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55)

 

잠과 식사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열왕기상 19:1-8)

 

갈멜산에서의 대결 이후 신적 분노에 사로잡힌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붙잡아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기손 강가로 데려가 모두 죽였다. 그런 후 엘리야가 비를 내려달라고 일곱 번 기도하자, 바람이 일고 짙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오롯이 나타났다. 하지만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갈멜산에서 벌어진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왕비 이세벨은 이를 갈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언한다. 만일 그를 내일 이맘때까지 죽이지 않는다면 신들에게서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갈멜산의 엘리야라면 이런 위협 앞에 흔들릴 리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야가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고 말한다.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었던 엘리야에게 적용된 단어들이 낯설다. ‘두려워서’, ‘급히’,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이 아닌가? 엘리야는 영웅에서 졸지에 반(反)영웅으로 전락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인간이다. 어떤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고 난 후에는 무력감이나 공허감이 찾아올 때가 많다. 그는 쓸쓸한 도망자가 되어 뙤약볕 밑을 터벅터벅 걷다가 로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주님께 하소연한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4절)

 

 

 

 

그런데 혼곤한 가운데 잠이 찾아온다. 잠은 엘리야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독의 심연으로 내몰리던 마음에 틈을 만들어준다. 팽팽하게 곤두섰던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그 때 천사가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머리맡에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잠에 빠졌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른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리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감동한다.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훈계하거나 꾸짖지 않으셨다. 그의 절망과 두려움까지도 품어 안으시고 그에게 꿈조차 없는 단잠을 주셨다. 그리고 그를 위해 말없이 밥상을 차리셨다. 마치 중력처럼 그를 절망으로 잡아당기던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일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이 장면을 생각한다. 우리를 위해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기도*

 

하나님,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로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몰아치던 엘리야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은 낯설기만 합니다.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돌아보면 그게 사람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연약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말없이 감싸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낼 수 없습니다. 비록 비틀거리며 걸을지라도 기어코 가야 할 목표에 당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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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4)

 

예수님도 때론 분노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복음 23:27-31)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걸림돌이라고 하신다. 회칠한 무덤, 겉과 속이 다른 이, 잔과 접시의 겉은 닦지만 속은 닦지 않는 사람들. 험한 욕설인 셈이다. 맹자는 ‘남의 선생 되기 좋아하는 것이 탈(人之患在好爲人師)’이라 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가르칠 것만 있고 배울 것은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들이다.  예수님은 종교적 독선과 권위에 짓눌린 채 두려움과 죄책을 안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아픔을 절절히 느끼셨다. 하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도록 도와야 할 종교가 오히려 사람들의 질곡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분노하셨다. 칼릴 지브란은 1926년에 쓴 『모래와 물거품』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옛날에 너무나 남을 사랑하고 그 자신이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나는 그 사람을 어제 세 번이나 만났다. 처음에 그는 창녀를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부랑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번째는 교회 안에서 장사치와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었다.”

 

 

 

 

지브란의 예수는 연약하고 상처 입은 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친절하고 겸손하지만 자기 의에 사로잡혀 안하무인인 사람들, 사람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폭풍처럼 분노를 터뜨리는 분이셨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어떤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위선과 탐욕과 절제를 모르는 권력 앞에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 사회적 루저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다. 19세기 유대교 갱신운동의 지도자였던 렙 메나헴 멘들은 불꽃같이 살다간 사람이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타오르는 분노가 그의 속에서 되살아났다고 말할 정도로 불의에 대해서 엄격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일화가 하나 전해 내려온다. 

 

“한번은 시장에서 사과를 파는 한 여자를 보았다. 바구니의 윗부분에는 맛있게 생긴 잘 익은 사과를 얹어 놓았고 설익은 것들로 아랫부분을 채워 놓은 것을 보고 아홉 살 된 소년은 바구니를 둘러엎어 그 여자의 장사를 망쳐버렸다. 여자는 화가 치밀어 올라 그를 마구 욕하며 때렸다. 그는 욕설과 매질을 감수하였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7, 『진리를 향한 열정』, 종로서적, 1985, 128쪽)

 

이런 의분이 없어 교회가 무기력해졌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미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 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위선의 굳은 껍질을 깨는 망치의 언어가 때로는 필요한 법이다.

 

*기도*

 

하나님, 경건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과 욕망이 맞부딪치는 거친 세상에서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요? 고사목만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위선 앞에서 내뱉으신 예수님의 거친 언사가 오히려 우리 마음에 위안이 됩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울고, 웃어야 할 때는 웃고, 분노할 때는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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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주의의 어리석음

 

그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들이 모두 말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에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마태복음 27:22-26)

 

예수님은 지도자들의 음모에 따라 빌라도에게 넘겨졌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면서 제시한 죄목은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그리스도 곧 왕을 자칭했다는 것(누가복음 23:2)이었다. 한 마디로 선동가였다는 것이다. 예수 운동을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기 위해 그들이 동원한 수사는 치밀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멋대로 왜곡하여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끼워 넣었다. 빌라도는 그런 고발에 대해 예수에게 자기 변론의 기회를 주었지만 주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말의 부질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이 낯선 사나이의 깊은 침묵에 당황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는 그저 고요한 침묵 속에 머물고 있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에서 예수님을 만난 빌라도의 당혹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심문을 했지만 그는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빛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내 통치자요 재판장이기나 한 것처럼.”(『사람의 아들』, 함석헌 옮김, 한길사, 137쪽)

 

 

 

 

성경은 빌라도가 예수의 침묵을 매우 이상히 여겼다고 전한다(마태복음 27:14). 여기서 말하는 ‘이상히 여겼다’는 말은 예수의 이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전할 때 사용되던 단어이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엄, 즉 신적인 권위를 보았던 것이다. 빌라도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예수님이 자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면 결정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인 고려와 양심의 법 사이에서 갈등했다.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뿌리치는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예수를 처벌할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마태복음 27:22)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처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당당하지는 못하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기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되지 못할 때 삶은 비루해진다. 위임된 권한을 바르게 활용하지 않음으로 당분간 권력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물을 가져다가 손을 닦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마태복음 27:24) 하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비겁이 벗겨지는 것은 아니다.

 

*기도*

 

하나님, 문제를 적당히 해결하고 넘어가고 싶었던 빌라도의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그는 법의 권위를 세우는 데 실패했습니다.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기보다는 대중들의 시선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우리도 정의보다는 평판에 더욱 마음을 쓰곤 합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이런 보신주의 때문입니다. 이제는 정의와 공의가 넘실거리는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진실한 믿음의 용기를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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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2)

 

죽어서 사는 길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11-15)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규정해주는 단어는 ‘안다’이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선한 목자는 도둑과 이리로부터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삯꾼들은 위험이 닥치면 양떼를 포기한다. 자기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셨다.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쳐야 할 가치를 알고 산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 아닌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어느 철학자는 죽음은 미래에 실현될 것이 확실한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 말했다. 죽음은 고유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들은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더 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한 이들을 통해 발생하곤 한다. 예수님도 살고 싶은 생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 위해 생을 구걸하지 않았다.

 

 

 

 

 

 

<엘라의 계곡>이라는 영화에서 행크라는 인물은 자기를 도와주다 어려움을 겪은 경찰관의 집에 찾아가 그의 어린 아들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 들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다윗은 자신의 공포심을 이겼어. 그래서 골리앗이 상대가 안 된 거야. 골리앗이 달려오는 데 꼼짝 않고 기다렸단다.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인 줄 아니? 괴물하고는 그렇게 싸우는 거야. 다가오게 놔뒀다가 눈을 똑바로 보고 끝장내는 거지.”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와 그렇게 싸웠고 마침내 죽음의 지배를 끝장내셨다. 어떤 사람이 용기가 있다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현실이 없다면 어떻게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육체적인 고통이나 사회적 수치를 당할 우려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맞서는 순간, 그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를 마비시킬 수 없다. 이게 자유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장 큰 적인 두려움의 눈을 똑바로 보고 끝장을 냈던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라 죽음에 대해 죽으신 분, 영원한 자유인이다. 문익환 목사는 <마지막 시>라는 시에서 “두 동강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나는 죽는다./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아./그 말만 생각하자./그 말만 믿자, 그리고/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이 밤에도/죽음을 살자.”고 노래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길이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죽어서 산다’는 말씀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자유롭고 멋지게 살고 싶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물러서곤 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불의를 보면 화를 내거나 혀를 차면서도 항거다운 항거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소한 손해도 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의 영을 몰아내고, 자유인의 영을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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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1)

 

바보 같은 열정

 

하나님의 사람은 세속에 매몰된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존재들이다. 모두가 높은 곳을 지향할 때 낮은 곳을 지향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추구할 때 불편하고 힘겨운 길을 걷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온갖 말로 바울을 폄하했다. 사심 없는 것처럼 보여도 바울이 뭔가 꿍꿍이속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했을 거라든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 비해 이름 없는 사람이라든지,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등의 모함이었다. 바울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증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b-10)

 

그는 사심 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을 뿐 누구를 속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한 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성도들의 구원에 있었기에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려 했다. 늘 시련의 그늘 아래 있었기에 그는 근심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늘 기뻐했다. 질그릇 속에 담긴 값진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쁨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다. 비행기가 지상의 인력을 떨치고 날아오르듯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 나라의 흐름을 타는 순간 근심은 기쁨으로 바뀐다. 바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을 부요하게 했다. 염려와 근심에 짓눌린 이들을 일으켜 세웠으니 말이다.

 

 

 

 

후배 목사가 제주도에서 목회할 때의 일을 들려주었다. 교인이 20명 쯤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교인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몇 달 수고한 끝에 그의 교인은 다섯 명이 되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었다. 그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홀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들의 목회지를 찾아갔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탄식하듯 말했다. “네가 수도원장으로 사는구나.”

 

프란체스코 성인은 새들과 동물들에게도 설교를 했다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느 수도자는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싶어했다. 사환 노릇을 하던 젊은이가 고단한 나머지 텅 빈 들판에서 발을 멈추고는 말씀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 앞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수도자는 열성을 다해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나자 돌들이 ‘아멘’ 하고 화답했다고 한다. 좋은 것을 남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하는 이 바보 같은 열정이 세상을 정화하지 않겠는가?

 

*기도*

 

하나님,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두려움을 주입하려 합니다. 삶의 안전장치를 많이 마련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그 설득에 넘어간 이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축적하기 위해 자기를 착취합니다. 이웃들을 돌보거나, 그들과 삶을 경축하며 살 여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외로움은 깊어가고, 삶은 적막해집니다. 주님, 소유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항상 생의 신비를 경축하며, 다른 이들을 복 되게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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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0)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편 27:1-4)

 

목숨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 잘 해결해 나갈 때도 있지만 어려움에 치여 헐떡일 때도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우리 마음에 기어들 때도 있고, 구체적인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도 있다. 어떤 경우든 두려움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이성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흔들리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붙들어야 할까?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거나, 잠을 청하거나,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자기를 던지거나, 술의 힘을 빌리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간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시인은 두려움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린다. 그러자 은총의 날개 아래서 살아온 지난날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주님은 인생의 어둔 밤을 만난 시인의 등불이셨다.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다. 잡아먹을 듯 달려들던 적들은 마치 제 발에 걸린 듯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여전히 어려운 현실은 남아 있지만, 회복된 기억은 시인의 가슴에 든든함을 심어준다.

 

 

 

 

절망의 어둠이 우리를 사로잡으려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숨결을 불어넣어 절망과 무기력을 극복하게 하신다.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에 시인은 노래한다.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시편 27:3)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 사람의 고백이다.

 

길들인 독수리와 함께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날개를 편 채 유영하는 독수리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 모습이 경이로웠다.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바람은 지친 나그네의 시린 마음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일 때도 있지만, 장애물을 다 날려버리는 회오리바람일 때도 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깨우는 봄바람일 때도 있지만,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날려버리는 태풍일 때도 있다.

 

시인은 자기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소원이란 그 소원 이루고 나면 죽어도 좋은 것일 것이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편 27:4)

 

하나님이라는 중심에 자신을 비끄러맨 채 살고 싶은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인 삶은 직립한 삶이다. 그는 허둥거리지 않는다.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당당한 이 한 마디가 우리를 붙들어준다.

 

*기도*

하나님, 힘들 때나 순탄할 때나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사는 새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복할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무지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붙드시고, 하늘빛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흐르는 모래에 갇히듯 세상일에 속절없이 빠져들 때 우리의 손을 잡아 건져주십시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두려워하는 영을 거두시고,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받드는 담대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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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49)

 

성찬의 신비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0:16-17)

 

<안식의 여정>은 헨리 나우웬 신부가 남긴 마지막 일기이다.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세계적인 학자인 그는 인생의 절정기에 대학을 사임하고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새벽의 집’에 들어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담’이라는 사람을 돌보며 살았다. 밥을 먹여주고, 씻겨주고, 잠자리를 보아 주고, 휠체어를 밀어 산책시켜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여러 해를 그렇게 살다가 그는 안식년을 얻게 되어, 1년 동안 ‘새벽의 집’을 떠나 세계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벗들을 만났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벗들과 만나 한 가장 중요한 일이 성찬 나눔이었다는 사실이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은 성찬을 나눔으로 자기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재확인하곤 했다. 그들의 사귐의 중심에는 성찬식이 있었던 것이다.

 

주후 4세기 이후에 사막의 은둔소에 머물며 기도생활에 전념하던 이들을 가리켜 헤지카스트라고 부른다. 그들도 주일이 되면 은둔소에서 나와 인근 도시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 그것은 예배와 성찬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 웨슬리는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감리교도들에게 길을 가다가도 어딘가에서 성찬식이 있음을 알면 꼭 성찬에 참여한 후에 길을 떠나라고 권고했다.  

 

 

 

 

성찬식은 어느 교회에서나 아주 엄숙하게 거행되지만 사실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은 일상의 식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찬식이 지나치게 신비화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교회의 상징은 성찬식에 사용되는 화려한 그릇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실 때 사용한 수건과 대야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리가 있다. 지금의 성찬식이 성직자들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도구화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제자들은 성찬을 통해 주님과 함께 지냈던 때의 기억을 반추하고, 그분의 현존이 자기들 속에 일으켰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고, 어찌하든지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시던 주님의 모습,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서 한없이 당당하시던 주님의 모습,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던 주님의 모습, 그리고 십자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던 주님의 모습, 그리고 두려움에 떨던 자기들을 찾아와 평안을 빌어주며 새로운 사명을 주시던 주님의 모습. 주님에 대한 기억은 또한 거울이 되어서 지금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였을 것이다. 이런 성찬을 나눌 때 우리 삶이 맑아지지 않을까?

 

*기도*

 

하나님,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주님의 삶과 희생을 떠올립니다. 성찬의 식탁 앞에서 인간 세상의 모든 차별은 지워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분리의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허무셨습니다. 우리도 장벽 허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말이 넘실대는 세상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봅니다. 이제는 사람들 앞에 걸림돌을 놓지 않겠습니다. 가장 천대받는 이들의 벗이 되기 위해 몸을 낮추겠습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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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밝은 사람 라합

 

정탐꾼들이 잠들기 전에, 라합은 지붕 위에 있는 그들에게 올라가서 말하였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여호수아 2:8-9)

 

여호수아는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 성으로 보냈다.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 가운데 하나인 여리고를 통과해야만 했던 것이다. 정탐꾼들은 그 성에 잠입하여 라합의 집에 머물렀다. 성경은 라합을 창녀라고 소개한다. 다산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성전에 소속되었던 제의적 창녀를 일컫는 말은 ‘커데샤’이다. 이들은 세속적 매춘행위는 하지 않았고 사회적 지위도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었다. 그에 비해 라합에게 적용된 단어 ‘조나zǒnā’는 세속적인 창녀를 일컫는 말이었다. 라합은 그 성읍 국가의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여인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엄한 인격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남성들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그런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고단한 삶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사람이었다. 

 

정탐꾼들은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의 정체는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정탐꾼이 왔다는 첩보는 왕에게까지 알려졌고, 왕은 라합에게 전갈을 보내 정탐꾼들을 데려오라 이른다. 그러나 라합은 두 사람을 지붕 위로 데려가 널어놓았던 삼대 속에 숨겨주었다. 그럴듯한 말로 수색대를 따돌린 후에 라합은 정탐꾼들의 탈출을 돕는다. 그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그동안 라합은 어쩌면 단 한 번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합은 밑바닥에서 사는 이들의 예민한 지각력으로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라합은 거스를 수 없는 그 변화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며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세웠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돌려보내며 한 말은 라합의 단단한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여호수아 2:9)

 

라합은 여리고의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는지, 그리고 넘실거리는 홍해를 어떻게 가르셨는지, 아모리 족속에 속한 두 나라 헤스본과 바산을 어떻게 정복했는지를 다 듣고 있었다. 라합은 그런 모든 구원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대세는 기울었다. 라합은 천대받던 여인이지만 눈이 밝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기도*

 

하나님, 세상을 바로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표면의 질서를 알아차리기도 어렵지만, 이면에서 작동되는 힘을 이해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중들이 선호하는 길을 따라 걷기도 합니다. 불안을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분별해냈습니다. 밑바닥의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열린 눈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역사 섭리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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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47)

 

 

축복의 소명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29:4-9)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나라를 잃어 천더기 신세인 그들에게 세상은 적대적일 뿐이었다. 그들은 복역의 때가 끝나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학수고대하며 살았다. 그들의 일상은 고통 그 자체였다. 조롱하는 눈빛에 상처를 입고, 무시하는 말투에 맘 상하고, 물리적인 폭력에 시달렸다. 가진 것이 없다고, 지켜줄 나라가 없다고 마치 인격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분하지만 상황을 바꿀 힘조차 없었다. 그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말한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예레미야 29:5-6)

 

예레미야는 뿌리 뽑힌 백성들에게 속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는 헛된 꿈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비록 남의 땅에 살고 있는 나그네 신세이고, 아무데도 속한 데가 없는 ‘설 땅을 잃은(nowhere)’ 사람들이지만 바로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지금 여기(now and here’)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봄 되면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고, 또 때가 되면 돕는 배필을 만나 아들딸 낳으며 일상의 삶을 회복하고, 자식들이 장성하면 짝을 지워주라는 것이었다. 곤욕스럽더라도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수굿이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권고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보아도 치가 떨려오는 압제자들의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한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도, 약자의 비겁한 굴종도 아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이 바빌로니아에서 기록한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창세기 1:28)라고 축복하셨다. 마음에 이는 증오심과 원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승자의 오만한 여유를 즐기는 이들보다 더 큰 정신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이기는 길이고, 사는 길이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활용하여 살아남았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기독교인의 소명은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라도 다가와 친밀하게 머물고,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편하게 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우정의 공간’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기도*

 

하나님,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의심이 머리를 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을 못본 체 하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일상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라 이르십니다. 땅의 현실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둥거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현실 속에 하늘을 끌어들이며 살겠습니다. 믿음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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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46)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태움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누가복음 15:8-10)

 

드라크마 열 개를 가진 여인이 있었다. 드라크마는 로마 세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은화인데, 그 가치는 대략 노동자의 일일 품삯에 해당했다고 한다. 열 드라크마는 여인이 어려운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비상금이었는지, 전 재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 되었든 이 여인은 가난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 부자들은 ‘그까짓 것’ 할지 모르겠지만 이 여인은 그럴 수 없었다. ‘어디에 떨어뜨렸을까?’ 여인은 이리저리 생각을 궁굴려보고, 이곳저곳 둘러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여인은 창문조차 없어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집에 불을 밝힌 후에 종려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빗자루를 들고 온 집을 쓸었다. 온 집이라야 방 한 칸에 불과했겠지만, 여인은 귀를 나팔처럼 펼쳐 금속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들리나 집중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태움. 모든 것이 넉넉한 이 시대에는 만나보기 어려운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닐까? 무관심과 냉정함으로 사람을 잃은 적은 부지기수이고, 내면의 신성한 불꽃도 이제는 가물거리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까닭조차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소명(vocation)을 뜻하는 라틴어의 또 다른 의미는 ‘목소리’(voice)이다. 소명이란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들어야 할 내면의 목소리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음에 반응하느라, 하늘의 소리를 놓치곤 한다. 진정한 자기로부터의 소외는 이렇게 발생한다. 분주함 속에서도 마음이 공허하고 스산한 것은 소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잃어버리고도 잃은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줄 모르니 찾지도 않는다.

 

애태우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던 여인은 마침내 소망을 이뤘다. 여인은 기뻤다. 그래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누가복음 15:9) 여인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기쁨에 초대한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 사심 없이 기쁨을 나누는 사람들은 어떤 연대의 끈이 자기들 속에 생겨난 것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누가복음 15:10). 애태움이 없다면 기쁨도 없다. 욕망의 벌판에서 바장이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며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 이처럼 장쾌한 일이 또 있을까?

 

*기도*

 

하나님,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윤동주) 시인의 고백이 참 적실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삽니다. 다른 것에 온통 마음이 팔렸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우리 발걸음은 대지에서 유리된 것처럼 허청거리기 일쑤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우리도 잃은 것을 찾는 자가 되겠습니다. 우리 발걸음을 인도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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