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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

기다림뿐인 할머니의 전화 “글쎄, 이번 달엔 전화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어유. 쓴 적두 별루 읍는데.” 속회예배를 마쳤을 때 윤연섭 할머니가 전화요금 걱정을 했습니다. 조그마한 오두막집에 홀로 살고 계신 할머니가 전화를 놓은 건 재작년 일입니다. 혼자가 되신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돈을 모아 전화를 놓아 드렸던 것입니다. 눈이 어두운 어머니를 위해 전화기의 반이 숫자판으로 되어 있는 전화기를 골라 샀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 할머니는 드물긴 하지만 전화 걸 일 생기면 ‘건넌말 애덜 불러다 숫자 눌러 달라’ 하던지, ‘애덜 읍슬 땐 전에 그랬듯 딴 집 가 돈 주고 걸든지’ 그렇게 지내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거의 수신전용 전화기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런데 요금이 많이 나왔다니 얼마나 나왔을까 궁금하여 여쭙자 “삼천 원이 넘게.. 2021. 11. 20.
할머니와 함께 탄 버스 “그래두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정 품도 팔구 해서 쪼끔씩 쪼끔씩 뫄 둔 게 있었어유. 그래두 그게 몇 만원은 돼 두 늙은이 이럭저럭 썼지유.” 버스정류장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부론 지나 흥호리에 살고 계신 할머니였는데 친척 되는 분 생일이라 잠시 다녀가는 길이었습니다. 할머니께 들으니 올해 72세 되신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습니다. 그렇게 건강할 수가 없었던 할아버지가 웬일인지 2년 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이젠 아예 누워 바깥출입조차 못하시고 계십니다. “그냥 저냥 지내다 살문 살구 죽으문 죽구 하는 거지 뭐, 별 수 있나유. 돈이나 있으문 냉큼 병원으로 모셔서 되나 안 되나 치료나 받았으믄 딱 좋겠구먼.” 그저 두툼할 뿐인, 제법 낡은 털 스웨터. 듣는 얘기 탓인지 할머니가 더욱 추워 보입니다. .. 2021. 11. 19.
자괴감 김 집사님은 요즘 며칠째 다리가 아파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습니다. 뙤약볕 밑에서 고추 따다가 쓰러진 후 점점 기력이 쇠약해졌습니다. 이따금씩 들릴 때마다 집사님은 아픈 다리를 걷어 올리시며 손 얹어 기도해 달라 하십니다. 별 효험이, 아니 아무런 효험이 없는 줄 알면서도 목사라고 제 손길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기도 중에 심한 통증이 일어나 서로가 어려웠습니다. 기도하면 아픈 게 싹 가시고 낫고 해야 할 텐데, 기도하는 중에 더 큰 통증이 왔으니, 그렇게 참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 다니던 교회를 친척네 다녀와서부터 나오기 시작한 선아 할머니가 며칠 전엔 김영옥 집사님을 따라 새벽예배에도 나오셨습니다. 예배를 마쳤을 때 집사님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선아 할머니가 늘 머리가 아파 고생이니 손을 얹.. 2021. 11. 18.
흙먼지 날리는 객토작업 객토 작업을 합니다. 차라리 탱크를 닮은 15t 덤프트럭이 잔뜩 흙을 실고 달려와선 논과 밭에 흙을 뿌립니다. 땅 힘을 돋는 것입니다. 땅에도 힘이 있어 몇 해 계속 농사를 짓다보면 땅이 지치게 돼, 지친 땅의 힘을 돋기 위해 새로운 흙을 붓는 것입니다. 트럭이 갖다 붓는 검붉은 흙더미가 봉분처럼 논과 밭에 늘어갑니다. 객토작업을 보며 드는 생각 중 그중 큰 것은 고마움입니다. 그건 땅에 대한 농부의 강한 애착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농촌이 천대 받고 아무리 농작물이 똥값 된다 해도, 그렇게 시절이 어렵다 해도 끝내 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땀 흘려 씨 뿌리겠다는 흙 사랑하는 이의 눈물겨운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흙먼지 날리는 객토작업을 불편함보단 든든한 고마움으로 보게 됩니다. - 1991년 2021. 11. 17.
숨겨놓은 때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초등학교 시절 잊지 못할 일 중의 하나는 배급식량이었다. 강냉이 죽, 우유가루, 빵 등을 우린 학교에서 얻어먹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얻어먹는 맛에 즐겁기만 했던 원조 식량들, 그건 먼 나라에서 보내온 구호식품이었다. 넉넉지 못한 양식, 왠지 모를 배고픔을 우린 원조식량에 의지해 한껏 덜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5학년 때였을 게다. 그때 우리에게 지급된 구호식품은 가루우유였다. 커다란 종이부대에 담긴 구호식품 우유가 나오면 우린 한 봉지씩을 나누어 받았다. 양은그릇으로 하나씩 나누어 주는 일은 반장인 내 몫이었다. 차례대로 한 사람씩 우유를 퍼 주다보니 자루가 점점 줄게 되었고 나중에 자루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몸을 옆으로 숙여 깊숙이 손을 집어넣고 우유를 펴내느라 애쓰고 있을 때 선.. 2021. 11. 16.
빵 배달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그때 우리에게 지급된 간식은 빵이었다. 그 또한 원조 식량이었는데, 겉이 우툴두툴하고 딱딱한 곰보빵이었다. 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그저 밀가루를 구워 만든 빵이지만, 그건 훌륭한 간식이었다. 3학년 우리의 교실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관사라 불리던 일본식 집 한 채와 그 옆에 붙은 큰 차고가 언덕배기 예배당 아래쪽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 창고를 개조한 것이 우리 반 교실이었다. 6.25때 맞았다는 총탄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반만 떨어져 있다는 오붓함에 불편함을 몰랐다. 간식 빵은 언제나 점심시간에 운반해 오곤 했다. 그날도 친구와 함께 학교로 넘어가 양동이 가득 빵을 담아 우리 교실로 오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몇몇 형들이 빵 몇 개를 .. 2021. 11. 15.
“야, 야, 얘들 나와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나와라!” “야, 야, 얘들 나와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나와라!” 거의 매일 저녁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았다. 그 일은 언제나 숙제를 먼저 마친 아이들 몫이었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면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 제법 마당이 넓은 나무로 된 전봇대 아래, 우리가 늘 모이는 곳은 이내 아이들로 북적댔다. 그렇게 모인 우리는 만세잡기, 술래잡기, 다방구 등 신나는 놀이를 했다. 매일 해도 정말로 신이 나는 놀이들이었다. 그 놀이는 어둠이 한참 깔려서야 끝이 나곤 했다. 상호야, 웅근아, 호진아, 병세야, 저녁 먹으라 불러대는 엄마들 목소리가 또 한 차례 동네를 울리고 나서야 아쉽게 놀이가 끝나곤 했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그 소리들이 남아있다. 매일 저녁 동네를 돌며 애들 나오라.. 2021. 11. 14.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들 1원이면 주먹만 한 눈깔사탕이 두 개였다. 박하향 진한 하얀 사탕을 입이 불거지도록 입안에 넣으면 행복했다. 그러나 그 1원짜리 구리 동전 한 개가 아쉬웠다. 학교로 가는 길목엔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번 발길질에 솔 씨들은 춤을 추며 제법 날렸다. 점 찍힌 듯 박혀있는 까만 솔 씨들을 잘도 빼먹었다. 노란가루로 날리기 전, 한참 물오른 송화도 마찬가지였다. 쉽지 않은 그 맛을 즐겼다. 찔레순도 흔했고, 제법 높다란 학교 옆 벼랑을 따라서는 산딸기도 탐스럽게 매달리곤 했다. 초봄 잔설이 남아있는 산에 올라선 마른 칡 순을 찾아 칡뿌리를 캤다. 이 사이에 씹히는, 동글게 느껴지는 알칡의 맛을 입이 시커멓도록 맛보았다. 집 뒤뜰 언덕배기엔 돼지감자가 있었다. 가죽 벗겨내듯 언 땅을 들어내면 올망졸망한 .. 2021. 11. 12.
사라진 우물, 사라진 샘에 대한 이 큰 아쉬움이라니! 어릴 적, 동네엔 우물이 있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깊이가 제법 깊은 우물이었다. 우리는 우물 속에 얼굴을 비춰보기도 했고, ‘와!’ 소리를 질러 메아리로 돌아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두레박에 물을 채운 뒤 누가 손을 적게 쓰고 물을 끌어올리나 시합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들은 쌀이며 나물을 가져 나와 씻었고, 간단한 빨래도 했다. 우물은 좋은 냉장고도 되어 오이나 토마토를 우물 속에 집어넣기도 했다. 그런 뒤 꺼내 먹으면 시원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둥둥 떠 있는 오이와 토마토를 두레박에 담는 데는 나름대로의 기술이 필요했다. 한여름에는 윗옷을 벗고 등물하기도 좋았다. 이따금씩은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우물물을 푸기도 했다. 커다란 통에 줄을 매달아 물을 푸고, 거의 바닥이 들어날 쯤이면.. 2021.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