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이라는 병

김기석의 새로봄(182)

 

교만이라는 병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야고보서 4:6-7)

 

신앙생활은 ‘탈향脫向’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탈’은 옛 삶으로부터의 벗어남이고 ‘향'은 새로운 삶을 향한 견고한 지향이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고, 제국의 논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라는 소명 앞에 서 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단해져야 한다. 버릴 것을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을 든든히 붙잡아야 한다.

 

야고보는 이것을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라”는 말로 요약한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악마를 물리치는 것은 사실 하나의 과정이다. 악마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도록/못하도록 만드는 존재이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교만이다. 교만의 사전적 정의는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이지만 교만의 뿌리는 훨씬 깊다. 7세기 시나이의 수도자인 요한 클리마쿠스는 교만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교만이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악마의 발명품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이다. 그것은 비난의 어머니이고 칭찬의 자식이고 불모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광기의 선구자이며 몰락의 창조자이다. 마귀에 들리는 원인이고 분노의 원천이며 위선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것은 악마의 요새, 죄의 후견인, 냉혹함의 근원이다. 연민의 부정이요, 지독한 위선자요, 무자비한 심판관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신성을 모독하는 뿌리이다.”(캐틀린 노리스, <수도원산책>, 129-130쪽에서 재인용)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교만은 ‘비난의 어머니’, ‘칭찬의 자식’, ‘불모의 상징’,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의 달아남’, ‘분노의 원천’, ‘위선으로 가는 통로’, ‘연민의 부정’이다. 우리 생을 무겁게 만드는 많은 것이 여기에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은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정작 자신은 알지 못하는 치명적인 병이다. 교만한 영혼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의 가슴에 지우기 힘든 상처를 입힌다.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교만의 병에 걸린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기의 옳음을 확신하기에 다른 이들에 대해 늘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 하지만 진짜 신앙에 깊이 들어간 이들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억압적이지 않다. 그들은 판단과 정죄의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행동도 자연스럽다. 교만의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교만이라는 병에 걸려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자기가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치유를 받을 수도 없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들여 자기 자신을 자꾸 성찰해야 한다. 그때 하늘로부터 은총의 빛이 비쳐든다. 치유는 그렇게 시작된다.

 

*기도

 

하나님, 날마다 새로운 삶을 다짐하지만 우리 삶은 여전히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합니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는 안일함이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오히려 다른 이들의 허물을 찾아 지적하려 합니다. 겸손을 가장하지만 은근히 남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이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만하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헛된 자만심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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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거니시는 주님

김기석의 새로봄(180)

 

우리 가운데 거니시는 주님

 

너희는, 지난해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미처 다 먹지도 못한 채, 햇곡식을 저장하려고, 해묵은 곡식을 바깥으로 퍼내야만 할 것이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 나는 너희가 메고 있던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서, 너희가 얼굴을 들고 다니게 하였다.(레위기 26:10-13)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철 따라 비를 내리시고, 땅은 소출을 내고, 들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은 해로운 짐승을 없애시고, 세상에서 칼이 설치지 못하게 하신다. 해로운 짐승은 사람을 위협하는 맹수를 뜻하는 말인 동시에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 세계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이다(이사야 11:7). 우열을 가리고, 힘의 서열을 정하고, 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육식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초식 동물의 세계이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위기 26:11-12)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시고, 그들과 함께 거니신다. ‘거닐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할라카halakh’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야훼라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중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창조자, 보호자, 생명을 북돋는 자라는 뜻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자 혹은 감시자가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신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얽어매는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서 우리가 얼굴을 들고 다니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온갖 속박들로부터 놓여나는 길은 하나님과 확고히 접속되는 것이다. 『장자』의 양생주 편에는  ‘제지현해帝之縣解’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 매인 해방‘(정호경)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일체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장벽이 참 많다. 장벽은 늘 타자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 다른 장벽을 세운다. 악순환이다. 장벽을 철폐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꿈이다. 경계선을 철폐하는 일은 복잡하지 않다. 누군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추고, 특권이나 기득권을 자꾸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사탄은 우리 사이를 버름하게 만들어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만든 후 우리를 지배한다. 사탄의 전략은 ‘나누고 지배하라divide and rule’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속죄 혹은 구속을 뜻하는 ‘어토운먼트atonement’를 파자破字해보면 ‘하나 되게 한다’(at+one+ment)는 뜻이 된다. 우리는 나뉜 세상을 하나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말씀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다가옵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머무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주님의 땅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땅과 산과 들과 강을 욕망에 따라 함부로 훼손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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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우상숭배

김기석의 새로봄(179)

 

내면의 우상숭배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1:13-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 속에 신앙의 신비가 다 들어있다. 암흑의 권세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은인으로 행세하지만 자기들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가혹하게 대한다. ‘자른다’, ‘계약을 해지한다’, ‘구속한다’고 말하며 굴복을 강요하고, 약자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약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게 옛 세계의 풍경이다. 하지만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믿기에 비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을 향해 당당한 음성으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저명한 신학자인 랭돈 길키가 일본군에 의해 중국의 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2년 반 동안의 경험을 『산둥 수용소』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그 책에서 랭돈은 라인홀드 니버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내면의 우상숭배(즉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을 숭배하는 것)가 사회적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랭돈 길키,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432쪽)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의 결과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랭돈 길키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삶, 곧 구원받은 이의 삶을 이렇게 설명한다. 

 

“구원은 영혼의 내적인 평안이고, 다른 사람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며, 주위 세상과 이웃을 향한 창조적인 관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앞의 책, 436쪽)

 

다른 이들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를 이해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 망가지고, 이웃이 고통당하고 있는 데도 나와 무관한 것처럼 여기며 산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은 삶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아주 경건해 보이는 데, 공적인 영역에서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다. 사탄은 그런 이들을 누구보다도 좋아한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이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평화를 누리라고, 또 그 평화를 만들라고 초대받은 존재이다.

 

*기도

 

하나님, 바르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하는 이들이 그립습니다. 거칠고 사나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 마음 곳곳에는 깊은 상처가 새겨졌습니다. 작은 자극에도 비명을 지르는 것은 내면에 새겨진 공포의 기억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아픔과 상실의 기억에서 벗어나 생을 마음껏 경축하며 살고 싶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정성을 다해 대하고, 그들과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협력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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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를 청하다

  • 생기, 용기, 원기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죠.!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9.05 09:06

김기석의 새로봄(178)

 

생기를 청하다

 

그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래서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에스겔 37:9-10)

 

“고마운 사랑아, 샘솟아 올라라/이 가슴 터지며 넘쳐나 흘러라.”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할 때면 가끔 떠오르는 노래이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가사를 쓴 이 노래는 이렇게 계속된다. “뜨거운 사랑아 치솟아 올라라 누더기 인생을 불질러 버려라/바람아 바람아 불어 오너라 난 너울너울 춤추네 이 얼음 녹이며//사랑은 고마워 사랑은 뜨거워 쓰리고 아파라 피멍든 사랑아/살갗이 찢기어 뼈마디 부서져 이 땅을 물들인 물들인 사랑아.”

 

우리는 이 마음을 잃어버렸다. 자기 이익에 발밭은 사람들로 인해 이 땅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로 변하고, 황폐하게 변하고, 음란하게 변하고, 이웃들의 피울음소리가 들려와도, 내 한 몸 간수하기도 어렵다며 나 몰라라 하고 살아간다. 영혼을 잃어버린 좀비처럼 세상을 떠돈다. 행복을 구하지만 늘 불만족을 수확하며 산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에스겔이 보았던 해골의 골짜기와 다를 바 없다. 풍요를 약속하는 거짓 신들을 따라가느라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기의 사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돌보아야 할 이웃들을 외면했던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일부는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일부는 전란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고, 일부는 옛 땅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멸망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사분오열되었다.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에게 패배한 것처럼 보였기에 희망도 잃어버렸다. 절망이란 전망이 없는 것(신영복)이라지 않던가.

 

 

 

 

 

모두가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할 때 예언자 에스겔은 놀라운 비전을 본다. 주님의 영이 그를 데려간 골짜기에는 메마른 뼈들만 가득했다. 참담한 광경에 말문이 막힌 그에게 하나님이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은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의 가슴에 전율이 흘렀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그가 목이 터져라 외치는 외침이 마른 뼈들 위에 이슬처럼 내려앉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다시 한 번 살아보자고, 죽음의 그늘을 떨치고 한 번 살아보자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살갗이 덮였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온전히 일어서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생기에게 대언하라고 명하셨다. 그가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하고 외치자 그들이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엄청나게 큰 군대를 이루었다. 아담의 코에 불어넣어졌던 그 바람, 낙심했던 제자들을 휘감았던 그 바람이 불어오자 모든 것이 변했다. 그들은 더 이상 무덤 속에 갇힌 무기력한 시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꿈에 사로잡힌 하늘 군대였다. 이 바람이 이 각박한 세상에 불어오기를 고대한다.

 

*기도

 

하나님, 바람 빠진 타이어로는 먼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맥이 빠진 채 욕망의 저잣거리를 방황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마른 뼈들만 버성기는 것 같은 현실이기에 우리는 외로움의 수인이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멋진 꿈을 꾸는 일에 무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해골 골짜기에 불어왔던 생기를 오늘 우리에게도 보내주십시오. 생기 충만한 이들이 어깨를 겯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하게 해주십시오. 그 목표에 이를 때까지 지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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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뵙는 주님

  •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이진구 2019.09.04 08:53

김기석의 새로봄(177)

 

눈으로 뵙는 주님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기 42:1-6)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질문을 던지시며 대장부답게 허리를 동이고 일어서서 대답해 보라 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유구무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은 집요하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것들, 모든 생명들에 대해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욥은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자연 현상은 물론이고 따오기, 산에 사는 염소, 들사슴, 들나귀, 들소, 타조, 말, 매, 독수리의 생태에 대해서도 욥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의 무지함을 절감했다. 세상은 우리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의 공간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言者不知 知者不言)지 않던가. 욥은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는다. 피조 세계도 다 알지 못하는 데 하물며 창조주의 신비를 누가 다 안다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속성이나 행태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욥의 고백은 적실하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욥기 42:2-3)

 

삶의 터전이 흔들리기 전까지 하나님은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시련은 그의 삶 전체를 뒤바꿔놓았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도 흔들렸다. 하나님은 졸지에 낯선 분이 되었다. 욥에게 있어 하나님은 임마누엘 칸트가 말했듯이 ‘도덕적 요청’으로 존재하는 분이었다. 친밀하다고 여겼지만 그분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용광로를 거친 후 그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안내되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기 42:5) 사람들의 가르침 혹은 전통에 의지해 알아온 하나님이 낯설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인식의 싹이 움터 나왔다. 인간의 생각을 한없이 뛰어넘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경외심 없이는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숨 쉬고 살 뿐이다.

 

*기도

 

하나님, 느닷없이 닥쳐오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 앞에서는 모든 이론과 신학이 잿빛으로 변합니다. 마음의 중심이 무너지고 나면 세상은 온통 낯선 곳으로 변하고, 삶의 희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응시하다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무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그 무한의 세계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넓고 광활한 세계에 그저 안길 따름입니다. 우리 눈을 여시고,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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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의 유익

김기석의 새로봄(176)

 

책망의 유익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2:11-16)

 

바울이 안디옥에 머물고 있을 때 베드로가 그곳을 방문했다. 안디옥 공동체는 이미 든든히 서 있었고,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아주 활발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아마도 그런 현장을 살펴보고 또 격려도 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기애애한 애찬이 벌어졌다. 베드로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흉허물 없이 어울렸다. 이미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던 담장을 마음속에서 철거했기 때문이다. 이방인 형제자매들도 기뻤을 것이다. 위대한 사도가 그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찬의 흥겨운 분위기는 예루살렘교회가 파견한 일단의 사람들이 도착하면서 깨졌다. 그들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맞이하는 이도, 영접 받는 이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친교의 식탁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난감했던 것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베드로가 자리를 뜨자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떴고,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자리를 떴다. 이방 출신의 교인들은 괜히 죄인이 된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불같은 성격의 바울은 그런 태도와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위선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런 위선을 덮어두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 모든 사람들이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조금 당황스럽다. 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때 성립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안다. 사사건건 대립하고, 들춰내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는 붕괴된다. 옳음 때문에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 쉽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거나 훼손될 우려가 있을 때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 환부를 감추어야 할 때도 있지만 도려내야 할 때도 있다. 바울은 그런 점에서 주저함이 없었다. 바울은 가장 큰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베드로를 꾸짖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갈라디아서 2:14b)

 

바울의 이런 책망을 베드로가 고깝게 여겼다면, 그래서 베드로가 바울에게 맞섰다면, 앙심을 품었더라면, 베드로는 반석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매를 맞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 꾸지람을 받아들임으로 그는 율법의 껍질로부터 벗어나와 은혜의 세계로 확고히 걸어 들어갔다. 은혜는 이렇게 나타나기도 한다.

 

*기도

 

하나님, 누군가를 책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해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게 꾸짖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마음 또한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짓과 위선을 적당히 덮어주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알을 깨는 고통이 필요하듯, 참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픔을 각오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미움과 경멸이 아닌 존중과 사랑에 바탕을 둔 꾸짖음이 참을 낳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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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을 깬 여인들

김기석의 새로봄(175)

 

통념을 깬 여인들

 

그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누가복음 8:1-3)

 

누가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마치 그녀의 택호처럼 사용되는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의 서안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주로 직물업과 염색업에 종사했고, 갈릴리에서 잡은 물고기를 염장 처리하는 공장도 그곳에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 마을은 비극의 땅이기도 했다. 로마군대의 주둔지였기 때문이다. 로마 군인들은 종종 정복당한 민족들에게 치욕감을 안겨주었고, 그 때문에 분노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항거하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잔인하게 진압하곤 했다. 갈릴리 여러 마을이 로마에 의해 참혹하게 유린당하곤 했는데, 막달라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였다.

 

 

 

 

 

마리아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어쩌면 가까운 일가붙이들이 로마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는 광경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백소영 교수는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가 경험했을 지도 모를 현실을 상상 속에서 그려 보여준다.

 

“소식을 듣고 가게로 뛰어왔을 때는 이미 제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기억하기도, 다시 말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에요. 하지만 눈을 감으면, 아니 눈을 뜨고 있어도 가게에 갇혀 로마 군인들이 지른 불에 스러져가던 일곱 사람, 제 가장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이고, 그들의 비명이 귓가에서 날카롭게 울렸습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겠어요? 미처 날뛰는 저를 보며 사람들은 죽은 일곱 원혼이 들어가 저를 괴롭히는 것이라 했죠. 하지만 틀렸어요. 제 가족이, 친구들이 저를 괴롭힐 리 있나요? 그게 귀신이었는지, 제 안의 분노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그들의 영혼은 아니었어요. 다만 전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미친 여자처럼 거리를 헤매었죠. 제 눈에는 세상이 온통 불에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다 그때 그 자리에서 히죽거리던 로마 군인들 같이 보였고요.”(백소영, 『인터뷰 on 예수』, 174쪽)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런 일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백소영 교수는 막달라 마리아를 괴롭혔던 ‘일곱 귀신’을 마음속에 일고 있던 분노와 두려움으로 해석한다. 그 내면의 상처와 고통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부둥켜안는 예수,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기듯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땅 바닥을 기어 마침내 하늘로 비상하도록 해주는 예수, 그분과의 만남이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뒤바꾸어 놓았다. 고통의 심연 속에서 몸부림치는 마리아를 보고 사람들은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제 예수와 더불어 ‘일어선 사람’, 즉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다른 여성 제자들과 함께 예수운동에 능동적으로 동참했다. 사회의 통념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전초가 되었던 여인들의 이름이 참 귀하다.

 

*기도

 

하나님, 통념을 깬다는 일은 늘 위험을 동반합니다. 사람들은 경계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온시 되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경계선을 넘을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세상은 정말 답답하고 편협한 곳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유대교가 만든 금제의 선을 넘어 예수의 마음에 합류했던 여인들이 있었기에 예수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경계선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부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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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의 연습

  • 감사합니다. 자족하는 사람이 되야 하는데, 그렇치 못함은 제대로 된 인식이 없어서 그렇겠지요.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새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저도 기도해야 겠습니다.

    이진구 2019.09.01 11:41

김기석의 새로봄(174)

 

단순한 삶의 연습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디모데전서 6:6-10)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자족하는 사람이다. 가진 것이 변변치 않은 데도 당당한 사람을 보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들을 게으르다고, 무능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부끄러움조차 없이 발화되는 순간부터 세상은 시장으로 변했다. 교회조차 인간의 욕망 충족을 부추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디모데전서 6:9)

 

이건 일종의 경고의 나팔소리이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이야말로 사탄이 틈타기 좋은 마음이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간결하게 요약한다. 바울은 돈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더러’를 ‘많이’로 바꾸어야 할 형편이다.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삶의 훈련이 필요하다. ‘더’의 삶에서 ‘덜’의 삶으로 개종해야 한다. 덜 먹고, 덜 쓰고, 덜 누리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분은 ‘더럽다’는 말을 ‘덜 없다’로 풀어 설명했다. 비우지 못하는 것이 곧 더러움이라는 말이다. 누가 비우며 살 수 있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 이들은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본다. 자원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이들은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다.

 

둘째,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inter-connectedness)을 믿는 것이다.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이들은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 고통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생명은 상호 책임지는(inter-responsible) 존재이다. 바울 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서로’ 혹은 ‘서로 함께’(kai allelon)이다. 누군가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창조주에 대한 이런 신실한 믿음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라야 자본주의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덧없는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가리켜 ‘주조된 자유’라 했지만, 때로 돈은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기도

 

하나님, 욕망의 벌판에서 사람들은 눈이 벌개진 채 돈을 쫓아다니느라 분주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돈이 주는 자유와 행복을 노래합니다. 마치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은 뱃사람들처럼 사람들은 그 노래에 이끌려 나아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만족을 모릅니다. 주님, 멈춰설 줄 아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그저 주어진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님이 만드신 세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며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새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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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박다

  •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글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8.31 08:43

김기석의 새로봄(173)

 

뿌리를 박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6-7)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크레도credo’는 ‘심장을 바친다’는 뜻의 ‘코르도’에서 나온 말이다. 코르도는 영어로 용기를 뜻하는 ‘courage’의 어원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 생각, 감정보다 더 깊은 생의 중심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다. 우리는 믿는 사람인가? “믿는다는 말이나 믿는다는 확신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78쪽)

 

신앙고백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을 시인하면서도 삶으로는 그 분을 부인하거나 배신할 때가 많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사도는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7)

 

 

 

 

‘뿌리를 박는다’는 말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1968년에 작고한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라는 시이다. 그는 진창처럼 더러운 역사일망정 이 땅에 굳게 뿌리를 내리겠다고 다짐하면서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이라고 노래한다. 젊은 시절 이 시구와 만났을 때 가슴이 뛰었다. 우리를 힘들게 하던 역사에 대해 속상해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검질김과 당당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아무리 척박해도 예수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절박함 혹은 열정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뿌리를 박은 사람이라야 세우심을 받을 수 있다. 세우심을 받는다는 말은 정신적으로 든든하게 되어 주체적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기둥과도 같은 것이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혹의 바람, 박해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 가끔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무너지지는 않다. 뿌리를 내리고, 세우심을 입은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아간다. 우리는 일쑤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의 욕망에 따라 왜곡하거나 축소시키곤 한다.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매끈매끈하게 만든다. 그래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심장을 바치는 것이다. 이 믿음 안에 있을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진다.

 

*기도

 

하나님, 인간은 뿌리가 없어 불편합니다. 대지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했기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삽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풍란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부평초처럼 세상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삶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흔들림없는 발걸음으로 진리를 향해 걸어가도록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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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조차 품어 안는 사랑

  •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자녀에게 줄 빵을 왜 개에게 준것인가요 ?

    이진구 2019.08.30 08:52

김기석의 새로봄(172)

 

모욕조차 품어 안는 사랑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복음 15:21-28)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신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셨다. 고요함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나 고요함에 대한 갈망은 성취되지 않았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찾아와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는 자기 딸을 도와달라고 외쳤던 것이다. 예수님은 짐짓 모른 척하셨다. 절박했던 여인은 더욱 크게 외쳤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여인을 달래 돌려보내는 게 좋겠다고 하였을까.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하는 여인을 보면서도 주님의 반응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복음 15:26) 

 

뜻밖의 반응이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놀란다. 이 말을 하신 분은 우리가 알던 그분이 아닌 것 같다. 누구보다도 가련한 이들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그들의 아픔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셨던 예수님이 아니신가. 예수님의 반응은 낯설 뿐만 아니라 불친절하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 예기치 않은 반응을 두고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변호하기 위해 애쓴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반응을 보이신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예수님은 이미 여인의 믿음을 알아보셨지만, 여전히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런 반응을 보이셨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여인은 모욕을 당했다.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개’라고 지칭되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도 국수주의자처럼 보인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노골적이었기에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어떤 긴장감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고통을 안고 찾아온 여인이 종교와 인종의 장벽에 막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긴장된 대치를 깨뜨린 것은 여인이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마태복음 15:27)

 

모욕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단절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절박함은 자존심을 훨씬 넘어섰던 것 같다. 여인은 그 모욕적인 말과 상황을 그냥 자기 품으로 부둥켜 안아버린다. 이 여인이 거절에 노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고통으로 인해 겪어온 인고의 세월이 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긴장이 해소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생겼다. 여인의 말은 예수님께 깊은 인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여인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문제에 몰두해 있던 예수님을 구체적인 한 존재, 곧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고통은 인종, 피부색, 문화, 정치 체계, 종교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류 공통의 경험이다. 고통이야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의 끈이다. 여인은 그런 사실을 가리키는 기표로 우리 가운데 서 있다.

 

*기도

 

하나님,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모멸감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박두진 시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묵상하면서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어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손해에도 분노하고, 작은 모멸감에도 바들바들 떠는 우리들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존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사랑의 빛 안에서 사람과 세상을 보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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