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92)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7:1-5)

 

 

예수님은 모든 비판 혹은 판단을 금지하시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금하시는 심판 혹은 비판은 한 존재에 대한 미움과 멸시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건전한 비판은 꼭 필요하다. 누군가로부터 질정(叱正)을 받지 않고는 우리 정신이 자랄 수 없다. 남에게 배울 생각이 없는 닫힌 정신만이 비판받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것이라 해도 모든 비판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없는 질정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물론 존경과 애정이 없는 비판이라고 해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귀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정한 비판, 애정이 담기지 않은 비판 앞에 설 때 자기 방어적이 되게 마련이다. 자기 '에고'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자기를 지키려한다는 말이다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적당한 온도가 필요하듯이 존재의 변화는 사랑의 품 안에서만 일어난다. 오지랖은 넓지만 팔이 짧은 게 문제이다. 누군가를 껴안을 때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절로 흔흔해진다. 그러나 가시처럼 다가서는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이들과 만나면 우리 영혼은 피투성이로 변한다예수님은 누군가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3)

 

 

 

이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들보'는 매우 충격적인 대조이다. 흑백의 대비만큼이나 선명하다. 어쩌면 이것은 자기의 허물을 더 통렬하고 아프게 돌아보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남의 허물은 크게 보고,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처럼 살고 있다. 내게는 못나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소중한 사람이다. 왠지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런 사람이다. 이 마음 혹은 이 눈 하나 얻지 못해 인생이 무겁다. 

 

인도 사람인 비노바 바베는 부단 운동을 전개했다. 부단 운동이란 지주들로 하여금 땅 없는 사람들을 위해 땅의 일부를 헌납하도록 하는 운동이다. 그는 부자들에게 만일 아들이 다섯이라면 여섯이라고 생각하고 땅을 여섯으로 나눠 그 한 몫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권고했다. 거의 불가능한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는 많은 땅을 헌납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정착시켰다. 부자들을 설득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그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옳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 속에 있는 선의 씨앗을 보았고, 그것이 싹을 틔우도록 도왔다

 

"내가 지주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는 많은 잘못과 단점이 있고, 그의 이기심은 높은 담벼락처럼 완강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선량함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문을 찾을 의지만 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그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마치 담벼락 앞에 서있는 것처럼 암담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도 작은 문은 있게 마련이다. 그 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무능 때문이다. 형제의 눈에서 티끌이 아니라 눈물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어느 시인은 남의 상처에 들어앉아 그 피를 빨아 사는 기생충이면서 아울러 스스로 또한 숙주”(정현종)인 인간이 두루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끔 남을 비난하고 비판함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유혹에 시달립니다. 남들이 내게 가하는 비판은 아파하면서도 내가 남에게 가하는 비판에 가차가 없는 것은 우리 속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웃들의 부족함을 채워줄 따뜻한 마음을 주십시오. 이웃들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십시오. 아멘.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91)

 

지나침을 경계하라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전도서 7:15-18)

 

세상살이의 경험이 많은 코헬렛(전도자)은 삶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사람도 있고,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는 것이다. 이 불균형은 우리의 도덕 감정을 뒤흔들고 신의 존재를 회의하게 만들기도 한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실종된 이 세상에서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전도서 7:16)고 권고한다. 적당히 세상 눈치나 보며 손해나지 않을 길을 택하라는 말일까? 그런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가 경고하려는 것은 ‘지나침’이다. 

 

그가 말하는 ‘너무 의롭게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에게 성실한 사람이다. 그는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 그래서 깨끗하다. 하지만 그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는 자기가 자신에게 부과한 성실성이라는 이미지에 얽매인 채 살기에 늘 긴장상태에 있다. 자기 자신을 꾸짖고 탓하며 살다보니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백이 없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지 않던가. 그가 하는 말은 사사건건 지당한 말씀이고, 그의 행동은 나무랄 데 없지만, 그는 누군가의 품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바리새인들이야말로 너무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이라는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잰다.  거기에는 여백이 없다.

 

 

 

                                사진/한희철(노고단)

 

하지만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의 자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셨다. 그래서 상대의 장점을 잴 때는 마음이 푼푼하지만, 허물을 잴 때는 눈이 어두운 듯 보인다.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기준이 분명치 않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마련한 그런 헐거운 틈 사이로 생명의 바람이 불어오자 생명의 싹이 움터 나왔고, 그 싹이 자라 하나님 나라의 꿈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예수님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여백 때문이 아닐까?

 

살다보면 때로는 경계선 밖으로 걸어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수녀들은 유대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나찌의 군인들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수녀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경건이 깨진 것은 아닐 것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다면 그것은 '지나침'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의로운 것도 문제이고, 지나치게 악한 것도 문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극단은 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마련이다. 극단에 서면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삶의 방식을 가진 이를 품지 못한다. 나와 다르다고 하여 틀린 것은 아니다. 질서와 혼돈이 섞여 있는 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오늘 옳게 보이는 것이 내일은 그른 것으로 판명나기도 하고, 오늘 그릇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내일은 옳게 판명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시대의 한계, 인식의 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누구나 다른 이들의 판관이 되고 싶어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겸허한 마음을 심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이웃들을 대하게 해주십시오. 여백이 없는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분명한 입장을 갖고 살면서도 여백이 큰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90)

 

거룩한 삶을 향한 열망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1-2)

 

성경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삶의 목표를 거룩함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거룩함이란 속된 것과 구별되는 종교적 신비 혹은 덕목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한마디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 만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이가 거룩한 사람이다.  

 

성결법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가르쳐준다. 우선 중요한 것은 부모 공경, 우상 숭배 멀리하기, 정성스런 제물 봉헌이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추수를 하면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것, 도적질·속임수·거짓말을 멀리하는 것, 힘있다고 해서 이웃을 해치거나 이웃의 몫을 가로채지 않는 것,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귀먹은 사람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 앞 못보는 이 앞에 장애물을 놓지 않는 것,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지 않는 것, 다른 이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 것, 힘없는 이웃을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것,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았을 때는 애정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 등이다. 

 

 

 

간디의 제자 가운데 비노바 바베는 인도에서 간디 이상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분이다. 그의 정신 세계의 바탕을 만들어준 이는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거지가 문간에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체격이 건장한 거지 한 사람이 찾아왔고 어머니는 평소대로 그에게 적선을 베풀었다. 비노바는 못마땅하여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 사람은 아주 건강해 보여요. 그런 사람에게 적선을 하는 건 게으름만 키워주는 것이라구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지 않은 거예요. [기타]에도 나오잖아요. 순수한 선물은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구요.”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는 아주 차분하게 대답하셨다. 

 

“바냐,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간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하나님처럼 존중해 주고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베푸는 거란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니?”(칼린디, 『비노바 바베』, 김문호 옮김, 실천문학사, p.65)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웃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쾌락의 도구로 삼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하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타자를 물화시키는 것이 능력처럼 여겨지는 시대이기에, 거룩한 삶을 향한 투신이 더욱 절실한 오늘이다. 

 

*기도*

 

하나님,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는 동안 우리 영혼은 묵정밭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삶의 열망은 간데 없고, 온갖 부정적 삶의 습성만이 우리를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우거진 우리 영혼의 뜨락이 스산하기만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통해 거룩한 삶의 열망이 우리 속에서 되살아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완벽한 사랑과 지혜 안에서 우리 삶을 재정비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한 손님으로 여기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89)

 

길을 찾는 사람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4)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립보서 3:7-11)

 

바울은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 영적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느라 늘 노심초사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선망하는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다. 명문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에다가,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이전에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심지어는 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이전에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은 한결같이 그의 자아를 강화해주는 것들이었다. 가문, 학식, 신분, 종교적 열심. 이런 것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소중한 것들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많다. 신앙이란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과정이다. 자랑스러운 게 많은 사람 속에는 하나님을 모실 공간이 부족하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바울의 내면에 비쳐드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게 지푸라기 강아지(芻狗)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늘 막힌 듯 답답하던 정신의 지평이 툭 트였다

 

 

 

그때부터 그는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어떤 고난, 시련도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벗어던지려고 했던 약함과 고통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겼다. 자신의 약할 때가 곧 주님의 은혜가 유입되는 순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움과 해로움이 이렇게 자리를 바꿨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말하지만,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5:10)라고 고백한다.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사람들은 바알과 맘몬을 숭배하고 있다. 한완상 박사는 한국의 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교회의 위기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이렇게 분석한다

 

교세의 양적 팽창과 대외적 선교열을 그토록 자랑하는 한국 교회와 교인의 삶 속에서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위기라 하겠습니다. 그분의 체취, 그분의 숨결, 그분의 꿈, 그분의 정열, 그분의 의분, 그분의 다정한 모습을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밑바닥 인생의 그 억울한 고통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사랑과 공의의 새 질서를 몸소 보여주셨던 갈릴리 예수가 더욱 그리워집니다.”(<예수 없는 예수 교회>, 7)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 거룩한 지향을 다시 회복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이웃들과 더불어 생명의 춤을 추며, 살아 있음을 경축하며 살고 싶습니다. 기쁘게 일하고, 신나게 놀고, 뜨겁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잿빛 우울에 감싸여 있습니다. 세상의 인력이 하늘을 향해 도약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곤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진정한 자유인이 된 바울 사도가 부럽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기다리오니, 성령이여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88)

 

욥의 세 친구를 위한 변명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욥기 2:11-13)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들은 욥과의 논쟁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욥이 큰 시련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주저 없이 달려왔다. 욥을 외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쁘다거나, 거리가 멀다거나, 비용이 많이 든다거나, 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서 욥을 보았지만 처음에는 욥인 줄 알아보지도 못했다.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는,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마치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친구의 불행을 아파한 것이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지냈다. 편안한 집을 놔두고 사서 고생을 한 것이다. 단 하루도 고통 속에 있는 친구 곁에 머물기 어려워하는 우리로서는 감히 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끊긴 자리에서 그저 친구와 더불어 있는 그들의 모습은 가슴 찡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뜨거운 우정의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교육학자인 파커 파머는 한 때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꺼리면서 단절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친구 빌은 매일 그의 집을 찾아와서 30분 동안 발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때의 경험을 파머는 이렇게 전한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파커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116-7) 욥의 세 친구는 바로 그런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들 속에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 그들은 하나였다. 하지만 종교와 신념과 사상이 끼어들자 그들의 관계는 파괴되었다. 벗이 겪는 고통의 가장자리에 가만히 있어줄 때 그들은 우정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석의 욕망이 작동하는 순간 그들은 판관이 되었다. 판관이 있는 곳에서 우정은 망가지게 마련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한 말씀을 들려준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린도전서 8:1c) 

 

그들은 인습적인 사고에 젖어 세상을 죄와 벌 혹은 원인과 결과의 도식으로 바라보았다. 욥의 세 친구는 악인도 아니고 위선자도 아니다. 무지했을 뿐이다.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종교와 신념과 사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과의 깊은 연대감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예기치 않은 시련에 직면한 이들을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위로의 말이 어떤 때는 부질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의 만남을 꺼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욥의 친구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불원천리하고 고통을 겪는 친구를 찾아왔고, 그의 곁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해석하려는 욕망이 끼어들 때 그들의 우정은 흔들렸습니다. 주님, 우리의 굳은 신념이나 믿음이 사람들 사이의 우정어린 결속을 깨뜨리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삶을 향한 열망  (0) 2019.06.03
길을 찾는 사람  (0) 2019.06.02
욥의 세 친구를 위한 변명  (0) 2019.06.01
우리가 초대해야 할 손님  (0) 2019.05.31
눈은 몸의 등불  (0) 2019.05.30
사회적 모성  (0) 2019.05.29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87)

 

우리가 초대해야 할 손님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누가복음 14:12-14)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기 5:24) 에녹이라고 하여 우리와 달랐을까? 그 역시 우리처럼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감사와 원망,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삶을 요약하는 한 마디가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사실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분명한 중심을 갖고 살았다는 뜻이 아닐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내면에 바닥짐을 마련한 사람이다. 바닥짐은 배의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 밑바닥에 싣고 다니는 짐을 일컫는 말이다. 마음에 바닥짐이 있는 사람은 웬만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휘뚝거리지 않는다.  

 

마음의 바닥짐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생을 즐기지 못하고, 남들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하다. 그들은 자기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남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비난을 받으면 살맛을 잃고 칭찬을 받으면 우쭐한다. 그런 이들은 언제 파선할지 모르는 배처럼 위태롭다. 그들은 또한 자리와 서열에 민감하다. 어떤 모임에 가면 제일 어려운 게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상석이 어디인지를 먼저 알아차려야 하고, 참석자들 가운데 자기 지위에 맞는 자리가 어딘지를 가늠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 중에서도 지도자급에 속한 이의 집에 초대를 받아가셨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맨 끝자리에 앉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이나 관행을 뒤집는 요청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산다. 그래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연을 이어가려고 애쓴다. 때로는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스펙을 쌓고, 좋은 차를 타고, 큰 집에 살려는 것도 그것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무시당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계를 향해 마음을 열라고 하신다.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의 신분이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하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누가복음 14:12). 우리가 청해야 할 사람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이들은 대개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리는 이들이다. 가난한 사람,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눈먼 사람…. 이들의 명단은 더 늘어날 수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을 청하라는 말은 시혜를 베풀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 인생길의 동행으로 여겨 존중하라는 말이다. 그들이야말로 자칫하면 잊어버리기 쉬운 인간됨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이다.

 

*기도*

 

하나님, 누군가의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들은 내가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유력한 이들의 초대를 받으면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그런 초대 자체가 내 존재의 무게를 입증해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 참 많습니다. 어딜 가나 눈치를 봐야 하고, 때로는 멸시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이들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초대하여 함께 생을 경축하라고 이르십니다. 쉽지 않은 요구이지만 그렇게 살아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하늘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을 찾는 사람  (0) 2019.06.02
욥의 세 친구를 위한 변명  (0) 2019.06.01
우리가 초대해야 할 손님  (0) 2019.05.31
눈은 몸의 등불  (0) 2019.05.30
사회적 모성  (0) 2019.05.29
배려와 심려  (0) 2019.05.27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86)

 

눈은 몸의 등불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태복음 6:22-23)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다. 두려움이나 거짓, 사심이나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편안하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본다. 하지만 관계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우리 눈은 살짝 흔들린다. 핏발 선 눈, 섬뜩한 눈, 이글거리는 눈, 흐릿한 눈, 초점을 잃은 눈과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반면 넉넉하지만 깊고, 깊지만 따뜻하고, 따뜻하지만 진실한 눈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진다.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유한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한다.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외적 정보를 조합해 세상과 만나고 소통한다. 오감 가운데서 어떤 감각에 유난히 예민한 이들도 있지만, 보통사람들에게는 시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시대는 특히 시각이 독주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옛 사람들은 밖으로 향한 눈보다는 안으로 열린 눈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는 성찰(省察)이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성찰은 물론 고독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늘 누군가와 접속 중인 이들은 성찰적 존재가 되기 어렵다. 어쩌면 성찰의 시간을 견딜 수 없어 누군가와 접속을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기 속에 있는 약함, 상처, 그림자, 부끄러움 등을 살필 용기가 없는 사람일수록 남들에게 가혹하다. 그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아내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작은 티끌이라도 찾아내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허물을 가리려는 가련한 시도일 뿐이다.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야 삶이 비루해지지 않는다. 마음의 빛이 흐려져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에 휘둘리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게 된다.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산다. 눈이 밝아져 제대로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 다니지 않는다. 눈이 성하지 않으면 온 몸이 어두워지게 마련이다. 온 몸이 어둡다는 말은 자기 인생의 때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요한계시록 3:18)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안약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눈빛 맑은 사람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밝아집니다. 똑같은 사물이나 대상을 보아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표현하는 이들과 만나면 우리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려는 자세로 일관하는 이들과 만나고 나면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을 느낍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셨는데, 눈이 어두운 우리는 그때를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 눈을 밝혀주십시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게 하시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는 의지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의 세 친구를 위한 변명  (0) 2019.06.01
우리가 초대해야 할 손님  (0) 2019.05.31
눈은 몸의 등불  (0) 2019.05.30
사회적 모성  (0) 2019.05.29
배려와 심려  (0) 2019.05.27
인간은 거룩하다  (0) 2019.05.27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85)

 

사회적 모성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명기 15:12-15)

 

신명기 법전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해, 그리고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명심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규정이 상당히 상세하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생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 15장은 빚을 면제해 주는 면제년 규정을 다룬다. 매 칠 년 끝에는 빚을 면제하여 주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단락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필요한 이들에게 넉넉히 꾸어주되,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되고, 면제년이 되면 그 빚을 삭쳐주어야 한다. 성경은 그 땅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신명기 법전이 다루는 히브리 종들에 대한 규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빚에 몰려 종으로 팔려온 히브리인들은 여섯 해 동안 주인을 섬기면 이듬해에는 그에게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야 했다. 자유를 주어 내보낼 때에 '빈 손'으로 내보내지 말고, 토지와 가축으로부터 얻은 소득 가운데서 넉넉하게 주어서 내보내야 했다. 그들의 수고와 땀 흘림 덕분에 주인집도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나그네들일 뿐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떠나도 땅은 여전히 남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살다 보면 사람들의 운명은 갈리게 마련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약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린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특권 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사람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림으로 죄의 길에 접어들게 되고, 사회적 약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이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내면에 냉소와 불신과 적의를 키우게 된다. 평화로운 삶의 꿈은 가물가물 스러지고, 세상은 전장으로 변하고 만다.

 

특히 오늘의 현실이 그러하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빚’을 매개로 하여 작동되는 체제이다. 소비사회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욕망의 시장으로 내몬다. 인간이 소비자로 전락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 사는 동안 난파 당한 이들이 많다.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삶의 방편을 찾을 길 없어 낙심하는 젊은이들이 거리와 광장을 채운다. 일하지 않고도 호사스럽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상실감 혹은 원한감정에 시달린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는 위험 사회이다. 사회학자 짐멜은 “돈은 자유를 선사하지만 연대를 앗아간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이 점점 사라진다는 말일 것이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앞장서서 그 일에 동참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값없는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기도*

 

하나님, 무정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서로 도우며 살라고 보내주신 이웃들을 우리는 경계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이 우리의 안일한 행복을 뒤흔들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서로 거들고 부축하며 사는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우리 삶은 점점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아픔을 겪는 이들을 보면서도 모른 체 합니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진주군처럼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인색한 마음, 무정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이웃들과 더불어 삶을 경축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넓혀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초대해야 할 손님  (0) 2019.05.31
눈은 몸의 등불  (0) 2019.05.30
사회적 모성  (0) 2019.05.29
배려와 심려  (0) 2019.05.27
인간은 거룩하다  (0) 2019.05.27
벌떡 일어선 사람  (0) 2019.05.26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84)

 

배려와 심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로마서 15:1-3)

 

헨리 데이빗 소로는 그의 책 『월든』에서 자기가 가꾸었던 콩밭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랑의 한쪽 끝은 내가 그늘에서 쉴 수 있는 관목 떡갈나무 숲에서 끝나고, 다른 한쪽 끝은 한바탕 김매기를 하고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푸른 딸기의 색깔이 더 짙어지는 블랙베리 밭에서 끝났다. 잡초를 뽑고, 콩의 줄기 주변에 신선한 흙을 덮어주면서, 내가 뿌린 씨에서 나온 줄기와 잎들이 잘 자라도록 격려하고, 황색 흙이 자신의 여름 생각을 다북쑥, 후추나무 또는 기장 같은 잡초가 아니라 콩의 잎과 꽃으로 표현하도록 설득하여, 땅이 풀이오!가 아니고 콩이오!라고 외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일과였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208쪽)

 

소로는 풀을 뽑고 콩대 주위에 흙을 북돋워주는 것을 콩대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황색의 흙을 설득해 잡초가 아니라 콩잎을 내도록 한다. 그래서 자라나는 '콩'은 흙의 자기표현이요 긍정이 된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단순하게 요약한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로마서 15:1-2).

 

여기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여전히 규율에 매인 채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하여 비웃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약함을 보듬어 안으면서 그들이 성숙한 믿음에 이를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약한 이의 힘이 되어주는 것, 그들 속에 잠들어 있는 선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호명하여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믿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우리 또한 그러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편 116:12)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하나 밖에 없다. 누군가의 동료가 되는 것, 남들을 보살피는 것, 이웃의 짐을 함께 지는 것 말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셸). 이웃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위’이다. 우리가 정녕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 배려와 심려야말로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묘약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까닭을 바울 사도는 더욱 간명하게 밝힌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15:3) 즉 그리스도는 사사로운 욕망에 굴복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항상 당당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욕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좋을 대로 하지 않는 삶을 연습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제자로 지어져 갈 것이다.

 

*기도*

 

하나님, 과거에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을 때에는 마을 전체가 연약한 지체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들에게 설 자리를 제공함으로 인간적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연약한 이들은 난폭하고 야비한 강자들의 사냥감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연약한 이들을 보살피라 이르십니다. 그것은 악한 시대정신을 거스르며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길입니다. 어렵지만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은 몸의 등불  (0) 2019.05.30
사회적 모성  (0) 2019.05.29
배려와 심려  (0) 2019.05.27
인간은 거룩하다  (0) 2019.05.27
벌떡 일어선 사람  (0) 2019.05.26
웃시야의 몰락  (0) 2019.05.25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81)

 

인간은 거룩하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우뚝 설 것이다.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 민족마다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다른 모든 민족은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 우리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할 것이다.(미가 4:1-5)

 

주전 8세기 예언자인 미가는 모레셋이라는 시골 마을 출신으로 사회의 밑바닥 계층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그 지경으로 만든 지도자들의 무능과 사악함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였고, 하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무리들이었다. 부자들은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점을 뜯어냈고,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은 입에 먹을 것을 물려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했다. 재판에 뇌물이 오갔고, 종교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돈벌이였다. 지도자들이 그 지경이니 백성들은 자책감조차 없이 거짓말을 해댔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토라의 이상은 잊혀졌다. 암흑시대였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미가에게 주님의 영과 능력을 채우시어 그들을 꾸짖게 하셨다. “그러므로 바로 너희 때문에 시온이 밭 갈 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3:12) 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다. 하나님의 분노 속에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백성에 대한 사랑에서 터져나온다. 미가는 폐허더미가 될 예루살렘,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성전 산이 새로운 희망의 뿌리가 될 것을 내다본다. 인간의 헛된 꿈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꿈이 시작된다. 미가는 때가 되면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설 것이라고 말한다.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몰려오면서 주님께 길을 여쭙고,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과 위선은 사정없이 깨뜨리지만, 상한 것은 싸매고 약한 것은 강하게 만드신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미가는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 훈련을 하지 않을 세상을 그려보인다. 앗시리아라는 제국주의의 망령이 세상을 뒤덮는 때, 침략전쟁에 나선 군인들의 발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려올 때, 지도자들의 폭거로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올 때 미가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은 그 꿈을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우리들 속에 있는 거칠고 야비한 것들을 녹여 부드럽고 따뜻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벌이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김준태 시인은 <인간은 거룩하다>라는 시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힌 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한 그릇의 물도 함부로 엎지르지 않고, 한 삽의 흙이라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이를테면 풀여치, 지렁이, 장구벌레, 물새, 뜸북새, 물망울 등은 다 거룩한 생명이다. 그렇기에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것들을 어루만진다. 우리 마음에 숨겨둔 칼과 창이 먼저 녹아내려야 한다. 그래야 보듬어 안을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암울한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 우리 속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의 등불로 우리 앞을 밝혀주십시오. 게으름과 냉담함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꿈을 우리 꿈으로 삼고 살게 해주십시오. 거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가슴에 창과 칼을 품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칼과 창은 우리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주님, 그 거친 것들을 녹여주십시오. 생명을 품어 기르는 흙을 닮은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회적 모성  (0) 2019.05.29
배려와 심려  (0) 2019.05.27
인간은 거룩하다  (0) 2019.05.27
벌떡 일어선 사람  (0) 2019.05.26
웃시야의 몰락  (0) 2019.05.25
베들레헴의 우물물  (0) 2019.05.23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