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손

김기석의 새로봄(198)

 

당신의 손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누가복음 13:10-13)

 

열여덟 해 동안 등이 굽은 채 살아온 여인이 있었다. 참 긴 세월이다. 며칠만 아파도 삶의 리듬이 깨지는 법인데 그 긴 세월을 여인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천형처럼 다가온 질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참 안됐다고, 잘 될 거라고 위로하던 이들도 이제는 그의 고통을 잊은 지 이미 오래다. 가족들은 있었을까? 설사 있었다 해도 가족들조차 여인을 짐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차라리 없으면 좋을 잉여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도 여인은 회당 예배를 포기할 수 없었다.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여인에게 일종의 숨쉬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 운명의 날, 여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당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어떤 뜨거움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여인의 존재를 꿰뚫었던 것 같다. 예수님도 그 회당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예민하게 알아차리셨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그 여인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활동하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18년 동안 한 번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여인을 앞으로 불러 세우신 후에 말씀하셨다.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 음성이야말로 '빛이 생겨라' 하시던 그 음성이 아닌가? 예수님은 여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강은교 선생의 시 ‘당신의 손’이 떠오른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누워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보고, 가까이 부르고, 선언하고, 접촉하는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 흐름 속에서 생명이 소생되고 있었다. 여인의 허리가 펴졌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여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이 마침내 떠나간 것이다. 여인을 사로잡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죄책감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 대한 혹은 세상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그 여인을 부자유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의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맺힌 것을 풀어 자유롭게 하는 의사이다. 허리를 펼 수 있게 된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렸다. 누가 들을세라 숨죽여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찬송이었다. 우리의 굽은 등을 펴주시는 그 손길이 몹시 그립다.

 

*기도

 

하나님, 모든 이들에게 잊혀졌지만 고단한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던 이 여인의 슬픔을 주님 홀로 헤아리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늘 그 자리에 있는 풍경처럼 대했겠지만 주님은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로 대하셨습니다. 이웃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시선을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해도, 아픔에 처한 이들의 입장에 서려는 노력은 게을리 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 마음을 녹여주십시오.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는 새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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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구원받은 사람인가

  • 감사합니다. 자격 조건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살아야 이 세상 쉽게 산다는 데, 자격 없는 이에게 오늘도 생명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이진구 2019.09.23 08:58

김기석의 새로봄(197)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가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누가복음 13:22-30)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13:23) 이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질문자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정말 궁금한 것을 물은 것이다. 그는 이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을 보증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천당’이라고 해야 그들의 숨은 욕망이 더 잘 드러날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욕망이 어떠하든 성경에서 사용되는 구원(soteria)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치유’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가장 많다. 병자의 치유, 귀신들린 자의 회복이 구원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회복은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당신을 영접한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고, 남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누가복음 19:9)고 선언하셨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주로 사람의 사람됨이 회복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거듭난 사람이라야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은, 구원을 남과는 구별되는 특권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구원조차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정작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오지랖 넓게 남이 구원 받았나 받지 못했나를 곁눈질할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살필 일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했다는 아베 피에르 신부에게 한 방송 진행자가 다짜고짜 물었다. “삶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피에르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영원한 사랑과의 영원한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약간의 시간일 뿐입니다. 인생이 내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었지요. 나는 이 말을 후세에 물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확신이 내 인생과 행동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아베 피에르, <피에르 신부의 유언>, 16쪽)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응대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24절) 힘쓴다는 말은 ‘아고니제스테agonizesthe’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에서 심한 고통을 뜻하는 영어 단어 ‘agony’가 나온 것을 보면, 이 단어는 고심하고 고투하는 것 즉 진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급적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최선의 노력을 다해 들어가라는 말이다. 세상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서 고생하는 길에 접어든 이들 말이다. 이 거친 세상에 살면서 마음이 상하고 찢긴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사람들은 구원받을 사람의 자격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자격 조건에 자신을 맞추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독점한 듯 말하는 이들 가운데는 삶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주님, 구원받은 자답게 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과 피조물을 대하고, 이웃을 복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섬김의 자리에 서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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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로 산다는 것

김기석의 새로봄(196)

 

순례자로 산다는 것

 

주님께서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 때에 다른 나라 백성들도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 일을 하셨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 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 보내 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 126:1-6)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저절로 기도의 사람이 된다. 16세기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교부 도로테우스는 세계를 원이라고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중심은 하나님이고 그분의 광채는 인간들의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나님이 계신 원의 중심으로 다가간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다가서야 하고, 이웃에게 참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다가서야 하는 이 되먹임의 관계가 참 신비하다. 

 

 

 

 

 

함께 살아야 할 이들은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걸림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마음은 늘 ‘충만’과 ‘텅 빔’ 사이를 오간다. 시인의 기도는 그래서 소중하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4절) 네겝은 비가 올 때는 물이 흐르지만 비가 그치면 바짝 말라버리는 와디이다. 우리 마음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 도시에 사는 우리 마음은 네겝의 와디처럼 모래만 버석이는 불모지 아닌가? 그곳에 물이 흐르게 하시고, 세상에 사로잡혔던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인으로 살게 하실 분은 하나님뿐이다.  

 

네겝 시내에 물이 흐르기를 소망한 시인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은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광경이다. 척박한 땅에 물이 흐르면 죽은 것 같았던 대지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파종의 때이다. 인생을 순례로 사는 이는 파종자여야 한다. 파종은 고된 노동이다. 하지만 파종이라는 노고가 없다면 수확도 없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5-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좀 낯설게 들린다. 노동이 고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말일까? 사실 이 말은 애굽이나 우가릿 신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겨우내 죽음의 세계에 끌려간 곡물의 여신을 깨우기 위해서는 들판에서 울어야 한다고 믿었다. 운다는 말은 그러니까 신을 깨우는 일이다. 히브리의 시인은 그런 풍습을 그리되, 그 의미를 바꾸어놓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자기 욕망을 거스르는 일일 수 있다. 섬김, 돌봄, 나눔, 권리의 자발적 포기, 타자를 유익하게 하는 삶이 쉽지는 않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욕망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정의의 씨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 그것이 순례자로 산다는 의미이다.

 

*기도

 

하나님, 삶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은 뭔가에 쫓기듯 들떠있습니다. 외로움이 깊지만 선뜻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지도 못합니다. 가까운 이들조차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쓸쓸합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순례의 과정임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명심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과 함께 정의와 공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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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굴로 앞에서

김기석의 새로봄(194)

 

유라굴로 앞에서

 

날이 새어 갈 때에,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오늘까지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목숨을 유지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빵을 들어,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떼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용기를 얻어서 음식을 먹었다. 배에 탄 우리의 수는 모두 이백일흔여섯 명이었다. 사람들이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뒤에, 남은 식량을 바다에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였다.(사도행전 27:33-38)

 

가이사랴에 몇 해 동안 구금되어 있던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압송할 책임을 맡았던 백부장 율리오는 그들을 아드라뭇데노 호에 태웠다. 그 배는 지중해 연안을 끼고 항해하여 지금의 레바논 땅인 시돈에 이르렀고, 맞바람 때문에 키프로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를 계속했다.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가로질러 루기아에 있는 무라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다. 맞바람이 심했다. 배는 크레타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하다가 크레타 남쪽 해안의 '아름다운 항구'에 잠시 닻을 내렸다. 항해하기에 위태로운 때였다. 바울은 그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기로 작정하고 항해를 서둘렀다. 

 

항해 일자를 줄여 이득을 많이 남기려는 선장과 선주의 이해관계와 편하고 안락한 곳에서 쉬고 싶은 군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위험이 예기되었지만 그들은 '잘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기댔다. 순하게 남풍이 불었고 항해는 순조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섬 쪽에서 몰아치는 광풍 유라굴로를 만났다. 선원들이 배를 어떻게든 통제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속절없이 이리저리 떠밀렸다. 좌초를 막기 위해 짐을 바다에 던지고, 항해에 필요한 필수 장비마저 버렸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날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이 점점 희미해졌다. 절망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 그 희망은 경험 많은 선원들이나 침착하고 용감한 백부장을 통해 오지 않았다. 어느 곳에 있든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려는 한 사람, 바울을 통해 왔다.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살리려는 바울의 마음은 변할 수 없었다. 그는 여러 날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한 말을 전했다. 지금은 비록 곤경의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셨다는 것이었다. 그의 증언은 절망의 심연에서 허덕이던 이들의 내면을 밝히는 실낱같은 빛이 되었다.

 

여러 날 표류하던 배가 수심이 얕은 곳으로 밀리면서 배가 암초에 걸릴 위험이 증가했다. 바울은 몰래 배를 탈출하려는 선원들을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백부장에게 고했고, 소동을 겪으며 절망 속에 빠져들어가는 이들에게 음식을 권하며 용기를 북돋웠다.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사람들을 휩쓸어가고 있던 두려움의 폭풍을 잠재웠다. 파선의 위협 아래 있던 이들을 구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한 단 한 사람의 깨어 있는 영혼이었다.

 

*기도

 

하나님,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우리 인생이 상쾌할 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순간 우리는 역풍에 시달리며 삽니다. 만성적인 피로가 쌓이면서 명랑함을 잃었습니다. 사소한 자극에도 화를 내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징징거리기도 합니다. 드물지만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것처럼 난감한 시간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역사의 격랑이 우리 사회를 삼키려 할 때 우리는 허둥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있어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들도 그러한 희망의 메신저가 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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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끈질긴 모험

김기석의 새로봄(194)

 

사랑이란 끈질긴 모험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한일서 2:15-17)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다 한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찾아오기에 피하기 어렵고, 그 충격은 몸과 마음에 오래 남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왔다가 자기 맘대로 떠나가는 사랑 때문에 열병을 앓는 이들이 많다.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것은 모든 생명 현상의 뿌리이다. 세계적인 영성가로 명성을 얻었던 헨리 나우웬 신부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도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싶어했고, 대중들에게 잊혀질까봐 두려워했다. 따뜻한 시선을 언제나 그리워했다. 그런 여린 영혼의 소유자인 그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곤 했던 것은 어머니의 눈길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 내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제가 되었을 때, 미국에서 살기 위해 떠났을 때 바라보셨던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고통이 공존하는 사랑의 눈으로 말이다. 아마도 그 눈이, 사랑과 슬픔이 공존하는 그 눈이, 늘 나를 감동시켰던 것 같다."(마이클 앤드루 포두, <상처 입은 예언자 헨리 나우웬>, 173쪽)

 

 

 

 

 

사랑은 이처럼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사랑의 방향성이다. 옛 성인은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성경은 두 방향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요한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했다.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이 그것이다. 이 셋은 한결같이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과 관련된다. 자기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지구는 자원일 뿐이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이용 가능한 연줄이다. 연줄로서의 역할이 끝나면 관계도 끝난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 만나는 사람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한다.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을 때 이익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평강은 얻을 수 없다. 우리 속에 있는 외로움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서로 함께’(Miteinander)의 존재이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란 끈질긴 모험'이라 했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사랑의 관계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넘어서야 한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견디고 모든 것을 함께 겪어내야 한다.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눠야 한다. 사랑의 모험에 나설 용기가 없다면 인생은 적막할 뿐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사랑의 세계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리를 걷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 드리운 쓸쓸함을 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받고 사랑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사랑하기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짓밟는 이들,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사랑을 선택하며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사랑의 모험을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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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사람의 길

  •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올까요? 제가 가진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기도뿐이겠지요...

    이진구 2019.09.19 08:49

김기석의 새로봄(193)

 

참 사람의 길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마태복음 25:40)

 

떼제 공동체의 설립자인 로제 수사는 스위스 사람이다. 스위스는 영세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2차 대전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민한 젊은이였던 그는 고통 받는 이들을 품겠다는 의지 하나로 떼제에 정착했다. 3년 동안이나 마을의 작은 예배당에서 기도에 매진하던 그의 곁에 형제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약했지만 하나의 질문 위에 자기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로 작정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몸으로 살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돌본 이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내려온 유대인들이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이 찾아간 것은 '독일군 포로'였다. 모두의 미움을 받던 이들이었지만 가장 절실하게 이웃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을 만나고 돌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나중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았다. 이 마음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최후 심판의 날에 벌어질 한 광경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모든 민족을 당신 앞에 불러 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르친다. 주님은 한편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복음 25:34) 그 복을 받은 이들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아니다. 헌금을 착실하게 하고, 은혜 받는 집회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몸짓으로 찬양을 올린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한 이들의 형제자매가 되어 준 이들이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이들은 ‘좋은 교인’이 아니라 ‘참 사람’이다. 물론 좋은 교인과 참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게 결합된 말이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 사람됨’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누가 참 사람인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이고 싶어지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대접해주려는 사람, 외로운 나그네를 보면 따뜻하게 맞아들이려 하는 사람, 헐벗은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입혀 주려는 사람, 병들어 몸과 마음이 다 무너진 사람을 보면 그의 곁에 머물며 힘이 되어 주려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보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넘어 가엾게 여기고 그를 찾아 주는 사람이야 말로 참 사람이라는 말이다.

 

철학자 E. 레비나스는 낯선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사랑을 선택할 때,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인간의 윤리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너'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는 소중한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버릇처럼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합니다. 사람들이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것은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 때문입니다.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이들은 주변화되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사는 이들은 ‘패배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십니다. 아니,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할 수 있도록 하늘의 숨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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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얀나무처럼

  • 처음 들어보는 나무 이름입니다. 감사합니다. 반얀나무처럼 살아야겠네요

    이진구 2019.09.18 08:54

김기석의 새로봄(192)

 

반얀나무처럼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브리서 10:23-25)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여전히 옛 삶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이라고 말했다. 예수님과 친밀한 접속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천사가 우리 마음을 들어 올려주지만, 그 접속이 끊어질 때면 악마가 우리 마음을 아래로 잡아당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이 내림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악마가 행복의 환상을 우리 속에 주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은 삶이 이미 황폐해졌을 때이다.

 

삶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장애물을 만나 길을 우회해야 할 때도 있고, 그 길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늘 흐름 속에서 산다. ‘변함없음’, ‘한결같음’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지향을 잃지 않으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히브리서 10:23)

 

나침반은 흔들리면서 북쪽을 가리킨다. 흔들리지 않고 정북正北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고장난 것이다. 일단 믿음의 길에 접어든 이들은 길이 보이지 않아도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야 한다. 산에 올라가 본 이들은 잘 알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던 산봉우리가 계곡에 들어서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할 이유는 없다. 잠시 다른 봉우리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봉우리는 그곳에 있으니 말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척박한 세상 한복판에서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또 그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다. 그 소망을 굳게 붙들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삶의 길로 부르실 때 동지도 함께 보내주신다. 같은 지향을 가진 이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될 때 우리를 지배하던 이기심과 탐욕의 영역은 줄어들고, 행복의 환상으로 우리를 제멋대로 지배하던 사탄의 권세는 힘을 쓰지 못한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10:24)할 때 주님의 몸은 든든히 선다.

 

 

 

 

반얀나무(Ficus benghalensis)는 뿌리가 약하기에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가지에서 다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습성이 있다 한다. 땅에 닿은 뿌리는 기둥뿌리(支柱根)가 되어 나뭇가지를 받쳐준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 그루 반얀나무가 숲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반얀나무가 그러하듯 서로를 든든히 지탱해주면서 숲을 이루어 뭇 생명들을 품어 안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교회됨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바람이 불든 눈비가 내리든 의젓하게 길을 걷고 싶지만, 우리는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며 인생이라는 소롯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지향을 잃고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동료를 주신 것은 흔들리는 마음을 서로 붙들어주라는 명령인 주줄 이제는 알겠습니다. 함께 격려해가며 숲을 이루는 반얀나무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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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회복

  • 감사합니다. 가슴에 품은 주님의 사람되게 해주세요! 저도 ...

    이진구 2019.09.17 09:49

김기석의 새로봄(191)

 

총체적 회복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마태복음 9:35-38)

 

조선 시대의 선비인 허목(許穆, 1595-1682)은 자신의 평생을 돌아보며 스스로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나는 늘 말이 행동보다 앞섰다. 자꾸 떠벌리기만 했지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경전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지만,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녹아들진 않았다. 말씀 따로 나 따로 각자 놀았다. 나는 이것이 부끄럽다. 지금에 와서 깊이 반성한다. 나 죽으면 이 글을 돌에다 새겨 내 무덤 앞에 묻으라. 뒷 사람이 이 글을 보고 자신을 비춰볼 수 있도록.”(정민, <죽비소리>, 199쪽)

 

참으로 엄정한 자기반성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답게 살고 있나? 예수님을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배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이 사람들을 부를 때 하신 말씀은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였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마태복음 9:35)

 

‘가르치셨다’(teaching), ‘선포하셨다’(preaching), ‘고쳐 주셨다’(healing)라는 세 단어가 눈에 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일상적인 언어로 잘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 ‘좋은 이웃이 되는 것’,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 그 핵심이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다. 주님은 억압과 착취와 폭력을 통해 유지되는 제국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과 평화를 통해 열릴 새 세상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다. 선포의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나 삶을 뒤흔든다. 선포의 언어는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하신 사역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치유 사역이다. 마태는 주님이 사람들의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고 전한다. 질병(nosos)은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병적 증상을 이르는 말이다. 질병은 우리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질병은 삶의 활기(bios)를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애써 유지하고 있는 삶의 질서(nomos)를 깨뜨린다. 가족 가운데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족 전체의 삶의 질 또한 떨어진다. 그런데 주님은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인양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주셨다. ‘아픔’(makaria)은 감정적·정서적·영적으로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신의 균형이 무너지면 충동적이 되고, 화를 참지 못하고, 이웃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고, 공감의 능력이 줄어든다. ‘아픔’은 일쑤 사람들을 비인간의 길로 인도한다. 예수와 만난 이들은 총체적인 회복을 맛보았다.

 

*기도

 

하나님, 인생 여정 가운데 지리산가리산 헤매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욕망의 벌판에서 바장이는 동안 우리 마음은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분별력과 그 뜻을 따라 살려는 검질긴 의지 또한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 위에 인생의 집을 짓고 싶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꿈을 가슴에 품은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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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인다

김기석의 새로봄(190)

 

사랑하면 보인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1)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마태복음 16:1-4)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함께 주님께 왔다. 무심히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두 집단이 서로에 대한 호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쑤 대립하기도 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새로운 경건운동의 중심을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전통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견원지간이었다. 그런 그들이 손을 맞잡았다. 공공의 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던 유대교 세계를 기초부터 뒤흔드는 위험인물이었다. 마태는 그들이 예수께 나온 것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 그들은 예수를 함정 속으로 유인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표징은 일견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위험하다.

 

표징을 보여주면서 자기 말을 따르게 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자신들에게만 귀속시키면서 다른 이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 한다. 지배는 곧장 욕망 채우기와 연결된다. 표징을 보이면서 순진한 사람들에게 재산이나 몸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지 않던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의 표징 요구는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알고 싶다는 절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를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이면서 자신을 입증하려 하는 사이비 종교인, 다시 말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가 계신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았다. 병든 사람들이 나음을 입고, 귀신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친교의 식탁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 말고 다른 표징이 더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려는 마음이지 표징이 아니다.

 

 

 

 

 

진실은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때때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눈이 있다고 하여 다 보는 것이 아니고, 귀가 있다 하여 다 듣는 것도 아니다. 볼 마음이 있다면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들을 마음이 있으면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열네 살 연상인 루 살로메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이런 사랑의 시를 썼다.

 

“내 눈을 감기세요./그래도 난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내 귀를 막으세요./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보인다. 그리고 들린다.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 오시는 시간이다. 세미한 중에 들려오는 그 말씀을 듣기에는 세상이 너무 소란스럽다. 거기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극적인 소리에만 반응한다. 전락이다. 예수님은 표징을 보여 달라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신다. ‘너희는 하늘을 보면서 일기는 분별할 줄 알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 줄은 알지 못하고 있구나.’ 제법 똑똑한 척하고, 모르는 게 없는 척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기도

 

하나님, 자기 의에 충만한 우리는 청맹과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휘황한 것들에 익숙한 눈은 세상에 깃든 영원의 흔적을 보지 못합니다. 소란스런 소리에 익숙해진 귀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눈이 없어도 들을 수 있고,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다는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증거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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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목적

김기석의 새로봄(189)

 

교육의 목적

 

그 날에 당신들은 당신들 아들딸들에게, ‘이 예식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고 설명하여 주십시오. 이 예식으로, 당신들의 손에 감은 표나 이마 위에 붙인 표와 같이, 당신들이 주님의 법을 늘 되새길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이 규례를 해마다 정해진 때에 지켜야 합니다.(출애굽기 13:8-10)

 

출애굽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신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기 위해 무교절을 지키라는 것이다. 무교절에 가장은 아들딸들에게 그 예식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했다. 가장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억의 전승자 혹은 교육자가 되어야 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누가 사람이냐>라는 책(종로서적, 176쪽)에서 유다인의 교육 과제를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교육은 학생에게 살아 있는 존재의 신비와 놀라움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주는 것과 관련된다. 식탁 앞에 놓인 음식이나 과일을 맛보아도 그것이 우리의 앞에 오기까지 온 우주가 참여해 마련한 것임을 안다면 어찌 감사한 마음이 일지 않겠는가. 놀람을 가로막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모두가 선물이다.

 

둘째, 자신이 무한하게 값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빚으로 얻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경쟁에 시달리며 사는 많은 이들이 자존감을 갖지 못한다. 경쟁에서의 패배는 곧 바로 인생의 실패처럼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났든 못났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에 꼭 필요한 많은 것들을 공짜로 누리거나 다른 이들을 통해 얻고 있다. 이걸 알면 지나친 비애나 오만함에 빠질 수 없다.

 

셋째, 시간 속의 성(聖), 곧 거룩함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2) 하셨다.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의 현존을 자각하고 살 때 우리 삶은 거룩해진다. 맑아지고 순수해진다.  

 

넷째, 축제의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을 경축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었다. 요한은 그 이야기를 통해 주님이 계신 곳에서는 삶이 즐거운 축제로 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축제는 혼자서는 누릴 수 없다. 다른 이들을 우리 삶 속에 맞아들이고, 또 우리 자신도 기꺼이 손님이 되려는 열린 마음이 있을 때 축제는 시작된다.

 

교육의 목적은 유능한 직업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살 줄 아는 사람을 육성하는 데 있다. 자기의 존재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아는 사람,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는다. 그는 ‘자아’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화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 앞에 드러내지 못합니다. 삶의 속도를 줄이고 하나님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고 싶습니다. 삶이 온통 신비라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은총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거친 세상을 사는 동안 잃어버린 기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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