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78)

 

베들레헴의 우물물

 

수확을 시작할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평원에 진을 치니, 삼십인 특별부대 소속인 이 세 용사가 아둘람 동굴로 다윗을 찾아갔다. 그 때에 다윗은 산성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다윗이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였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그러자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길어 온 물을 주님께 부어 드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이 세 용사가 바로 이런 일을 하였다.(사무엘하 23:13-17)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것을 보면 아직 그가 절대왕권을 수립하기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수확철은 언제나 전쟁의 시기였다. 수확물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철병거로 무장한 블레셋이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다윗은 적의 수중에 떨어진 고향이 그리워서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하지만 삼십인 특별 부대에 속한 이들 가운데 세 명의 장수는 다윗의 그런 탄식을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친다. 

 

보기 드문 충성이고 용기이다.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을 통해 그들이 새 삶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동굴’에 피신하고 있던 다윗을 찾아갔다고 말한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름을 받았던 때의 첫 마음을 잃은 채 전제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다윗은 잠재적인 적으로 분류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아둘람 굴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사무엘상 22:2)이 모두 다윗에게 몰려왔다. 다윗은 어려움에 처해 있던 그들을 세심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다. ‘뿌리 뽑힘’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었다. 세 장수는 자기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준 다윗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휘하 장수들이 떠온 물을 차마 마실 수 없었다. 그 물은 그들의 피와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물 한 잔의 유혹 때문에 부하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다윗은 아뜩해졌다. 다윗은 그 물을 주님께 부어드리면서 말한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17절) 여기서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제가 어찌 감히’라는 구절이다. 바로 이 마음이 다윗을 다윗 되게 한 마음이다. 그는 부하들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다윗이 물을 땅에 부어 주님께 바치는 순간, 그 장수들의 가슴에 감동이 찾아들었을 것이다. ‘아, 우리를 이렇게도 아끼시는구나!’ 그들을 묶었던 연대의 끈이 더욱 튼실해졌을 것이다.

 

사무엘서 기자가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삽입한 것은 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 ‘모두의 생명이 소중하다.’ ‘생명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다.’ 물을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다윗은 해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었다.

 

*기도*

 

하나님, 삶이 고달플 때마다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알지 못해 방황합니다. 그곳에 가면 스산했던 마음이 따뜻해지고, 삶의 원기가 회복되는 곳 말입니다. 전장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다윗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었던 것은 그의 속에 깃든 외로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부하들의 헌신을 통해 다윗은 자기 본분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한정없이 방황할 때, 주님, 우리 마음을 원위치로 되돌려줄 벗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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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7)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 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이다.(출애굽기 23:9)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잠시 집을 떠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고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자기의 고향을 떠나 낯선 외국인들 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가슴 시린 일이었을 것이다.

 

‘게르’ 곧 ‘나그네’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살아가는 개종자였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차마 홀로 버려둘 수 없어서 자기 고향인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이주한 여인이다. 룻은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철저히 동화된 이들을 게르 체덱(ger tzedek)이라 한다. 

 

이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이스라엘에 동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살았다. 토라는 이들을 게르 토샤브(ger toshav)라고 부른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거의 밑바닥 수준이었다. 안식일 규정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에 쉬어야 할 대상을 죽 열거한다. ‘너희’, ‘너희의 아들이나 딸’,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 ‘너희 집짐승’, 그리고 마지막이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출애굽기 20:10)이다. 고대 세계에서 나그네는 정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토라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나그네, 즉 사회적 약자들에게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두려움에 떨거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성결법전에서 하나님은 ‘게르’에 대한 생계 대책을 세우라고 엄중하게 지시하신다. 곡식과 올리브 혹은 포도를 거두고 남은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몫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삼년에 한 번씩 거두는 십일조도 그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나그네들을 잘 돌보라 하신 것은 그들이 나그네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좌절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좌절하는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할 수 있지 않던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그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 그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해방자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 복받는 길이기도 하다. 신명기법전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을 배불리 먹일 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신명기 14:29)

 

*기도*

 

하나님, 세상이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이 거침없이 내뱉는 욕설과 냉소가 우리 가슴을 멍들게 만듭니다. 가슴에 멍이 든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함부로 대함으로 보상을 얻으려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생의 곤경에서 벗어날 길 없는 이들이 폭력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나그네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세심하게 돌보라 명하십니다. 그 명령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들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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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6)

 

힘을 내어라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개 2:4-5)

 

규모의 문제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때가 많다. 어느 시인은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 했다. 모든 가치가 숫자로 환원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성적, 점수, 연봉, 재산, 아파트 시세에 목숨을 건 것처럼 보인다. 숫자 앞에서는 우정도 박애도 인간적 친밀함도 뒷전으로 밀려난다. 아름다움과 몸까지도 숫자로 관리되기에 피트니스 센터는 새로운 신전이 되었다. 체중, 몸매, 체질량을 전문가의 손에 맡겨 관리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몸과 마음은 이렇게 하여 자본주의 질서에 확고히 포획된다.  

 

신앙인들조차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가르고, 교회의 크기에 따라 목회자들의 계급 관계가 만들어진다. 큰 교회 목사들은 신앙적 깊이나 인간적 품격과는 관계없이 발언권을 독점하고, 작은 교회 목사들은 이유 없이 주눅 들어 지낸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했던가?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 숫자를 늘리면 그들은 유능한 목사라 인정받는다. 저마다 백향목이 되어 모든 나무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한다. 겨자풀들의 천국을 가르쳤던 예수님은 오늘의 교회에서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들은 성전을 지음으로 삶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 뜻은 장했으나 척박한 땅에서의 생존이 어려워지자, 환멸이 찾아왔고 성전 건축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사는 것이 힘겨운 판에 성전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학개는 성전을 포기했기에 삶이 어려워진 것이라 말하며 성전 건축을 독려한다. 뜻이 바로 서야 삶도 회복된다는 것이다. 학개의 독려를 통해 성전 건축 공사가 재개되었다. 성전 터가 정비되고 기초가 놓일 때 옛 솔로몬 성전의 영화로움을 기억하던 이들은 그 초라한 규모를 보고 통곡한다. 그들의 울음은 다른 이들까지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건만, 사람들은 규모에 집착한다. 그때 학개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러나 스룹바벨아, 이제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아,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학개 2:4)

 

‘힘을 내어라’라는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여호와의 확언이다. 에스겔은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솔로몬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성전 혹은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학대받은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건재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면 대체 주저할 것이 무엇이랴. 세상에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을 뿐이다.

 

*기도*

 

하나님,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을 때 주님은 그 성전의 무너짐을 보셨습니다. 진리를 권위로 바꾸고, 거룩을 이익으로 바꾼 성전 혹은 교회는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땅에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이 두려운 진실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교회만이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늘 망설이면서 실행의 시간을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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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5)

 

사랑은 제자됨의 징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요한일서 5:1-5)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셨다는 확신과 더불어,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성취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전형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 의식이다.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늘 깨어 있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과 대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웃들의 고통에 민감한 분이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마태복음 9:12)는 말은 주님의 삶의 방향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말이다.

 

맹자는 공자를 가리켜 ‘성지시자(聖之時者)’라 하였다(孟子, <萬章 下>). 공자는 성인 가운데 시중(時中)의 도리를 지킨 분이라는 뜻이다. ‘시중’이란 ‘수시처중(隨時處中)’이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때에 따라 가장 적절하게 처신한다는 말이다. 어떤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삶의 핵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이야말로 시중의 삶을 사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세상 사람들 앞에 온전히 드러내셨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現-存在’(Dasein)이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명에 대한 ‘아멘’이었다. 사랑에 근거한 순종이기에 비애가 남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역시 그 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주님이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다.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랑은 수고를 전제한다. 수고 없는 사랑의 고백은 허사일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옥이란 다름 아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사랑할 수 없음이 지옥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사랑에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된다. 좋은 식당에 가면 웨이터들이 늘 손님들의 식탁을 주목하고 있다가 물 잔에 물이 떨어지면 곧 다가와 물을 채워준다. 낯선 나그네들을 영접했던 아브라함도 그들이 먹는 동안 서서 시중을 들었다지 않던가(창세기 18:8).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 잔을 비워낼 때 하나님은 그것을 넉넉히 채워주신다. 이런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주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기도*

 

하나님,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사랑받기를 구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 속에 깃든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깨어나게 합니다. 주님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맞아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이셨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을 누리지 못한 이들의 가슴에는 차가운 얼음이 자랍니다. 그 얼음은 두려움과 냉소 혹은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주님, 따뜻한 봄볕이 만물을 깨우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세상에 봄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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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4)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히브리서 13:20-21)

 

수필 문학을 한 차원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윤오영 선생이 들려주는 ‘방망이 깎던 노인’ 이야기는 시간에 쫓겨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어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는 아주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린다. 동대문 맞은 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한다. 방망이 한 벌을 깎아달라고 부탁하자 노인은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이리 저리 돌려보며 굼뜨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 했다. 차 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저 달라고 해도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되나”라고 퉁 치고 말았다. 자꾸 재촉을 하다가 포기한 화자에게 노인은 말했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결국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불쾌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방망이를 본 아내는 칭찬 일색이었다. 제대로 된 방망이를 사 왔다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편지의 수신인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바친다.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히브리서 13:20-21a) 신앙생활의 과정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깎고, 자르고, 두드리고, 문지르는 일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하나님이 주도하시지만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최선과 인간의 최선이 만나 이루어지는 법이다.

 

좋은 방망이를 얻었다고 기뻐하는 아내에게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고 하자 아내는 이렇게 응대한다. “배가 너무 부르면 힘들어 다듬다가 옷감을 치기를 잘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가 쉽다.” 정성을 다해 깎은 방망이라야 제 역할을 잘 감당하는 법이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는 일은 죄뿐이라면서 어쩌다 선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통찰한 이의 말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일을 이루기 원하신다. 아름다운 일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생명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하는 일임을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다듬질하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은 은총의 시간이다.

 

*기도*

 

하나님, 세월의 더께가 앉은 우리 영혼은 죄에 대해 아주 둔감하게 변했습니다. 영적 민감함을 잃었기에 세상에 만연한 아픔을 보면서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욕망 둘레를 맴돌며 근근이 살아가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함께 병든 세상,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그 부름에 응하고 싶습니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일체의 군더더기들을 걷어내 주시고, 주님의 마음과 꿈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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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3)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9:23-24)

 

예레미야는 멸망이 목전에 닥쳐왔는데도 허망한 자랑에 빠진 이들에게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렘9:23)라고 충고한다. 겸허함을 모르는 ‘지혜’는 다른 이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힘’은 자기의 의지를 타자들에게 강제하고픈 욕망으로 이어지고, ‘재산’은 과시적인 소비의 욕망을 부추긴다. 

 

자랑하는 마음의 뿌리에는 열등감이 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지혜와 힘과 재산은 그들이 중요한 사람임을 입증해주는 전리품이나 마찬가지이다. 반면 내면이 충실한 이들은  굳이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적으로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프랑스 사상가인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매개되어 있다고 말했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 무엇을 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마음의 뿌리에는 그것을 이미 누리고 있는 이들에 대한 선망의 감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망의 감정이 지배할 때 우리는 부자유 속에 살 수밖에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인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삶을 모방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방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긍휼, 공평, 공의라는 세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긍휼은 몸으로 표현되는 사랑 혹은 사랑으로 가득 찬 친절함이고, 공평은 회복적 정의를 가리킨다. 공의는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견결한 태도이다. 하나님은 엄중하신 동시에 부드럽고, 상처입은 세상과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시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신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이것 뿐이다. 

 

 

 

모제스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는 중세 최고의 철학자이자 랍비였다. 그는 <당황하는 이들을 위한 지침>(The Guide for the Perplexed)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존재, 인간 인식의 한계, 악의 문제 등을 다뤘다. 주제가 어려운 만큼, 내용도 어렵다. 책의 말미에 그는 자기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한다. 그게 바로 예레미야 9장이다. 고도의 지적인 사색을 거쳐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 책을 쓴 후 그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처럼 행동할 수는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지혜는 하늘을 향한 발돋움이지만 결국 그것은 땅에서 바로 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해 병든 이들을 고쳐 주었고, 고민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해결책을 제시했다. 또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기도*

 

하나님, ‘타인의 시선이 나를 타락시킨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참 적실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고, 가식적인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세상에 적응하느라 지쳤습니다. 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습니다. 헛된 자랑거리를 추구하던 삶에서 돌이키고 싶습니다. 긍휼과 공평과 공의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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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2)

 

하와의 복권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창세기 3:17-21)    

 

성경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하와이다. 하와의 이름은 언제나 ‘선악과’, ‘타락’, ‘유혹’과 결부되곤 한다. 순진한 아담을 꾀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위반하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종교학자들은 유혹과 하와를 연결시키는 것은 여성이 갖고 있는 신비한 매력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하와는 히브리어로 ‘생명’이란 뜻의 하야(hajja)에서 유래된 단어(라틴어 Eva)로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어떤 학자는 그 이름이 고대 히타이트 족의 천둥신의 아내인 헤바(Heba)와 연결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창세기 기자는 하와에게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영예스러운 호칭을 부여하고 있다. 타락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하와’가 복권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아담이 인류의 첫 사람인 동시에 우리 모두를 의미하듯이, 하와는 생명을 북돋고 살리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든 사람의 이름이다. 하와는 ‘여성적 원리’를 드러낸다. 남성들이 주도해 온 세상은 지배, 정복, 경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긴장과 의구심을 거둘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 평화의 열매를 거두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문화는 배려, 공감, 보살핌, 양육, 협동의 원리 위에 세워진다. 여성들을 그런 역할에 고정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여성들은 계급적으로 위/아래를 나누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돌보는 일은 자비의 심성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훨씬 가깝다. 나희덕 시인은 아기를 낳은 후 젖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과 수시로 찾아드는 오한 속에서 밤을 보내야 했는데, 어머니가 곁에서 밤새 뜨거운 찜질로 젖망울을 풀어주려고 굳었던 가슴을 쓸어주시며 기도하시더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땀이 시인의 가슴을 흔들어 깨웠고,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뭔가가 솟구쳤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사랑이 딸의 가슴에 잠들어 있던 ‘어머니 성’을 불러낸 것이다(<해빙>)

 

이런 기적은 여성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이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홀로는 할 수 없기에 여성들은 다른 이들과 협력하는 데도 익숙하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기독교인이라면 다른 의미의 ‘하와’ 즉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복음 10:10b)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하와의 마음이 아름답게 조응하고 있다.

 

*기도*

 

하나님,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우리는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유동하는 공포가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친절하고 따뜻한 얼굴과 만나면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복해집니다. 주님, 우리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하와’를 깨워주십시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 곧 하나님에 대한 예배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도록 우리 마음을 하늘빛으로 채워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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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이 된 사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복음 13:12-15)

 

김흥호 목사는 스승을 산과 같은 존재라 말한다. “사람은 산을 보다가, 산을 걷다가, 산이 됩니다.” 놀라운 말이다. 한국의 한 등반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것을 보고 쓴 글 속에 그가 생각하는 스승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세계의 정상 히말라야 정상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무서운 빙벽과 고요한 빙호(氷湖)와 넘치는 빙하가 8,848m 에베레스트의 모습이다. 옛 사람은 이 산을 설산(雪山)이라 했고, 이 설산은 가끔 스승에 비유되었다. 위대한 스승에게는 빙벽과 같은 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는 무서운 정의감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얼음같이 차가운 참과 거짓을 판가름하는 고요한 진리감이 깃들어야 하고, 빙호같이 넘치는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자비감이 흘러내려야 한다. 무서운 정의와 고요한 진리와 넘치는 자비가 하나가 될 때 위대한 스승은 이루어진다.”(설교 ‘스승의 특징’ 중에서)

 

무서운 정의, 고요한 진리, 넘치는 자비가 한 존재 속에 구현될 수 있을까? 예수는 바로 그런 분이었다. 권력 앞에 당당하여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고, 진리를 구현할 뿐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슬픔을 품어 안으셨다. 예수님을 스승이라 하면 어떤 이들은 모욕감을 느낀다며 항변한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스승으로 격하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 아니고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스승은 길이 된 사람이고, 참 생명이 된 사람이고, 진리의 화신이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 베드로가 이건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항변했지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요한복음 13:8)고 말씀하신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은 채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모습은,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적시던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모든 계층화된 질서의 전복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당신을 배신할 유다의 발까지 닦아주셨다. 영혼의 깊은 어둠 속을 방황하던 제자의 번민까지도 용납하고 품어 안으신 거룩한 사랑이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후 예수님은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앉으셨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요한복음 13:14). 발을 씻겨 준다는 것, 그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연약함과 슬픔, 못남과 허물까지도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이러한 비상한 실천을 통해 열린다. 주님은 말로 가르치는 분인 동시에 삶으로 본을 보이신 분이다. 본받을 이가 없는 인생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예수를 본받을 때 삶이 맑아진다.

 

*기도*

 

하나님,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애써보지만 우리는 번번이 습관의 폭력 앞에서 무너지곤 합니다. 주님을 따라 살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작은 타격을 받는 순간 무너지곤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는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못났다 책망하지 않으시고 끝없이 용납하시는 그 사랑을 감당할 길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를 사랑으로 전복시키십니다. 이제 우리도 그 사랑을 품고 누군가의 발을 닦아줄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속에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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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 나귀를 매개로 하여

 

너희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3:4-5)

 

성정이 다르고 지향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소한 차이가 관계를 어렵게 만들곤 한다. 욕정을 품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문제는 갈등이 ‘함께 함’에 대한 회의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다른 이들과 등을 돌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화해의 연습이 필요하다.

 

토라는 화해를 가르치기 위해 구체적인 상황 하나를 제시한다.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들짐승의 먹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짐승이 잘 아는 사람이나 가까운 이들의 소유라면 우리는 얼른 그 짐승을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이다. 짐에 눌려 쓰러진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주인을 잘 모른다 해도 그 딱한 광경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만약 그 짐승의 주인이 원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해관계가 얽혀 사이가 나빠졌든, 삶의 방식이 너무 달라 비위가 맞지 않는 사이이든, 원수의 불행은 그다지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원수의 것이라 해도 길을 잃고 헤매는 짐승을 보거든 반드시 임자에게 돌려주고, 짐에 눌려 쓰러진 짐승을 보거든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를 도와 나귀를 일으켜 세우라는 것이다. ‘반드시’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요구가 아니다. 우리가 모름지기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그것이 치유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길을 잃거나 무거운 짐에 눌려 쓰러진 ‘원수의 짐승’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내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모습을 보면 ‘잘 됐다’,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당연한 것으로 혹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 마음에 고착되는 순간 인간적 성장은 멈추게 마련이다. 비록 적대감이 그와 나를 갈라놓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수를 직접적으로 돕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토라는 가여운 처지에 빠진 동물을 매개로 하여 화해를 모색할 지혜를 발휘해보라고 말한다. 꼭 동물이 아니라도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우리를 이어줄 끈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곤란에 처한 원수를 돕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돕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속에 있는 쓴 뿌리, 즉 악한 경향을 극복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화해의 용기를 발휘할 때 우리는 더욱 커진다. 

 

*기도*

 

하나님, 마음 내키지 않는 이들과 함께 지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장소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마음이 무거울 때는 그런 이들이 없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 살고 싶다는 헛된 꿈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지낼 수 없는 게 세상 현실입니다. 주님, 낯선 이들을 존중하는 열린 마음을 심어주십시오. 고통과 시련을 함께 감내하면서 서로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사랑에 당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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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오뎃

 

사마리아에 오뎃이라고 하는 주님의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가, 사마리아로 개선하는 군대를 마중하러 나가서, 그들을 보고 말하였다. “주 당신들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붙이신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당신들이 살기가 등등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남녀들까지 노예로 삼을 작정을 하고 있소. 당신들도 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당신들은 이제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시오. 당신들이 잡아 온 이 포로들은 바로 당신들의 형제자매이니, 곧 풀어 주어 돌아가게 하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당장 당신들을 벌하실 것이오.”(역대하 28:9-11)

 

스무 살에 유다 왕이 된 아하스는 열여섯 해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통치를 역대지 기자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는 한 마디로 요약한다. 그는 풍요와 다산을 보장해준다는 바알을 섬겼고,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나라 사람들이 섬겼던 신들에게 절을 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하나님께서 보호를 철회하자마자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다. 약탈이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포로로 잡혀간 이들도 많았다. 포로가 된 이들의 미래는 어둠 그 자체였다. 희망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희망은 늘 예기치 않은 곳에서 피어난다.

 

이스라엘에는 아직 깨어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뎃’이라는 예언자였다. 그는 사마리아로 개선하는 군대를 맞이하러 나가서 준엄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치시도록 허락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행태는 도를 넘었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살기가 등등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남녀들까지 노예로 삼을 작정을 하고 있소. 당신들도 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역대하28:9b-10).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이들에게 오뎃은 찬물을 끼얹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 30장에서 인간 세상에서 전쟁이 없을 수는 없다고 시인한다. 그는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때,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전쟁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고(故)로 선자(善者)는 과이이(果而已)요 불감이취강(不敢以取强)이라.” ‘목적을 겨우 이룰 따름이요 감히 강함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패전한 나라에 대해서 지나치게 가혹하게 대하지 말아야 하고, 또 스스로 강해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뎃은 이스라엘 군대가 부르는 승전가 속에 깃든 오만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군대 지휘관들에게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고 말한다. 오뎃은 그들이 포로이기 이전에 언약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징계가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추상과 같은 오뎃의 가르침에 에브라임의 지도자 네 사람이 깊이 공감하고 군대를 막아섰다. 자칫하면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군인들은 포로와 전리품을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넘겼고, 에브라임의 네 지도자는 전리품을 풀어 헐벗은 이는 입히고, 맨발로 끌려온 이들에게는 신을 신기고, 음식을 나눠주고, 상처 입은 이들은 치료해주고, 환자들은 나귀에 태워 돌려보내주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 시대에 벌어진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모든 일은 눈 밝은 사람 하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용기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앙적 양심에 따라 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 또한 많지 않습니다. 모처럼의 승전을 기뻐하며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군대를 막아서는 것, 그들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불의를 보면서도 비겁한 침묵 속에 머물지 않도록 우리 속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그리고 고통 받는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낼 눈을 열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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