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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

새들에게 구한 용서 펑펑 싫도록 눈이 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가 솜이불 뒤집어 쓴 듯 조용합니다. 옹기종기 모인 짚가리가 심심한 빈들, 새들만 신이 났습니다. 온 세상 조용한데 니들만 신났구나, 빈정거리듯 돌아서다 다시 돌아서 죄 지은 듯 새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새들은 신이 난 게 아니었습니다. 흰 눈 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린 먹을거리, 먹이를 찾아 애가 탔던 겁니다. 늘 그러했을 내 눈, 쉽게 바라보고 쉽게 판단하고 말았을 지금까지의 눈, 화들짝 부끄러워 눈 덮인 빈들, 소란한 새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 1991년 2021. 11. 2.
가을잎 구멍 사이로 초저녁 노을빛을 닮아가는 가을잎 겹겹이 구멍 사이로 하늘이 눈부시다 흙으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려는 듯 한결 느긋해진 한낮의 바람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발아래 드리운 잎 그림자와 빛 그림자를 번갈아 보다가 어느 것이 허상인 지 어느 것이 실체인 지 사유의 벽을 넘나들다가 겹겹이 내 마음의 벽도 허물어진다 허물어져 뚫린 구멍 사이로 하늘이 들어찬다 2021. 11. 1.
종소리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어느 날, 학교가 파하자마자 우리는 월암리로 갔다. 작은 고개 큰 고개 제법 높은 고갤 두 개 넘어야 친구네 집이었다. 친구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가지, 타래박, 양동이, 삽, 채 등을 챙겨 들고 논으로 갔다. 웅덩이를 푸기로 했던 것이다. 우린 그러길 좋아했다. 산 쪽으로 붙어있는 포도밭 아래 제법 큰 웅덩이였다. 조금씩 줄어드는 물을 웅덩이 속 수초로 확인하며 우리는 열심히 물을 펐다. 놀란 고기들과 새우들이 물 위로 튀었다. 한참 만에 바닥이 드러났다. 우리는 바지를 걷어 부치고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미꾸라지, 붕어, 우렁, 새우 등 웅덩이 속엔 온갖 것들이 많았다. 신나게 웅덩이를 뒤지고 있을 때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한 종소리였다. 그날이 수요일이었고, 그 종은 .. 2021.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