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화 사이

김기석의 새로봄

 

복과 화 사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누가복음 6:20-26)

 

“복이 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 너희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헬라어의 어순에 따라 재구성한 것이다. ‘복이 있다’는 선언이 앞에 나오고 그 대상 혹은 이유가 뒤에 나온다. 단언적일 뿐만 아니라, 같은 구가 반복되기에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복’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너무 낡은 말이 되어 버려서 원문의 뜻을 담아내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복’으로 번역된 ‘마카리오스’를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셨던 김교신 선생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용출하는 내적 환희의 샘”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 안에서 사람 된 자의 진정한 도를 따르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김교신 전집4, <성서연구>, 노평구 편, 32쪽)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요즘으로 치면 영 복 같지 않은 복이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 이것은 오히려 화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지금 정말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이들은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기보다는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에 화를 내기도 한다. 마치 주님이 불의한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다. 엄연한 고통의 현실에 눈을 뜨고 또 저항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영혼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약이라는 것이다. 사실 역사 속에서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한 때도 있었기에 마르크스의 말은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이나 굶주림을 미화하실 생각이 없다. 네 가지의 복은 24절부터 나오는 네 가지 화에 대한 선포를 배경으로 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눅6:24-26)

 

이 대목 역시 원문에는 ‘화가 있다’는 구절이 맨 앞에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온다. ‘부요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모든 이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 이 구절도 얼핏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에 담겨 있는 속뜻을 헤아리려면 상상력이 조금 필요하다. 여기서 화가 있다고 선언된 사람들은 '타자' 혹은 '이웃'의 고통이나 불행에는 아랑곳없이 홀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 우월감에 들떠 남을 무시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공감할 줄 모른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울 줄도 모르고,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출 줄도 모른다. 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화일 때가 많다.

 

*기도

 

하나님, 주님의 말씀은 가끔 우리의 일상적 판단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풍요로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슬픔을 한사코 피하려는 이들에게 지금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 전복적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시오. 믿음은 관념도 이론도 아닌 현실임을 깨우쳐주십시오. 지금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줄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 가운데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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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김기석의 새로봄(

 

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이사야 19:23-25)

 

꿈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꿈꾸는 이들은 몽상가 혹은 현실 부적응자 취급을 당하곤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이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는 법이다. 꿈을 버리는 순간 비관주의와 허무주의가 우리를 확고하게 지배한다. 평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꿈은 어처구니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 꿈은 강고한 현실에 작은 틈을 만드는 법이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종신교수인 정현경 박사는 알자지라 TV에서 본 한 광고를 즐겁게 기억한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이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축구공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높은 시멘트 담 너머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실망한 소년은 시멘트 담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팔레스타인 쪽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저쪽에서 놀고 있던 또래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그 공을 힘껏 차 담을 넘겨 돌려보내준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126쪽)

 

 

 

 

 

중요한 것은 그 ‘틈’이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틈이 없었다면 이런 멋진 장면은 연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있는 장벽 사이에 시소가 놓이자, 이쪽과 저쪽의 아이들이 시소를 타고 노는 장면을 보았다. 장벽을 깨뜨리는 상상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 틈으로 평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혀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경계선을 가로지른 분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의인과 죄인, 성과 속 사이에 길을 내 서로 통하게 만드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삶으로 만드신 그 길을 우리 길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이사야 19:23)

 

이사야는 기존질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대관계였던 나라들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세상 여러 나라에 복을 매개하는 꿈을 꾼다. 이런 꿈이 없어 세상은 거칠고 빈곤해졌다. 역사적 상상력을 억압하고 세상을 시장으로 바꾸는 정치를 바로잡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꿈이라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기도

 

하나님,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동안 우리는 날개를 잃은 새처럼 살고 있습니다. 몸은 비대해졌지만 정신은 왜소해졌고, 땅의 현실에 몰두하다보니 하늘을 잊었습니다. 경쟁과 불화가 우리의 자연 상태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서로에게 복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의 그 꿈을 우리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는 강고한 편견과 적대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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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의 초대

김기석의 새로봄(200)

 

공동체로의 초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마가복음 6:39-44)

 

‘빈들’, ‘어둠’, ‘배고픔.’ 예수를 따라왔던 이들이 처한 상황이 딱하기는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이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주님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허기진 그들을 차마 그냥 돌려보내실 수 없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그들을 먹이려면 적어도 200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필요한데, 그럴 돈도 없고 또 설사 있다 해도 빵을 구할 데도 없다고 말씀드렸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제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알아본 후에 말한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많다 적다 평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시켜 무리들을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무리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앉았다. 우리는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안다. 주님은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두니 열 두 광주리가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도록 하셨다는 대목이다. 배분의 편의를 위한 조치였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무리를 공동체로 초대하신 것이다.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는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아니 좀 더 현실적으로 보아 대다수가―자기중심이라는 그늘에서 빠져나와 참된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공동체와 성장>, 17쪽)라고 말했다. 무리는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기는 하지만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느끼고 괴로워하고, 서로의 필요에 응답한다. 공동체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소속감을 회복시켜 준다. 공동체는 우리의 새로운 고향이다.

 

예수님은 자칫하면 익명성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들을 공동체로 초대하신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랑의 기적을 함께 체험한 사람들이 되었다. 함께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자 내면의 어둠이 스러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현대인들은 익명의 대중이 되어 살아간다. 외로움은 당연한 귀결이다. 적대적인 눈빛, 경계하는 눈빛들이 우리 가슴에 자꾸만 생채기를 낸다. 주님은 익명의 대중들이 경계심을 풀고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공동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입구임을 보여주셨다.

 

*기도

 

하나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그칠 때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림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외로운 세상이지만 곁에 선 이들의 손을 붙잡아 주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순례를 멈추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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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아름다움

김기석의 새로봄(199)

 

공동체의 아름다움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에베소서 2:19-22)

 

교회는 우리가 복음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북돋워주라고 주님이 주신 선물이다. 교회는 돈과 출세를 마치 인생의 목표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야 한다. 백향목처럼 남들 위에 우뚝 솟은 사람이 되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굽은 나무일망정 다른 나무와 더불어 숲을 이룰 줄 아는 것이 참 삶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몸은 유기체이다. 유기체의 특색은 '배려'이다. 고통 받는 다른 지체를 위해 자기 몫을 덜어낼 때 유기체의 건강이 유지된다. 몇 해 전 프랑스에 있는 떼제 공동체에 잠시 들른 적이 있다. 환대와 경건과 사랑의 친교를 만끽하며 지냈다. 떼제 공동체를 떠나기 이틀 전 참 감사하게도 알로이스 원장 수사와 다른 수사들의 점심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떼제 마을의 아름다운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공동체의 정원에서 우리는 정겹게 음식을 나눴다. 떼제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기도 경험과 공동체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는 좋은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 자리에 초대된 미국인 청소년 잭이 자기가 떼제에 오게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저는 몇 년 전에도 떼제에 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두 번째 방문입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제 절친한 친구와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혼자 왔습니다. 그 친구는 작년에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친구를 잊지 않으려고 팔에 그 친구의 모습을 문신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제 속에서 반항심이 커갔습니다. 떼제에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조금 망설였지만 응한 것은, 2005년에 로제 원장 수사님이 기도 중에 살해를 당했는데, 여러분들이 어떻게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지만 잭의 이야기는 매우 정연했다. 식탁 사이로 낮은 탄식이 흘렀다. 알로이스 원장 수사는 잭을 따뜻한 말로 위로하면서 "우리도 혼자였다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형제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잭을 격려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떼제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은 '함께 하는 삶'(life together)이다. 공동체는 삶을 함께 나눌 때 든든히 서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이야말로 교회의 핵심이다. 사랑으로 삶을 나누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자란다.

 

*기도

 

하나님,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다른 나무에 기댄 채 시련의 시간을 견뎌냅니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어깨를 빌리고 또 빌려주기도 하는 일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홀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삶을 경축하는 축제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함께 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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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

김기석의 새로봄(198)

 

당신의 손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누가복음 13:10-13)

 

열여덟 해 동안 등이 굽은 채 살아온 여인이 있었다. 참 긴 세월이다. 며칠만 아파도 삶의 리듬이 깨지는 법인데 그 긴 세월을 여인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천형처럼 다가온 질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참 안됐다고, 잘 될 거라고 위로하던 이들도 이제는 그의 고통을 잊은 지 이미 오래다. 가족들은 있었을까? 설사 있었다 해도 가족들조차 여인을 짐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차라리 없으면 좋을 잉여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도 여인은 회당 예배를 포기할 수 없었다.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여인에게 일종의 숨쉬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 운명의 날, 여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당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어떤 뜨거움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여인의 존재를 꿰뚫었던 것 같다. 예수님도 그 회당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예민하게 알아차리셨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그 여인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활동하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18년 동안 한 번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여인을 앞으로 불러 세우신 후에 말씀하셨다.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 음성이야말로 '빛이 생겨라' 하시던 그 음성이 아닌가? 예수님은 여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강은교 선생의 시 ‘당신의 손’이 떠오른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누워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보고, 가까이 부르고, 선언하고, 접촉하는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 흐름 속에서 생명이 소생되고 있었다. 여인의 허리가 펴졌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여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이 마침내 떠나간 것이다. 여인을 사로잡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죄책감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 대한 혹은 세상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그 여인을 부자유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의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맺힌 것을 풀어 자유롭게 하는 의사이다. 허리를 펼 수 있게 된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렸다. 누가 들을세라 숨죽여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찬송이었다. 우리의 굽은 등을 펴주시는 그 손길이 몹시 그립다.

 

*기도

 

하나님, 모든 이들에게 잊혀졌지만 고단한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던 이 여인의 슬픔을 주님 홀로 헤아리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늘 그 자리에 있는 풍경처럼 대했겠지만 주님은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로 대하셨습니다. 이웃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시선을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해도, 아픔에 처한 이들의 입장에 서려는 노력은 게을리 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 마음을 녹여주십시오.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는 새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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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구원받은 사람인가

  • 감사합니다. 자격 조건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살아야 이 세상 쉽게 산다는 데, 자격 없는 이에게 오늘도 생명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이진구 2019.09.23 08:58

김기석의 새로봄(197)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가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누가복음 13:22-30)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13:23) 이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질문자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정말 궁금한 것을 물은 것이다. 그는 이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을 보증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천당’이라고 해야 그들의 숨은 욕망이 더 잘 드러날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욕망이 어떠하든 성경에서 사용되는 구원(soteria)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치유’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가장 많다. 병자의 치유, 귀신들린 자의 회복이 구원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회복은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당신을 영접한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고, 남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누가복음 19:9)고 선언하셨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주로 사람의 사람됨이 회복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거듭난 사람이라야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은, 구원을 남과는 구별되는 특권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구원조차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정작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오지랖 넓게 남이 구원 받았나 받지 못했나를 곁눈질할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살필 일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했다는 아베 피에르 신부에게 한 방송 진행자가 다짜고짜 물었다. “삶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피에르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영원한 사랑과의 영원한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약간의 시간일 뿐입니다. 인생이 내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었지요. 나는 이 말을 후세에 물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확신이 내 인생과 행동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아베 피에르, <피에르 신부의 유언>, 16쪽)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응대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24절) 힘쓴다는 말은 ‘아고니제스테agonizesthe’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에서 심한 고통을 뜻하는 영어 단어 ‘agony’가 나온 것을 보면, 이 단어는 고심하고 고투하는 것 즉 진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급적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최선의 노력을 다해 들어가라는 말이다. 세상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서 고생하는 길에 접어든 이들 말이다. 이 거친 세상에 살면서 마음이 상하고 찢긴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사람들은 구원받을 사람의 자격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자격 조건에 자신을 맞추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독점한 듯 말하는 이들 가운데는 삶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주님, 구원받은 자답게 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과 피조물을 대하고, 이웃을 복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섬김의 자리에 서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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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로 산다는 것

김기석의 새로봄(196)

 

순례자로 산다는 것

 

주님께서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 때에 다른 나라 백성들도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 일을 하셨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 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 보내 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 126:1-6)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저절로 기도의 사람이 된다. 16세기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교부 도로테우스는 세계를 원이라고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중심은 하나님이고 그분의 광채는 인간들의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나님이 계신 원의 중심으로 다가간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다가서야 하고, 이웃에게 참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다가서야 하는 이 되먹임의 관계가 참 신비하다. 

 

 

 

 

 

함께 살아야 할 이들은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걸림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마음은 늘 ‘충만’과 ‘텅 빔’ 사이를 오간다. 시인의 기도는 그래서 소중하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4절) 네겝은 비가 올 때는 물이 흐르지만 비가 그치면 바짝 말라버리는 와디이다. 우리 마음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 도시에 사는 우리 마음은 네겝의 와디처럼 모래만 버석이는 불모지 아닌가? 그곳에 물이 흐르게 하시고, 세상에 사로잡혔던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인으로 살게 하실 분은 하나님뿐이다.  

 

네겝 시내에 물이 흐르기를 소망한 시인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은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광경이다. 척박한 땅에 물이 흐르면 죽은 것 같았던 대지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파종의 때이다. 인생을 순례로 사는 이는 파종자여야 한다. 파종은 고된 노동이다. 하지만 파종이라는 노고가 없다면 수확도 없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5-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좀 낯설게 들린다. 노동이 고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말일까? 사실 이 말은 애굽이나 우가릿 신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겨우내 죽음의 세계에 끌려간 곡물의 여신을 깨우기 위해서는 들판에서 울어야 한다고 믿었다. 운다는 말은 그러니까 신을 깨우는 일이다. 히브리의 시인은 그런 풍습을 그리되, 그 의미를 바꾸어놓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자기 욕망을 거스르는 일일 수 있다. 섬김, 돌봄, 나눔, 권리의 자발적 포기, 타자를 유익하게 하는 삶이 쉽지는 않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욕망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정의의 씨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 그것이 순례자로 산다는 의미이다.

 

*기도

 

하나님, 삶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은 뭔가에 쫓기듯 들떠있습니다. 외로움이 깊지만 선뜻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지도 못합니다. 가까운 이들조차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쓸쓸합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순례의 과정임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명심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과 함께 정의와 공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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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굴로 앞에서

김기석의 새로봄(194)

 

유라굴로 앞에서

 

날이 새어 갈 때에,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오늘까지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목숨을 유지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빵을 들어,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떼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용기를 얻어서 음식을 먹었다. 배에 탄 우리의 수는 모두 이백일흔여섯 명이었다. 사람들이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뒤에, 남은 식량을 바다에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였다.(사도행전 27:33-38)

 

가이사랴에 몇 해 동안 구금되어 있던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압송할 책임을 맡았던 백부장 율리오는 그들을 아드라뭇데노 호에 태웠다. 그 배는 지중해 연안을 끼고 항해하여 지금의 레바논 땅인 시돈에 이르렀고, 맞바람 때문에 키프로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를 계속했다.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가로질러 루기아에 있는 무라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다. 맞바람이 심했다. 배는 크레타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하다가 크레타 남쪽 해안의 '아름다운 항구'에 잠시 닻을 내렸다. 항해하기에 위태로운 때였다. 바울은 그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기로 작정하고 항해를 서둘렀다. 

 

항해 일자를 줄여 이득을 많이 남기려는 선장과 선주의 이해관계와 편하고 안락한 곳에서 쉬고 싶은 군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위험이 예기되었지만 그들은 '잘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기댔다. 순하게 남풍이 불었고 항해는 순조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섬 쪽에서 몰아치는 광풍 유라굴로를 만났다. 선원들이 배를 어떻게든 통제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속절없이 이리저리 떠밀렸다. 좌초를 막기 위해 짐을 바다에 던지고, 항해에 필요한 필수 장비마저 버렸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날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이 점점 희미해졌다. 절망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 그 희망은 경험 많은 선원들이나 침착하고 용감한 백부장을 통해 오지 않았다. 어느 곳에 있든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려는 한 사람, 바울을 통해 왔다.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살리려는 바울의 마음은 변할 수 없었다. 그는 여러 날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한 말을 전했다. 지금은 비록 곤경의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셨다는 것이었다. 그의 증언은 절망의 심연에서 허덕이던 이들의 내면을 밝히는 실낱같은 빛이 되었다.

 

여러 날 표류하던 배가 수심이 얕은 곳으로 밀리면서 배가 암초에 걸릴 위험이 증가했다. 바울은 몰래 배를 탈출하려는 선원들을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백부장에게 고했고, 소동을 겪으며 절망 속에 빠져들어가는 이들에게 음식을 권하며 용기를 북돋웠다.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사람들을 휩쓸어가고 있던 두려움의 폭풍을 잠재웠다. 파선의 위협 아래 있던 이들을 구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한 단 한 사람의 깨어 있는 영혼이었다.

 

*기도

 

하나님,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우리 인생이 상쾌할 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순간 우리는 역풍에 시달리며 삽니다. 만성적인 피로가 쌓이면서 명랑함을 잃었습니다. 사소한 자극에도 화를 내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징징거리기도 합니다. 드물지만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것처럼 난감한 시간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역사의 격랑이 우리 사회를 삼키려 할 때 우리는 허둥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있어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들도 그러한 희망의 메신저가 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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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끈질긴 모험

김기석의 새로봄(194)

 

사랑이란 끈질긴 모험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한일서 2:15-17)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다 한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찾아오기에 피하기 어렵고, 그 충격은 몸과 마음에 오래 남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왔다가 자기 맘대로 떠나가는 사랑 때문에 열병을 앓는 이들이 많다.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것은 모든 생명 현상의 뿌리이다. 세계적인 영성가로 명성을 얻었던 헨리 나우웬 신부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도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싶어했고, 대중들에게 잊혀질까봐 두려워했다. 따뜻한 시선을 언제나 그리워했다. 그런 여린 영혼의 소유자인 그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곤 했던 것은 어머니의 눈길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 내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제가 되었을 때, 미국에서 살기 위해 떠났을 때 바라보셨던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고통이 공존하는 사랑의 눈으로 말이다. 아마도 그 눈이, 사랑과 슬픔이 공존하는 그 눈이, 늘 나를 감동시켰던 것 같다."(마이클 앤드루 포두, <상처 입은 예언자 헨리 나우웬>, 173쪽)

 

 

 

 

 

사랑은 이처럼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사랑의 방향성이다. 옛 성인은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성경은 두 방향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요한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했다.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이 그것이다. 이 셋은 한결같이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과 관련된다. 자기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지구는 자원일 뿐이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이용 가능한 연줄이다. 연줄로서의 역할이 끝나면 관계도 끝난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 만나는 사람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한다.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을 때 이익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평강은 얻을 수 없다. 우리 속에 있는 외로움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서로 함께’(Miteinander)의 존재이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란 끈질긴 모험'이라 했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사랑의 관계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넘어서야 한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견디고 모든 것을 함께 겪어내야 한다.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눠야 한다. 사랑의 모험에 나설 용기가 없다면 인생은 적막할 뿐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사랑의 세계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리를 걷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 드리운 쓸쓸함을 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받고 사랑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사랑하기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짓밟는 이들,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사랑을 선택하며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사랑의 모험을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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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사람의 길

  •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올까요? 제가 가진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기도뿐이겠지요...

    이진구 2019.09.19 08:49

김기석의 새로봄(193)

 

참 사람의 길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마태복음 25:40)

 

떼제 공동체의 설립자인 로제 수사는 스위스 사람이다. 스위스는 영세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2차 대전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민한 젊은이였던 그는 고통 받는 이들을 품겠다는 의지 하나로 떼제에 정착했다. 3년 동안이나 마을의 작은 예배당에서 기도에 매진하던 그의 곁에 형제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약했지만 하나의 질문 위에 자기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로 작정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몸으로 살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돌본 이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내려온 유대인들이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이 찾아간 것은 '독일군 포로'였다. 모두의 미움을 받던 이들이었지만 가장 절실하게 이웃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을 만나고 돌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나중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았다. 이 마음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최후 심판의 날에 벌어질 한 광경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모든 민족을 당신 앞에 불러 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르친다. 주님은 한편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복음 25:34) 그 복을 받은 이들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아니다. 헌금을 착실하게 하고, 은혜 받는 집회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몸짓으로 찬양을 올린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한 이들의 형제자매가 되어 준 이들이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이들은 ‘좋은 교인’이 아니라 ‘참 사람’이다. 물론 좋은 교인과 참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게 결합된 말이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 사람됨’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누가 참 사람인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이고 싶어지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대접해주려는 사람, 외로운 나그네를 보면 따뜻하게 맞아들이려 하는 사람, 헐벗은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입혀 주려는 사람, 병들어 몸과 마음이 다 무너진 사람을 보면 그의 곁에 머물며 힘이 되어 주려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보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넘어 가엾게 여기고 그를 찾아 주는 사람이야 말로 참 사람이라는 말이다.

 

철학자 E. 레비나스는 낯선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사랑을 선택할 때,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인간의 윤리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너'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는 소중한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버릇처럼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합니다. 사람들이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것은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 때문입니다.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이들은 주변화되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사는 이들은 ‘패배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십니다. 아니,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할 수 있도록 하늘의 숨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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