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얀나무처럼

  • 처음 들어보는 나무 이름입니다. 감사합니다. 반얀나무처럼 살아야겠네요

    이진구 2019.09.18 08:54

김기석의 새로봄(192)

 

반얀나무처럼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브리서 10:23-25)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여전히 옛 삶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이라고 말했다. 예수님과 친밀한 접속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천사가 우리 마음을 들어 올려주지만, 그 접속이 끊어질 때면 악마가 우리 마음을 아래로 잡아당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이 내림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악마가 행복의 환상을 우리 속에 주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은 삶이 이미 황폐해졌을 때이다.

 

삶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장애물을 만나 길을 우회해야 할 때도 있고, 그 길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늘 흐름 속에서 산다. ‘변함없음’, ‘한결같음’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지향을 잃지 않으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히브리서 10:23)

 

나침반은 흔들리면서 북쪽을 가리킨다. 흔들리지 않고 정북正北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고장난 것이다. 일단 믿음의 길에 접어든 이들은 길이 보이지 않아도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야 한다. 산에 올라가 본 이들은 잘 알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던 산봉우리가 계곡에 들어서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할 이유는 없다. 잠시 다른 봉우리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봉우리는 그곳에 있으니 말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척박한 세상 한복판에서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또 그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다. 그 소망을 굳게 붙들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삶의 길로 부르실 때 동지도 함께 보내주신다. 같은 지향을 가진 이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될 때 우리를 지배하던 이기심과 탐욕의 영역은 줄어들고, 행복의 환상으로 우리를 제멋대로 지배하던 사탄의 권세는 힘을 쓰지 못한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10:24)할 때 주님의 몸은 든든히 선다.

 

 

 

 

반얀나무(Ficus benghalensis)는 뿌리가 약하기에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가지에서 다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습성이 있다 한다. 땅에 닿은 뿌리는 기둥뿌리(支柱根)가 되어 나뭇가지를 받쳐준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 그루 반얀나무가 숲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반얀나무가 그러하듯 서로를 든든히 지탱해주면서 숲을 이루어 뭇 생명들을 품어 안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교회됨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바람이 불든 눈비가 내리든 의젓하게 길을 걷고 싶지만, 우리는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며 인생이라는 소롯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지향을 잃고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동료를 주신 것은 흔들리는 마음을 서로 붙들어주라는 명령인 주줄 이제는 알겠습니다. 함께 격려해가며 숲을 이루는 반얀나무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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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회복

  • 감사합니다. 가슴에 품은 주님의 사람되게 해주세요! 저도 ...

    이진구 2019.09.17 09:49

김기석의 새로봄(191)

 

총체적 회복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마태복음 9:35-38)

 

조선 시대의 선비인 허목(許穆, 1595-1682)은 자신의 평생을 돌아보며 스스로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나는 늘 말이 행동보다 앞섰다. 자꾸 떠벌리기만 했지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경전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지만,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녹아들진 않았다. 말씀 따로 나 따로 각자 놀았다. 나는 이것이 부끄럽다. 지금에 와서 깊이 반성한다. 나 죽으면 이 글을 돌에다 새겨 내 무덤 앞에 묻으라. 뒷 사람이 이 글을 보고 자신을 비춰볼 수 있도록.”(정민, <죽비소리>, 199쪽)

 

참으로 엄정한 자기반성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답게 살고 있나? 예수님을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배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이 사람들을 부를 때 하신 말씀은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였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마태복음 9:35)

 

‘가르치셨다’(teaching), ‘선포하셨다’(preaching), ‘고쳐 주셨다’(healing)라는 세 단어가 눈에 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일상적인 언어로 잘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 ‘좋은 이웃이 되는 것’,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 그 핵심이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다. 주님은 억압과 착취와 폭력을 통해 유지되는 제국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과 평화를 통해 열릴 새 세상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다. 선포의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나 삶을 뒤흔든다. 선포의 언어는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하신 사역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치유 사역이다. 마태는 주님이 사람들의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고 전한다. 질병(nosos)은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병적 증상을 이르는 말이다. 질병은 우리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질병은 삶의 활기(bios)를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애써 유지하고 있는 삶의 질서(nomos)를 깨뜨린다. 가족 가운데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족 전체의 삶의 질 또한 떨어진다. 그런데 주님은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인양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주셨다. ‘아픔’(makaria)은 감정적·정서적·영적으로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신의 균형이 무너지면 충동적이 되고, 화를 참지 못하고, 이웃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고, 공감의 능력이 줄어든다. ‘아픔’은 일쑤 사람들을 비인간의 길로 인도한다. 예수와 만난 이들은 총체적인 회복을 맛보았다.

 

*기도

 

하나님, 인생 여정 가운데 지리산가리산 헤매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욕망의 벌판에서 바장이는 동안 우리 마음은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분별력과 그 뜻을 따라 살려는 검질긴 의지 또한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 위에 인생의 집을 짓고 싶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꿈을 가슴에 품은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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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인다

김기석의 새로봄(190)

 

사랑하면 보인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1)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마태복음 16:1-4)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함께 주님께 왔다. 무심히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두 집단이 서로에 대한 호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쑤 대립하기도 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새로운 경건운동의 중심을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전통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견원지간이었다. 그런 그들이 손을 맞잡았다. 공공의 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던 유대교 세계를 기초부터 뒤흔드는 위험인물이었다. 마태는 그들이 예수께 나온 것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 그들은 예수를 함정 속으로 유인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표징은 일견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위험하다.

 

표징을 보여주면서 자기 말을 따르게 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자신들에게만 귀속시키면서 다른 이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 한다. 지배는 곧장 욕망 채우기와 연결된다. 표징을 보이면서 순진한 사람들에게 재산이나 몸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지 않던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의 표징 요구는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알고 싶다는 절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를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이면서 자신을 입증하려 하는 사이비 종교인, 다시 말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가 계신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았다. 병든 사람들이 나음을 입고, 귀신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친교의 식탁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 말고 다른 표징이 더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려는 마음이지 표징이 아니다.

 

 

 

 

 

진실은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때때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눈이 있다고 하여 다 보는 것이 아니고, 귀가 있다 하여 다 듣는 것도 아니다. 볼 마음이 있다면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들을 마음이 있으면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열네 살 연상인 루 살로메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이런 사랑의 시를 썼다.

 

“내 눈을 감기세요./그래도 난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내 귀를 막으세요./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보인다. 그리고 들린다.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 오시는 시간이다. 세미한 중에 들려오는 그 말씀을 듣기에는 세상이 너무 소란스럽다. 거기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극적인 소리에만 반응한다. 전락이다. 예수님은 표징을 보여 달라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신다. ‘너희는 하늘을 보면서 일기는 분별할 줄 알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 줄은 알지 못하고 있구나.’ 제법 똑똑한 척하고, 모르는 게 없는 척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기도

 

하나님, 자기 의에 충만한 우리는 청맹과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휘황한 것들에 익숙한 눈은 세상에 깃든 영원의 흔적을 보지 못합니다. 소란스런 소리에 익숙해진 귀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눈이 없어도 들을 수 있고,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다는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증거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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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목적

김기석의 새로봄(189)

 

교육의 목적

 

그 날에 당신들은 당신들 아들딸들에게, ‘이 예식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고 설명하여 주십시오. 이 예식으로, 당신들의 손에 감은 표나 이마 위에 붙인 표와 같이, 당신들이 주님의 법을 늘 되새길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이 규례를 해마다 정해진 때에 지켜야 합니다.(출애굽기 13:8-10)

 

출애굽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신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기 위해 무교절을 지키라는 것이다. 무교절에 가장은 아들딸들에게 그 예식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했다. 가장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억의 전승자 혹은 교육자가 되어야 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누가 사람이냐>라는 책(종로서적, 176쪽)에서 유다인의 교육 과제를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교육은 학생에게 살아 있는 존재의 신비와 놀라움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주는 것과 관련된다. 식탁 앞에 놓인 음식이나 과일을 맛보아도 그것이 우리의 앞에 오기까지 온 우주가 참여해 마련한 것임을 안다면 어찌 감사한 마음이 일지 않겠는가. 놀람을 가로막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모두가 선물이다.

 

둘째, 자신이 무한하게 값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빚으로 얻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경쟁에 시달리며 사는 많은 이들이 자존감을 갖지 못한다. 경쟁에서의 패배는 곧 바로 인생의 실패처럼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났든 못났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에 꼭 필요한 많은 것들을 공짜로 누리거나 다른 이들을 통해 얻고 있다. 이걸 알면 지나친 비애나 오만함에 빠질 수 없다.

 

셋째, 시간 속의 성(聖), 곧 거룩함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2) 하셨다.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의 현존을 자각하고 살 때 우리 삶은 거룩해진다. 맑아지고 순수해진다.  

 

넷째, 축제의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을 경축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었다. 요한은 그 이야기를 통해 주님이 계신 곳에서는 삶이 즐거운 축제로 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축제는 혼자서는 누릴 수 없다. 다른 이들을 우리 삶 속에 맞아들이고, 또 우리 자신도 기꺼이 손님이 되려는 열린 마음이 있을 때 축제는 시작된다.

 

교육의 목적은 유능한 직업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살 줄 아는 사람을 육성하는 데 있다. 자기의 존재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아는 사람,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는다. 그는 ‘자아’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화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 앞에 드러내지 못합니다. 삶의 속도를 줄이고 하나님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고 싶습니다. 삶이 온통 신비라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은총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거친 세상을 사는 동안 잃어버린 기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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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 속에서 자라는 평화

  • 감사합니다. 구체적인 목적 없이 놀이를 할 때 자기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마주한다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사심 없이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9.14 10:22

김기석의 새로봄(188)

 

어울림 속에서 자라는 평화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한다. 미련한 사람은 명철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의견만을 내세운다.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잠언 18:1-3)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한다.”(잠언 18:1) 사귐에 다소 굼뜨거나 소극적인 사람들에게는 좀 불편한 말이다. 노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들은 어쩌면 이 구절에 밑줄을 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위축될 것도 없고, 우쭐할 것도 없다. 이 구절은 소극적인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이 아니다. 어울림이란 한데 섞이어 조화롭게 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도시의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아이들이 친구 집 앞에 우르르 몰려가서 외친다. “000야, 노올자!” 마을 공터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엄지손가락을 세운 채 외친다. “술래잡기 할 사람 여기 붙어라!” 참 정겨운 풍경이다. 인간의 인간됨은 어울림에 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흉허물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자꾸만 빼앗아 간다.

 

위의 구절을 이렇게 바꾸어 보자.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하는 사람은 어울려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지만 진짜 어울림의 고수는 자기와 다른 이들까지도 기꺼이 품어 안는 사람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교회를 가리켜 ‘무지개 공동체’라 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 다른 색들이 한데 어우러지기 때문인 것처럼, 교회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이들이 만나 조화를 이룰 때 교회다워진다는 것이다.

 

 

 

 

 

어울림의 반대는 독선과 배타이다. 독선과 배타의 뿌리는 자기 애(self-love)이다. 독선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강하다. “미련한 사람은 명철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의견만을 내세운다.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잠언 18:2-3) ‘쓸모와 유용성’이 거대한 우상이 되어 모든 이들에게 숭배를 강요하고 있는 시대는 품성이 고귀한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 살기에 우리 마음은 늘 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치유책은 없을까?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잘 놀 때 우리 속에 깃든 무거움이 사라진다. 우리에게 감춰져 있던 능력이 드러난다. 구체적인 목적 없이 놀이를 할 때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마주치게 된다. 놀이는 우리를 짓누르는 현실의 중압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준다. 잘 노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신비에 매혹되는 법이다.

 

*기도

 

하나님, 천진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아내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이들을 보면 세상이 한결 밝아 보입니다. 의무의 감옥 속에 갇혀 살아서인지 우리는 제대로 놀지 못합니다. 사심 없이 함께 어울리면서 생을 경축하는 능력을 되찾고 싶습니다. 독선과 배타심 그리고 과욕을 내려놓고 만나는 모든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내는 눈 밝은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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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을 귀, 볼 눈을 주셔서 ...무엇을 봐야할지 들어야 할지 인도하여 주심에 새벽예배를 찾고, 목사님의 글을 찾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석 오늘 잘 보내세요

    이진구 2019.09.13 06:27

김기석의 새로봄(187)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복음 1:14)

 

바다 저 멀리 환하게 밝혀진 불빛이 어떤 그리움을 상기시킬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불빛이 실은 오징어잡이 배에 밝혀진 집어등集魚燈임을 알면 생각이 달라진다. 집어등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오징어들의 운명은 죽음이다. 도시의 휘황한 불빛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게 만들곤 한다. 현대인들은 ‘돈’과 ‘출세’라는 집어등 앞에 몰려들어 복닥인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위험한 세상이다. 돈을 매개로 하는 관계가 얼마나 허약한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는 이해관계가 해소되는 순간 끝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 빛이다. 요한은 예수님이야말로 ‘참 빛’이라고 말한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밝게 비추고 또 포근하게 감쌌다. 하지만 어둠이 장악하고 있던 세상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휘황한 전깃불을 끄지 않으면 달빛과 별빛을 즐길 수 없는 것처럼, 거짓 빛에 사로잡힌 이들은 참 빛과 만나기 어렵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그리스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린도후서 4:4)는 말로 요약한다.

 

 

 

 

 

 

요한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 영광은 한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오는 빛이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을 때 그의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말한다. 물고기 잡이 이적을 체험한 베드로가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누가복음 5:8) 고백했던 것도 어떤 압도적인 기운 혹은 범접할 수 없는 빛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란한 도시 한복판에서도 마치 숲속의 빈 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이 있다. 그와 잠시만 함께 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잔잔해지는 사람, 자아를 온전히 여의고 자기를 전폭적으로 내주는 사람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이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 요한은 바로 그런 경험을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로 요약한 것이 아닐까? 요한은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말한다. 충만함이란 넘침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가득 찬 것을 밖으로 내놓게 마련이다. 불쑥 불쑥 화를 내는 사람은 자기 속에 화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랄랄라 노래가 나오는 것은 속에 기쁨이 차 있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어깃장 놓는 사람은 속에 불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존재를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친 것은 은혜와 진리였다.

 

 

*기도

 

 

하나님, 별이 총총한 밤하늘은 우리를 시원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우리가 잊고 사는 청정한 세계를 그리워하게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얼굴빛이 환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얼굴과 만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을 꿈꾸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그 얼굴에 깃든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의 빛을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속절없이 세상의 인력에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눈을 여시어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시고,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갈망하는 마음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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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 감사합니다. 세상의 결핍은 다 방식이 틀릴뿐 똑같은 것 같습니다.SNS로 표출할 뿐이죠!

    이진구 2019.09.12 10:02

김기석의 새로봄(186)

 

위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고린도후서 1:3-5)

 

우연히 가수 하림이 부르는 <위로>라는 노래를 들었다. 서정적인 목소리의 가수가 “외롭다 말을 해봐요 다 보여요 그대 외롭다는 걸, 힘들다 말해보세요 괜찮아요 바보 같지 않아요”라고 노래할 때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사람 때문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관계’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삶이 참 힘겹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관계關係라는 단어에서 관關은 문빗장을 지른 모습을 그린 것이고, 계係 ‘걸리다, 잇다’라는 뜻이다. 닫아 걸기도 하고 또 잇기도 하는 것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관계가 순조롭고 원만할 때는 편안함과 행복을 느끼지만 관계가 어그러지면 고통스럽다. 

 

 

 

 

 

현대인들은 저마다 다 외롭다. 그렇기에 관계를 갈망한다. 젊은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누군가와 접속을 유지하려 애쓴다. ‘나 홀로’라는 느낌 속에 방치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 공간에 자기의 근황을 알리고는 누군가가 반응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누군가 의미 없는 기호인 ‘ㅋㅋㅋ’나 ‘ㅎㅎㅎ’로만 반응해도 흐뭇해한다. 페이스북에서는 ‘좋아요’라고 반응해 준 사람들의 수나 댓글 수에 민감하다. 문득 지구별에 왔던 어린왕자가 떠오른다. 그는 뾰족산에 올라 외친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누가 나의 친구가 되어줘.” 외로움이 문제이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타인의 인정을 갈망한다. 사람들은 인정과 배제 사이에서 바장인다. 따돌림 받지 않기 위해 자기 소신과는 무관한 일을 하기도 한다. 영혼을 파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의 인정에 매달리지 않는다. 물론 바울이 떠난 이후에 고린도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바울을 깎아내리는 이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가슴 아파했다. 자기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는 것 같은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씨는 때를 만나면 반드시 발아한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어둠의 날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올 것임을 확신했기에 그는 일어설 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위로의 기초였다. 환난과 핍박이 중첩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가 당당하게 대지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사도행전 5:41)했다. 이처럼 고난을 당하면서도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이들은 절망을 거두지만, 하늘의 위로를 얻은 이들은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척박한 대지를 갈아엎는다.

 

*기도

 

하나님,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고, 세상 모든 게 다 시들하게 느껴질 때면,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어집니다. 어쩌면 그때가 위로가 필요한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다가와 등이라도 툭 쳐주었으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사람의 위로도 소중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위로야말로 우리를 일어서게 하는 힘임을 말입니다. 척박한 세상에 평화와 생명의 씨앗을 뿌릴 힘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지금 위로의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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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김기석의 새로봄(185)

 

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이사야 19:23-25)

 

꿈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꿈꾸는 이들은 몽상가 혹은 현실 부적응자 취급을 당하곤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이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는 법이다. 꿈을 버리는 순간 비관주의와 허무주의가 우리를 확고하게 지배한다. 평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꿈은 어처구니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 꿈은 강고한 현실에 작은 틈을 만드는 법이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종신교수인 정현경 박사는 알자지라 TV에서 본 한 광고를 즐겁게 기억한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이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축구공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높은 시멘트 담 너머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실망한 소년은 시멘트 담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팔레스타인 쪽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저쪽에서 놀고 있던 또래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그 공을 힘껏 차 담을 넘겨 돌려보내준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126쪽)

 

 

 

 

 

중요한 것은 그 '틈'이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틈이 없었다면 이런 멋진 장면은 연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있는 장벽 사이에 시소가 놓이자, 이쪽과 저쪽의 아이들이 시소를 타고 노는 장면을 보았다. 장벽을 깨뜨리는 상상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 틈으로 평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혀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경계선을 가로지른 분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의인과 죄인, 성과 속 사이에 길을 내 서로 통하게 만드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삶으로 만드신 그 길을 우리 길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사19:23)

 

이사야는 기존질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대관계였던 나라들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세상 여러 나라에 복을 매개하는 꿈을 꾼다. 이런 꿈이 없어 세상은 거칠고 빈곤해졌다. 역사적 상상력을 억압하고 세상을 시장으로 바꾸는 정치를 바로잡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꿈이라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기도

 

하나님,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동안 우리는 날개를 잃은 새처럼 살고 있습니다. 몸은 비대해졌지만 정신은 왜소해졌고, 땅의 현실에 몰두하다보니 하늘을 잊었습니다. 경쟁과 불화가 우리의 자연 상태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서로에게 복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의 그 꿈을 우리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는 강고한 편견과 적대감으로부터 벗아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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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지키는 길

김기석의 새로봄(184)

 

마음을 지키는 길

 

아이들아,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내가 이르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이 말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너의 마음 속 깊이 잘 간직하여라. 이 말은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몸에 건강을 준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언 4:20-2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순간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측 가능한 ‘상투어’가 아니다. 늘 새롭게 들려온다. 하지만 우리 경험은 인생이란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무료하고 권태로운 삶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분명한 지향이 있어야 한다. 제법 나이가 들고,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춘 이들도 가끔 길을 잃는다. 이정표를 찾아야 한다. 시인 이정록은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삶에 대한 통찰력이 넘쳤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정표로 삼고 산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냐?/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가슴 우물> 중에서)

 

 

 

 

 

삶은 이처럼 단순한 건데 우리는 복잡하게 살아간다. 그렇기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해 줄 말씀과 만나야 한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나부끼는 부평초처럼 우리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감사와 노여움 사이를 오간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천국을 짓기도 하고 지옥을 짓기도 한다. 외부 세계의 영향에 민감한 우리 마음은 고요함을 누리지 못한다. 오죽하면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말이 있겠는가? 예레미야는 일찍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예레미야 17:9)라고 탄식했다. 

 

옛 사람은 어딘가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쓸 수 있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 金剛經)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진 않다.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똑같은 사안도 이익이나 입장, 친소관계에 따라 전혀 달리 평가한다. 누가 감히 나는 언제나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은 늘 흔들린다. 그렇기에 마음을 제대로 쓰고 살려면 늘 잘 조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음’으로 삼아야 할까? 히브리의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음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귀를 기울이라’,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 ‘마음 속 깊이 간직하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집중하라는 말이다. 집중이라는 한자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일 集에 가운데 中 자가 결합된 말이고, 다른 하나는 잡을/지킬 執에 가운데 中 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中’에 우리 마음을 오롯이 모아야 하고(集中), 또 그것을 꼭 붙들어야 한다.(執中) 붙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꼭 지켜야 한다.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길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 마음은 늘 흔들립니다. 어떤 때는 담대하다가도 다음 순간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타적인 선택을 하지만 이기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이다’라고 말할 만한 확고한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을 주님께 내놓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조율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일에 이끌리겠기 때문입니다. 구멍투성이인 우리 마음을 고쳐주시고, 주님의 마음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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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샤의 비극

김기석의 새로봄(183)

 

아마샤의 비극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 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아모스 7:12-13)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에게 하나님의 모진 심판을 예고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은 불편함 그 자체였다. 귀족들과 부유한 이들의 호의에 기대어 사는 동안 특권에 익숙해진 사람이었으니 아모스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아팠을 것이다. 그는 아모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왕의 손을 빌리려 한다. 그는 여로보암 왕에게 가서 아모스가 백성들에게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하는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모스가 왕은 칼에 찔려 죽고 백성들은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라면서 민심을 뒤흔들고 있으니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마샤가 아무런 근거 없이 아모스를 모함한 것은 아니다. 아모스는 분명히 그런 메시지를 선포했다. 하지만 아마샤는 맥락을 제거한 채 아모스의 말을 제멋대로 발췌하여 보고했다. 그는 아모스가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왕으로 하여금 부정의의 현실과 대면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의 관심일 뿐이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권고를 가장한 위협을 가한다. 남왕국 출신인 그가 왜 뜬금없이 베델까지 와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냐며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

 

이 구절은 애국을 가장하고 있는 제사장 아마샤의 진짜 관심이 무엇인지를 제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밥벌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밥벌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것처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먹고 사는 문제를 마치 사소한 문제인 듯 말하는 사람은 신뢰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삶을 바친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를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처럼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종교행위가 밥벌이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는 자기에게 밥을 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듣고 싶은 말만 하게 된다. 아마샤는 그런 타락한 종교인의 전형이다. 그는 스스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기에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아모스가 못내 불편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둔감함이다. 저어주지 않으면 금방 더께가 생기는 팥죽처럼, 매 순간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지 않으면 우리는 부푼 욕망에 덧없이 끌려가게 마련이다. 아모스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은 사람이다.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 입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자기 삶을 통해 인류의 양심을 깨우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이라 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첫 마음을 잃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뜻을 품고 살던 이들도 안락함에 길들여지는 순간 슬그머니 숭고한 뜻을 내려놓고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마샤는 그래서 우리의 반면교사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욕망과 이익에 취해 진리를 등지지 않도록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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