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24)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2:26)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명령을 듣고 익숙하던 세계를 떠났다. 그것은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발판이 없는 허공을 걷는 듯, 울타리 없는 집에 사는 듯 위태로운 나날이었을 것이다. 공초 오상순의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방랑의 마음〉 제1연이 적혀 있다.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오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나의 혼.”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어디에도 머물지 않겠다는 시인의 결기가 느껴진다. 익숙한 생각, 관습적 사고, 친밀함은 때로 덫이 되어 우리를 붙잡는다. 비우고 떠날 때 새로움이 유입된다.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를 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란 스승의 뒤를 따르는 자이다. ‘떠남’을 넘어 ‘따름’이 제자의 길이다. 지향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라 이르셨다.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비로소 그분의 제자가 된다. 선불교의 가르침 가운데는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을 어설프게 적용하려다간 허릅숭이가 될 위험이 더 크다. 제자는 스승을 철저히 신뢰하고 따라야 한다. 

 

 

 

스승은 가르치는 자이지만, 삶으로 보이는 입증해 보이는 자이다. 말놀이지만 스승은 ‘자기를 이긴 사람’이라 할 수 있다지 않던가. 배움은 자기의 한계를 돌파해 더 큰 세계에 접속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승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요한의 두 제자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요한복음 1:38-39)라고 대답했다. 진정한 가르침은 삶의 총체성 속에서 빚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2:26)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분이 계신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이 계신 곳은 그다지 유쾌한 곳이 아니다. 병든 사람들이 있는 곳, 귀신 들린 사람들이 있는 곳, 절망의 심연, 냉소가 넘치고 악다구니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곳, 주님은 한사코 그런 곳으로 가신다. 말쑥한 옷차림에 교양이 넘치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삶을 쾌적하게 즐기려는 이들은 예수를 따르기 심히 어렵다. 몸이 낮은 곳에 처할 때 영혼은 고양되는 법이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게 바로 그런 뜻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습도 많은 대기 가운데서 걷노라면 몸은 무거워지고 숨도 가빠옵니다. 햇살 좋은 날 거리를 걷는 일은 상쾌합니다. 우울한 세상, 유동하는 공포가 우리 목을 죄는 세상에 살기에 우리는 유쾌하고 즐거운 일을 탐닉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저 낮은 곳으로 부르십니다. 지고 있는 인생의 짐이 무거워 허덕이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의 짐을 함께 나누라 하십니다. 주님, 이제야 깨닫습니다. 다른 이들의 짐을 나눌 때 비로소 우리 짐이 가벼워지는 진실을 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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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23)

 

고통 속에서도 신뢰합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때, 몹시 두려워,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 하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편 116:10-12)

 

시인의 고백이 절절하다. 본래 우리가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건만, 시간 속을 바장이는 인생살이에 슬픔과 고통은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무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행복은 카프카의 성처럼 늘 저만치에 있어 다가서면 그만큼 멀어지곤 한다. 행복은 명멸하는 불빛처럼 잠시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다가 이내 스러지곤 한다. 그러나 고통스런 기억은 잊히는 듯하다가도 어떤 계기를 만나면 너무나 쉽게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아픔이 축적되어 퍼런 멍이 되고, 미래에 대한 전망조차 불확실할 때 비애가 발생한다. 그때 우리는 시인처럼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고통은 외로움을 동반한다. 대개의 경우 고통은 사적이다. 물론 위로해주는 이들도 있고, 곁을 지켜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절망과 아픔을 온전히 경험할 수는 없다. 고통은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터전을 뒤흔든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일상의 질서를 회복하지 못한다. 행복했던 지난날은 영원히 지나가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애도와 상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다그치는 이들이 있다. 일종의 동정 피로(compassion fatigue)일 것이다.

 

 

 

시인은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현실을 ‘죽음의 올가미’, ‘스올의 고통’, ‘고난과 고통’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를 괴롭히는 현실의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보통 이상의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그런 고통은 타격이다. 그 타격은 우리 삶을 휘청이게 만든다. 확실했던 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변하고, 익숙했던 세계는 낯설게 변한다. 가까이 계시던 하나님조차 멀어진 것만 같다. ‘어둔 밤’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돌연 지난 날 자신을 너그럽게 대해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며 고통이 궁극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비로소 그의 믿음이 단단해진다.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흔들림조차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속절없는 흔들림 속에서 얻은 든든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고통 앞에서 잠시 흔들려도 괜찮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흔들림조차 품어 안으신다.

 

*기도*

 

하나님, 고통은 가끔 우리 삶을 받침조차 없는 허방 위에 세우곤 합니다. 혼돈과 흑암이 마음을 가득 채울 때, 우리는 다만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손 내밀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절망의 심연이 우리를 끌어당길 때에도 주님은 우리 손을 꼭 붙들어주십니다. 그 사랑에 의지하여 고통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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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22)

 

신앙은 주체적 결단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여호수아 24:15)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내내 여호수아는 모세 곁을 지켰다. 모세의 비범한 용기에 경탄했고, 지도자의 고뇌와 외로움도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온 백성들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 어찌 힘겨운 일이 아니겠는가? 홍해를 건너 오아시스 지대인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아말렉이 쳐들어왔고, 그는 모세의 지시에 따라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에 맞서 싸웠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이스라엘을 이끈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아말렉과의 전투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민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통과제의였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회막 안에 들어가면 그는 밖에서 회막을 지켰고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그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다. 강직한 사람이다. 정탐꾼이 되어 가나안 땅을 살피고 온 후에 그는 갈렙과 더불어 소수 의견을 제출했다. 다른 정탐꾼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위용을 보고 겁에 질려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며 손사래를 칠 때,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민수기 14:9)라고 말했다.

 

 

모세가 벧브올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에 묻힌 후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삼으시며 당부하셨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에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여호수아 1:5b-6).

 

두려웠지만 그는 소명을 받아들였고, 가나안 땅 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뤘다. 땅의 분배까지 다 마친 후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백성들에게 고별사를 남긴다. 그때까지 그들을 인도하고 또 그들 편에서 싸우신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고,  율법의 말씀을 담대하게 지키고 행하라는 것이 고별사의 요점이었다. 오직 주님만 섬기라고 신신당부하던 여호수아는 돌연 그들을 선택 앞에 세운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여호수아 24:15)

 

신앙은 두길마보기가 아니라 주체적 결단이다.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라는 말이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선택 가능성을 내려놓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시면서 돈과 주님을 더불어 섬길 수는 없다고 하셨다. 여호수아는 형편이 어떠하든 그와 그의 집안은 오직 주님만을 섬길 것이라며 주체적 결단의 본을 보인다. 견결한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길을 잃기 일쑤입니다. 여호수아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내적인 고뇌가 왜 없었겠습니까만 그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말씀을 살아내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응석받이 신앙생활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전사가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 속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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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21)

 

있는 힘껏 선을 행하라

 

너의 손에 선을 행할 힘이 있거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라. 네가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너의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시오. 내일 주겠소” 말하지 말아라. 너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 너의 이웃에게 해를 끼칠 계획은 꾸미지 말아라.(잠언 3:27-29)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부분)

 

시는 이어서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자에게 무슨 정조냐”며 능욕하려는 장군을 고발한다. 시인은 조국을 잃고 유랑하는 이의 신산스러운 삶을 이런 시어를 통해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떠도는 이들은 일쑤 인격도 인권도 없는 존재로 여김을 받는다.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비인간 취급을 받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쏟아진다. 그런데 그 눈물 속에서 시인은 ‘당신’을 본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가난한 이를 멸시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토라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도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으니 그들의 고통을 잘 이해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이 처음 배우는 한국어가 “사장님, 때리지 마세요.”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불법 체류자의 신분을 악용하여 품삯을 떼먹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비단 이주 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하청 노동자들 역시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위험을 외주하 하는 대기업들의 횡포가 가련한 노동자들을 사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너의 손에 선을 행할 힘이 있거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라. 네가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너의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시오. 내일 주겠소” 말하지 말아라. 너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 너의 이웃에게 해를 끼칠 계획은 꾸미지 말아라.

 

신실하다는 기독교인조차 ‘베푼다’는 말을 별다른 반성 없이 사용한다. ‘베푼다’는 말 속에는 시혜자의 오만함이 담겨 있다. 베풂의 대상으로 전락한 수혜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굴욕감이 스며들 수도 있다. 시혜자와 수혜자로 나뉠 때 묘한 계급 관계가 발생한다. 누군가에게 주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그 쾌감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받는 이들의 모욕감을 대가로 한 것이다. 제대로 줄 수 있기 위해서는 받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섬세한 마음을 훈련해야 한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질이 없다면 따뜻한 말 한 마디, 선선한 미소라도 건네면 된다. 남에게 선을 행할 마음이 없다면 최소한 해를 끼치지는 말아야 한다. 나의 ‘있음’이 누군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 살아갈 일이다.

 

*기도*

 

하나님, 능력 있는 이웃과 잘 지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함께 지내는 것은 참 고단합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외면하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우리는 일쑤 그들을 외면하며 삽니다. 차라리 모르면 양심의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이런 우리 모습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 지나쳤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겠습니다. 위선과 무정함의 수렁에서 우리를 건져주십시오. 있는 힘껏 선을 행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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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20)

 

평화를 택하는 용기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골로새서 3:12-17)

 

골로새서는 성도를 가리켜 ‘택하심을 받은 사람’, ‘사랑 받는 사람’, ‘거룩한 사람’이라 말한다. 마땅히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선언이다. 문제는 선언 이후이다. 그런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름하여 성도다운 삶 말이다. ‘~답다’는 단어는 체언에 붙어 성질이나 특징이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은 명칭과 실질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사회를 바루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정명 사상은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배자들이 부여한 질서라는 비판이 따르지만, 지금처럼 이름과 실질이 부합하지 않는 시대에는 다시 한 번 가려 써도 괜찮은 사상이다. 

 

성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고,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사랑이다. 무골호인이 되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 믿는 이들은 거짓과 위선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불의한 이들이 더 이상 불의를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가 악을 행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니 말이다.

 

 

                               사진/송진규

 

하지만 믿는 이들의 삶이 늘 순조롭지는 않다. 강한 저항에 부딪힐 때가 많다. 불의에 타협하기를 거절하면 ‘너만 홀로 의로우냐’는 타박을 듣기도 한다. 불의를 불의로 폭로하면 ‘배신자’의 낙인을 찍기도 한다. 그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들이 많다. 어두운 세상과 맞서 싸우다 보면 우리 마음에도 어둠의 흔적이 남게 된다. 거칠고 야비한 세상을 사랑으로 돌파하려다가 마음에 멍이 든 이들이 많다. 음울하고 심각한 사람은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과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명랑하게 헌신하는 이들이라야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라는 말이 있지만, 평화를 선택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평화를 포기할 수 없다. 평화를 만들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중심에 속해 있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헌신해야 할 의무이다”(헨리 나웬). 그렇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골로새서 3:15)

 

*기도*

 

하나님, 우리는 성도답게 살기를 갈망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넘어지곤 합니다. 이제는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나 다시금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땀 흘리겠습니다. 미움보다 사랑이 강하다는 것을 몸으로 입증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하여 투덜거리기보다는 뿌리 깊은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 속에 평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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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9)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다니엘 6:10)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그것은 떠도는 자들의 슬픈 자기 위안일 뿐 사실은 아니다. 모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해야 하고, 문화와 습속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유랑하는 사람의 신산스런 처지를 절절하게 노래한다. “어느 사이네 나는 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타향은 꼭 필요한 것들의 부재를 의미한다. 부재는 쓸쓸함과 두려움을 낳는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처지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망해 버린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 돌아갈 고국이 없다는 것, 그처럼 처량한 게 또 있을까?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포로민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다. 더러는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식민 지배자들의 눈에 들어 요직에 등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하여 삶이 절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피식민지 백성들은 질시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니엘은 아무도 풀지 못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면서 바빌로니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인정받았고, 바빌론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받았다. 바빌로니아가 메대에 의해 무너진 후에도 다니엘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다. 메대의 개국공신들은 다니엘을 눈엣가시처럼 대했다. 그리고 그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다리우스 왕에게 “앞으로 삼십 일 동안에, 임금님 말고,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집어넣기로 한다”(다니엘 6:7)는 금령을 내려달라고 한다. 그 제안이 다리우스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금령이 내려졌고, 음모를 꾸민 자들은 다니엘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왕의 금령 문서에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자기 집 다락방에 올라 늘 하던 대로 예루살렘 쪽으로 난 창문가에 앉아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호시탐탐, 사자굴에 갇히기 전 다니엘은 이미 야수들의 시선에 포박되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기도를 중지하지 않았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부정이라는 모멸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다. 다니엘은 기꺼이 사자굴을 택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했다.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구원의 바람은 그 창문을 통해 불어온다. 우리에게도 그런 창문이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기도*

 

하나님, 윤동주 시인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세상 길을 배회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잃어 우리는 욕망 주위를 그저 맴돌며 그것이 삶인 줄로 여기고 있습니다. 온유하지만 정신의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모습은 안일에 길들여진 우리 삶의 누추함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주님,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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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8)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로마서 11:29)

 

사람은 누구나 삶의 전모를 미리 알지 못한다. 순간순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불확실한 시간을 살아내야 하니 번민이 없을 수 없다. 선택은 다른 가능성에 대한 배제를 뜻하기에 선택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신중하게 생각한다 하여 늘 최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벼 고르려다 뉘 고른다는 말이 있듯이, 신중함이 자칫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리산지리산 헤맨 것처럼 보여도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 돌아보면 우리 삶의 지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검질기게 붙들고 가는 삶의 원리가 조금씩 형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신비이다. 우리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실패처럼 보이던 일이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를 세워준 계기가 될 때도 있고, 성공처럼 보이던 일 때문에 우리 삶이 어그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씁쓸한 실패의 기억과 달콤한 성공의 기억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 우리 인생이라는 피륙을 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28).

 

바울 사도의 이 말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된다. ‘모든 일’에는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다 내포된다. 죄와 허물과 실수투성이 삶이라 해도 그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은 그 삶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빚으신다. 

 

 

 

 

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 속에서 살았다. 그 자부심은 그들이 곤고한 생을 지탱해주는 내적 힘이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에 고착되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퇴행이 시작된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많은 표징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전 체제를 부정하는 듯한 예수의 행태를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가 그들의 발목을 붙들어 현재를 오롯이 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복음이 시들어버린 것은 아니다. 복음은 이방인에게 흘러갔고,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구원의 신비를 맛보며 살았다. 그 모습이 유대인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거룩함에 이르는 질투가 있다. 어거스틴의 회심도 거룩한 질투에서 촉발되었다. 그는 지인들이 복음을 위해 세속의 유혹을 뿌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인 알리삐우스에게 말한다.

 

“우린 어찌 된다? 너도 들었지? 도대체 이게 뭐냐? 무식꾼들이 불쑥 일어나서 하늘을 쟁취하는데, 그래 우리 학식을 가지고도 마음 하나가 없어서 이렇게 피와 살 속에 뒹굴고 있구나!”(『고백록』, 최민순 역, 210쪽)  

 

결국 복음은 유대인 가운데 거룩한 불꽃을 일으켰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롬11:29) 이 가없는 은총이 우리 삶의 든든한 방패이다. 

 

*기도*

 

하나님, 푯대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걷는다 하면서도 한눈을 팔 때가 많습니다. 방심한 사이에 우리는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벗어나 엉뚱한 길로 나아가곤 합니다.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 삶의 방향을 되돌려 보려 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에 밴 습성이 우리를 놓아주질 않습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되돌려주실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가시나무로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라도 우리가 헛된 것들을 따라가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주님, 더디더라도 주님을 따라 걷고 싶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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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7)

 

어려운 위임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복음 16:19)

 

빌립보의 가이사랴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인 동시에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눈 뜸이다. 예수님의 알짬에 눈을 뜨는 순간 베드로는 경외심에 사로잡혔다. 주님은 그런 깨달음이 베드로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면서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18)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초석인 이 반석은 베드로라는 개별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힘을 통해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을 과감하게 거슬러 섬김의 길을 걸으려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회가 지배의 욕망에 사로잡힐 때 교회의 토대는 흔들리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면서 그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위임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베드로는 늘 손에 열쇠를 든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천국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열쇠. 오랫동안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를 자처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천국의 열쇠’를 내보이며 넌지시 혹은 노골적으로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주님은 그 열쇠를 잠그는 데 쓰라고 주신 것일까? 아니다. 닫힌 문을 열라고 주셨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 서로 소통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둘 사이에 물길이 트게 마련이다.

 

특정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거나 혐오감을 내비칠 때 교회의 자기 부정이 시작된다. 누군가를 배제함으로 얻는 쾌감은 저열한 것이다. 가름과 차별을 통해 특권층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세상에서 교회와 교인들은 그 답답한 교착상태를 열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아무리 강고한 벽이라 해도 어딘가에 문은 있다지 않던가.    

  

*기도*

 

하나님, 우리 손에 들린 열쇠가 무겁기만 합니다. 가끔 우리는 그 열쇠를 잠그는 데 사용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열쇠를 푸는 데 사용하라 하십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상처를 입은 우리 마음은 점점 좁아져 이웃을 위한 여백이 거의 없습니다. 주님, 우리 마음을 넓혀주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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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

 

진노의 팔을 붙드는 손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아 부었고, 내 격노의 불길로 그들을 멸절시켰다. 나는 그들의 행실을 따라 그들의 머리 위에 갚아 주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에스겔 22:30-31)

 

세상의 타락은 불의한 권력자들의 공모를 통해 진행된다. 하나님은 유다 땅을 가리켜 ‘더러움을 벗지 못한 땅’, ‘비를 얻지 못한 땅’(에스겔 22:24)이라 하신다. 억울한 사람들의 피가 흐른 땅, 나그네를 학대하고, 고아와 과부를 구박하는 땅, 남을 헐뜯는 이들이 늘어나고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없이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은 땅은 저주받은 땅이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사는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는 쓸모도 없는 쇠찌꺼기’(에스겔 22:18)라고 말씀하신다. 기가 막힌 전락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모두의 잘못이라고 말함으로 사태를 두루뭉수리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한 나라의 타락은 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소위 지도자연하는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신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위반할 뿐 아니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지도자들은 불의한 이득을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파멸로 이끈다.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 주고, 거짓된 신비로 사람들의 마음을 호린다. 지도자들이 그 모양이니 백성들의 삶이 온전할 리 없다. 폭력과 강탈이 판을 친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안타까워하며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투신하는 한 사람을 찾으신다.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하나님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고 하신다. 한결같이 썩어버린 것이다. 

 

 

 

 

프랑스의 리옹 미술관에는 루벤스(Pierre-Paul Rubens, 1577-1640)의 <그리스도의 진노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성 도미니크와 성 프란체스코 >라는 그림이 있다. 종교 개혁의 여파로 유럽 세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을 때 그린 그림이다. 화면의 상단에는 죄악에 가득 찬 세상을 보고 진노하여 손에 갈대로 만든 채찍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주님의 왼편에는 당혹스런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마치 그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다가서고 있는 성모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편에는 근심스런 표정의 성부와 비둘기로 형상화된 성령이 있다. 화면의 하단에는 뱀이 휘감고 있는 지구본 위에 걸터앉은 도미니크 성인과 그 위에 손을 얹고 있는 프란체스코 성인이 등장한다. 둘은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맨발에 누더기 차림이다. 그들의 팔은 마치 내리치는 그리스도의 팔을 막으려는 듯 위로 치켜올려져 있다. 지금 주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기도*

 

하나님, 사방을 둘러보아도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삼키고 있습니다. 초월의 관점에서 역사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종교조차 욕망의 벌판을 질주할 뿐입니다. 주님의 몸이어야 할 교회는 자기 확장에 몰두할 뿐입니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두리번거리지 않겠습니다. 부족할망정 우리가 먼저 바로 서겠습니다. 이런 우리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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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창세기 32:22-29)

 

사이 공간 혹은 점이지대라는 게 있다. 어둠과 빛, 도시와 시골, 안과 밖, 성과 속이 교차하는 장소 말이다. 비무장지대나 문지방도 일종의 사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옛 어른들은 문지방을 밟지 말라고 엄히 이르셨다. 성경의 제사장들의 직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의 경계를 분별하는 일이었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괴물들이 불길한 까닭은 그들이 인간과 동물의 구별을 무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은 늘 위험을 동반한다.

 

20년 동안의 객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은 얍복 강이라는 경계선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먼저 건너보낸 후 그는 뒤에 홀로 남았던 것이다. 고향이 지척이건만 그는 선뜻 그 강을 건너지 못한다. 강은 일종의 심리적 장벽이  되어 그를 가로막는다. 형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던 기억과 아울러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는 대로 동생을 죽이고 말겠다는 형의 노기 찬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어느덧 밤이 다가왔다. 갑자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았고 목숨을 건 씨름이 시작되었다. 엉덩이뼈를 다쳤지만 절박한 야곱은 앙버티며 그 밤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동이 틀 무렵 그가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그는 야곱에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야곱입니다.” 야곱의 문자적 이미는 ‘발뒤꿈치를 잡다’이지만 그 속뜻은 ‘속이는 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 곤 하지만 야곱은 그동안 속이는 자로 살았다. 자기 이름을 발설함으로 그는 자기 삶을 드러낸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는 말일 것이다. 얍복 강이라는 경계선에서 야곱은 죽었고 이스라엘로 재탄생했다. 비로소 경계선을 넘을 준비가 된 것이다. 

 

호렙산 떨기나무 아래 엎드렸던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야곱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한다. 히브리인들에게 이름과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여실히 안다는 뜻이다. 신적 존재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라고 되물으신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야곱을 축복하여 주었다. 축복하심이 곧 그분의 존재이다. 야곱의 밤은 지나갔다. 비록 절름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죽고 다시 산 자의 표징일 뿐이다. 경계를 넘어 그는 은총의 세계로 들어갔다.  

 

*기도*

 

하나님, 사도들은 우리가 땅에 살고 있지만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한 자각이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질척거리는 욕망의 벌판에서 사는 동안 하늘을 잊을 때가 많아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곱’처럼 살고 있습니다. 절름거리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걸었던 야곱이 누린 복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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