질 수 있기에,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웠던 자가 배반하는 것이기에. 녹이 쇠에서 나와 쇠를 삼킨다는 것을 언제든지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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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톨

  • 밥은 하늘이라지요

    한길 2019.12.27 21:25
    • 밥 한 톨에 하늘이 있고요

      신동숙 2019.12.28 23:00 DEL

신동숙의 글밭(42)

 

밥 한 톨

                         

밥 한 톨도
흘리지 마라

 

밥그릇
주변을 돌아보고

 

밥 한 톨도
남기지 마라

 

밥그릇
속을 들여다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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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굴복하는 것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27 13:55
    • 한결같은 걸음,
      반갑습니다.

      한희철 2019.12.28 07:00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52)

 

폭력에 굴복하는 것

 

 

 

 

“현대생활의 분주한 활동과 스트레스는 본질적인 폭력의 한 형태인데,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 상반되는 무수한 관심사에 정신을 파는 것, 수많은 요구에 굴복하는 것, 너무나 많은 사업에 관계하는 것, 모든 일에 모두를 돕기를 원하는 것 따위는 어느 것이든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폭력에 협력하는 것이다. 행동주의자의 광분은 그가 평화를 위해 하는 사업의 효과를 사라지게 만든다. 광분은 평화를 이루는 그의 내적 능력을 파괴한다. 풍부한 결실을 가져오는 내적 지혜의 뿌리가 광분 때문에 죽어버려 그의 일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토마스 머튼의 단상>에서 만난 한 구절이다. 정작 이런 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미 폭력에 굴복했고,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동기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이르며, 평화를 광분으로 대체한다. 자신만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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