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욕지족 소병소뇌 (少欲知足 少病少惱)

신동숙의 글밭(67)

 

소욕지족 소병소뇌 (少欲知足 少病少惱)

 

운전을 할 때면 라디오 클래식이나 평화방송, CBS, EBS교육방송 중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돌려 가면서 듣고는 합니다.

 

요즘은 그 어느 것도 성에 차지가 않아서 법정스님의 육성문법이나 이야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번갈아 가며 듣고 있는 중입니다. 거듭 되풀이해서 들어도 매번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말씀들입니다. 두 분의 공통점은 설교 안에 이야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빠지지 않고 삶의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불경이든 성경이든 또는 옛 선현들의 지혜가 깃든 고전과 한시도 좋고, 주변의 그야말로 작고 소박한 소재들로 이야기를 풀어내시는 것이지요. 단지 경전 속 알멩이만을 전달하기 위해 적어도 목청을 돋우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법문과 설교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식으려 하고 삭막해지려는 거친 제 마음밭을 일구는 일이 됩니다. 따뜻한 이야기 한 자락에는 마음을 다독여주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픈 곳에서 피운 눈물꽃. 그 홈이 패인 곳에 씨앗을 심는 감동스런 이야기꽃. 의미있고 가치가 있으면서 재미난 이야기들. 눈물과 웃음과 감동과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더불어 걷는 이야기 산책길인 것이다. 권위도 경계도 사라진 맑고 환한 하늘입니다.

 

법정스님의 법문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법정스님이 해인사에 머무시는 동안 자운스님께 안부 편지를 드렸는데, 노스님으로부터 펜글씨로 또박또박 눌러쓰신 여덟 글자의 답장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몸에 병이 적고 머리에 생각이 적고.
    작고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자.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보다는 작고 적은 것 속에 있다.
    작고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있다.

 

이 말씀은 이미 알고 있고, 오랜동안 들어왔고, 평상시에도 거듭 새기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을 때마다 샘물을 들이킨 듯 시원하고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진리는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생명에겐 해와 물 같은 존재니까요. 흐르는 개울물은 개울물이지만 한 번도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이치처럼요. 진리의 말씀도  매 순간이 늘 새로움입니다.

 

법정스님은 고백하십니다. 그 어느 긴 글보다도 이 짧은 여덟 글자가 평생을 가슴에 새겨 두고 함께 걸어온 말씀이라고.

 

저도 아직 읽어 본 적 없지만, 법정스님의 말을 옮기자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E.F. 슈마하의 책이름이다. 이 책의 부제(副題)는 '인간을 중요시하는 경제학의 연구'라고 달고 있다. 돈을 가지고도 살 수 없는 비물질적인 가치 즉 아름다움과 건강과 조화의 새로운 인간생활을 부흥시키는 일이, 미래의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라고 그는 역설하고 있다..작은 것이 아름다움은 굳이 경제적인 영역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다.([물소리 바람소리] 中 '작은 것이 아름답다', 法頂)

 

계속 운전을 하면서 충전기에 연결된 스마트폰으로 법문을 듣던 중. '소욕지족 소병소뇌'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아멘!" 이라고 화답을 합니다. 그러면서 또 혼자서 웃습니다.

 

소나무 밑에 흙이 검은빛이 도는 게 참 기름집니다. 솔갈비입니다. 솔잎이 그대로 떨어져서 예전의 흙과 섞이며 좋은 산거름이 되었습니다. 노지에 심겨진 차나무 밑에다 깔아주면 참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솔갈비는 잡초와 해충도 막아주면서 돌의 냉기만 먹던 뿌리에 소나무의 맑고 청정한 기운까지 더해주는 좋은 거름이 되어 줍니다. 그래서 천 년도 더 이전부터 차나무가 소나무 밑에서 뿌리를 내리며 더불어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도 야산의 차나무처럼 청정한 이를 닮은 소나무 그늘 아래서 살아간다면 불쑥불쑥 잡초처럼 올라오는 허물도 염려도 그 아래서 덮이고 맑아지고 익어서 또다시 좋은 거름이 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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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십자가를 보며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진구 2020.01.31 10:28
    • 한결같은 메아리,
      반갑습니다.

      한희철 2020.02.01 06:48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8)

 

작은 십자가를 보며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우리로서는 작은 것을 당연함으로 나누었을 뿐인데, 그 일을 고맙게 여겨 귀한 마음을 보내왔다. 상자 안에는 마음이 담긴 인사말과 함께 성구를 새긴 나무판과 십자가가 담겨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직접 만든 것이었다. 성구가 새겨진 나무판은 교우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아가페실에 걸어두었고, 작은 십자가는 목양실 책장에 올려두었다.

 

평범한 십자가라 여겼는데, 오늘 새벽에 들어서며 보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슨 나무였을까, 껍질을 벗긴 나무의 흰빛은 알몸처럼 다가왔다. 십자가의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은 가시면류관을 쓰고, 못이 박히고, 창으로 찔리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무 위에 매달려 발가벗겨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과 수치가 어디 있겠는가? 드러나야 할 것은 우리의 치부, 그런데도 발가벗겨진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가만 바라보니 나무 몇 곳에 까만 점들이 있다. 잔가지를 잘라내고 남은 상흔일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다 헤아리지 못한 십자가의 아픔이 왜 없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버린 마음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상처로 남은 일들이 십자가 안에는 적지 않을 것이다.

 

나무의 굵기로 볼 때 세로로 세워진 나무는 거꾸로 서 있었다. 아래쪽보다도 위쪽이 더 굵었다. 어쩌면 십자가는 위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태해도 이 땅에, 부조리한 현실에 뿌리를 박는 것이다.

 

십자가 아래쪽엔 툭 불거져 나온 부분이 있었다. 나무의 본래 모양이 그랬겠다 싶은데, 십자가를 만드는 이는 그 모양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불뚝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고, 매끈하지 않다고 나무를 버리지 않고 본래의 모양 그대로를 살린 것은 십자가를 만든 이의 십자가 묵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 십자가를 묵상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만들 수가 있겠는가.

 

툭 불거져 나온 부분이 문득 내게는 꺾인 무릎으로 다가왔다. 십자가는 무릎이 꺾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발로 서려는, 내 생각대로 하려는 그 무릎을 꺾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뒤 바라보니 툭 불거져 나온 부분과 거기에 남아 있는 나뭇결의 모양이 마치 무릎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더 못 본 것이 무엇일까 싶어 새벽예배 후 십자가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바라보았다. 꺾인 부분에 다시 눈이 갔다. 어쩌면 툭 불거져 나온 저 부분은 십자가에서 흘린 땀과 눈물과 피가 고여 있는 것 아닐까, 서로 엉겨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십자가에서 흘린 한 방울 한 방울은 모두 진액과 같아서 쉽게 떨어질 수 없었고, 몸을 타고 흐르던 땀과 눈물과 피가 저 자리에서 모여 응어리진 것은 아닐까 싶었다.

 

십자가로 인하여 내 안에 응어리진 곳은 어디일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아랫부분이 툭 불거진 채로 거꾸로 선 십자가는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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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걸어서

  • 정말로 사진에 왜 없으셨어요 ?

    이진구 2020.01.31 10:19
    • 날 때부터 걸어서 그런가 싶었답니다.

      아기를 안고 찍은 사진은 단 두 장 뿐이었습니다.

      한희철 2020.02.01 06:47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7)

 

날 때부터 걸어서

 

설 명절을 맞아 흩어져 있던 식구들이 어머니 집에서 모였을 때, 어머니가 봉투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봉투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사진 중에는 오래된 흑백사진들도 있었는데, 특히 예배당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에 눈이 갔다. 내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모두 보낸 고향교회의 옛 예배당과 새벽마다 종을 쳤던 종탑을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었다.

 

당연히 사진 속 인물들에 관심이 갔는데, 옛 예배당 앞에서 찍은 두 장의 흑백사진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이제는 93세, 하지만 사진 속 한창 젊은 어머니는 두 장 모두 아기를 안고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기가 누구인지를 떠올려보니 한 명은 바로 위의 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사진을 찍은 연도를 볼 때 형과 동생이 당연하다 여겨졌다. 마침 사진 속에 담긴 형과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보고 있는데,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는 형과 동생만 있고 나는 없었다.

 

형은 어디 갔냐는 듯이 동생이 힐끔 나를 쳐다보기에 어머니 대신 내가 대답을 했다.
“나는 날 때부터 걸어서 이런 사진이 없나 봐.”
실없는 소리를 해도 웃음으로 받아주는 날이 명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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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로또

신동숙의 글밭(66)

 

내 인생의 로또

 

 

설 명절을 지났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새해 덕담이 오고가는 연초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언젠가부터는 복을 둘러싼 인삿말도 '복을 지으세요.', '행복하세요.',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등 다양해진 모습입니다. 아마도 사람의 의식이 진화를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 더 창의적이고 멋진 덕담들이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복, 기복 신앙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 역시도 이왕이면 좋은 삶이기를 바라니까요. 가족들도 건강하고, 좋은 일들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지만, 다행인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인생의 로또, 로또를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꽝이 될지라도 혹시나 싶은 한 가닥 희망을 또다시 걸어보는 것입니다. 당첨이 된 이후의 삶이 현재보다는 더 행복해지리라는 기대감에 떨칠 수 없는 유혹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그런 기대감을 탓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조심할 점은 목표 지향적인 맹목적 추종입니다. 제 자신과 제 주변을 둘러보면, 로또 당첨에 대한 희망처럼, '내 인생에 이것만' 있으면, 내 인생도 꽃길일 텐데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오래 전에는, 대학만 졸업하면, 좋은 직장만 들어가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인생이 순탄하리라 여기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IMF를 겪으며 평생 직장에 대한 믿음도 깨어졌습니다. 이제는 명문대를 중퇴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일찍 시작한 모습들을 주위에서도 흔하게 봅니다. 평생 직장과 대학 졸업장과 자본 경제 구조에 대한 환상이 그렇게 한꺼풀씩 벗겨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요즘은 성인 뿐만 아니라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미래의 꿈이 변했습니다. 건물주가 되는 것이 꿈이랍니다. 슈퍼스타K가 된다면, 미스트롯이 된다면, 인기 아이돌이 된다면, 내 인생의 꽃길이 활짝 열릴 텐데 하며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모습들을 봅니다. 자기 자신과 함께 사는 사회와 지구 생명과 진정한 인생에 대한 충분한 자아성찰의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채, 대중의 유행에 따른 목표에 치중한 삶에서 놓쳐버리는 과정의 보석 같은 매 순간들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부의 작은 교회 목회자와 중직자들은 어느 정도 중형 교회의 모습까지 갖추기를 전교인의 기도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후부터는 교회가 알아서 돌아간다는 얘기들을 하면서요. 찬양사역자는 앨범만 나왔으면 합니다. 수단이 불순하더래도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일단 내 것으로 만들어 찬양으로 섬기면 하나님의 은혜가 다 덮어줄거라 믿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교회의 양적 성장과 앨범은 로또가 됩니다. 교회만 떠나지 않는다면 이후의 삶은 건물주처럼 꼬박 들어오는 수익과 여기저기 부름으로 교회 내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 방송 등 전파를 타기만 하면, 목회와 앨범은 날개를 단다고 믿습니다. 그는 수많은 무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먹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내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진정한 선교는 나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나게 하는 일입니다. 대중과 욕망을 따르는 그에게서 하나님과 예수의 모습은 종종 구름에 가리워집니다.

 

이단도 로또를 꿈꿉니다. 목표한 교인수만 채워지면, 이단도 정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개척 교회사가 흘러온 것처럼요. 어느 날 당첨될지도 모르는 로또처럼 교회의 양적인 성장만을 목표에 두고 달려온 대형 교회. 그리고 그런 대형 교회를 따르며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기도 제목으로 삼는 일부 작은 교회의 맹목적 추종. 반면에 소박한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며 매 순간의 삶을 영원으로,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살려는 빛과 소금이 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하나님과 예수를 봅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한 마음을 스스로가 하찮게 여기며, 과정을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욕망의 헛된 믿음의 삶. 때론 목표에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어린 양 한 마리 쯤은 짓밟아도, 진실 한 톨 쯤은 덮어버려도 아랑곳하지 않는 눈먼 종교인의 모습. 그러한 조직 안에서 숨 죽인 얕은 숨을 쉬며 가족의 안락과 자녀의 출세만을 구하는 성도들. 영혼의 깊은 숨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굴레를 돌아가느라 바쁘고 숨가쁜 종교인. 이러한 모습들 또한 그 속에 몸담은 제 거울에 비춰진 저의 부끄러운 모습 중 하나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제가 본 예수가 걸어간 복음의 길은 그런 로또와 같은 양적인 부피 성장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내세우면서도, 예수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교회 부흥의 양적 부피 성장에 눈 먼 성도들의 맹목적인 추종을 봅니다.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를 외친 전광훈 목사의 부울경(부산 울산 경남) 신년연합집회가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된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았습니다. 후원자와 참석자들을 일일이 눈여겨보았습니다. 세상도 그렇게 교회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집니다.

 

부산에서 제일 큰 수영로 교회의 교역자가 대회장입니다. 부산 고신대실용음악과 출신 트리니티 보컬 그룹이 전광훈과 한 무대에 오릅니다. 이언주 국회의원이 참석합니다. 여신도에게 '내가 팬티 내리라면 내려!' 명령하던 전광훈의 부름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형교회와 사역자들, 찬양사들, 4000석을 채우는 성도들. 전광훈이 손에 쥐고 무당의 요령처럼 흔드는 것은 성도들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있은 탐욕입니다. 내려놓지 못하는 자아, 자녀의 출세, 부와 명예, 안락함, 육신의 모든 정욕입니다. 자기를 보아주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얻는 만족감도 밖에서 오는 허상일 뿐입니다. 사랑도 행복도 모든 실체는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 모든 생명이 이에서 남이니.'

 

그것이 성령 부흥사라고 믿는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 앞에 싸늘한 눈물이 흐릅니다. '납작 엎드리!', '조직의 쓴맛을 봐야. 누가 갑이고.' 제가 한때 몸 담았던 담임 목사의 평소 언어습관도 그 조직에서 파생된 개체입니다. 예수는 조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한 명 한 명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떠나 산으로 가시던 예수의 뒷모습, 홀로 하나님을 만나시던 그 예수의 그 고독의 사랑방을 그려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더욱 노예화된, 청산되지 못한 한국 정치와 한국 경제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이 가져온 폐해와 한계는 지금껏 드러나고 있습니다. 각 개인의 행복지수가 낮습니다. 좁고 이기적인 행복이 행복인 줄로 착각하며, 제 생명이 아닌 헛된 숨을 쉽니다. 헛된 권력과 분간 못하는 거짓에 현혹된 삶을 살아가는 눈 먼 영혼의 불순함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삶.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한 알의 씨앗으로 공평하게 계십니다. 부흥 집회처럼 큰 소리 치며 밖으로부터 오는 맹신적이고 광란적인 성령이 아닙니다. 같은 집회의 자리라도 참된 목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저마다의 내면입니다. 예수가 그러했듯이요. 내 어둔 가슴 속으로부터 잔잔히 떠오르는 눈물처럼 별빛처럼 태양처럼 맑고 환한 실체입니다. 진리와 사랑과 양심의 빛으로 발하는 실체의 하나님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의 고독처럼, 고독의 사랑방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일상의 삶 속에서 저마다 내면으로부터 피어나는 자기 자신의 꽃을 피우며, 영혼의 깊은 숨을 쉬며 맑고 환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한 걸음씩 세상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에서 비로소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런 교회를 세상은 따스한 빛으로 느낄 테지요.

 

그렇게 한국교회의 부흥사에서 전광훈이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를 외치는 곳은 수많은 무리들 앞입니다. 대중은 개인을 미치게 만듭니다. 대중이 모이면 개인은 그것이 옳다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적으로 대형화된 그 조직과 권력 앞에 꼼짝 못하고 전광훈의 부름에 응하는 성도들이 어린 제 눈에는 좀비처럼 보입니다. 예수의 보혈을 몸에 발라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전광훈의 소리에만 반응하는 눈먼 좀비들. 제 의식이 초등학생 수준이라서 영화 '부산행'이 떠올랐을 테지요. 과연 전광훈의 말을 실수처럼 허물을 덮어주려는 성도의 마음이 예수로부터 난 사랑인지, 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 난 맹신인지 자세히 들여다 보십시오.

 

역사는 심판을 할 것입니다. 탐욕의 로또와 기복신앙에 대한 먹구름 같은 환상이 벗겨진 밝은 눈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고 성령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 진리의 영, 성령은 이방인이나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주신 양심입니다. 해는 어김없이 온 세상에 공평하게 떠오릅니다.  어둔 가슴에도 해가 떠오를 테고요. 그리고 저는 매일 아침 매 순간 어둡고 가난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들숨날숨마다 하나님을, 빛과 사랑의 하나님을 구합니다.

 

저 역시 어린 자녀에게 물려주기를 원하는 로또가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예수입니다. 자연 속에서 단순함과 가난함 속에서도 하나님과 예수를 가슴에 품고서 늘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자녀의 인생은 밝고 선하게 흘러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일상 가운데 잠시 멈추고! 5분, 10분 그 이상의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침묵의 기도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만 부르며, 그 시간 동안 깨어서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씻기고 씻기운 눈으로 나와 주변을 바라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느끼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괜찮은 것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 조차도 저는 그 분안에 있을 테니까요. 단지 '너희는 멈추고 하나님 나를 알라.' 시편 46편의 말씀을 따릅니다.

 

멈추고 말없이 고요한 가운데, 왈칵 뜨거운 눈물로 오시는 예수를 가난한 가슴에 모시는 일.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제 가난한 영혼이 그 충만감의 은총을 누립니다. 그 은총의 평온함을 저 혼자만 누리기에는 복 되고 복 되어서 저는 자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합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자.'고 합니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고독의 사랑방입니다. 분주한 일상 가운데 잠시 멈추고, 고독의 사랑방에 머물러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만이 행복이 아님을 존재 그 자체만으로 충만한 삶이 있으니까요. 그런 삶에는 선하고 밝고 맑은 흐름이 평화의 강물처럼 흐를 테지요. 설령 그렇지 않더래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은 지옥이래도 천국일 테니까요. 하나님을 가려버린 복이 아닌 하나님이 밝히 드러나는 복된 삶. 내 인생의 로또는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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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눈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최고인 것 같습니다.

    이진구 2020.01.29 12:51
  • 묵묵히 자기 걸음을 걷는 이들은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됩니다.

    한희철 2020.01.30 17:08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6)

 

밝은 눈

 

2020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한국이 우승을 차지했다. 열광적 까지는 아니더라도 운동을 좋아하여 두어 중계는 지켜보았다. 젊은 선수들이 참 잘한다 싶었다. 주눅 들거나 오버하지 않고 자기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학범 감독의 리더십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우승에 칭찬이 뒤따르는 것이야 인지상정이지만, 김감독에겐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고 한다. 시골 아저씨를 닮은 외모에 경기 대부분의 시간을 의자에 앉아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어(박항서 감독과는 많이 달랐다) 언제 어떤 지시를 하나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선수들은 감독을 100퍼센트 이상 신뢰한다고 하니 그 비결이 무엇일지 궁금하곤 했다.


가능하면 선수들을 골고루 기용하고, 모든 선수를 주전으로 여기며, 기용한 선수들을 충분히 신뢰하는 것이 김감독이 갖고 있는 리더십의 바탕이라고 한다. 선수로서 이름을 날리진 않았지만 좋은 지도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반갑다. 언제라도 참은 요란하지 않고, 때로는 긴 세월이 지나 드러나는 법이다.

 

 

대회가 끝난 뒤 최우수선수를 선정했는데, 우리나라의 미드필더 원두재 선수가 선정되었다. 그런 소식도 반갑다. 내가 알기로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대회 중에 골을 넣지 못했다.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축구가 골을 넣는 경기다 보니 당연히 주목을 받는 것은 골을 넣는 선수다. 그럼에도 중원의 지휘자가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는 것은, 그가 한 역할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눈에 띄지도 않고, 공격과 수비 모두에 가담을 해야 하니 궂은일이라면 더없이 궂은 일,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한 결과를 제대로 평가받은 것이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우승을 한 것도 좋지만, 원두재 선수에게 상이 돌아갔다는 것도 좋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를 눈여겨보고 그것을 인정하는 밝은 눈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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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푸르도록

신동숙의 글밭(65)

 

하늘은 푸르도록

 

 

 

 

하늘은 푸르도록
언제나 오래 참고

 

바다는 푸르도록
언제나 온유하며

 

진리의 몸이 되신
푸른 눈물 한 방울

 

달빛의 믿음으로
시린 가슴 감싸주고

 

별빛의 소망으로
한 점 길이 되고

 

태양빛의 사랑으로
한 알의 생명이 되신

 

푸르도록 맑은
한 알의 눈물

 

푸르도록 밝은
한 알의 씨앗

 

(고린도전서 13장 - 사랑장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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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농담

  • 와우~ 치명적 농담에 섬뜩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28 11:43
    • 화들짝 우리를 일깨우는 것들이요.

      한희철 2020.01.29 07:30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5)

 

치명적 농담

 

서재 구석에 꽂혀 있던 책이 있었다. 읽고 싶어 구입을 하고는 책을 펼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사 후 되는대로 꽂은 책의 위치도 하필이면 책꽂이 구석이어서 더욱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이라는 책이었다.


분량이 제법인 원고쓰기를 마치고 모처럼 갖는 한가한 시간, 우연히 눈에 띈 책을 발견하고는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쯤 읽다보니 뭔가 이상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책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내용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단어로 연결되어 그런가 싶어 눈여겨 읽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오자 아니면 탈자일까 싶어 문맥을 살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이게 뭐지 하다가 페이지를 확인했더니 이런, 페이지가 잘못되어 있었다. 16페이지 다음에 147페이지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17페이지를 찾으니 어디에 있는지를 모를 만큼 페이지는 책 안에서 서로 길을 잃고 있었다. 이름이 알려진 출판사, 11쇄인 책, 그런데도 이런 실수를 하는구나 싶었다.


책 뒷면에 있는 출판사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했더니 책을 보내주면 바꾸어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몇 페이지가 잘못됐는지를 알려달라고.

 

책 앞부분에서 만난 글 중에 시인 정호승 씨 이야기가 있었다. 머리 없는 부처상이 모여 있는 곳에 아이들이 찾아와선 장난삼아 자기 머리를 부처 위에 대보더라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정호승 시인은 부처가 목이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부처의 목을 자른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부처가 되어보라 부처 스스로가 목을 자른 것이라고.

 

치명적 농담이라는 책에서 발견한 치명적 실수, 어쩌면 그 또한 치명적 농담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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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이 되는 충만한 시간

신동숙의 글밭(64)


한 점이 되는 충만한 시간



해가 뜨면 하루를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일찌기 해가 뜨기도 전에 하루를 시작하는 분들도 계시고, 더러는 아예 낮과 밤이 뒤바뀌어서 저녁답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분들도 우리네 주변에는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득 걸음을 멈추어, 하루 중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두고 사색을 합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씻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가르치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고, 음악을 듣고, 여행을 떠나는 일은 눈에 보이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내면에도 수많은 일이 개울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기뻐하고, 좋아하고, 잘해 주다가, 욕심을 부리고, 이뻐하다가, 미워하고, 용서 못해 괴로워하다가, 아파하고, 슬퍼하고, 울다가, 비우고, 감사하고, 또다시 사랑을 하고, 마음은 그렇게 우주 만큼 커졌다가, 어느 순간 한 점이 되기도 합니다. 


책을 한 권 읽더래도 모두가 제 나름의 좋은 선택 기준이 있습니다. 재미와 유익을 주는 책을 고르기도 하고, 책 제목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끌어당기기도 합니다. 가끔은 재미보다는 의미와 가치를 우선에 두고 선택을 하다보면, 시야가 조금은 더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의미와 가치를 우선에 두는 일은 나와 너, 그리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유익과 행복이 되는 길을 선택하려는 작은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유익하고 의미있는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시간을 조용히 있는 것이 10주 동안 타자기를 치고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유익하고 더 큰 힘을 준다. 그런데도 사랑은 날마다 나를 어디론가 몰고 간다. 나는 특별히 한 것도 없고 멀리 내다보거나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평화가 나를 에워싼다.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계신다. 내 삶은 하느님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토머스 머튼,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 159쪽)

 




토마스 머튼의 심중 고백의 말이 개울물 소리처럼 가슴으로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조용히 있는 시간에 대해서 법정스님도 비슷한 얘기를 하십니다. 


"밝아오는 여명의 창에 눈을 두고 꼿꼿이 앉아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하루 일과 중에서도 나는 가장 사랑한다. 이런 시간에 나는 내 중심에 있다. 그리고 밝은 창 아래 앉아 옛글을 읽는 재미 또한 내게서는 빼놓을 수 없다. 그 속에는 스승과 친구가 있어 내 삶을 시들지 않게 한다."(법정스님,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중에서)


그리고 법정 스님은 저서 곳곳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종종 고백하십니다.

 

"일을 하고, 책을 읽는 시간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시간이 내게는 가장 충만한 시간이다."


조용히 가만히 머물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고요한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충만한 시간임을 토마스 머튼과 법정 스님의 심중 고백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점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정일 테고요. 법정 스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주 자연 만물을 두었습니다.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늘 감사하며 감탄하며 일생의 삶을 통해 무소유의 나무를 닮아가신 법정스님.


법정 스님은 그러한 순간을 두고, 텅 빈 충만이라고 얘기합니다. 토머스 머튼은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어느 지점에 계신가요? 


하루의 일과 중 잠시 멈추어 가만히 머무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머물러 숨을 고르는 시간. 저는 그 시간 속의 시간을 두고서 고독의 사랑방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한 점이 되는 충만한 시간. 


눈을 감으면 어둡습니다. 스스로가 낮아지고 작아지고 가난해져 한 알의 씨앗이 된 그 마음 자리에 들숨처럼 저절로 채워주시는 그 충만한 시간.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한 은총의 시간은 해처럼 공평해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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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년에서 촌년으로

  • 언젠가는 배달의 민족이 드론을 통하여 짜장면을 배달하는 날이 오겠죠.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27 14:49
    • 그보다는 이 땅 구석구석 다함께 잘 사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희철 2020.01.28 06:52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4)

 

섬년에서 촌년으로

 

짜장면이 배달되는 곳에서 살았으면. 오지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의 바람이 의외로 단순할 때가 있다. 특히 어린 자녀들이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첫 목회지였던 단강도 예외가 아니어서 짜장면이 배달되지 않는 곳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짜장면이 오지를 가르는 기준이 되곤 한다.

 

강화서지방에서 말씀을 나누다가 한 목회자로부터 짜장면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섬에서 목회를 해서 당연히 짜장면이 배달되지 않는 곳에서 살았는데, 이번에 옮긴 곳이 강화도의 오지 마을, 그곳 또한 짜장면이 배달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란다.




목사님의 딸이 학교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들이 그랬단다.

“섬년에서 촌년으로 바뀌었구나!”

 

고맙다, 짜장면도 배달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버티는 모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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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시간들

  • 그래도 잃어버린 것이 조금은 아쉬울 듯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26 11:42
    • 실은 많이 아쉽지요.

      한희철 2020.01.27 08:18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3)

 

빛바랜 시간들

 


첫 목회지 단강에서 지낼 때 매주 만들던 주보가 있다. <얘기마을>이란 소식지였다. 원고는 내가 썼고, 옮기기는 아내가 옮겼다. 특유의 지렁이 글씨체였기 때문이었다. <얘기마을>은 손글씨로 만든 조촐한 주보였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적었다. 내게는 땅끝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적을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의 아픔을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조심스럽게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동네에선 젊은 새댁인 준이 엄마가 주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목사님, 욕이라도 좋으니 우리 얘기를 써 주세요.” 

 

민들레 씨앗 퍼지듯 이야기가 번져 700여 명이 독자가 생겼고, 단강마을 이야기를 접하는 분들도 단강을 마음의 고향처럼 여겨 단강은 더욱 소중한 동네가 되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합한 이들도 있었고, 먼 길을 찾아와 단강마을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성탄절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잘 묶어두었던 <얘기마을> 주보를 엉뚱한 일로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첫 번째 책인 <내가 선 이곳은>을 낸 출판사에 열다섯 권의 주보묶음을 넘겼는데, 이사를 하면서 잃어버렸다고 했다.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들, 하지만 더 이상 그 시간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일까 싶었다. 남아 있는 것을 추리니 온존하지 못한 모습으로 엉성하게 모였다. 하긴, 단강에서의 시간은 마음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던 터에 최용우 전도사님이 <햇볕같은 이야기>에 단강마을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중에 단강에 들러 성탄절을 함께 보낸 전도사님으로, 문서선교를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분이다. 

 

내게는 빛바랜 시간과 다를 것이 없는 시간들, 그럼에도 그 빛이 아주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 페이스북에 한 꼭지씩 단강마을 이야기를 올리는 것은 <햇볕같은 이야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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