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33)

 

풍요로움이라는 시험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전하여 주는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신명기 8:11-14)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계의 말씀을 전하신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후대에 기록되었음을 감안할 때 이 말씀의 삶의 자리는 출애굽 공동체가 아니라 정착생활에 익숙해진 백성들의 삶이라 할 수 있다. 12절부터 14절까지의 문장 구조는 “Ⓐ 할지라도 Ⓑ 하지 말라”가 된다. Ⓐ에 들어갈 말은 다양하다. ‘배불리 먹다’,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다’, ‘소와 양이 번성하다’, ‘은과 금이 많아져서 재산이 늘어나다’ 등이 그것이다. 그에 비해 Ⓑ에 들어갈 말은 하나이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가 그것이다. 이런 경고가 주어진 까닭은 하나님을 잊는 일이 현실 속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은 것은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신학자는 사람은 삶을 위한 도구를 바꿀 때 하나님까지 바꾼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고통의 시험보다 더 이기기 어려운 것이 풍요의 시험이다. 텍스트를 꼼꼼히 살펴보면 Ⓐ와 Ⓑ를 매개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한 마음’이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여전히 유통되는 것은 이런 현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능력, 경험, 판단, 결단을 자랑한다. 말은 겸손해도 그 얼굴에 깃든 득의의 표정이 그의 교만함을 드러낼 때가 많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이들 가운데는 자기 자랑을 하나님의 은혜로 덧칠하는 이들도 있다.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무시한다. 그 때문에 그가 있는 곳에서는 불화가 끊이질 않는다. 그 불화 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존 웨슬리는 수입이 늘어도 생활비 지출은 늘이지 않았다고 한다. 청빈한 마음은 청빈한 삶에서 비롯된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지바고가 하얗게 성에 낀 창문 아래서 촛불을 밝혀놓고, 손가락을 잘라낸 장갑을 낀 채 손을 호호 불며 시를 쓰던 장면이다. 세상에는 그렇게 정신의 칼날을 서늘하게 세우며 사는 이들이 있다. 

 

신명기 사가는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잊을 때 욕망의 지배가 시작되고 영혼의 전락이 가시화된다. 히브리인들을 종살이 하던 땅에서 이끌어내 자유의 새 삶으로 이끄신 해방자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을 미워하신다. 스탠리 머피(Stanley Murphy) 신부의 말은 그런 점에서 시사 하는 바가 많다. “누구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든 신성한 실재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순간 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무한하게 커진다.”(존 하워드 그리핀, 『블랙 라이크 미』에서 재인용) 하나님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죄의 심연에 이끌린다.

 

*기도*

 

하나님, 삶이 곤고할 때면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절박함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삶이 평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곤 합니다. 하나님을 잊기에 이웃들의 절박한 소리에도 귀를 닫고 삽니다. 좋은 집에 살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이 하나님을 잊는 빌미가 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주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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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32)

 

영적인 듯 보이나 육적인 사람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마가복음 3:1-6)

 

어느 안식일에 벌어진 일이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그를 고쳐주실 것인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남의 허물을 찾기 위해 몰래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은 얼마나 병적인가? 그들의 눈에는 병자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사회적인 불편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다른 이들이 겪는 구체적인 아픔은 늘 남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해석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다만 그들의 동행이 되고 돌보아 주셨을 뿐이다. 이것이 당시의 종교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였다.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자기 의’이다. 거짓 종교의 특색은 우리의 자아를 부풀려 준다는 것이다.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는 말이다. 거짓된 자아를 강화하는 데 종교처럼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남을 정죄하는 데 재빠르고, 편협하고 공격적인 이들이 많다. 외적으로 보면 그들은 좋은 신자이다. 집회에 빠지는 법이 없고,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고, 전도에도 열심이다. 하지만 그런 열정이 ‘사랑과 온유와 겸손’에 기초하지 않을 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은 영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육적인 사람들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가 이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보면 된다. 

 

체로키 족 인디언인 ‘Little Tree’는 할머니로부터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가려내는 방법을 배운다. 육적인 생각에 집착하는 사람의 영혼은 완두콩 크기만큼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한다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인간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여자를 볼 때도 추잡한 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타인을 볼 때도 나쁜 면밖에 볼 줄 모르고, 나무를 볼 때도 아름다움을 잊은 채 목재나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밖에 볼 줄 모르게 된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세상을 걸어다니지만 사실은 죽은 인간들이다.”(시애틀 추장 외,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80쪽)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하신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살았던 그가 난생 처음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물으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4) 이 질문에 직면하여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이들이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주님은 그 병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심으로 그를 고쳐주셨다. 안식일의 의미가 실체화되는 순간이었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보면서 우리는 때때로 아파하지만, 대부분의 순간 덤덤하게 그런 일들을 바라보곤 합니다. 고통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다가는 스스로 견딜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딱딱한 껍질로 자기의 여린 속을 보호하려는 갑각류처럼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추기보다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석하려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모든 아픔에 다 반응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의 신음에는 응답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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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31)

 

주님은 나의 희망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예레미야 애가 3:19-24)

 

조국의 패망을 목도한 애가의 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았으며, 빛도 없이 캄캄한 곳에서 헤맸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가난과 고생으로 그를 에우시고,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까지 채우셨을 뿐 아니라, 소리 높여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마치 엎드려서 사람을 노리는 곰이나 사자와 같다고 했겠는가.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을 과녁으로 삼아서 활을 당기시는 것 같고, 마치 돌로 이를 바수고, 그의 얼굴을 땅에 비비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쓴 쑥과 쓸개즙이 입 안에 가득한 듯한 형국이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입술을 비어져 나오는 것은 탄식뿐이다. 그의 삶에서 빛은 사라졌다. 고난의 현실을 잠시도 잊을 수 없기에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울적하다는 뜻의 ‘멜랑콜리’(melancholy)는 그리스어로 ‘쓸개즙’(담즙)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다. 중세에는 멜랑콜리를 종교적인 신념을 좀먹는 병적인 현상으로 여겨 죄악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멜랑콜리는 자기 성찰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 질병과 실패, 공허감이나 권태, 무력감이 찾아올 때 그것을 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의 부정적 계기들은 우리 삶에 덧붙여진 군더더기를 걷어내라는 하늘의 신호인지도 모르겠다. 애가의 저자는 울적함 속에서 곰곰이 자기를 돌아본다. 그러다가 자기 속에 있는 희망의 뿌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예레미야 애가 3:21-22)

 

너무나 갑작스런 분위기의 반전이다. 마치 단조(minor key)로 이어지던 노래가 갑자기 장조(major key)로 바뀐 것 같다.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기억의 회복’이다. 기억은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의 생각을 더 큰 세상과 접속시켜준다. 삶은 언제나 힘겹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난관을 헤치며 여기에 이르렀다. 고독한 순간은 있었지만 홀로 버려진 적은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린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처할 때도 있었지만, 그 고통의 시간에도 하나님이 곁에 계셨다. 행복의 날도 지나가지만 고통의 날도 지나간다. 하지만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기억해내는 순간, 고통은 나 홀로 견디어야 하는 아픔이 아님을 알게 된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의 나의 희망!”(예레미야 애가 3:23-24) 이 말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긴 사람은 절망의 어둠 속에 유폐되지 않는다.

 

*기도*

 

하나님, 은총의 날개 아래 우리를 품어 주십시오. 삶의 곤경에 직면해서야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약함과 강함이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휘저어놓곤 하는 일들이 매일 매일 벌어집니다. 지금 눈물의 골짜기를 거닐고 있는 이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차마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너진 이들 속에 하늘의 빛을 비춰주십시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속에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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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30)

 

길을 찾는 사람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립보서 3:7-11)

 

바울은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 영적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느라 늘 노심초사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선망하는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다. 명문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에다가,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이전에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심지어는 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이전에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은 한결같이 그의 자아를 강화해주는 것들이었다. 가문, 학식, 신분, 종교적 열심…. 이런 것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소중한 것들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많다. 신앙이란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과정이다. 자랑스러운 게 많은 사람 속에는 하나님을 모실 공간이 부족하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바울의 내면에 비쳐드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게 지푸라기 강아지(芻狗)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늘 막힌 듯 답답하던 정신의 지평이 툭 트였다. 

 

 

 

 

그 때부터 그는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어떤 고난도, 시련도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벗어던지려고 했던 약함과 고통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겼다. 자신의 약할 때가 곧 주님의 은혜가 유입되는 순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움과 해로움이 이렇게 자리를 바꿨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말하지만,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5:10)라고 고백한다.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사람들은 바알과 맘몬을 숭배하고 있다. 한완상 박사는 한국의 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교회의 위기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이렇게 분석한다. 

 

“교세의 양적 팽창과 대외적 선교열을 그토록 자랑하는 한국 교회와 교인의 삶 속에서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위기라 하겠습니다. 그분의 체취, 그분의 숨결, 그분의 꿈, 그분의 정열, 그분의 의분, 그분의 다정한 모습을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밑바닥 인생의 그 억울한 고통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사랑과 공의의 새 질서를 몸소 보여주셨던 갈릴리 예수가 더욱 그리워집니다.”(『예수 없는 예수 교회』, 7쪽)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 거룩한 지향을 다시 회복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이웃들과 더불어 생명의 춤을 추며, 살아 있음을 경축하며 살고 싶습니다. 기쁘게 일하고, 신나게 놀고, 뜨겁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잿빛 우울에 감싸여 있습니다. 세상의 인력이 하늘을 향해 도약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곤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진정한 자유인이 된 바울 사도가 부럽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기다리오니, 성령이여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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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29)

 

홀로 그리고 함께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9-12)

 

서양의 정신사는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자유란 남들에게 아무 것도 강제당하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자기의 자발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경우 ‘타인’은 늘 우리의 자유에 걸림돌로 작용하기 일쑤이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서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홀로 자족적인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술과 마약, 그리고 쾌락으로 도피한다. 때로는 배타적이 되고, 이웃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로움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소금물을 들이킨다고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는 법이다. 요즘 우울증이 늘어나는 것은 타자들과의 소통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전도서는 혼자보다는 함께 일하는 게 효율적이고, 혼자 걷는 것보다는 함께 걷는 게 좋고, 혼자 눕는 것보다는 함께 눕는 게 따뜻하고, 혼자 싸우기보다는 함께 싸우는 게 승산이 높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참 진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를 피하여 지나갔고,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 이야기 끝에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셨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누가복음 10:36) 주님은 ‘이웃’의 경계를 설정하거나 범주화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이웃 되어주기’를 사유하도록 하셨을 뿐이다. 종교, 문화, 피부색, 나라도 이웃의 경계일 수 없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이 세계에 회복시키려는 마음이다. 

 

제랄드 메이는 『사랑의 각성』이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는 아주 괴팍한 노인이었다. 아이들이 뒷마당에서 놀기 시작하자 노인은 철조망을 치고 자기 집 마당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하루는 아들 폴의 고양이가 그 집 장미 덩굴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폴은 고양이가 그 집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며칠 후 고양이의 주검을 발견하고 말았다. 노인이 쥐약을 먹였던 것이다. 가족들 모두가 분노해서 뭔가 복수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폴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매우 외로운 분일 거예요. 우리가 그분에게 생일 파티 같은 것을 해드렸으면 좋겠어요.” 이 어린 천사는 우리에게 이웃 되어주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려 할 때 우리를 사로잡는 외로움 혹은 우울은 안개처럼 흩어진다.

 

*기도*

 

하나님, 남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무겁다고 느낄 때마다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곤 합니다. 피부가 상한 자리에 스치는 모든 것들이 다 고통을 안겨주듯이 삶에 지친 우리들은 작은 일에도 비명부터 질러댑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이들을 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는 다른 이들의 속 깊은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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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28)

 

아나니아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사도행전 9:13-19)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울에게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나니아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거라’라는 명령이 거듭되자 아나니아는 그 명령에 순종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사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그는 말씀에 의지하여 사울을 찾아간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게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란 비록 이해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 대해 ‘아멘!’ 하는 것이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던 이스라엘은 적을 목전에 둔 길갈에서 전투에 나설 젊은이들에게 할례를 행했다.(여호수아 5장) 전투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에 순종해 그렇게 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던 기드온은 군인들이 너무 많다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처음엔 이천 명을, 그리고 그 다음엔 만 명을 돌려보내고 오직 삼백 명만 데리고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사사기 7장)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아나니아는 ‘곧은 거리’에 있던 유다의 집을 찾아가 사울과 만난다. 그는 사울이 경험하고 있는 어둔 밤의 체험은 오히려 그의 생을 바로 세우기 위한 창조적 혼돈임을 깨우쳐 주었다. 지금까지 사울은 맹목적 열정에 사로잡힌 채 살았다. 그것은 눈 먼 자의 행로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그릇된 열정을 변화시켜 복음을 위한 열정으로 변화시키려 하셨다. 아나니아는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사도행전 9:17)라고 말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부른다. 형제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델포스(adelphos)는 ‘자궁’을 뜻하는 델푸스(delphus)에서 나온 말이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골육지친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사울도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자궁에서 새롭게 태어난 혹은 태어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울의 몸에 닿은 아나니아의 손길은 어쩌면 주님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 그릇된 열정의 비늘, 편견과 경쟁심의 비늘, 자기 의라는 비늘이 떨어져 나가자, 그는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영혼의 어둔 밤에서 벗어나자 그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세상을 감격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새로운 생의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미움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바심도 없었다. 궁극적인 평안과 기쁨이 그의 내면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의 하나니아(hananiah)와 연결된다. 세상에는 이처럼 은혜를 매개하는 이들이 있다.

 

*기도*

 

하나님, 만나기 꺼려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이나 지향이 다른 이들을 만나면 본의 아니게 불쾌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맞는 이들과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가라 하십니다. 아나니아는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매개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세우신 사람들을 우리 멋대로 판단하고 도외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넓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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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27)

 

다리 놓는 사람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내가 호렙 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말라기 4:4-6)

 

신앙인은 다리 놓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와 나 사이에 무너진 다리를 놓아,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문장론은 ‘法古創新(법고창신)’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변화를 주어 새롭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인간관계에 적용해보면 젊은이들은 삶의 경험이 많은 어른들에게 여쭐 줄 알아야 경박함을 면할 수 있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고루함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세대 간의 갈등이 심각한 이 시대가 치유될 수 있을까?

 

말라기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야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자 하나님을 등지고 풍요의 신을 섬길 때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끈 사람이다. 그가 와서 할 일을 말라기는 생각보다 소박하게 소개한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말라기 4:6)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서로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보냄을 받은 자가 할 일이다.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세대 간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것, 선진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 세대는 과거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신앙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낯선 타자처럼 바라보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부모공경이 인간 윤리의 기본임을 가르친다.

 

 

 

 

 

박노해 시인의 시 <거룩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를 노래한다. 서울에서 고학을 하던 그의 형은 방학이 되면 몸이 허약해져서 고향에 내려오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애지중지 기르던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에 피를 묻혀가면서 맛있는 닭죽을 끓여 객지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먹이셨던 것이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두려워 떨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곤 했던 시인은 어머니를 통해 배운 삶의 지혜를 이렇게 노래한다. 

 

“사랑은/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사랑은/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사랑은/자신의 피와 능(能)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부모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이 부모에게 향하고, 마침내 고마워하고 대견해하는 마음이 가족의 경계를 넘어 사회로 파급되기까지 온몸으로 불통 세상과 맞서는 노고가 필요하다. 담을 허무는 분으로 사셨던 주님이 우리에게 그 일을 함께 하자 부르신다.

 

*기도*

 

하나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을 우리는 날마다 실감하며 삽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마음에 맞게 행동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바람이 무너질 때 서운한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적대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부끄럽지만 이기적이고 편협한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좁아진 마음을 넓혀 주시고,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이 닦아 주십시오. 먼저 용서하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말을 건넬 용기를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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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26)

 

광야학교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잘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아서 번성할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들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들을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당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들의 마음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당신들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습니다.(신명기 8:1-4)

 

광야 길은 강인한 이들만 걸을 수 있다. 햇볕을 가려줄 나무나 갈증을 해소시켜 줄 물줄기를 만날 가능성도 많지 않다. 광야 길에 접어든 사람은 자기 속에 슬그머니 자리 잡으려는 두려움과 회의와 맞서야 한다. 막막하고 아득한 길, 그 길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그래서 광야는 학교이다.

 

광야 학교는 우리 속에 있는 뿌리 깊은 교만을 치유해준다. 교만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않으려는 마음, 자기의 영향력을 자꾸 확대함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이다. 교만한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말했던 뱀의 유혹에 넘어가게 마련이다. 뱀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지옥이 시작된다. 인생의 광야를 만나 암담할 때 낙심하지 말자. 오히려 그 시간을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연처럼 한없이 높아지려는 우리 마음을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받아들이자. 

 

광야학교는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준다.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은 철저히 무기력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먹을 것을 구할 수도, 마실 물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희망을 하나님께 둘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섰다. 자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서게 된다. 

 

 

 

 

필립 시먼스는 일리노이주의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 영문과 교수였고 주목받는 작가였다. 그러던 그가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려 5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그는 날마다 찻 숟가락 하나로 생명을 덜어내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오히려 생의 충만함을 맛보았다. 시먼스는 어느 날 근심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섯 살배기 딸 애밀리아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소멸의 아름다움』 중에서). 

 

“내 손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아직은 너를 안아줄 수 있어.”

“팔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

“그러면 네가 ‘나’를 안아주어야겠지. 네가 안아주기만 하면 난 괜찮을 거야.”

 

우리가 완전히 무력하게 되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 주신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살다보면 우리는 벼랑가로 내몰리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쓰라린 고통과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저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광야 학교에 적응을 잘하는 이들에게 삶은 신비이다.

 

광야학교는 탐욕의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만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노자(老子)는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보태는데,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서 모자라는 것을 덜어 남는 데 보탠다고 말했다(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천지도 손유여이보부족, 인지도칙불연, 손부족이봉유여 77장). 광야학교는 우리를 비움과 나눔의 신비 가운데로 인도한다.

 

*기도*

 

하나님, 사람은 누구나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구합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도 습관처럼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들이 찾아와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 동안 애집하던 것들조차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 때 마치 광야에 선듯 마음이 스산해집니다. 하지만 광야는 우리 삶이 정초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주님, 버릴 것은 단호하게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꼭 붙들 수 있는 용기를 우리 속에 심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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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25)

 

영혼의 계승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들고 돌아와, 요단 강 가에 서서,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그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외치고, 또 물을 치니,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엘리사가 그리로 강을 건넜다.(열왕기하 2:9-14)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영화 <나사렛 예수>에 나오는 한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권력자들에게 독설을 서슴지 않던 세례자 요한이 군인들에게 붙잡혀갈 때, 그 소란 속에서 요한의 겉옷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예수님이 슬그머니 다가가 그 옷을 집어 들고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셨다. 함께 영화를 본 한 청년은 ‘예수님이 참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 장면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라는 마가복음 1장 14절의 말씀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장면은 세례자 요한의 길과 예수님의 길은 다르지만 두 분 모두 하나님 나라를 지향했음을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자 엘리야는 자신의 생도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려 한다. 하나님을 등졌던 아합과 이세벨에 맞서 싸우느라 지쳤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힘을 내라시면서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 7천 명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에 의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쉽게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은 믿는 이의 마땅한 태도가 아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있는 이들이 있다. 선지자의 생도라 하는 이들은 어쩌면 그 7천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오랜 싸움에 지친 엘리야의 가슴에 다시 한 번 용기의 불꽃을 지펴주었던 소중한 동지들이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 이들을 만나 용기를 붇돋고 싶었던 것이리라. 

 

엘리야는 산지인 길갈을 떠나면서 엘리사에게 그곳에 남아있으라고 권했지만, 엘리사는 스승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스승이 가는 곳마다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가로…. 요단강을 앞에 두고 엘리야가 겉옷을 말아서 물을 치자 물이 갈라지고 두 사람은 걸어서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후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무엇을 구하는지를 묻자 엘리사는 아주 간결하게 답한다.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열왕기하 2:9b)

 

머지않아 떠나실 스승에게 엘리사가 구하는 것은 유형적인 유산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과 깊이였다. 엘리야를 휘몰아갔던 하나님의 영이 자신에게 갑절이나 부어지기를 그는 바랐다. 이윽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가자, 슬픔에 잠긴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들고 요단 강 가에 섰다. 그리고 겉옷으로 강물을 치자 강이 갈라졌다. 둘 사이에 일어난 영적 계승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정신의 계승자로 살고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

 

*기도*

 

하나님, 삶이 고단하고 팍팍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 자기에게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런 헛된 바람을 한번 웃음으로 소비하면 그만이지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삶이 지리멸렬해집니다. ‘왜 사는지를 알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격언처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삶의 방편이 아니라 삶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정념을 품고 살기를 원했던 엘리사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접속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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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심을 잃을 때

 

이것이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던 도성 두로냐? 그토록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저 먼 곳에까지 가서 식민지를 세우던 도성이냐?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던 두로, 그 상인들은 귀족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이 우러러보던 사람들이었는데, 두로를 두고 누가 이런 일을 계획하였겠느냐? 그 일을 계획하신 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온갖 영화를 누리며 으스대던 교만한 자들을 비천하게 만드시고, 이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자들을 보잘 것 없이 만드시려고, 이런 계획을 세우셨다. 스페인의 딸아, 너의 땅으로 돌아가서 땅이나 갈아라. 이제 너에게는 항구가 없다. 주님께서 바다 위에 팔을 펴셔서, 왕국들을 뒤흔드시고, 베니게의 요새들을 허물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녀, 딸 시돈아, 너는 망했다. 네가 다시는 우쭐대지 못할 것이다. 일어나서 키프로스로 건너가 보아라. 그러나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이사야 63:7-12)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빈곤과 주택난, 그리고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에 입힌 상처와 그에 따른 허무주의 등을 다루고 있다. 서른여덟 살의 캐테는 세 아이를 데리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인 프레드는 가족들을 사랑했지만 자기의 무능력 때문에 그들이 상처 입는 것이 싫어서 가출했다. 이 가엾은 부부는 한 달에 한 번씩 더러운 여인숙에서 만나곤 했다. 어느 날 캐테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시다'고 탄식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한다. 가난과 생의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남편의 늙은 얼굴을 보며 캐테는 말한다. “당신은 기도를 해야 해요. 정말 그래야 해요. 기도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걸 당신은 왜 외면하는 거예요?” 남편은 맥없이 대답한다. “당신이 날 위해 기도해 줘. 나는 기도하는 법을 일어버렸어.” 아내는 다급하게 말한다. “연습이 필요해요. 끈질기게 해야 해요. 계속해서 다시 시작해 봐요. 술 마시는 건 소용없어요.” 남편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말한다. “취하면 어떤 때 기도가 아주 잘 돼.” 캐테는 안타까워하며 말한다. “그건 소용없어요, 프레드. 기도는 정신이 맑은 사람이 하는 거예요.”

 

 

 

 

삶이 힘겨워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때, 하나님조차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아 암담할 때, 나 홀로 섬처럼 외로울 때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꿈조차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데, 꿈조차 빼앗긴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세가 그러했다. 그들은 낯선 땅의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하늘을 올려보아도 하늘은 그저 무심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탄식한다. “하늘로부터 굽어 살펴 주십시오. 주님이 계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곳에서 굽어보아 주십시오. 주님의 열성과 권능은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나에게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쳤습니다.”(이사야 63:15) 

 

조상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그들을 찾아오시어 출애굽의 대업을 이루신 하나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그 하나님, 우렛소리와 우박으로 적들을 물리치신 그 하나님의 기세가 지금은 어디에 계신가?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 버린 것일까? 하나님은 깊은 침묵 속에 계실 뿐 응답하실 마음조차 없으신 것 같다. 기쁨도 감격도 없는 삶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는 자같이 되었습니다.”(이사야 63:19) 

 

이것은 분명 비극적 상황이다.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주님의 길에서 떠나고,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큰 전락은 가난도 아니고, 질병의 고통도 아니고, 명예를 잃거나, 어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경외심을 잃는 것이다. 본(本)이 바로 서야 말(末)이 누추하지 않은 법이다. 

 

*기도*

 

하나님, 든든한 줄만 알았던 삶의 토대가 흔들릴 때면 우리는 어찌할 줄 몰라 허둥거립니다.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홀연히 사라지고 나면 허무가 그 빈자리를 채웁니다. 삶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변할 때 근본을 성찰할 수 있는 용기와 여백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삶의 꼴을 새롭게 가다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새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눈 먼 사람처럼 더듬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든든히 붙잡아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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