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어떻게 국민을 홀렸나?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10. 23. 07:06

꽃자리의 종횡서해(16)

 

히틀러는 어떻게 국민을 홀렸나?

- 다카다 히로유키의 히틀러 연설의 진실 -

 

 

히틀러의 연설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세워 공중에서 자잘하게 흔들면서 뭔가 위협적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약간은 우스꽝스러워 보이면서도 히스테릭한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독일 국민을 홀린 히틀러 연설의 진실은 따로 있다. 일본의 독문학자인 다카다 히로유키는 191910월 뮌헨의 맥주홀에서 했던 첫 연설부터 19451월 총통 지하 방공호에서 녹음한 최후의 라디오 연설까지, 25년에 걸쳐 쏟아낸 히틀러의 연설문들을 컴퓨터로 계량분석하여 히틀러 연설 150만 단어데이터를 완성했다. 히틀러 연설의 진실은 그 데이터를 토대로 히틀러 연설을 언어적 측면과 연설이 놓인 정치적 역사적 맥락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 책이다.

 

이 세상의 위대한 운동은 전부 위대한 글쟁이가 아니라 위대한 연설가 덕분에 확대된다.”

 

히틀러의 연설은 정권 획득을 전후로 하여 내용과 형식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가장 전성기였던, 그러니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절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우선 가정법이 많다. “만일 ~한다면, 그것은~”이라는 식으로 상황을 편리하게 가정한 뒤에 이를 출발점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식이다.(이는 이른바 라면 사설(~라면 ~이다)’로 유명한 조선일보 글쓰기와 유사하다.)

 

“A가 아니라 B”라는 식의 대비법도 자주 등장한다.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바를 더욱 선명하기 위해 부정어를 앞세우거나 A에서 예상되는 것과는 다른 B를 부각시켜 흑백을 명확하게 나누는 식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반복이다. 히틀러는 청중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반복이라는 망치를 솜씨 좋게 사용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청중들의 머리 깊숙이 두드려 넣었다. 그 효과는 다른 어떤 것보다 탁월했다.

 

이 외에도 히틀러는 과장법, 평행법, 교차법 등의 수사학과 인상적인 제스처를 동원해 청중들을 매료하고 열광시켰다. 그렇다고 그가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말하는 연사는 아니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서론-진술-논증-결론이라는 형식적 측면을 철저하게 따랐다. 연설에서 다룰 주제에 대한 키워드 혹은 주요 문자를 순서대로 메모지에 기록하고, 그것을 현장에서 최대한 구현해냈다. 연설문을 꼼꼼하게 작성하는 대신 구성을 치밀하게 한 것이다. 즉석에서 생각난 것처럼 들리는 문장이나 표현도 미리 메모해둔 것이었다.

 

 

 

 

프랑스 대중심리학자 르 봉의 군중심리의 영향을 받은 히틀러는 대중의 수용능력은 매우 한정적이고 이해력은 낮으며 그만큼 잘 잊어버린다는 전제를 깔고 대중들을 상대했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는 선동연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주는 어록들이 등장한다.

 

글말보다 입말. “이 세상의 위대한 운동은 전부 위대한 글쟁이가 아니라 위대한 연설가 덕분에 확대된다.”

 

논리보다 감정에 호소하라. “본능적인 혐오, 감정적인 증오, 선입관에 따른 거부를 극복하는 것은 학술적인 오류를 바로잡는 것보다 천 배는 더 어렵다.”

 

요점을 간추려 반복하라. “주관적이고 일관성 있는 태도로, 그 요점을 슬로건처럼 반복해야 한다.”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이 선거에 당선되는가

 

히틀러는 뛰어난 연출가이자 천부적인 선동가였지만 단지 자신의 개인기만으로 독일 대중들을 휘어잡은 아니었다. 때맞추어 도착한 문명의 이기들이 그를 도왔다. 마이크와 스피커가 개발되면서 히틀러의 목소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는 비약적으로 넓어졌고 비행기는 그가 만날 수 있는 유권자들의 수를 몇 배로 늘려주었으며, 라디오와 수신기는 그의 슬로건을 독일 구석구석까지 전파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진다. 나치는 1933년부터 194310년 사이에 독일 국민 세 명 중에 한 명 꼴로 소형 라디오 수신기를 가지고 있게 만들었지만 히틀러의 연설 횟수는 오히려 반으로 감소했다. 국민들은 라디오를 통해 목소리만 흘러나오는 연설에 싫증을 냈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수천, 수만 명의 청중을 상대로 쨍쨍한 목소리를 울려댔던 히틀러 역시 마이크 앞에서 읽어내려가는연설에 흥미를 잃어갔다. 결국 라디오를 통해 강제적으로 들어야만 했던 총통연설은 원래 가지고 있던 파급력을 잃어버리고,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히틀러의 연설은 더 이상 동지를 얻지 못하는 공허한 메아리로 전락하고 만다.

 

유권자인 우리가 새삼 깨달아야 할 진실은 단순하다. 히틀러의 능란한 말재주와 이를 전하는 미디어가 청중에게 가져다 준 것은 자체가 아니라 실체가 없는 채로 부풀려지기만 한 빵의 꿈이었다는 것이다.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히틀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길 일이다.

 

선거에서는 명확한 의미가 없으면서 다양한 바람을 이루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상투적인 말을 새롭게 발견하는 후보자가 당선된다.”

 

김경실/<아름다운 날> 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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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 노래, 질펀하도다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9. 16. 16:17

이 사랑 노래, 질펀하도다

 

아주 가끔 성서를 들출 때가 있다. 물론 종교적 열심이 아닌 텍스트에 대한 관심 때문이지만, 어쨌든 성서를 읽으며 나름의 마음공부를 한다. 그런데 성서는 꽤 야한 구석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삶이 그렇고, 솔로몬 왕이 사랑한 아리따운 여인 이야기도 제법 농밀하다. 그런가 하면 그 옛날 <주말의 명화> 시간에 봤던 삼손과 데릴라의 사랑 아닌 사랑도 은밀한 이야기 천지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성서는 에로티시즘으로 가득한 책이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성서에 잠입한 에로스의 그림자’를 추적하는 책이다. 물론 에로스 혹은 에로티시즘이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대놓고 말하기 뭣한 주제다.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에로스는 ‘수상한 부담 덩어리’이고, 에로티시즘은 ‘신앙과 경건의 이름으로 자랑스레 내세우기 면구스러운 심리적 켕김을 동반’하는 그 무엇이다. 성서에 그렇게 많은 사랑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

 

에로스는 희랍의 신 이름이고 그래서 이방 신화와 종교 전통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가까이하기에 흉측하다. 그뿐 아니라 에로스의 사랑은 남녀 인간의 육체적 관능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에서 에로스나 에로티시즘은 “타락한 세속의 음란과 방종을 부추기면서 마치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의 사상적 저변” 정도로 치부된다.

 

 

 

    ⓒ내셔널 갤러리 루벤스가 그린 < 삼손과 데릴라 > . 미묘한 사랑 이야기다.

 

‘호혜적 파트너’로서의 관계

 

상황이 이런데도 지은이는,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점점 더 멀어지기 전에 기독교와 에로티시즘의 화해를 시도한다. 에로스와 에로티시즘이 “인간의 현 존재를 가능케 하는 생명의 거푸집이자 그것의 재생산 구조이며, 나아가 모래알처럼 분립되고 흩어진 인간의 하나 됨을 갈망하는 오래된 인류의 꿈”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로티시즘이 “현대 문명의 두터운 금기를 성찰하고 그것을 과감히 위반하는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생명의 숨구멍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비평의 풀무질”이기 때문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인간의 문화와 예술, 종교와 사상은 결국 에로티시즘이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인 지은이 차정식은 성서에 드리운 에로스의 그림자를 찾아내기 위해 그야말로 성서 구석구석을 누빈다. 먼저 아담과 하와가 태초의 인간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고독’이라는 감정에 주목하면서 두 사람이 한 몸의 존재를 넘어 한 몸 ‘되기’를 꿈꾼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지은이는 영적 상상력을 발휘해 성서의 텍스트가 내포하고 있는 에로티시즘, 곧 “서로간의 사귐을 통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화이부동의 지평을 개척해나가야 할 호혜적 파트너로서의 관계”에 대해 풍성한 사유를 풀어낸다.

 

그런가 하면 성서를 통틀어 가장 에로틱한(?)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아가서> 통해 ‘담대한 아름다움과 에로틱 신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전개한다. 아가서의 두 연인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갈망한다. 사랑이 깊어져 상사병에 걸리기도 한다. 두 연인은 주변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 간 잔치에서 먹고 마시며 사랑을 예찬한다. 예찬으로 끝나지 않고 “두 사람만의 은밀한 사랑을 위한 침상과 거기서 나눠지는 성애의 미묘한 쾌락”까지 성서는 자세히 묘사한다. 이를 통해 지은이는 인간의 사랑의 심연은 신에 대한 사랑의 심연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그러고는 “아가의 질펀한 사랑 노래, 그 담대한 에로티시즘의 향연이 더욱 갈구되어야 한다”라고 덧붙인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에로티시즘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시각만을 바꾸는 책은 아니다. 지은이는 신학은 물론 철학과 문학, 예술 분야 등 다양한 관점을 넘나들며 질펀한 성적 판타지로 가득한 현대사회에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제시한다. 성서에서 찾아낸 에로스의 유산을 통해 오늘 우리 사회의 “아름다움과 육체, 욕망과 억압, 금기와 위반이라는 에로티시즘의 핵심 개념”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더 없이 반가운 책이 바로 《성서의 에로티시즘》이다.

 

장동석/<기획회의> 편집주간,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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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9. 16. 15:31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에로스의 묵은 정념을 일깨우는 일상적 에로티시즘이야말로 숨 막히는 현대문명의 두터운 금기를 성찰하고 그것을 과감히 위반하는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생명의 숨구멍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비평의 풀무질이다.”(7-8쪽)

 

“이 책이 성서의 해석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관점, 하나 됨을 갈망하는 인간의 꿈이라는 관점, 요컨대 생태적인 창조론의 관점을 좀더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9쪽)

 

1.

 

어깨 품이 넓은 비단옷을 입은 한 청년이 무릎을 꿇은 채 두 팔로 땅을 짚고 있다. 소맷자락을 걷어 올려 드러난 그의 팔은 미끈하고 든든하다. 살짝 드러난 초록색 바지가 고급스러워 보인다. 눈은 황홀경에 빠진 듯 반쯤 감겨 있고, 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다. 그는 연못에 비친 자기의 영상을 홀린듯 바라보고 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카라바조(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1610)가 그린 나르시스의 모습이다. 나르시스는 자기 아름다움에 이끌려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죽고 만 비극의 인물이다. 그의 비극은 무엇일까? 그를 연모하는 다른 이들의 마음에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자족할 뿐 다른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 비우지 않음으로 그는 신의 노여움을 샀다. 철학자인 김상봉 선생은 나르시스의 비극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르시스는 타자적 주체를 알지 못하는 정신이다. 그는 언제나 홀로주체로서 존재한다. 그의 세계에서는 자기만이 주체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의 객체이다. 그리하여 그의 세계 속에서 모든 타자는 사물화되고 인식대상으로 정립되기는 하되, 결코 인격적 만남의 대상으로서 그에게 마주설 수 없다.”(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한길사, 21쪽)

 

누군가에게 매혹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그동안 견고하다고 생각해왔던 자기 주체성의 성채는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 무너짐은 자기 상실로 이어지기보다는 자기 초월 혹은 자기 고양의 계기가 된다. 사랑이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이가 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리라. 안타깝게도 오늘의 젊은이들은 이런 매혹 앞에 자기를 던지지 않는 것 같다. 매혹된 영혼이 되기보다는 스펙을 견주어보며 사뭇 안전한 길을 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보헤미안적인 작가 목수정은 "생물학적인 연애 충동마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조국의 심상치 않은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해 근심한 바 있다. 변형된 나르시스들이 비틀거리며 오가는 거리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나르시시즘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질적인 타자와의 하나 됨을 추구하는 에로스에 붙들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라는 말은 공론의 장에 등장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에로스라는 말이 발설되는 순간 사람들은 거의 즉각적으로 성애를 떠올린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을 띠고는 금기 뒤에 숨으려 한다. 물론 호기심을 버리지는 못하면서. 성 담론이 넘치는 시대에 에로스를 소환한다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 무모한 열정에 달려든 이가 있다. 빼어난 필력으로 성서 텍스트에 담겨 있는 숨은 뜻을 밝혀왔던 한일장신대의 차정식 박사가 그이다.《성서의 에로티시즘》. 제목이 파격적이다. 기독교 성 정치학의 뿌리로 작동해왔던 ‘성서’와 금기시되어 왔던 ‘에로티시즘’이라는 단어가 ‘의’라는 소유격으로 엮여도 되는 것일까? 독자들은 궁금하다. 그런데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고은비의 그림은 외설스럽기는커녕 성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생명의 기운이 곰비임비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가 성서의 에로티시즘에 주목하는 것은 온갖 금기와 억압으로 점철된 오늘의 신앙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로스는 풍요의 신과 결핍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고 때로는 결핍감을 느낀다. 결핍은 누군가에 대한 혹은 뭔가에 대한 그리움을 낳는다. 주로 ‘동경’이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젠주흐트(Sehnsucht)는 ‘보다’와 ‘찾다’라는 말의 조합이다. 보고 찾는 것이야말로 동경 혹은 그리움이라는 말이다. 헤르만 헤세는 동경을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와 활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본다면 에로스는 우리 삶을 추동하는 힘, 혹은 관계를 가능케 하는 힘이라 할 수 있겠다.

 

성서에서 에로스적 표현이 가장 다채롭게 표현되고 있는 책은 노래 중의 노래라고 불리우는 아가서이다. 아가서가 신과 그의 백성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은유이든,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표현이든, 노골적인 사랑 이야기가 성경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근엄한 도덕주의자들에게는 스캔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저자는 아가서의 의미를 이렇게 밝혀준다.

 

“아가의 사랑이 추구하는 에로틱한 아름다움은 거친 타락의 현실을 가로질러 훼손되지 않은 인간의 하나 됨이란 원초적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담대한 의욕에 잇닿아 있는 듯하다. 그것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다. 죽음과 소멸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전부를 불태우고자 하는 헌신의 열정이 에로스의 밑자리에 창조적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이다.”(185-186쪽)

 

‘인간의 하나 됨’을 회복하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테마이기도 하다. 하와가 등장하기 전 아담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했지만 ‘홀로 있음’이 야기하는 고독 속에 유폐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타자의 존재가 필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그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 그것으로 하와를 만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낯이 익은 동시에 낯선 존재인 하와를 보며 이런 노래를 부른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은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창 2:23). 낯선 타자를 보며 기뻐하며 경탄하는 아담의 모습이 이채롭다

 

저자는 이 고백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바람직한 관계를 읽어낸다. 인간은 뼈를 공유하여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서로를 지탱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뼈 중의 뼈’라는 말에 담긴 존재론적 요청이다. ‘살 중의 살’이라는 말에서 저자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당신의 요소들까지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포용하겠다는 의지”(18쪽)를 엿본다. 즉 낯섦을 적대감정으로 환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지평으로의 초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환대의 관계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하나 됨의 체험이다. 서로에 대한 경탄과 어루만짐을 통해 드러나는 이런 하나 됨의 의지를 저자는 에로틱한 것으로 명명하고 있다. ‘나’의 쾌락을 위해 '너'를 물화하거나 수단으로 삼는 타락한 성애와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영어로 구속을 뜻하는 단어 어토운먼트(atonement)는 ‘하나 되게 함’이라는 뜻으로 풀이 될 수 있다. 구원 체험이란 결국 소외가 극복된 상태, 등 돌림의 관계에서 마주 봄의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그러한 하나 됨의 가장 완전한 예를 예수에게서 발견한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이들의 공동체의 하나 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 하나 됨이야말로 인류가 지향하는 역사의 황홀경일 것이다. 황홀한 비의의 세계는 근엄한 율법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기꺼이 나를 내주려는 사랑을 통해 열린다.

 

 

 

2.

 

하지만 에로틱한 에너지는 역사 변혁의 동력이 될 수도 있고, 무자비한 파괴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로써 미학적 정치를 실천한 주인공”(218쪽)으로 에스더를 들고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모에 의해 멸절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에스더는 ‘인형과 같은 장식적 위상’에서 벗어나 민족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다. 그때 그의 무기는 왕조차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이었다. 저자는 에스더의 그런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구원의 ‘때’를 위한 전위적 몸부림”(227쪽)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 들 수 있는 사람은 테클라이다. 테클라는 ‘바울과 테클라 행전’이라는 외경문헌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바울의 종말론적 급진성과 금욕주의의 메시지를 접한 후 테클라는 약혼조차 파기하고 바울을 따른다. 테클라는 바울을 향한 집요한 그리움을 드러내지만 금욕적이었던 바울은 한사코 그를 멀리한다. 나중에 테클라는 독립적인 주체로 서서 새로운 여성 리더십의 전범으로 자리를 잡는다. 저자는 “테클라의 사랑 이야기는 그리움이 욕정의 에너지로 전락하지 않고 공적인 사명으로 승화될 수 있는 틈새를 확보하였다”(310쪽)고 평가한다.

 

에로틱한 에너지가 파괴의 원천으로서의 작용한 예는 살로메를 들 수 있다. 살로메는 관능적인 춤으로 왕과 고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무엇을 청하든 다 들어주겠다는 왕의 호언에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 했다. 살로메의 “에로틱 에너지는 파괴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선악의 경계를 허물며 일거에 의인을 비참한 사지의 그늘로 처박는다.”(245쪽) 오늘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에로틱한 에너지는 이처럼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는 에로티시즘이 숭고한 비극으로 귀결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정념을 주체할 수 없었던 삼손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의 영웅이라기보다는 반(反)영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거룩한 소명과 이국적인 여성의 몸에 의탁하여 고독을 달래려는 속된 에로스적 열망 사이에서 흔들린다(100쪽). 그는 에로스의 덫에 걸려 머리털을 잘리우고 눈조차 뽑히는 수모를 당한다. 그런 후에야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나 죽음을 통해 소명을 이룬다.

 

차정식 박사는 가장 다루기 어려운 근친상간의 문제도 우회하지 않는다. 성경은 근친상간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한다(레위기 20장). 그런 짓은 ‘망측한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창조한 주체와 피조된 객체 사이의 질서를 혼란케 만드는 전복적 위반"(45쪽)이라고 설명한다. 유전학적 이유에서든, 문화인류학적 이유에서든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은 ‘세상의 도리’로 공유된 원초적 질서를 위반함으로써 도래할 미지의 위험에 대한 공포가 작용한 결과”(47쪽)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드물기는 하지만 근친상간을 용인하거나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소돔성의 멸망 이후 산으로 달아나 숨어 살던 롯과 그의 두 딸의 경우도 그 중 하나이다. 롯의 두 딸은 세상 풍속대로 결혼한 남자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한 뒤 차례로 아버지 곁에 누웠다가 아이를 잉태했다. 성경은 그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고 건조하게 보도한다(창세기 19:30-38).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도 위반의 경계를 넘음으로써 생명을 이어가게 된 이야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겠다. 다말은 자식을 얻어 남편의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당위적 요청에 따라 신전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맞아들였다. 저자는 다말의 선택을 딱딱한 제도와 법규, 그리고 “억압의 금기를 넘어 관계의 정의를 이룩하는 지경으로까지 뻗어가는 매우 희귀한 사례”(69쪽)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가 근친상간 자체를 용인하자는 이야기가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3.

 

저자는 《성서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매음 혹은 음녀의 사회학에 대해서도 예리한 분석을 가하고 있다. 음녀를 꾸준히 요구하는 남성 가부장체제의 남근주의가 어떻게 여성들의 생명을 착취하고 파괴했는지 여러 학자들의 논거를 끌어들여 정리하고 있다(281쪽). 신전창녀들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적 의례의 외피를 입고는 있지만, 신전창녀들은 수줍은 매음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종교기관의 경제적 수요를 충당했다는 사실도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포르노그래피의 수사학을 차용하여 에로티시즘의 도발적 창의성을 짓밟는 경우이다. 저자는 그러한 예로 에스겔 16장과 23장을 든다. 그곳에서 에스겔은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조국의 현실을 극단적인 성욕에 사로잡힌 음녀가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빗대 말했다. 저자는 이 대목을 매우 불편해한다.

 

“왜 패망한 국가와 민족의 비극이 성욕의 자유를 당당하게 추구하고 향유한 건강한 여성의 자유로 빗대어졌는지, 그녀의 몸에 피어오르던 에로틱한 에너지의 활성화가 어찌하여 음탕한 방종의 낙인 가운데 곤욕을 치르게 되었는지 본문의 행간에 질문의 싹조차 엿보이지 않는다.”(205쪽)

 

에로틱한 에너지가 가장 아름답게 승화된 예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인은 예수가 식사를 하고 있던 자리에 등장하여 눈물로 그의 발을 씻겨주고 머리털로 닦은 연후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다. 이 광경은 인습에 찌든 이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외설적으로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예수는 여인을 만류하지 않는다. 어떤 ‘사무침’의 정서가 그들을 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저자는 지극한 열정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다만 그녀는 가장 치열한 자신의 신체 언어로써 예수를 속속들이 만나고 싶었고 자신의 극진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 표현의 진정성을 옹호하면서 그 몸짓 언어를 수락했다. 한 영혼의 가식 없는 서비스를 남세스레 여기지 않고 최대한 즐김으로써 예의를 표했다.”(263쪽)

 

예수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도 전파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렇게 해석한다. “복음 전파의 사명이 사명을 위한 사명이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으로 우리의 몸을 통해 구현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복음도 그 본연의 목적에 부응할 수 없다는 우려의 전언이다.”(266쪽) 어쩌면 이 대목이야말로 《성서의 에로티시즘》이라는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의 욕구와 ‘욕망’을 금기의 경계 밖으로 추방해버린 신앙 혹은 신학이 오늘의 기형적인 기독교를 낳은 것이 아닐까? 삶의 아름다움을 항유할 능력을 거세해버리는 순간, 삶은 축제가 아니라 고역이 된다.

 

4.

 

차정식 박사의 안내를 따라 성경의 세계 이곳저곳을 탐사하는 이들은 한편으로는 후련함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숨기고 싶은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드러내고 싶은 그러나 드러낼 수 없는 자기 욕망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매끈한 텍스트로 읽는 이들은 《성서의 에로티시즘》을 금서 목록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주름 잡힌 텍스트임을 어렴풋이나마 눈치 채고, 그 주름 사이에 깃들어있는 서사성에 귀 기울이려는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성경과 더욱 깊이 만나게 될 것이다.

 

에로티시즘이 금기를 해체하는 기능을 한다면 차정식 박사의 이 책 또한 에로틱하다 할 수 있다. 근엄한 이들이 그어놓은 금기의 선을 마구 넘나들기 때문이다. 신학자의 책은 흔히 읽기 어렵다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어렵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렵지 않다. 저자의 문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독서의 리듬을 방해하는 단어 배치에 놀랄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도 어떤 자리에 배치되어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아우라를 드러낼 때가 있다. 차정식 박사의 글이 때로는 너무 화려한 듯 싶어 불편할 때도 있고, 중층적인 문장 구조가 복잡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을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쓸 수 있겠는가?

 

《성서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한국교회 혹은 한국사회에서 경청된다면 우리는 좀 더 에로틱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른다. 글을 마치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카라바조의 다른 그림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을 떠올린다.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핍박을 받던 시절 유딧은 “저들의 오만을 이 여자의 손으로 깨뜨리십시오”(유딧 9:10) 하고 기도한 후 술에 취한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버렸다. 카라바조는 바로 그 장면을 화면에 담았다. 섬뜩하다. 유딧의 서늘한 칼날이 목에 닿는 느낌이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도취적 나르시시즘이 과잉 범람하면서 자본의 힘에 굴복하는 오늘의 현실(87쪽)에 유딧의 칼날이 닿을 수 있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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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에로티시즘’이 피어난 꽃자리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9. 15. 16:30

성서의 ‘에로티시즘’이 피어난 꽃자리

 

1.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이 몸과 맘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아갈 때 그곳에 생명력과 기쁨이 있다.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생명력과 기쁨, 누구에게나 간절하다. 그래서 그 욕망과, 욕망이 추동하는 몸과 맘은 경계를 넘어선다.

 

어떤 때 경계선은 허용되는 금이다. “우리 집에 왜 왔니?”라고 물으면 “꽃 찾으러 왔단다”로 답하며 오고가는 아이들 놀이의 금은 즐겁게 오가는 경계다. ‘위반자’를 환영하는 금이다. 즐겁고 유쾌하며, 그 사이 은근한 짜릿함도 있다.

 

그러나 금기의 국경도 있다. 개인이, 사회가, 나라가, 역사가, 아니 영원이 거룩함의 이름으로 불침(不侵)의 경고 푯말을 붙여 놓은 터부의 경계. 금기의 경계 저 편에는, 엄중 경고의 푯말을 넘어간 후에는, 열락의 천국이 있을까? 아서라, 그곳으로 진입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케루빔들로, 또 움직이는 불 칼로 길목을 차단당한 곳은 단지 태초의 에덴만은 아니다.

 

헬라어 ‘에로스’는 하나 됨의 욕망을 의미한다. 영원을 향한 추동부터 인간 사이의 욕정까지, 장대하고 구구한 하나 됨의 욕망이 그 단어로 형용된다. 그 단어는 인간 삶의 위대함과 구차함 모두를 둘러싸기에, 사람살이의 구경(究竟)에 들어가는 열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열쇠를 쉽게 얻을 수 없다. 특별히 성서라는 몇 천 년 전 문서의 고고학적 층위를 조심스레 캐 가며 에로스의 흔적을 발굴하고, 거기서 얻어 낸 열쇠의 모양을 재현해 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2.

 

한일장신대학교의 차정식 교수가 불쑥 탐사를 끝냈다며, 발굴 보고를 한다. 그의 학문이 단지 현하지변(懸河之辯)에 머물지 않음을 알지만, 그래도 이 탐사는 자못 놀랍다. 기왕에 알아 온 그 차 교수가 에로티시즘에 관한 책을 쓴다고 할 때, 나는 ‘햄릿이 그린 명랑 만화’를 떠올렸다. ‘신성한 괴물’(divine monster, 친한 학자들 사이에 방대한 양의 저술과 높은 질적 성취 덕분에 그가 얻은 별명)에게 그가 쓴 에로티시즘을 읽고 싶지 않다는 농담을 했다. 그는 자신의 에로틱한 ‘구석’을 주장했고,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괴물’이 지은 공저 포함 40여 권의 책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책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 교수가 조형한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무엇일까? 이 책은 에로스 또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특정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가령 “에로티시즘은 그 합일을 훼방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에 이르는 모든 부정적 스캔들을 혁파하는 해체의 에너지”(250쪽)라는 정의가 있지만, 그것은 에로티시즘의 한 면을 언급할 뿐이다. 나는 일단 에로티시즘을 “한 인간이나 인간 사이의 에로스의 속내를 간파하고 드러내며, 그것의 현상과 결과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설명 사이에 드러난 생각의 꼴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 책을 읽어 내려 한다.

 

3.

 

이 책의 진가를 단박에 알아보려는 이들에게 나는 “향유(香油)와 향유(享有)의 신학적 미학 – 예수와 한 여인의 거룩한 사치”를 읽으라고 권한다. 이 책에 만발한 꽃밭의 뿌리에 이 글이 놓여 있다. 이 이야기(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가 에로스의 정수를 드러내는 까닭은 여기에 남자/신성/천상을 향한 여인/육체성/지상의 지극한 구애와 간절한 하나 됨의 욕망이, 주위의 온갖 방해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승인된다는 데에 있다. 승인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되어야 하며, 찬미받아야 한다. 설레는 오감의 육체성이 가득한 지상의 열망은 위반과 금기의 스캔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와 신성, 그리고 천상을 향한다. 그 향함의 길에는 중층적 감정에 복받친 눈물과, 그 눈물과 함께 있었을 법한 (흐느끼는) 소리, 따사롭고 감각적인 살갗의 접촉과 열락의 향내가 가득하였다.

 

예수는 이 모든 에로스를 거절하지 않는다. 에로스의 대상인 그는 ‘여인’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여인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여인의 입술을 받아들였고, 여인의 머리카락을 받아들였다. 여인의 눈물을 받아들였고, 눈물 섞인 흐느낌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그 여인이 평생 모았을 법한 향유를 받아들였다. 아니, 수동적 받아들임이 아니다. 그는 여인의 모든 것을 향유(享有)했다. 그리하여 이 현장에서 남자와 여자, 신성과 인간성, 천상과 지상, 육과 영, 거룩함과 속됨의 황홀한 하나 됨이 탄생한다. 그것이 에로스의 궁극이고, 성서가 그려 내는 에로티시즘의 진모(眞貌)이다. 그 사이로 온갖 현란한 감각의 축제가 벌어진다. 아무리 낭비하고 사치해도 여전히 부족한 듯 보이는 역설이 생겨난다.

 

이 역설의 현장은 에로스의 대상의 죽음을 준비하는 곳이라고 선언되는데, 이로써 바타유가 말하는 에로티시즘과 죽음과의 관계가 선명히 드러난다. 이곳에서는 실선으로 되어 있는 금기의 경계를 넘는다. 죽음을 무릅쓰는 에로스 앞에 경계를 지키던 ‘타나토스’(죽음)는 잠시 그림자를 거둔다. 타나토스는 알고 있다. 굳이 그 자리에서 맞설 필요가 없다는 것! 또 에로스에 이끌린 이들은 자신에게 자발적으로 걸어옴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끌린 예수가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보라!

 

남자/신성/천상을 향한 여인/육체성/지상의 이원론적 구분에 발끈할 필요는 없다. 비록 그것이 시대적 한계 때문에 성차별적이고, 육체 경시적이며, 지상적 삶을 부인하는 듯이 보여도 속내는 그런 것이 아니다.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의 통찰대로 이원론이나 이분법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도입된 장치이고, 이 이야기는 결코 성차별이나 영육 이원론, 내세와 이생의 위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문화적으로 그렇게 표현되어 있어도 이는 이른바 ‘더 높은 곳’을 향한, 아니 ‘높고 낮음’이라는 표현도 걸리적거린다면, ‘완전’ 혹은 ‘완성’을 향한 열망의 표현이다.

 

이것은 에로스와 프시케의 헬라 신화를 떠오르게 한다. 자신의 남편 에로스와의 약속을 어긴 벌로 프시케(정신)는 갖은 고생을 다하며, 다시 남편인 에로스와 결합하고자 한다. 에로스를 향한 프시케의 고투는 금기와 경계, 그리고 죽음을 오가며 자신을 성숙과 완전으로 나아가게 한다. 헬라의 신화는 남편과 아내라는 알레고리를 차용하였다. 에로스와 프시케 신화가 “아내는 남편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과 상관없듯, 향유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드러내는 바의 골수에는 차별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러니 문자 자체에 속거나 분개하지 말아야 한다.

 

차 교수가 해설하는 향유 부은 여인 이야기에는 에로스의 정수가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 과정에 이르게 하는 힘, 곧 이 책의 호소력과 장점이 한껏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차 교수의 《성서의 에로티시즘》에서 전통적 성서학자의 역할을 놓지 않는다. 차 교수는 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이야기에 “은폐된 전승의 곡절”을 해부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신약학자의 임무이며, 다른 분야의 학자라면 그저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본문의 형성과 구조를 분석하여 이야기의 층위를 드러낸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기본적인 힘이다.

 

차 교수는 성서 본문의 앞과 뒤, 본문과 본문 주변의 상황, 한 단어 한 문구에 맺힌 숨결과 몸짓에 민감하며, 그것의 요령(要領)을 조탁(彫琢)된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서 본문을 가져오고, 그것을 제 입맛에 맞게 조리하기보다는 성서의 침묵도 들으려 하는 성서학자로서의 자세와 능력이 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또한 이 책은 성서의 감각적 이미지와 표현들을 쉽게 정신화하지 않고, 반짝거리는 육감적 언어를 용감하게 사용한다. 차 교수는 근엄한 도덕에 짓눌려 신학자들이 망각한 파라다이스의 언어를 되찾아오는 임무라도 맡은 듯, 이러저러한 상열지사(相悅之詞)가 파득거리는 텍스트를 벌여 놓는다. 그 텍스트가 어떻게 가능한지 아는가? 차 교수는 발칙하고, 그 발칙함을 예수 앞에서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청년 예수의 욕망을 과감히 상상해 보기로 한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근접하면서 제 생명의 인간적 욕구에 최대한 배려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아우성치는 육신의 욕망에 따스한 위안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가능했다. … 예수의 경우는 낯선 여인과의 우발적인 신체 접촉이라는 방식으로 하나의 희귀한 선례를 남겼다. …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변명 삼아 위선을 떨지 않고 그 신체적 공궤를 기탄없이 수락했다. 그만큼 그는 하루 한 시간의 감각적 ‘주이상스’(jouissance) 가운데 행복하고 자족했던 것이다”(264쪽).

 

예수가 즐긴 감각의 쾌(快)! 그 쾌를 곧바로 정신적인 것으로 전환하며 본문을 읽을 이유가 없다. 쾌는 육체의 표피적 감각 속에, 그리고 그 감각이 주는 실제와 실제에 겹친 판타지 속에 머물면서 정신화에 저항한다. 아름다움은 얼마나 자주 표피에 머무는가. 그래서 그것이 또 얼마나 덧없이 보이는가. 차 교수는 나아가 사회정의나 구제와 봉사에 갇혀서는 안 되는 복음의 생명력이 기억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에로티시즘이 없다면 복음을 마르크스주의나 도덕주의로 변환하려는 시도를 제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막 14:9)해야 한다. 이로써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복음의 주변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 속함이 천명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성서인문학의 성숙을 보여 준다. 그의 책 <신학의 스캔들, 스캔들의 신학>을 평하면서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저자의 ‘해석의 힘’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저자에게 힘 있는 ‘신학자’라는 명예를 건네려다가 그보다는 저자가 표방한 ‘성서인문학’을 떠올리며 그를 ‘성서인문학자’로 명명해 본다. 그것은 새로운 이름이고 이 시대에 불릴 만한 이름이다.” 이 성서인문학자는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공감을 얻은 이론을 사용하며 성서 본문을 해석한다. 본문 해석과 무관하게 자신의 독서를 자랑하는 듯 난삽하게 이론을 치렁치렁 장식하기보다는, 본문 해석에 필요한 이론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본문의 의미를 한층 증폭시켜 준다.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기에도 바쁜 이들은 다른 이들의 말을 굳이 가져올 이유가 없다. 각주가 거의 없이 쓰인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3권은 모든 학자들의 꿈에 가깝다. 저자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4.

 

흔히 서평은 책의 요약을 첨부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피할 이유는 없지만, 나는 굳이 요약을 제시하기보다는 이 책의 독법 하나를 제안하고자 한다. 내가 위에서 “한 인간이나 인간 사이의 에로스의 속내를 간파하고 드러내며, 그것의 현상과 결과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설명 사이에 드러난 생각의 꼴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로티시즘을 정의한 바를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틀에 따라 이 책을 읽으면 에로티시즘, 곧 성서가 에로스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이념과 생명력에 다가가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가령 “번식과 금기, 그 위반의 경계에서 – 롯과 두 딸의 막다른 골목”은 근친상간이라는 인류 공통의 터부와 관련된 성서 이야기를 다룬다. 롯과 두 딸이 육체적으로 합치게 되는 현상의 배후, 또 그것의 배경과 속내를 성서 저자가 어떻게 제시하는지, 그리고 터부를 넘어선 그 ‘에로스’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그 평가를 산출한 저자의 가치 체계, 다시 말해 평가의 이념이 무엇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에로티시즘'의 한 풍광을 정리해 볼 수 있다.

 

또 “관능의 춤과 좌절된 에로스 – 살로메의 춤에 대한 발칙한 상상”도 내가 제시한 틀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살로메 이야기에서는 살로메와 관련된 성서 본문이 낳은 후대의 예술적 상상력의 전후와 주석적 점검이 이루어진 후, 춤이라는 관능을 둘러싼 에로틱한 시선과 허장성세가 어떻게 억울한 파괴와 의로운 죽음을 낳았는지가 논의되는데, 저자는 이야기에 드러난 성서적 가치를 가지고 그 에로스의 후일담을 평가하고 상상한다.

 

독자들은 허무와 퇴폐, 그리고 파괴가 얽힌 그 자리에서 건강한 에로티시즘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성서의 논리를 파악하게 된다. 비록 성기기는 했지만 이 틀이, 차 교수의 유려한 언어의 숲 속에서 발견한 옹달샘과 오솔길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논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잠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요약의 도구가 될 것이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말할 학자는 없을 것이다. 학자들은 으레 ‘동의 안 해 주기’ 운동과 ‘나만의 차별성 갖기’ 운동을 겸하여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저러한 사항을 트집 잡기보다는 저자가 자신의 논지를 더 힘차게 밀고 나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차원에서 단지 두 가지 점만 언급하려 한다.

 

하나는 에로티시즘을 재빠르게 정신화하는 움직임에 저항하는 이 책의 미덕이 간혹 중지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분들은 통념적 기독교 윤리와 사뭇 다른, 짜릿한 도발과 위반이 이 책에 듬뿍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의 쾌가 발생할 때, 저자는 그것의 쾌를 속히 정신 혹은 영과 연결 짓지 않으려는, 곧 육의 쾌의 충만성을 감각적으로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간혹 저자는 에로티시즘을 성급하게 신학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때는 일반적인 감상과 반성의 수준에 머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애무의 절정에서 남자와 여자는 성기의 삽입과 흡수를 통해 접속을 완성한다. … 그러나 그 순간조차 가장 극적인 쾌락의 정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공허한 욕망의 허구렁이라는 것을 얼핏 깨닫는다. … 결국 남자와 여자는 그 뼈와 살을 물질적 매개로 자신의 영혼이 결국 하나님의 형상에 잇닿아 있음을 체감할 뿐, 그것이 이 땅에서 완성체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몸 되기의 생물학적 사실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신학적 교훈이다”(24쪽)는 김성동의 《만다라》에서 한 승려가 여인을 취한 후, 자신의 동료 승려에게 한 자조적 말과 맥락을 같이하는데, 이것은 종교적 감상이라기보다는 수컷의 허무감을 종교 언어로 가장하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또 이 책이 기왕에 위반과 금기 전반을 다루고자 했다면 요사이 한창 논란이 되는 동성애에 관련된 논의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차 교수는 그럴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에로티시즘 전반이 아니라 범위를 ‘성서’로 잡는 한, 그것의 독특성은 다른 신화나 이야기와의 비교, 혹은 에로티시즘에 관련된 이론의 적용과 적용 밖에 있는 성서의 '삐짐'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창세기의 아담 창조 이야기를 풀이하면서 저자가 플라톤이 전하는 인간 창조 신화를 언급할 때(13쪽 이하), 나는 이 책이 이들 간의 비교에서 어떤 함의를 이끌어 낼지 궁금했다.

 

플라톤이 전하는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세 종류로 창조되었다. 여자-여자, 여자-남자, 남자-남자. 인간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자 제우스는 그들을 절반으로 갈라 힘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평생토록 서로의 절반을 찾아 헤매는 데에 힘을 다 쓰게 하여 신들에 대한 반항의 싹을 죽였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것이 에로스의 기원이 된다. 서로 하나가 되고자 갈망하며 낭비하는.

 

그러나 저자는 플라톤의 신화 가운데 남자-여자의 자웅동체만을 언급한다. 세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는 것과, 단지 자웅동체만이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함의를 갖는다. 세 종류의 인간이 반으로 나뉘어 서로의 반쪽/짝을 찾아다닌다면 기계적인 산술로 동성애자의 수를 인류의 2/3으로 잡는 것인데, 이 신화 구조에 따르면 동성애가 매우 자연스럽다. 이것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고, 둘에게 생육과 번성을 명령했다는 창세기의 이야기와 다르다. 두 이야기를 비교하면 성서의 이야기 구조,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성서 전승에서 동성애가 환영받지 못한 이유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성서 전통과 기독교의 교훈에서 마땅히 비판받고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 동성애 논의에 뛰어든다면 이 책의 가치가 드러나기도 전에 소모적인 논쟁이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보물이 마땅히 누려야 할 찬사가 감소될까 걱정한 듯하다.

 

산뜻한 봄에 잘 어울리는 책이다. 불볕더위의 짙푸름과 함께할 만하며, 애상의 계절에 적합하다. 눈 속에 곱게 핀 꽃과 같이 기쁨과 힘을 주는 책이다. 성서의 지층을 우리말 지도도 없이 헤매다 나름의 길을 얻어온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이렇게 우리 삶에 아름다운 꽃자리를 펴 주었다. 유한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그 에로스의 꽃이여, 아찔한 광휘여, 우리 곁에 길이 머물라!

 

김학철/연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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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이 성서의 ‘세속’과 만날 때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9. 15. 13:38

<꽃자리>의 종횡서해

 

신앙생활이 성서의 ‘세속’과 만날 때

-《성서의 에로티시즘》의 저자 차정식 교수 인터뷰-

 

 

편집자 주/ 이 기사는 도서출판 <짓다>의 김성민 대표께서 SFC 편집장 시절 인터뷰하여 <뉴스앤조이>에 실은 내용입니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를 차정식 교수만큼 적절하게 풀어낼 사람은 드물다. 그의 문장들은 깊이 있는 신학적 해석에 텍스트를 바라보는 에로틱한 상상력이 함께 공명한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날카로운 분석은 혀를 차며 감탄할 정도고, 끊임없이 쏟아 내는 화려한 수사학은 짧은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이롭다. 냉랭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이렇게도 한 문장에 함께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선입견을 관능적 육체의 미학으로 바뀌어내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런 주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지거나 오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서 텍스트의 농밀한 언어를 다시 복원하고 그 원래 풍성한 분위기를 살려내려면 그만큼 그것을 다루는 언어 사용 또한 에로틱해야 할 것이다. 차정식 교수의 글은 이 어려운 과제를 거뜬히 수행하고 있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이 출간되었을 때, 그다운 책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출간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인터뷰 일정을 잡았던 이유이다.

 

- 우리나라 신학자 중에 에로티시즘을 다룬 사람이 잘 없는 것 같은데, 교수님의 기억에 생각나는 책이 있나요.

 

확인을 안 해 봤는데 몇 년 전 성서공회 민영진 전 총무님이 월간 <기독교사상>에 ‘성서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적이 있어요. 그걸 꾸준히 읽었는데 주로 아가서의 에로틱한 시적인 표현들 중심으로 쓴 글이었어요. 그분이 구약성서 전문가니까 구약성서에 나타난 에로틱한 이미지 위주로 살핀 글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 글은 인문학적 사상이나 이론과는 상관없이 구약성서 맥락에서 주제에 따라 풀어낸 글이었죠. 단행본으로 출판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해요, 저작의 동기라고나 할까요. 저작의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저작 동기는 간단해요. 한종호 목사님(도서출판 꽃자리 대표)이 <기독교사상> 편집주간을 할 때 친분이 있었어요. 제가 필진도 추천하고 그 잡지에 연재도 몇 번 했어요. 편집주간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차렸는데 작년 3월인가 4월에 전주로 저를 만나러 왔어요. 그때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로 책을 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제가 많이 아는 분야도 아니고 당시 여러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어서 많이 바빴기 때문에, 독서하고 공부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죠. 소극적으로 한번 시도해 보겠다고 해 놓고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나름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하고, 출판사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처음부터 꼼꼼하게 계획하고 목차를 하나하나 챙겨야 했는데 그렇게 쓰는 책도 있지만 어느 정도 즉흥적인 영감에 의해 직관적인 순발력에 기대어 쓰는 경우가 있어요. 이 책은 그런 방식으로 썼어요. 말하자면 목차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목차를 조정하고 상합하여 하나하나 쌓아 나가는 건축술적인 책 쓰기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꼭지를 선별하고 조율하고 조정하고 탈고 직전에 끼워 넣기도 하면서 썼어요. 직관적인 순발력과 순간적인 영감이 많이 작용했어요. 장인이 건축공학적인 방식으로 하나씩 쌓아 가듯이 글을 쓰다 보니 열다섯 꼭지를 쓰게 되었어요.

 

곤혹스러웠던 건 신약성서에 에로틱한 이미지나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는 점이었어요. 알다시피 오히려 구약성서에 인간의 다양한 삶의 풍경들과 실존의 모습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거기에 에로티시즘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 많아요. 그래서 구약성서에 많이 할애를 했어요. 일반적으로 에로티시즘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 같은, 인간의 신체 미학적인 주제를 다룬 인문학 서적과 이론서 등을 개인적으로 소화하고 그것을 나의 언어로 풀어 보려고 노력했어요. 인문학적 주제를 성서 텍스트와 만나게 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담론을 엮어 내려고 했어요. 이런 과정에서 공부와 쓰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어요. 독서하고 글 쓰고 다시 피드백하고 하는 매우 복잡한 작업을 했던 거죠.

 

 

 

 

- 집필 과정에서 감각적으로 상황적인 영감을 많이 중시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교수님의 집필의 특징인가요. 특별히 상상력이나 영감 그리고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서 생기는 새로운 통찰력을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론 상상력만으로 책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성서라는 텍스트가 주어진 상황에서는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분석과 나름의 심도 있는 해석 등 성서를 표피적인 텍스트가 아닌 심층적인 텍스트로 인정해야 해요. 그런데 성서의 전후좌우 모든 입체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더라도, 그것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재구성해서 제출하는 작품은 해석의 결과라는 면에선 창의성이 있을지는 몰라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런 작업도 '주석쟁이'의 빤한 공정 같아서 성서학자로서 주석을 중시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해요. 천편일률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석이 텍스트의 의미를 산출해 내고 무엇인가 해석의 가능성들을 우려내는 데 있어선 고유한 영역이 있겠지만 반대로 그 한계도 있는 것이 사실이죠.

 

방법론을 굳이 말하자면 김학철 교수가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문신학’이에요. 성서를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해 온 내부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큰 틀 속에서 기존 방법론을 무시하진 않지만, 그걸 포괄하면서 넘어서는 인문학적인 감수성과 현대 사회라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두루 아우르면서, 외부의 시선이나 낯선 외부자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빤한 반경을 넘어서 보자는 것이에요. 넓은 의미의 인문학적인 관점과 글쓰기에서 개입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감수성이 객관적인 공변성을 갖추기까지는 여러 검증이 필요하지만, 저는 여전히 모험적인 창조의 순간을 중시하는 편이죠. 그래서 저의 글쓰기 전략에서는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감수성을 개입시키는 형식이 많이 나타나요.

 

-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가 과제로 주어진 거지만, 교수님 개인적인 삶에서 내용을 촉발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감수성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성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라든지, 에로티시즘 주제나 여성에 대한 이해 등에 대해 어느 정도 교감과 접속이 이루어져 이 책에서 우러나오고 있는지요.

 

에로티시즘 주제가 참신하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은 기독교 문화의 전통 그리고 신앙 전통이 영적인 것을 늘 강조한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어요. 영적인 것이 중요하고 저도 강조하기는 하지만 이런 배타적 강조들이 우리 일상생활의 감각적인 경험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 같아요. 신령한 걸 추구하는 기독교 전통의 감각 속에서는 반대로 육체적이고 신체적인 부분도 중요하거든요. 신체를 매개로 작동하는 욕망의 세계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 과연 기독교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일까 하는 문제의식을 늘 갖고 있었어요.

 

우리 삶의 내용을 주도하고 우리의 정신적인 사유를 촉발하는 것이 우리의 신체 기관이나 뇌의 작용, 그리고 욕망의 발현 방식과 무관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선한 창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타락한 실존이라는 죄의 문제를 비켜갈 순 없지만, 하나님이 지은 인간의 아름다움의 유산이 우리의 신체를 통해서도 발현되고, 신체를 매개로 한 감각적인 욕망들이 수렴되는 부분집합이라면, 감각적인 욕망을 외면하거나 매도하거나 정죄하고 억압하는 게 과연 선한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부합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신체와 욕망에 대해 부정적인 신앙교육을 하다보니까, 인간들에게 쓸데없는 금기와 죄의식을 심어왔지 않나 생각해요. 그것이 욕망을 억압하면서 악순환되는 정서적인 부작용들을 양산했다고 보는 거죠.

 

이런 욕망들이 눌려져 있다가 폭력적으로 나타나 우리 사회에 성과 관련한 온갖 범죄와 부정적인 현상들을 만들어 낸다 생각해요.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요한 성령의 자유 부분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성령의 자유를 누려야 하는데 그저 표방되는 자유에 국한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몸으로 성령의 자유를 누리는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어요.

 

신적 창조의 아름다움을 배제한 신학의 구도는 기형적이에요. 인간의 신체적인 아름다움과 욕망, 그 심연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외면한 채 성서를 읽으면 그 메시지가 많이 반감된다는 겁니다. 저에게 이런 모든 문제가 에로티시즘이라는 꼭짓점으로 수렴이 되었던 거에요. 그리고 같은 학교에 재직하면서 오래전 함께 친분을 나눠 온 김영민 교수님과도 자주 대화하면서 사회에 범람하는 섹슈얼리티 코드와 성 담론에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야 할 출구가 무엇인지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가 공감했던 게 바로 '일상적 에로티시즘'이었어요. 일상에서의 만남과 마주침, 서로 말을 섞고 눈을 마주치며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창의적 모험의 결핍, 그리고 이것을 존중하고 예찬하는 언어를 상실한 것이 우리의 성적인 욕구가 왜곡되어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배경이지 않느냐는 나름의 문제의식에 공감했던 것이지요.

 

- 성서 안에 있는 성 문제나 에로티시즘의 주제에 국한하셨다고 했는데, 성서에서 이러한 주제를 뽑아낼 때 특별한 선별 기준이 있었는지요.

 

주로 남녀가 나와야 하는데, 에로티즘 또는 에로티시즘 주제를 공부해 보니 섹슈얼리티 이슈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신체 감각적이거나 성욕을 매개로 해서 남녀가 교합하고 교접하는 차원의 관심사를 넘어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였다는 것이죠.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금기와 위반 같은 주제, 인간이 성을 매개로 생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매춘의 문제, 룻의 경우 드러나는 구애와 연애의 문제, 에스더의 경우가 그렇듯 섹슈얼리티가 정치적으로 쟁점화되는 영역도 있었어요. 공부하면서 남녀가 부대끼면서 생기는 성과 연결된 부분을 탐색하다 보니 신약성서보다 구약성서에 더 많았어요. 구약성서가 인간의 복잡다단한 욕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면서 과감하게 스토리텔링을 한 데 성경의 위대한 점이 있다고 봐요. 구약성서에 이런 게 누락돼 있다면 신약성서만으로 얼마나 빈약했을까 생각해요. 제가 신약성서 학자이면서도 구약성서의 위대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죠.

 

구약성서를 살피면서 몇몇 인물들을 발견했고, 인물과 관련한 사건을 발견하고, 또 이야기와 사건과 결부된 쟁점들, 그러니까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이론을 조명해서 의미화할 수 있는 쟁점들을 발굴했어요. 또 현대문학에서 <은교>라는 소설이나 영화의 내용들을 이런 쪽과 연결할 수 있는 주제들이 있잖아요. 성서에 나오는 남녀의 만남 이야기를 위주로 엮긴 했지만, 이걸 뒷받침하는 정치 사회적인 콘텍스트나 인문학에서 제공하는 이론적인 통찰과 해석학적인 모델을 함께 접목시키려 노력했어요. 거기에 저의 실존이나 동시대적인 사람들이 까발리기 어려운 욕망의 저변, 그리고 감각의 문제나 감각적인 삶의 향유 문제를 함께 버무렸죠.

 

오늘날 사회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강 미인 이슈라든지,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강박시키는 왜곡된 아름다움의 실상에 대한 비판도 빠트리지 않았지요. 가령 여성의 경우 쭉쭉빵빵, 남자는 식스팩 등으로 성욕을 북돋우거나 성적 판타지를 부추기는 게 과연 욕망의 진정성에 순종하는 부분인지, 가짜 욕망의 거품에 휘말려 소모되는 부분인지, 문명 비판적인 관점도 개입시켰어요. 나중에는 더 추가해야 할 내용을 찾다가 성서에 나타나는 음녀와 성녀 등 여성의 성을 이원화해서 성적 판타지를 대리 충족하는 해석학적 틈새도 발견하게 되었죠.

 

- 이 책은 하나의 큰 주제를 감안하고 각 장의 내용을 엮었다고 할 수 있나요? 예를 들어 가부장적 여성성을 비판하는 정치적인 문제의식 같은 것이 모든 장에 있는지, 아니면 각 장은 하나의 창을 열듯이 각각 다양한 주제를 갖고 있나요.

 

굳이 말하자면, 한 꼭지마다 조명하는 주제의 특수성과 고유성, 다양성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맥이 있다면 그것은 에로티시즘을 창발적으로 재해석하고 재적용하면서 성경이라는 텍스트 속에 되먹인 것이죠.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의미를 좀 더 증폭하려는 해석학적인 작업을 시도했어요. 책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통일성이 있다면, 우리 시대에서 이런 감각적인 욕망의 자연스러운 향유를 방해하는 가부장체제의 권위주의적인 억압의 족쇄와 이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혁파하고 해체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자연스럽게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고 조율하도록 돕고, 상충하는 경우 욕망이 탐욕으로 빠지지 않게 절제의 필요성도 진작시키려 했어요. 욕망을 감각적으로 누리면서 우리가 서로 긴장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담아낸 것이죠.

 

오늘날 이게 너무나 어려운 이유는 사회적으로 성추행과 성폭력이 만연하니, '아름답다'라는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워져요. 너도 나도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지독한 억압을 느끼는 것이죠. 사소한 실수를 해도 언어적인 성추행이나 성폭력으로 증폭되기 쉬운 게 우리 현실이니까요. 그렇지만 사회적인 금기에 눌려서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정치적인 긴장이 흐르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는 아니잖아요. 남남, 남녀 관계뿐 아니라 세대 간 장벽을 넘어 인간의 타락한 욕망을 순화해서 지금보다는 순전하고 천진하게 만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의 예비자로서 좀 진중한 연습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이런 연습에 욕망을 조율하는 연습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제 신념이 이 책 전체에 바탕으로 깔려 있어요.

 

- 우리가 성이나 욕망의 문제 그리고 신체의 이슈에 대해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현대 한국 사회는 자유로운 언어나 시선이 오히려 폭력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적이 되는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이런 부분에서 성서학자로서 성서 텍스트가 에로티시즘이나 신체에 대해 인문학적 관점과는 다른 어떤 차별적인 독특성이나 통찰을 던져 줄까요.

 

저는 성서 역시 신구약을 막론하고 가부장적 시대의 제약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성서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고 경외할 만한 측면이 분명히 있어요. 2500년도 더 된 구약성서 텍스트나 2000년 가까이 된 신약 텍스트 속에 인간의 복잡 미묘한 실존을 단순화하거나 굉장히 역동적인 욕망의 세계를 얼마든지 제거해 버리거나 아름답게 미화하고, 이상형만 뽑아서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수많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역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함과 악함 등 모든 파노라마적인 현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거에요. 이야기나 시적인 표현 외에도 아가서와 같이 농밀한 언어 등으로 묘사하기도 하죠. 표현의 풍요함, 스토리텔링의 무제한성, 모든 인간의 금기에 터부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적나라한 인간 욕망의 끝자리를 보여 주고 있어요.

 

가령, 롯과 두 딸이 동굴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성적인 교섭을 통해 자손을 보급하는 건 오늘날 관점에선 근친상간인데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잖아요. 유다와 다말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성서 배후의 가부장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관을 넘어서는 성서의 창조적인 관점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있단 말이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다루는 에로티시즘의 이슈에서 성서를 해석학적인 거울로 삼아 여기에 투사해서 재해석하고 얻어 낼 수 있는 풍성한 영감이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오늘날 부대끼며 씨름하는 사회 정치적인 이슈, 신학적인 이슈, 신앙적인 이슈를 모두 포함해서 우리가 암시받고 영감의 출처로서 성경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풍요로운 세계가 있다고 봐요.

 

인문신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성서를 고전으로 대하고 해석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교조적인 틀 속에서 성경을 보는 그런 관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굉장히 풍요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이걸 저는 '인문신학'이라고 말해요. 실제로 전혀 성서학자가 아닌 사람도 성서를 통해 참신한 접근을 하는 이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발터 벤야민, 알랭 바디우, 자끄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 좌파 철학자들이 성서를 가지고 인문학적인 전유의 작업을 통해 참신한 해석을 많이 했어요. 성서학적인 관점에서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저는 바깥의 목소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신학이 인문학과 만나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생활이 '세속'을 알아야 해요. 이것을 매개하고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성서에 있다고 보는 것이고요.

 

- 이 책이 상대적으로 구약성서에서 나타난 에로티시즘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인간성 내지 동물적 신체를 가진 인간 자체에 대한 묘사가 드물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자주 등장하는데 우리가 잘 못 보는 것인지, 신약성서 학자로서 견해를 말씀해 주세요.

 

신약성서에서 대표적으로 다룬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거예요. 여기서 제가 추출한 핵심 주제가 일종의 '향유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이야기에서도 에로틱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충분히 의미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이 구약성서는 온갖 천연 원료를 달여서 만든 한약과 같고 신약성서는 양약과 같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 비유가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히브리적인 세계관과 헬레니즘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이와 같지 않나 싶어요.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희랍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듯이, 헤브라이즘(유대교의 토라 신학적인 전통)과 헬레니즘 전통이 만나면서 소용돌이치는 국면이 1세기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연안의 디아스포라 세계의 문화적이고 사상적인 환경이라고 볼 수 있어요. 헬레니즘이 세계화된 사상으로서 그들의 일상생활과 문화와 사상,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어요. 헬레니즘 전통은 플라톤까지 올라가면 인간을 다양하게 창조한 신화 이야기 등 풍성하게 나오는 게 사실인데, 그때 헬레니즘은 오리지널한 플라톤 사상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근거해 유대교와 기독교에 나름대로 영향을 주었어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플라톤주의 전통을 태반으로 깔고 있었던 신약성서의 세계에 이원론, 즉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 빛과 어둠의 이원론 등등의 이원론적인 사고가 나타나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이 선교하면서 교회를 개척했지만, 1세기 말까지 지속된 '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했죠. 이 땅에서의 생존과 삶의 여정은 오로지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내세 천당을 향해 떠나기 위해 대합실에 잠시 체류하는 삶의 기대치를 가지고 살았다고 볼 수 있어요.

 

이왕이면 상급을 많이 받기 위해서 이 땅에서 많은 덕행을 쌓아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금욕주의 신앙이에요. 이것은 우리의 '프뉴마(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마' 즉 육신까지도 흠 없이 보존해야 한다는 신앙이죠. 영혼과 육신이 욕망에 감염되는 죄악의 세상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보존하여 순결하게 지키면 내세에 보상이 클 것이라는 금욕주의와 결부된 종말 신앙이 소개되고 있죠. 이러한 긴박한 종말론적 신앙 패턴 그리고 헬레니즘의 이원화된 세계관을 반영하는 내용들이 요한복음에도 나오고 신약성서 여기저기에 등장해요. 신약성서의 인간관에 히브리적인 통전적 전통이 일부 잔재로 박혀 있지만, 신약성서의 인간론적 용어로 사용된 사륵스(육체), 프뉴마(영혼), 프쉬케(목숨) 등 개념 분할 자체가 인간을 쪼개서 본 것이죠.

 

신플라톤주의에 기초한 인간론의 빈곤, 종말론적인 긴박한 생활 스타일과 핍박받는 상황에서, 생성기 기독교인의 삶의 자리는 금욕주의와 결부된 내세의 보상 신앙이라는 특수 여건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의 일상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론적인 복락의 증거가 되고 우리의 신체적 감각을 누리는 향유의 삶 자체가 죄악시되거나 그것을 발견하고 체감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가 여전히 21세기에 살면서 1세기 감각과 세계관, 사유의 반경에 머물러 있으면 과연 정상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면, 우리가 신약성서의 기독교 신앙에 끼친 영향을 존중하면서도 그 한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측면이 있어요.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수많은 원천들이 구약성서에 있는 거고요. 그런 차원에서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긴장과 교리적 명쾌함과는 또 다른 미학적인 효용성이 있다고 보는 거죠.

 

-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 문제를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만, 초기 기독교 문헌들 중에 에로티시즘에 기초하고 있는 문헌들이 존재하잖아요. ‘예수의 여자들’이라는 주제는 보수 신학의 입장에서는 금기시되는 영역인데 이 부분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아주 민감한 주제에요.(웃음) 일단 어떤 욕망의 존재로서 인간을 논할 때 예수님도 욕망의 존재로서 인간이었다면, 인간론의 기본을 밑바탕에 깔고서 예수님의 인간관계나 인간에 대한 그분의 감정적인 판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영지주의 문헌을 보면 예수와 여자 제자들이 입맞춤을 한다든지 하는 이른바 ‘신혼방(bridal chamber) 모티프’에 기초해서 기록된 내용들이 나와요. 영지주의 문헌에서 이런 모티프를 신적인 존재와의 영적인 연합이란 관점에서 발전시킨 게 사실이에요. 칼 융이 자기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분석한 많은 영지주의 문헌들이 있고, 그런 문헌들에서 에로틱하고 섹슈얼한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하는 게 사실이긴 해요.

 

하지만 이런 것들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많은 무리가 있어요. 영지주의 신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생산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죠. 복음서에 나오는 향유를 깨뜨린 여인과의 관계는 네 개의 버전으로 나오는데, 역사 비평적, 전승사 비평적 관점에서 네 개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조명해 보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굴절되었는지 다루었죠. 제가 쓴 또 다른 책 《예수는 어떻게 죽었는가》에서 언급하고, 《묵시의 하늘과 지혜의 땅》이라는, 예수신학을 비평적 관점에서 다룬 또 다른 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어요.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개인의 욕망의 번뇌와는 전혀 무관하게,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마땅히 기계적으로 ‘죽어 줘야’ 하는, 죽음의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었단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자기 죽음의 현실 앞에서 실존적으로 직면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과 두려움과 부대끼면서 씨름한 죽음의 능동적인 주체로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은 사건을 단순히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었다고 편리하게 해석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부분이 많죠.

 

문화사적으로 연구를 해 보면 알 수 있어요(이 주제는 사실 저의 박사 학위 논문과도 관련이 있어요). 그리스 로마 시대 많은 영웅호걸들, 유대교 전통의 현자들, 랍비들, 동양의 도인이나 고승들이 죽기 전 남긴 많은 에피소드들을 예수님의 경우와 비교 분석해 봤어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죽음과 연관된 문학적 모티프는 사람은 자기의 욕망에 어느 정도 충족을 받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충족받지 못했다면 죽음 직전에라도 자기의 마지막을 호사스럽게 향유할 수 있는 자기에의 배려가 필요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필요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죠.

 

고대 영웅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보면, 대개 죽기 전 목욕재계하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일생을 성찰하거나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 식사를 나누거나 하거든요. 예수님의 경우도 복음서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잖아요. 자기의 죽음을 내면화하고 의미화하는 과정, 인간적으로 고뇌하며 마무리하는 모습이 계속 나오는데 겟세마네에서의 모습과 그에 앞서 제자들과의 식사 장면, 향유 이야기 등이 전형적인 요소들이라 할 수 있어요. 식사도 일종의 향유 방식이지만, 예수님처럼 평생 가난한 자로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섬기면서 고생한 분이면서 또 한참 ‘총각’으로 살아오신 분을 한 여인이 사치스러운 기름을 몸에 붓고 닦아드리는 과정에 드러난 물심양면의 정성과 신체적인 접촉에는 분명 에로틱한 측면이 있는 거죠.

 

여성에게 가장 소중하면서도 아름다운 신체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의 터치를 생각해 보세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 기호에 의하면 발은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는데, 머리카락과 발이 만나고 그것이 입맞춤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매우 환상적인 상상을 증폭시키지요. 이런 에로틱한 이미지들이 결합하는데 예수님이 과연 그 순간에 영적인 황홀감에 빠졌을 뿐, 인간의 신체적 감각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기계와 같은 존재였을까…. 당연히 아니었겠죠. 평생 고생만 하고 산 사람에게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도록 하는, 불우한 육체를 죽음 직전에 달래며 호강시키는 방식의 일환으로 공동의 식사나 여인의 향유 공궤의 행동을 해석할 수 있어요. 마치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게 의사들이 보고 싶은 데 여행도 다니고 먹고 싶은 음식 실컷 먹게 하라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 향유의 공궤는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에로티시즘의 이미지가 총동원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살아 있음을 실감하면서 제 생명의 고유한 가치를 누리는 하나의 방식이었어요.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향유 공궤는 ‘거룩한 사치’나 ‘창조적 낭비’의 인문신학적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죠.

 

이런 사건이 진일보하면서 ‘마지막 식사(the last meal)’의 자리로 서사화되고 그것이 다시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의 형식으로 의미가 증폭되어, 나중에 ‘성만찬 예식(the Holy Sacrament)’의 제의적인 틀로 진화되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버전에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로, 베다니 마리아로 나타나긴 하지만)은 에로티시즘의 변용과 굴절을 드러내는 중요한 에피소드가 되죠. 마가복음의 가장 오래된 전승에 보면 복음이 전수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갸륵한 행실이 기념되리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향유 신학적인 전통의 계승에 대한 암시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면에서 예수 복음의 전승이 반쪽 전승으로 전락된 게 이 여인과의 중요한 에피소드를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못한 것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을 마땅히 '죽어 줘야' 하는 대속론적 관점으로만 본 우리의 교리신학적 한계가 이런 반쪽 전승으로 귀착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요. 이제 신학도 많이 발전하고 당시와 역사적인 성찰의 거리가 이 정도로 있으면 부족한 반쪽을 보완할 수 있는 신학적 통찰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 한국 개신교 신학의 약점 중 하나가 ‘몸의 신학’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런 신학적인 맥락에서 개신교가 '몸의 신학'에 대해 좀 더 풍성한 논의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흔히 개신교에서도 교회의 지표 중 성찬과 세례를 넣고 있는데 이것은 몸, 즉 신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적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국 개신교의 신학은 몸이나 몸과 관련된 여러 요소들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해석을 하잖아요. 말씀하신 향유 신학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 개신교가 고민하고 발전시켜야 할 부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성만찬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서 신학교에서 배운 건 교회의 신앙고백 문서를 담아 놓은 리마문서(또는 BEM문서)를 통해서에요. 창조신학적, 종말신학적, 선교신학적, 구원론적 관점에서 성만찬 교육을 받았어요. 성만찬 신학을 미국 신학교에서 매주 한 번씩 채플에서 제 몸으로 배웠어요. 성만찬이 끝나면 아침을 못 챙겨 먹는 학생들이 와서 남은 빵을 먹었지요. 창조적인 관점에서 성만찬은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을 의미하니까요. 물론 예수의 몸과 피라는 상징적인 장치가 있지만, 우리가 이걸 같이 나누고 누리는 데 의미가 있어요. 여기에 ‘예수님의 몸’이다, ‘예수님의 피다’는 말은 몸에서 피와 땀을 흘려 노동하고 번 돈으로 양식을 사서 함께 나누는 그런 삶을 긍정하는 거죠. 이런 일상생활의 경험을 거기에 농축시켜 보면 빵 한 덩어리와 포도주 한 잔의 상징 속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 생태적인 공정, 우리의 노동, 또 그것이 예수의 몸과 피라는 면에서 우리의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신앙의 정체성까지 모두 담겨있다고 할 수 있죠. 여기에 종말이 오기 전 우리가 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전파하는 선교적 사명까지 매우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어요.

 

그중에 우리가 충분히 오리엔테이션이 안 되어 있는 부분이 신체의 미학적인 측면이라고 봐요. 빵에 담겨 있는 창조론적인 의미와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했을 때의 신체 미학적이고 신앙 미학적 측면이 누락돼 있는 거죠. 성만찬 부분만 제대로 공부해도 우리의 몸에 대해 신학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봐요.

 

이와 별도로 몸의 신학이 개신교 신학의 결핍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몸을 다각적으로 이해하고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몸은 욕망의 존재잖아요. 우리가 욕망에 대해 너무 표피적이거나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의 욕망에는 착하고 악한 욕망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신약성서에 욕망을 대표하는 용어가 ‘에피투미아(epithymia)’인데, 이것은 중립적인 의미의 욕망일 수도 있고, 선한 에너지로 발동하면 의욕이 되고, 내 욕심을 위해 부정적으로 발현되면 탐욕이 돼요. 탐욕과 욕망과 의욕의 삼각구도에서 서로의 차이는 굉장히 미세하고 개인의 스타일마다 편차가 심해요. 그래서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욕망이 더 많다는 걸 알아야 해요. 선하냐 악하냐, 아름다우냐 추하냐 하는 가치 판단을 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욕망의 영역이 엄청나게 넓고 깊어요. 그 욕망을 투시하면서 그것을 우리 삶의 콘텍스트에서 어떻게 배분하고 분할하고 절제하고 조율할 것인가가 중요해지죠. 이런 걸 '욕망의 경제' 또는 ‘욕망의 테크놀로지’라고 개념화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이 우리의 몸을 통해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표현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성찰적인 자의식과 체계적인 공부가 너무 부족한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몸과 욕망에 미지의 여백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특별히 욕망에 대해서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경직된 태도나 방관의 태도를 보이면서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사안별로 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배분하고 균형을 잡아 가면서 그 가운데 '샬롬'을 이루는 게 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내용을 보다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요. 우리가 과연 몸으로 행복하게 숨 쉴 수 있는 상태인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몸에 대해 심도 있게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리고 그런 몸이 되도록 훈련할 수 있는 거죠.

 

- 몸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할 때 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차지하는가요.

 

우리의 성기를 통해 성적인 충동이 발현되고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이 발동하는 2차 성장기 이후부터 청년 장년 노년까지 성적인 관심은 일관된다고 봐요. 식욕과 수면욕 등 그것 이외에 성욕과 같이 중요한 게 있을까요.

 

오늘날 모든 권력과 문화의 코드가 섹슈얼리티에 압도되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이것이 우리의 몸을 향유하고 우리의 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면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영역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식욕과 비교해 보면 식욕은 죽기 전까지 가는 것 같아요. 법정 스님도 죽기 전에 단호박죽과 생미역을 먹었고, 옥한흠 목사님도 죽기 전까지 식사에 신경을 썼다고 해요. 이에 비해 성욕은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것 같진 않아요. 40~50대 되면 청년기에 비해 직접적인 성욕이 감퇴되면서 신체적인 욕구는 줄지만 대신 판타지적인 측면은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요즘 장년들이나 노년들까지 인터넷으로 10대, 20대의 성을 사면서 원조 교제 등 민망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또 언론에 보도되면서 모방 욕망이 작용하여 성적인 판타지 속에서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데, 저는 이것이 에로티시즘의 퇴행 현상이라고 봐요.

 

신체적 기관이 약화되면 우리의 상상력이나 미학적인 감수성을 통해 에로틱한 에너지를 다른 방식으로, 형식을 바꾸어 표현하고 발현할 수 있는 여러 영역들이 있어요. 에로틱한 열정으로 시를 쓴다든지, 예술적인 작품에 열정을 쏟는다든지, 사물과 생명체를 대할 때 행간에서 놓친 순간적인 의미를 포착한다든지, 얼마든지 다른 방식들이 존재해요. 원조 성관계 같은 게 최선의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죠.

 

- 성 문제가 우리의 육신과 관련해서 오히려 판타지가 될 정도로 우리의 삶에서 매우 강력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결국은 건강한 성에 대한 자유와 향유를 누리려면, 교수님의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 하는 창조적인 발견의 여유가 필요하잖아요. 무엇을 어떻게 예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고요. 이런 발견의 여유나 예찬의 언어가 어떻게 에로티시즘의 향유와 관계가 있나요.

 

우리 시대 압도적인 대세를 이루는 언어 타입이 있다면, 질투와 냉소의 언어가 합쳐진 것 같아요. 이것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많이 흐리게 하고 어둡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봐요. 이걸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언어 코드가 발견과 예찬의 언어에요. 말을 바꾸는 작업이 중요해요. 언어를 바꾸는 것은 우리 삶의 자세와 시선과 관점을 바꾸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 훈련이 언어의 갱신 훈련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투박하고 거칠고 뒤틀린 문체를 보면 그 이면에 도사린 그 마음의 풍경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불편하고 혐오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언어 자체가 에로틱한 요소가 있는 것 같아요. 색기가 있는 문장이 있어요. 어떤 사람의 문장은 색을 쓰는 반면에, 어떤 사람의 문장은 밋밋하고 투박하고 고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언어와 에로티시즘 관계를 흥미롭게 조명한 사람이 롤랑 바르트에요. 그의 《텍스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보면 책을 읽는 경험이 어떤 에로틱한 감흥을 유발하는지, 인간이 텍스트 속의 문자와 언어, 그 행간의 틈새를 경험하는 세계가 얼마나 에로틱한 경험인지 잘 포착했어요. 우리의 신체 미학과 욕망 그리고 감각의 세계에서 에로티시즘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문화, 언어, 그 색깔과 리듬 속에 잠재된 에로틱한 가치를 일상 가운데 구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과는 만나서 차 마시면서 대면하고 걸어가면서 어울리다 보면 생동하는 이야기의 욕망이 발동하거든요. 어떤 대상은 말을 섞고 대화할수록 깊어지고 심오해지는 경험이 있잖아요. 말에 끌려 매혹되고 더 주의 깊게 듣고 싶어지는 그런 말과 글이 있어요. 반면 어떤 사람은 말이나 글이나 교류할수록 버벅거리게 되고 대면하는 게 피곤하여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지는 만남이 있지 않나요?

사람을 어떤 이해관계,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와 결부돼 만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갖고 있더라도 많은 피곤함과 식상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미학적인 차원에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관계와 분위기, 그런 자리가 되면 서로 화학적 감흥이 발동하고 화제도 풍성하게 늘어나고 편해집니다. 우리가 본 영화나 읽은 책, 끌리는 그림이나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생활 세계의 아름다움과 생태적인 분위기, 만난 사람들 중 아름다운 사람의 기억과 이미지, 소통의 분위기 등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관계의 이면을 세밀하게 들추어 보면 은근히 에로틱한 측면이 있어요. 또 음식의 에로티시즘에 대해서도 말해볼 수 있겠죠.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걸 나누면 인간관계 자체, 그 개별 존재와 관계의 미학 속에 얼마나 에로틱한 요소가 많은지 금방 느낌이 옵니다. 또 우리의 언어가 의미를 증폭시켜 주기도 하거든요. 술의 경우도 술을 못 마시지만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술은 이와 같이 뜨거운 발화 작용을 통해 우리의 언어를 증폭시키지요. 반면 차(茶)는 술과 달리 쿨미디어에요. 적당히 달궜다가 서늘하게 대화를 이완시키는 매개가 되는 것인데, 이런 다채로운 일상적 미디어가 차려 주는 소박한 감각적 향유의 분위기 속에서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에로틱한 행위라고 볼 수 있죠.

 

- 책을 읽으면서 교수님이 풍성한 언어를 사용하고, 성의 향유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에 일관적으로 성의 해방적 측면을 강조한다고 봤어요. 이와 관련하여 언어화하기 힘든 조건과 지위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에로티시즘의 향유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신체적 약자(장애인)들이나 성 노동자들 그리고 성 소수자들은 그들만의 언어 표현이 외부의 주류 담론에 의해 억눌려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들의 몸의 에로티시즘은 표현되지 않고 가려지거나 음성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봐요. 교회는 이들에 대한 언어가 사실상 매우 빈약하기도 하고요. 사회적 약자의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에로티시즘의 본질이 금기를 위반하고 위반한 금기의 결과를 성찰하는 것이에요. 이런 면이 우리 삶 가운데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다이내믹한 세계로 증폭시킨다고 봐요. 에로티시즘의 견지에서 우리가 성 담론은 물론이고 그밖에 금기시해 온 다양한 주제를 깨 놓고 이야기하지 못할 게 없다고 보는 거죠. 인습적 관행과 주류 인식의 장벽을 넘어서긴 쉽지 않겠지만 방법론적인 테크닉의 계발이 필요할 거에요.

 

성 노동자, 흔히 말하는 매춘을 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해요. 얼마 전에 <신동아>라는 월간지에서 성 노동자의 생존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싶어서 스스로 성노동을 자청해서 경험한 것을 르포로 쓰고 인터뷰한 내용을 봤어요. 직업으로서의 성이라는 명분을 옹호하는 글이었어요. 말하자면 자신들도 엄연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법적인 족쇄를 채우지 말라는 주장이었지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먹고살 유일한 밑천이라는 것이죠. 생업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라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식기관이나 성욕을 은총의 선물로 허락했을 때, 그것을 누리고 생명을 잉태하는 것 등 나름의 고유한 목적이 있다고 봐요. 성 노동자들이 제 자신이 주체적으로 향유해야 할 성욕의 기관을 동원하여 돈을 주고 손님을 받는 매춘 행위를 하면서 얼마나 행복감을 누릴지 사실 의문이 들어요. 아무리 떳떳하게 일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을 할 때 자아의 존중감이 낮을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까발려서 인정받는 것도 구차한 면이 없지 않고, 그들의 현실을 공론화하더라도, 리버럴한 사람이 봐도 그러한 성적인 실천을 얼마나 존중해줄 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의문이 생기기도 해요. 물론 제가 성소수자가 아니고 성노동자 같은 사회적인 약자도 아닌, 나름대로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계급적이고 성적인 경험의 한계 내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만. 그런 면에서 그분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도 일리 있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목표가 불가능할까요? 성노동자가 되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처음부터 그렇게 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면에서 성이 먹고사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원초적인 뜻에 따라 누리고 즐기는 것, 사랑의 결실로 자녀를 생산하고 이런 쪽으로 욕망의 출구를 찾는 게 더 바람직한 대안이 아닐까 싶어요.

 

성소수자 문제는 할 말은 많아요. 미국에서 신대원 다닐 때 룸메이트가 게이였거든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지만 성소수자가 하나님이 생명으로 내신 인간이라는 면에서 권리는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당장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로 변신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면, 동성애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적 권리를 존중하는 게 마땅해요.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성소수자 측면에서 그들이 호소하는 입장을 배려하는 게 맞는다고 봐요.

 

다만 동성애가 마치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인 양 부추긴다든지, 심지어 찬미할 정도로 대단한 미학적인 가치를 갖는 영역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있어요. 최근 미국장로교회에서 동성애자 목사 안수 문제로 동성애에 대한 논쟁이 다시 또 불거졌잖아요. 제 나름대로 읽어본 관련 문서에 의하면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는 어떤 사회적 경험의 충격으로 말미암는 후천적인 사례도 있고, 태생적으로 예외적인 유전자의 조합에서 동성애적인 취향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극소수의 유형이긴 하지만요. 지금까지 유전자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병리학적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케이스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할 때 그것을 박멸해야 할 무슨 전염병처럼 여기면서 두려워하고(호모포비아) 격리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봐요. 예수님이라면 과연 그렇게 하실까요. 오히려 조건 없이 용납하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옳고 그름은 그 다음에 따지지 않았을까요. 동성애에 대한 호모포비아적인 태도는 크리스천으로서 극복해야 할 심각한 소수자 인권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인권 보존과 증진 차원에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부분을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신경 쓰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성애자들이 범하는 엄청난 성추행이나 성범죄에는 그렇게 관대하면서 성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심히 편협한 입장을 고수하며 정죄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올바른 태도인지 의심스럽다는 거지요. 또 다른 위장된 폭력이라고 봐요.

 

동성애의 에로티시즘과 미학은 추가로 연구하고 살펴야겠지만,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든 동성애를 아름답다고 수긍하거나 미학적으로 조명한 사례가 없어요. 비록 이 방면의 저술과 연구가 일부 있지만 오늘날의 관점을 역으로 투사하여 억지로 때려 맞춘 측면이 강하고, 성서를 통해 동성애의 에로티시즘을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봐요. 헬레니즘 계통의 다른 문헌 전통을 통해서는 충분히 가능하겠죠. 그리고 저 자신이 이성애자로서 동성애 미학을 다룬다는 것도 감각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버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철저하게 이성애자로 살아가면서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에는 감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이런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지적으로 정직하다고 봐요.

 

- 책이 출간되었는데,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인지,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고, 한국 기독교에 어떤 기여를 했으면 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이 책이 크리스천들과 일반인들을 내면의 억압된 욕망과 그 심리적인 부담에서 자유롭게 해방시켜주는 데 일조했으면 좋겠어요. 좀 더 세부적으로는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아가페와 에로스를 대립적으로 상극적으로 이해를 하는데, 이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사랑이 그렇게 간단하게 양분되지 않아요.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보면, 인간의 탐욕적이고 정욕적인 사랑을 묘사하면서 '아가파오(agapaō)'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예들이 있거든요. 에로스라는 단어는 플라톤의 저작을 보면 이데아의 원형과 같은 매우 고상한 형이상학적 메타포지요. 분법적인 사고방식과 편협한 배타적 사고가 고착되어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하는 데 구조적인 제약을 받고 있거든요. 이런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패턴을 깨는 데 이 책이 조금이라도 공헌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어떤 유형의 사랑이든 자유롭게 토론하고 대화할 수 있는 지적으로 정직한 환경과 개방된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좋겠고요.

 

우리의 정치, 사회, 종교 등 삶의 여러 분야에서 억압적인 금기가 고착되어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정서적으로 약동하는 우리의 생체 에너지가 에로틱한 기운과 결부되고 그것이 풍요롭게 충족되고 사안별로 조율되면서 행복한 개인들이 이 사회에, 우리 교회에 늘어나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신앙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해방된 정서를 양육해 나갈 수 있거든요. 자기의 욕망의 회로가 폐색된 채 시원하게 뚫리지 않으니 돈으로 장난치고, 권력으로 힘주어 큰소리치고 그러는 거예요. 교회의 권위주의도 욕망의 강박된 현실과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자세한 논리적인 규명이 필요하겠지만 교회 개혁이 안 되는 이유가 에로티시즘의 순환 회로가 막혀서 그래요.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 신앙 교육의 분위기가 바뀌어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자란다면, 그 가운데 소박한 자기 삶을 사는 '버릇'이 생기지 않겠어요? 일단 성인이 되면 생각이 고착되어 좀처럼 바뀌지가 않아요. 교회에서 60~70세가 넘어서 뭔가 휘두르고 싶어 하고, 큰 교회는 명예도 따라붙으니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그런 구태의연한 짓을 안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미학적인 여유를 발양하고 누리는 욕망의 조율, 삶의 향유 연습이 어렸을 때부터 필요한 거죠.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의미의 체질 훈련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에로티시즘의 미학적 감수성에 기초하여 정서적 자기연단과 일상적 욕망을 조율하는 기술을 배우면서 삶의 자생적 동력으로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개혁도 넓은 의미에서 더 잘 될 거예요. 교회개혁도 심층적으로 인간론적 견지에서, 인간의 욕망론적 차원에서 보면 좋겠어요. 제도나 인습을 당장 바꿔도 사람 내면에 그 욕망의 코드가 변하지 않으면, 사회개혁, 정치개혁, 교회개혁도 늘 한계에 부대끼게 되어 있어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심층적으로 인간의 욕망의 밑자리를 성찰하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데 일조한다면 바람직한 기여가 되겠죠.

 

중요한 한 가지 더, 유일한 실용적인 기대는 많이 사서 읽었으면 좋겠네요.(웃음) 밥 한 끼 먹는 마음으로 사서 우리 열악한 출판문화가 활성화되면 좋겠어요.

 

인터뷰는 전주에서 운치 있는 찻집에서 이루어졌다. 두 시간 가까이 쉼 없이 내뱉는 낱말들은 찻잔 속 녹차 향만큼이나 은은했다. 아니 차향보다 진했으리라.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덮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내맡기길 잘했다 싶다. 공교롭게도 인터뷰가 있는 같은 날 오전, 나는 전주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문상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래서 내 머리엔 계속 ‘죽음’과 ‘에로스’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에로스.’ 집으로 돌아와 이 연관 주제를 잘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다시 찾아보았다. 밑줄이 그어져 있다. 역시 이 책은 에로티시즘을 ‘거룩한' 의례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알면서도 삼손이 그 치명적인 비밀을 들릴라에게 밝히고 만 것은 여인의 사랑이 덫이 되어 이내 닥칠 자신의 비극을 기꺼이 수락하고자 하는 장엄한 결단 아니었을까(103쪽).”

 

“이제 부드러운 여성의 살갗이 다가와 그의 지친 발을 애무한다. 섬세한 머리털의 간질이는 감촉도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온정어린 감각의 서비스다. 더구나 눈물까지, 입술까지 제공된 마당에 예수의 가난한 발은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한 기관이 되는 환상적인 변화를 경험했을 법하다(264쪽).”

 

 

목  차

 

1. ‘한 몸’의 존재를 넘어 한 몸 ‘되기’

-아담과 하와에 대한 에로틱한 상상

 

2. 번식과 금기, 그 위반의 경계에서

-롯과 두 딸의 막다른 골목

 

3. 수줍은 매음과 변신의 에로티시즘

-유다와 다말의 곡진기정

 

4. 미인은 어떻게 건강할 수 있는가

-사사기의 여성전사들과 에로틱 메커니즘

 

5. 이국적인 것을 향한 동경으로서의 에로스

 

-삼손과 들릴라의 수수께끼 인연

 

6. 매력의 교육, 구애의 학습

-룻과 나오미의 연대, 보아스와 룻의 연민

 

7. 벌거벗은 육체와 시선의 에로티시즘

-다윗과 밧세바의 어긋난 시선

 

8. 침묵의 섬김과 신학적 존재론

-아비삭의 부재하는 현존

 

9. 발견과 예찬으로서의 사랑

-아가의 담대한 에로티시즘

 

10. 화대를 지불하는 창부의 틈새 진실

-에스겔의 굴절된 에로티시즘

 

11. 공동체의 전위로 나선 아름다운 몸

-에스더의 에로틱 정치 투쟁

 

12. 관능의 춤과 죽임의 에로틱

-살로메의 춤에 대한 상상

 

13. 향유(香油)와 향유(享有)의 에로티시즘

-예수와 한 여인의 신체적 교감

 

14. 음녀의 계보, 성녀의 족적

-에로틱 여성 이미지의 두 갈래 길

 

15. 처녀 남장과 단발, 또는 그리움의 승화

-바울과 테클라(저자 확인요망, 일반적으로 쓰이는 건 테클라지만...)의 인력과 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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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고독의 문지방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6. 11. 15:05

꽃자리의 종횡서해(11)

 

진정한 고독의 문지방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

 

 

“우리에게 고독은 원죄로 분열된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욕정과 죽음으로 꾸며낸 존재의 인위적․가식적 단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408쪽)

 

“내 자녀 요나여, 나를 본 적이 있는가? 자비, 깊고 깊은 자비, 나는 우주를 끝없이 용서해 왔다. 나는 죄를 모르기 때문이다.”(546쪽)

 

역시귀본逆時歸本의 실천

 

큰물에 떠 밀려 오는 부유물처럼 일상이 추레하고 번잡할 때 사람은 누구나 고요함을 희구한다. 침묵의 무게가 부족할 때 영혼은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치곤 한다. 이드거니 앉아 삶을 관상하기에는 현대인의 삶은 너무 분주하다. 달리고 또 달리느라 숨은 턱에 차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다. 벚꽃잎이 난분분하여도 그 앞에 멈춰 서서 피고 지는 꽃잎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여백조차 없는 나날이다.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는 바로 그런 때 내 앞에 왔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도사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유력 일간지에 서평을 쓸 정도로 촉망받던 문학도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세속을 떠나, 청빈․정결․순명․정주․행동 양식의 변화를 서원하는 은수자가 되도록 한 그 강렬한 내적 끌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고독에의 갈망이었다. 이런 갈망을 부추긴 것은 내적인 목마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파괴의 강렬한 힘을 자발적인 자기 포기의 길로 접어들라는 초대로 이해했다. 그를 시토회에 속한 트라피스트 수도회로 이끌었던 것은 자기 확장을 꾀하기 위해 남을 파괴하는 그 무분별한 욕망에 등을 돌리고 평화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역시귀본(逆時歸本)의 실천인 셈이다.

 

그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켄터키 산간에 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에 입회한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26년을 오직 그곳에 머물며 관상생활에 정진했다. 그가 수도원 밖 출입을 한 것은 불과 몇 차례 되지 않는다. 세속으로부터 절연된 수도원에 머물면서도 그는 고독의 부족을 절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홀로 살고 싶은 열망(고독), 하느님 안에 잠적하는 것, 하느님의 평화 속에 잠기는 것, 하느님 앞에서 남모르게 사라지는 것이다.”(35쪽)

 

침묵에 대한 갈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수도회에는 다양한 전문가가 필요하니, 문학적인 훈련을 받은 그도 재능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수도원장과 총장 신부의 권고는 참으로 사려 깊은 것이었다. 글쓰기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수도원장의 권고대로 영적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1946년부터 1952년 사이의 일기는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원제는 《요나의 표징》)라는 제목으로, 1956년부터 1965년 사이의 일기는 《죄 많은 방관자의 억측》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두 책은 20세기의 한 위대한 영성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자료이다.

 

공동체적 삶과 고독에의 갈망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그의 영혼의 지평이 어떻게 확장되어 갔는지는 두 책의 소주제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첫 번째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데 각각의 제목은 ‘종신서원’, ‘원장 신부님의 죽음’, ‘대품’, ‘하느님의 제단으로’, ‘고래와 아주까리’, ‘요나의 표징’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 책을 영적인 정체성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던 “한 관상가의 청소년기”의 기록으로 이해한다. 이 책에서 그의 시선을 철저히 자기 내면을 향하고 있다. 그에 비해 《죄 많은 방관자의 억측》은 그의 시선이 세상을 향하여 확장 혹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경향은 ‘바르트의 꿈’, ‘진리와 폭력: 흥미로운 시대’, ‘광인이 동쪽으로 달리다’ 등의 제목만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전례, 순명, 글쓰기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에서 우리는 현실과 갈망 사이에서 서성이는 한 불안한 영혼을 만나게 된다. 고독에 대한 그의 동경은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소음으로 말미암아 좌절되곤 한다. 불어나는 식구들을 수용할 건물을 짓느라 수도원은 늘 시끄러웠다. 트랙터와 불도저 소리는 그의 관상을 방해하곤 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은 까닭은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시대 정조가 되어버린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머튼 자신이 이 물음에 이끌려 수도원에 왔지만, 같은 질문을 가지고 찾아온 이들이 오히려 관상을 방해하는 역설 속에서 그는 번민한다. “하느님이 내 수도회이며 내 독방”이고 “내 수도 생활이며 규칙”(42쪽)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마음은 고요해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종신 서원을 하고 자신을 삶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사업, 야망, 명예, 쾌락, 이 세상의 모든 활동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가 얻고자 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일상의 소음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그가 감당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도 관상에의 몰입을 방해했다. 피정 온 사람들이 식사하는 동안 책을 읽어주고, 성가대와 함께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가끔 그는 자신이 과연 관상적 삶으로 부름 받은 것인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도 안다. 외부를 차단하고 성령께서 들어오시도록 내면의 문을 열어야 하지만, 조바심 때문에 관상에 대한 읽을거리를 찾고, 영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진정한 고독의 길로 이끈 것은 셋이었다. 첫째는 수도원적 삶의 리듬이었고, 둘째는 장상들에 대한 순명이었으며, 셋째는 글쓰기였다.

 

수도원 전통이 만들어낸 전례의 리듬은 수도사들을 지켜주는 울타리인 동시에, 그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형성해가는 틀이기도 하다. 그는 “성덕에 이르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 있는 방법은 반복되는 일상생활 뒤로 사라지는 것”(61쪽)이라고 말한다. 은수자로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는 “규칙과 공동생활은 제멋대로 살 때 머리에 몰려드는 걱정과 문제, 혼란과 매듭을 풀어준다”(215쪽)고 고백한다. 오랜 전통이 만들어낸 전례의 리듬 속에서 수도사들은 그저 그곳에 묵새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고독 속에 계신 하느님을 향해 늘 길을 떠난다. 전례의 리듬은 자유를 옥죄는 권위가 아니라 영적 투쟁의 성가퀴일 뿐이다. “전통의 샘은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착될 때만 샘 솟는다”는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옳다. 전통이라는 뿌리가 가지를 살리는 것이다.

 

머튼은 갈림길에 설 때마다 장상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성덕은 순명을 통해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63쪽)이라 믿기 때문이다. 순명이라는 말은 자칫 주체성의 포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순종 혹은 순명을 뜻하는 ‘obedience’는 라틴어 ‘ob-audire’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그 뜻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순종은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앞에서 취하는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는 말이다.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아니고는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장상들이야말로 순명하는 자, 곧 잘 듣는 자이다. 순명이란 타인의 의지를 수행하기 위해 나 자신을 내맡기는 자유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은 이 경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순명이란 공동의 의무 속에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겸손함이다. 사제수품을 앞두고 번민하던 그는 순명에서 번민을 벗어날 길을 찾는다.

 

“나는 순명하면서 정진한다. 장상이 내가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적어도 안전하다. 하느님께서 이 일을 원하시면 모든 것이 잘되게 해주실 것이다. 비록 상상할 수 없는 죽음을 안고 있더라도.”(165쪽)

 

이런 신뢰야말로 든든함과 당당함의 근원이 아닌가? 마음으로 순명할 수 있는 이를 모시고 사는 이의 든든함이여!

 

글쓰기 역시 머튼의 영성생활을 정초시켜준 소중한 매개였다. 장상들의 권유로 시작한 글쓰기는 자기 성찰과 깊은 관상에 이르는 통로였다. 머튼은 늘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회의할 때가 많았다. 생기 없는 문장도 문제지만, 깊은 내용을 담지 못한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그는 예리하고 명확한 글을 쓰는 엘리엇을 부러워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쓴 십자가의 성 요한을 늘 바라본다.

 

그런 고뇌 속에서 쓴 자전적 수기 《칠층산》이 예기치 않은 성공을 거두자 그는 양가적 감정에 시달린다. 한편으로는 뿌듯함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느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일 그 책이 영화화 된다면 ‘게리 쿠퍼가 주인공이 될까?’를 거듭 생각한다. 그러다가 도리질을 하듯 마치 그 책을 쓴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른다(142쪽). 책을 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명성을 오히려 영적 가난에 이르는 길로 삼지 않는 한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임을 그는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그는 명성에 초연하려 애를 썼다. 애독자들의 편지가 또 다른 번민거리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진정한 고독의 문지방

 

전례와 순명과 글쓰기는 그를 진정한 고독의 오솔길로 안내했다. 점차 고독은 장소의 부재가 아닌 형이상학적 초월임이 분명해졌다. 글을 쓰는 것이 완덕으로 나가는 데 장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완덕이 의존하는 조건 중의 하나임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렸다. 이전에는 고독에 방해가 된다고 느꼈던 수도원의 일상적인 일조차 관상의 수단이 되게 된 것이다. 성인 같았던 그레고리오 수사를 보면서 원장 신부에게 무엇이 수사님을 그토록 거룩하게 만들었냐고 물으면서 머튼은 “깊고도 소박한 기도 정신, 예기치 않은 믿음의 절정 같은 어떤 것, 순수한 마음, 내적 침묵, 고독, 하나님께 대한 사랑”(136쪽)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하지만 원장 신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수사님은 늘 일하고 있었네.”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시간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깊이 체험하는 기도의 시간일 수 있음을 그는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수사들이 들에서 비를 맞으며, 햇볕에서, 진흙에서, 그리고 바람을 맞으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영성 지도자요 수련장들로 우리를 명상하게 한다. 우리를 덕행으로 정제해 준다.”(486쪽)

 

노동이야말로 수도사들의 영성 지도자요 수련장이라는 자각은 그의 내면에 질서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사제수품 후 이런 깨달음은 더욱 깊어진다. 고독한 은둔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수도원 동료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그는 점차 인류의 한 구성원이 되어간다. 삶의 의미를 찾아 등지고 떠나왔던 세상은 더 이상 외면해야 할 암흑의 땅이 아니었다.

 

세상을 등지고 떠난 그의 여정은 수도원을 거쳐 마침내 세상에 이르고 있다. 강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듯 그는 마침내 슬픔의 바다에서 살고 있는 인류의 마음에 이르렀다. 고독과 침묵은 타자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더욱 옹골차게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생들을 돌보는 체험을 통해 그는 요나의 뱃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머튼 자신이 요나의 표징이었다. 요나처럼 그도 역설의 뱃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은둔 생활은 미래에 거는 희망이 아니라, 현재를 심화하는 것”(397쪽)이었다. 이제 일상 속에서 대면하는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낯선 타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그들’로 뭉뚱그릴 수 있는 집단이 아니라, 저마다의 아픔과 꿈을 가진 구체적 존재였다.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빌어주는 것, 바로 그것이 거룩한 삶의 입구요, 진정한 고독의 문지방임을 그는 절감했다.

 

“나의 새로운 사막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민compassion이다. 연민 또는 동정同情의 황무지만큼 지독하고 아름답고 무미건조하고 결실이 풍부한 사막은 없다. 연민은 백합처럼 번성하는 유일한 사막이다. 연민은 작은 못이 될 것이다. 이고에서 싹이 돋아나 꽃을 피우고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바로 이 사막에서 메마른 땅이 샘으로 변하고 가난한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505쪽)

 

고독이 자비로 바뀌는 순간 그의 귀에는 자기 의지의 수인이 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거기 누구 없소?’ 죽음에 삼켜진 생명을 구하는 것, 당신을 등진 이들을 ‘내 자녀 요나여’라고 부르는 이에게로 돌려드리는 것, 그것이 진리의 길을 찾는 이들이 할 일이다.

 

양심 성찰

 

수도원 생활에 대해 마치 스케치를 하듯 보여주고, 고독으로 부름 받은 수도사들의 내면 풍경을 얼핏 암시한 ‘프롤로그’는 ‘니네베 여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수도사들의 영적 여정이 니네베(니느웨)를 향한 순례임을 암시하려는 것이리라. 그 후 이어진 여섯 가지 이야기는 수도자들이 겪는 고래 뱃속 같은 어둔 밤의 체험과 더불어 은총처럼 찾아온 깨달음에 대해 들려준다.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의 제목은 ‘화재 감시’이다. 머튼은 한 밤중에 화재를 감시하기 위해 수도원 곳곳을 살피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두가 잠든 밤, 고래 뱃속 같이 컴컴한 수도원을 천천히 돌아보는 동안 그는 양심 성찰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화재 감시는 “어두움의 심연에서 등불을 켜고 의문을 가지고 자기 영혼을 성찰할 구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는 수도원의 역사와 수사들에 대한 애정에 찬 어루만짐으로 느껴진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지극한 애정, 당연한 듯싶지만 부러운 현실이다. 이 책은 전통이야말로 한 사람의 수도자를 만드는 못자리임을 보여준다. 신앙은 또한 한 순간의 깨달음이 아니라 전례의 리듬을 타고 고래 뱃속을 통과해 마침내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292쪽)이라는 그의 말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고독을 회피하도록 하는 오늘의 문화는 하느님을 등지도록 사람들을 유인한다. 버스에서건 지하철에서건 거리에서건 손에 든 T.V에 얼굴을 박고 혼자서 히죽거리고 있는 이들에게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늘 감성과잉의 흥분상태가 유지되어야 은혜 충만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고독이란 대체 무슨 뜻일까? 토머스 머튼을 내적으로 이끌어주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을 다시금 되뇌어 본다.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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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의 인간 탐구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5. 7. 14:56

꽃자리의 종횡서해(10)

구로사와 아키라의 인간 탐구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는 <라쇼몽>으로 1951년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 제 24회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해 일본 영화를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한 20세기 일본 영화계 최고의 거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세계적인 감독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비슷한 것》은 한마디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구로사와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가족, 친구, 그리고 스승에 관한 이야기다.

 

4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난 구로사와는 어린 시절 네 살 위의 형 헤이고(소학교 1, 2학년 무렵)가 학교에서 평균대 위에서 추락해서 피투성이가 되어 집에 온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고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제일 밑의 작은누나(넷째누나) 모모요가 갑자기 “안 돼! 내가 대신 죽을래”라며 울음을 터뜨린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구로사와는 작은누나를 회고하며 “우리 집안에는 감정 과다에 이성 결핍이라고 할까, 쉽게 감정이입을 하고 사람만 좋으며 감상적인, 좀 엉뚱한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긴급 상황에서 어린 소녀가 울면서 남동생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구로사와는 작은누나가 누나들 중에서 제일 예뻤고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고 회상한다. 유리같이 섬세하고 깨지기 쉬운,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했던가! 작은누나는 그 후 16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다. 《자서전 비슷한 것》에서 구로사와는 “작은누나에 대해 쓰다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몇 번이나 코를 풀고 있다”고 고백한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소녀의 내면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속(代贖)’ 관념이 깃들어 있었던 것일까? 물론 구로사와 집안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구로사와는 셋째 누나 다네요에 대해서도 애틋한 추억을 갖고 있다. 구로사와는 1945년 5월에 결혼했다. 미군의 공습이 행해지고 일본이 패전을 향해 치닫던 비상시국이었지만, 영화제작사 사람들은 촬영소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영화제작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구로사와는 간신히 틈을 내서 공습을 피해 아키타에 피난 중이던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다. 쾅쾅 하고 대문을 두드리자, 두 분을 돌보려고 가 있던 다네요 누나가 대문 틈새로 내다보고 “아키라다!”하고 외치더니, 밖에 있는 구로사와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부엌으로 뛰어가서 서둘러 쌀을 씻기 시작했다. 구로사와는 어이가 없었다. 재미있지만 웃지 못 할 이야기였다. 제대로 쌀 구경도 못했을 동생에게 빨리 쌀밥을 먹이고 싶은 누나의 눈물겨운 마음씨였다.

 

일본인의 집단주의에 의문을 품다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 경험담도 나온다. 구로사와가 13세 때 겪었던 일이다. 지진이 나자 정전으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서민들이 많이 사는 상업지대인 시타마치에서 화재가 발생해 밤인데도 어둡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타마치의 화재가 잦아들고 집집마다 초가 떨어지면서, 밤은 말 그대로 암흑의 세계로 변했다. 그러자 어둠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무서운 선동자들의 포로가 되어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말처럼 무분별한 행동에 나섰다. 구로사와는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지 상상도 안 가겠지만, 그 공포는 사람의 이성을 빼앗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안감은 사람을 미치도록 당황하게 만든다. 의심이 의심을 낳는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관동대지진 때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은 이런 어둠에 겁먹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한 선동자의 소행이라고 지적한다. 화재로 집을 잃은 친척을 찾아서 구로사와 가족이 우에노에 갔을 때, 그의 아버지는 단지 수염이 길다는 이유로 조선인으로 몰려 몽둥이를 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구로사와는 조마조마해서 함께 있던 형을 쳐다보았다. 형은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한심한 놈들!”하고 버럭 호통을 쳤다. 그러자 둘러싸고 있던 패거리가 슬금슬금 흩어졌다.

 

구로사와는 이보다 더 터무니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네에서 어느 집의 우물물은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우물 바깥 담장에 분필로 쓴 수상한 기호가 적혀있는데, 그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표시라는 것이었다. 구로사와는 어이가 없었다. 그 수상한 기호라는 게 자기가 쓴 낙서였기 때문이다. 그는 군중심리에 휘둘리는 그런 어른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것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로사와는 그로부터 수십 년 뒤 패전하던 무렵의 일본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는다. 1945년 8월 15일, 구로사와는 천황의 조칙을 라디오 방송으로 듣기 위해 촬영소로 갔는데, 그때 걷던 길가의 정경을 잊을 수 없었다. 집에서 기누타 촬영소까지 가는 동안 구로사와가 목격한 상점가의 모습은 일본인 모두가 정말로 죽을 각오를 한 듯이 비장한 분위기였다. 심지어 일본도를 가지고 나와 칼을 뽑아든 채 칼날을 노려보고 있는 가게 주인도 있었다. 천황의 조칙이 분명 패전 선언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구로사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 일본은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패전 조칙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서, 상점가 사람들 모두가 축제 전날처럼 신나는 표정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구로사와는 일본인의 민족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건 일본인의 유연성일까 아니면 허약함일까? 구로사와는 적어도 일본인의 성격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양면성은 구로사와 자신 속에도 있다고 보았다. 만일 패전 조칙이 아니었다면, 아니 만일 그것이 국민 모두에게 자결하자고 호소하는 것이었다면, 그 거리의 사람들은 거기에 따라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구로사와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자아를 악덕으로 보고 자아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양식 있는 태도라고 배운 일본인은 그 가르침에 익숙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구로사와는 그런 자아를 확립하지 않는 한, 자유주의도 민주주의도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에게 투신하기 전 청년 시절의 구로사와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 시절 구로사와는 고흐 등의 화집을 본 뒤 모든 것이 고흐의 눈을 통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몹시 불만스러웠다. 그는 ‘나만의 눈’으로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구로사와는 “어떻게든 나만의 시각을 가지고 싶어 안달”했다. 자아와 개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은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이었지만, 특히 학생 시절 구로사와의 게걸스러웠던 독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 구로사와는 “외국문학, 일본문학, 고전, 현대물을 가리지 않고 마구 읽었다. 책상에 앉아서 읽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읽고, 걸으면서도 읽었다”고 회상한다.

 

소학교 시절의 선생님과 친구

 

소학교 시절 구로사와는 늦된 아이였다. 친구들에게서 울보라고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성장을 도와준 선생님이 있었다. 담임인 다치가와 세이지 선생님은 지능 발달이 더디어 주눅 들어 있던 구로사와를 감싸서 처음으로 자신감을 갖게 해준 고마운 분이었다. 미술 시간이었다. 다치가와 선생님은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한 장 한 장 칠판에 붙이고 자유롭게 감상을 말하라고 했다. 구로사와가 그린 그림 차례가 오자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하지만 선생님은 무서운 얼굴로 아이들을 둘러본 다음 열심히 구로사와의 그림을 칭찬해주셨다. 구로사와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문지른 부분을 선생님이 무척 칭찬하셨다고 회고한다. 구로사와는 학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뒤로 미술 시간이 있는 날이면 그 시간이 기다려져서 서둘러 등교했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졌다. 그러자 그림 실력이 쑥쑥 늘었다. 동시에 다른 과목의 성적도 급속히 오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학급 반장이 되기까지 했다.

 

같은 반에는 구로사와보다 더 울보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우에쿠사 게이노스케라는 친구였다. 그 친구의 존재는 마치 거울을 들이댄 것처럼 구로사와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구로사와는 자기와 비슷한 그 아이를 보고, 나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에쿠사는 걸핏하면 넘어져서 울었다. 질퍽거리는 길에서 넘어져 깨끗한 옷이 엉망진창이 된 채 울고 있는 우에쿠사를 구로사와가 집까지 데려다 준적도 있었다. 운동회 때 웅덩이에 자빠져 새하얀 체육복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훌쩍거리는 우에쿠사를 달랜 일도 있었다. 두 울보는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다가갔고, 언제나 둘이 함께 놀았다.

 

다치카와 선생님은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는 반장인 구로사와를 교무실로 불러, 부반장을 두면 어떻겠냐고 의논하듯 물었다. 구로사와는 자기가 반장으로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생님은 그런 구로사와를 가만히 보면서 물었다. “너 같으면 누굴 추천하겠니?” 구로사와는 공부 잘하는 동급생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선생님은 좀 이상한 말씀을 했다. “나는 좀 부족한 녀석에게 부반장을 시키고 싶은데.” 구로사와는 깜짝 놀라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우에쿠사한테 부반장을 시켜보면 어떨까?” 구로사와는 그 순간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아프도록 알 수 있었다. 그는 감격해서 다치카와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등 뒤에 마치 후광이 비친 듯했다. 선생님은 우에쿠사를 ‘부족한 녀석’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우에쿠사의 내면에 잠들어있는 재능에 주목하신 것이었다. 우에쿠사는 결국 나중에 다치카와 선생님도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소설가가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우에쿠사가 시나리오를 쓰고 구로사와가 감독을 맡은 영화 <멋진 일요일>이 1948년 개봉되었다. 두 친구의 나이 38세 때였다. <멋진 일요일>이 개봉되고 며칠 뒤, 구로사와는 한 장의 엽서를 받았다.

 

“영화 <멋진 일요일>이 끝나고 영화관 안이 밝아졌다. 관객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고 울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엽서를 읽던 구로사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울고 있는 노인은 다치카와 선생님, 구로사와와 우에쿠사를 귀여워해주고 격려해주셨던 바로 그분이었다. 엽서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프닝 타이틀에서 ‘시나리오 우에쿠사 게이노스케,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글자를 읽었을 때부터 스크린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구로사와는 당장 우에쿠사에게 연락해서 다치카와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25년만의 만남이었다. 가슴 아프게도 선생님은 무척 작아지셨고, 치아도 약해서 고기도 잘 씹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구로사와가 뭔가 부드러운 걸 가져오겠다며 일어서는 걸 다치카와 선생님이 말리면서 말씀하셨다.

 

“두 사람 얼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

 

구로사와와 우에쿠사는 선생님 말씀대로 공손히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두 친구를 바라보며 “음, 음”하고 겨우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구로사와는 선생님을 바라보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려 선생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

 

중학교 시절 역사 과목을 맡은 이와마쓰 고로 선생님도 고마운 스승이었다. 어느 학기말 역사 시험 때였다. 열 문제가 나왔는데 거의 다 모르는 문제들이었다. 구로사와는 자신 있는 마지막 문제만을 골라서 답안지 석 장을 채워 써냈다. 나중에 이와마쓰 선생님은 채점한 역사 답안지를 학생들에게 돌려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특이한 답안이 하나 있다. 열 문제 가운데 하나밖에 쓰지 않았지만, 이게 꽤 재미있다. 나는 이런 독창적인 답안은 처음 봤다. 이걸 쓴 녀석은 장래성이 있다. 100점이다, 구로사와!”라며 그 답안지를 구로사와에게 내밀었다. 모두 한꺼번에 구로사와를 쳐다봤다. 구로사와는 얼굴이 빨개져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구로사와는 옛날 선생님들 중에는 이와마쓰 선생님처럼 자유로운 정신을 지니고 개성이 넘치는 분이 많이 계셨다고 말한다. “정말 좋은 선생님은 선생님이란 느낌이 안 드는 법인데, 이분이 그랬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 교사들은 단순한 샐러리맨이, 아니 샐러리맨이라기보다 관료주의적인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런 교사가 하는 교육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이다. 구로사와가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 만난 선생님들은 학생의 개성을 존중해주시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신 훌륭한 스승이었다. 구로사와는 영화계에 들어간 뒤에도 야마 상(야마모토 가지로 감독, 1902-1973)이라는 최고의 스승을 만났다. 구로사와의 말대로, 그는 정말 선생님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최고의 스승 ‘야마 상’

 

구로사와는 27세 되던 1936년에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야마 상은 조감독들의 개성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각자의 개성을 키우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조감독들이 찍어온 필름이 마음에 안 들어도 절대 자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영화관에 개봉되었을 때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 “저 장면은 이렇게 찍는 게 낫지 않았을까?”하면서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조감독들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작품을 희생시켜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키워준 구로사와에 대해 야마 상은 언젠가 잡지에 쓴 글에서 단지 이렇게만 썼다. “구로사와 군에게 가르친 건 술밖에 없다.” 그런 야마 상에게 구로사와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영화에 대해 야마 상에게 배운 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쓸 수 없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화가 지망생이던 20대 초반 청년 시절 ‘자신만의 눈’으로 독자적이고 개성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안달했던 구로사와였다. 그에게 야마 상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런 야마 상도 무서울 때가 있었다. 당시는 유성영화 초창기였는데, 그 무렵 영상과 음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야마 상만큼 깊이 이해했던 감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야마 상은 구로사와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던지 <도주로의 사랑>의 더빙을 맡겼다. 그러나 야마 상은 내부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더니 전부 다시 고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구로사와에게 충격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다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더빙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더빙 작업을 함께해온 스태프들을 볼 면목도 없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점은, 구로사와 자신이 뭐가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구로사와는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를 찾기 위해 릴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봤다. 마침내 그것을 겨우 찾아내 다시 작업을 했다. 수정된 영화를 본 야마 상은 간단히 “오케이”라고 말했다. 구로사와는 그런 야마 상이 얄미웠다. 뭐든지 다 시켜놓고는 마음대로 쉽게 말해버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도주로의 완성>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야마 상의 부인이 구로사와에게 말했다. “남편이 좋아했어요. 구로사와 군은 시나리오도 잘 쓰고, 이제 연출이건, 편집이건 더빙이건 다 맡겨도 괜찮다면서.” 이 말을 들은 구로사와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최고의 스승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구로사와는 야마 상을 만났을 때부터 자기 얼굴에 ‘고갯마루의 바람’이 불어왔다고 말한다. 고갯마루의 바람이란 길고 험한 산길을 오를 때 고갯마루에 가까워지면 산 저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말한다. 그 바람이 얼굴에 닿으면 고갯마루가 가깝다는 뜻이다. 그리고 곧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다. 조감독 구로사와는 카메라 옆의 감독 의자 옆에 앉아있는 야마 상 뒤에 서서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감회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야마 상이 지금 하고 있는 일, 그것이야말로 구로사와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 구로사와는 겨우 고갯마루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 고개 너머로 탁 트인 전망과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 보였다.

 

〈라쇼몽(羅生門)〉과 인간의 죄

 

때는 헤이안 시대. 무사 부부가 숲길을 지나던 중 도적을 만나 변을 당한다. 아내는 겁탈 당하고 남편은 살해당한 것. 나무꾼이 이를 발견하고 관아에 신고해 도적은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도적은 자신이 무사 남편을 살해한 것은 맞지만 무사 아내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진술한다. 겁탈 당하던 아내가 이에 저항하는 대신 자신을 받아들인 뒤 포박당한 남편을 살해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어 증언에 나선 무사 아내는 이를 완전히 부인한다. 겁탈당한 뒤 망연자실해 있던 중 도적은 이미 도망을 간 상태였고 자신을 걱정해야 할 남편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더란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나무에 포박당한 남편을 풀어준 뒤 자신을 죽여 달라고 절규하다가 그만 정신을 잃었단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이 검에 찔려 죽어 있다는 것이 아내의 말의 요지다.

 

무당의 몸을 빌려 진술에 나선 무사 남편의 얘기는 또 다르다. 아내는 겁탈당한 뒤 자신의 여자가 되어달라는 도적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니 도적에게 남편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그녀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낀 도적은 도리어 남편을 풀어주고 상황이 불리해진 아내는 도망간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남편의 말이다. 이들의 진술을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나무꾼은 모두 다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무꾼은 도적과 무사 부부가 얘기한 것과는 전혀 다른 자신의 목격담을 풀어놓는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세계적인 감독으로 만들어준 〈라쇼몽〉(1950)의 줄거리다. 그러나 <라쇼몽>이 제작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조감독 세 명이 구로사와를 찾았다. 시나리오가 전혀 이해가 안 돼서 설명을 듣기 위해 왔다는 것이었다. 구로사와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허식 없이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 시나리오는 그런 허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렸다. 아니, 죽어서까지 허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를 그렸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업이고, 인간의 구제하기 힘든 성질이며, 이기심이 펼치는 기괴한 이야기다. 자네들은 이 시나리오를 전혀 모르겠다고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원래 수수께끼다. 그런 알 수 없는 인간의 심리에 맞춰서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심(人心)의 기미(幾微)를 통찰하라는 주문이었다. 설명을 들은 세 명의 조감독 중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시나리오를 읽어보겠다며 일어섰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납득이 가지 않는지 화난 표정으로 돌아갔다. 구로사와는 그 뒤로도 그 조감독과는 계속 마음이 맞지 않아서, 결국 갈라서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작 초기 단계부터 〈라쇼몽〉의 영화화를 탐탁지 않아 했던 제작 회사 도에이(東映)는 개봉 이후 사장까지 나서 “영화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라쇼몽〉의 여파로 도에이에서 진행하려던 차기작 작업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영화계에 환멸을 느낀 구로사와 아키라는 연출 일을 그만둘 생각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내는 뜬금없이 축하인사를 전하며 베니스영화제에서 〈라쇼몽〉이 최고상 격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영화가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된 사실도 몰랐고, 도에이 역시 〈라쇼몽〉을 출품할 생각이 없었다. 이 영화를 본 베니스영화제 쪽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의 수상을 계기로 〈라쇼몽〉에 대한 일본 내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라쇼몽〉과 관련해 구로사와는 인간성이 지닌 또 한 가지 서글픈 속성을 보게 되었다. TV에서 이 작품의 제작회사 사장의 인터뷰가 방송되었는데,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구로사와는 말문이 막혔다. 사장은 당시에 이 작품의 제작에 난색을 표했고, 완성된 작품에 대해서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며 화를 냈으며, 제작을 추진한 중역과 프로듀서를 좌천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서는 이 작품의 제작을 추진한 건 전부 자기의 공로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구로사와는 그 인터뷰를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라쇼몽〉이라고 생각했다. 〈라쇼몽〉에서 그린 인간성의 서글픈 측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구로사와는 인간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우며,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미화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구로사와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는 사장을 비웃을 수 없었다. 구로사와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나도 《자서전 비슷한 것》을 여기에 쓰고 있지만, 과연 나 자신에 대해서 정말 솔직하게 썼을까? 역시 자기 자신의 추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고, 많건 적건 간에 자신을 미화해서 쓴 것은 아닐까? 나는 그 점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탐구자 구로사와 아키라의 성찰이 정점을 찍는 대목이다.

박상익/우석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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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에 오르겔과 함께하는 “요한복음 산책”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3. 31. 17:01

트루에 오르겔과 함께하는 “요한복음 산책”

 

 

바람 속에 담긴 풀 냄새, 빗방울이 머금은 들판의 소식, 나무줄기 가운데 흐르고 있는 아주 작고 작은 시냇물 소리, 그리고 흙을 뚫고 세상을 향해 춤을 추고 있는 꽃씨들의 귀여운 몸짓이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꽃은 갑자기 피어나고 문득 돌아보니 풀은 들판에 자라나 거기 그렇게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나무는 어느새 푸른 잎사귀로 치장을 마친 듯이 보여집니다.

 

시인 신동엽은 어느 날 창가에서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창가에 서면 앞집 담 너머로 버들잎 푸르다

뉘집 굴뚝에선가 저녁 짓는 연기 퍼져 오고

이슬비는 도시 위 절름거리고 있다

석간을 돌리는 소년은 지금쯤 어느 골목을 서둘고 있을까?

바람에 잘못 쫓긴 이슬방울 하나가 내 코 잔등에 와 앉는다

부연 안개 너머로 남산 전등 불빛이 빛 무리져 보인다

무얼 보내신 이가 있을까

그리고 무엇은 정말 땅으로만 가는 것일까

정말 땅은 우리 모두의 열반일까

창가에 서면 두부 한 모 사가지고 종종걸음치는 아낙의

치맛자락이 나의 먼 시간 속으로 묻힌다

 

- <창가에서>

 

시인은 서울 어느 길목의 정경을 표현하고 있으나, 사실은 자신의 마음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닐 듯한 자연의 몸짓이 보이고 이웃의 고단하면서도 정겨운 삶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이 모든 생명의 움직임 저 뒤에 있는 어떤 섭리에 대한 질문과 함께 결국 흙으로 가는 생명의 귀환을 주시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마음의 창을 열고 사는 까닭에 그의 영혼에는 세상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도시의 위용에 짓눌리지 않고 피곤한 일상으로 지쳐있지 않습니다. 숨을 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그의 시선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닐 듯한 자연의 몸짓을 담아 오는 4월 7일(화) 저녁 7시 청파교회에서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출간 음악회, <트루에 오르겔과 함께하는 요한복음 산책>이라는 조금은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는 요한복음 묵상과 메시지가 어우러진 책입니다. 이 날은 이야기 손님 없이 트루엘 오르겔과 바이올린 연주, 그리고 김기석 목사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꽃자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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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영성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맑은 물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3. 12. 14:57

꽃자리의 종횡서해(8)

깊은 영성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맑은 물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서평 -

 

1.

대학을 마치고 감신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동갑내기 동향인 김기석 목사를 만났다. 그의 큰 눈은 지금처럼 깊이 파였고 형형한 빛을 발산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목의 소임을 위해 입대했기에 깊은 교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인상은 강력하여 소식이 끊긴 다음에도 그의 행적이 종종 궁금했다.

당시에 그는 남미로 유학을 가서 해방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강골의 기질이 느껴졌기에 “그답다”는 생각을 했는데, 십 수 년이 지난 후에 그는 문학비평가가 되어 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남미대신 자신의 서재를 택했고, 민중신학 대신 문학을 택했으며, 유학대신 독학을 택했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던 시기에 그는 홀로 서재에서 서향을 벗 삼아 자신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그렇고 그런’ 목회 현장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평범한 목회자로 살면서 수도자의 영성을 길렀고, 매 주일 설교자로 강단에 서서 시인의 음성을 들려주었으며, 이런 저런 지면에 기고하는 글을 통해 자신이 체득한 진리를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에 누구도 가지 않았던 그만의 길을 개척하여 올곧게 걷고 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길이 되어가고 있다.

그의 최신간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꽃자리)는 설교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저자의 영성과 삶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편집자는 요한복음 본문에 대한 저자의 묵상과 요한복음 본문으로 선포한 설교를 번갈아 편집해 놓았다. 한 책에서 “했다” 체와 “했습니다” 체가 번갈아 나오는 것은 아주 드문 편집이다. 아마도 설교문이 가지는 다이나믹을 살리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분주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급하게 읽어내려 해서는 안 된다. 충분한 시간을 내어 몸을 바로 세우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천천히 읽어야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에릭 프롬이 말한 ‘소유형 독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독서를 통해 설교 예화나 자료를 얻으려는 습성에 젖어 있는 사람은 이 책의 향기를 음미할 수 없다. ‘존재형 독서’ 즉 독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키우려는 사람만이 이 책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저자 자신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우려 쓴 글이기에 그와 같은 정성으로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중에 떠오른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복음 13:52).

저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폭넓은 독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자료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쓴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시인들의 싯구다. 그 싯구들은 잡힐 듯 말듯 한 예수님의 말씀에 빛을 던져 준다. 이것은 늘 시의 숲에서 산책하기를 즐기는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동양고전과 사상가들의 통찰도 동원이 된다.

 

 

2.

구약학계의 권위 있는 목소리인 월터 브르그만은 설교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시인의 마음이라고 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묵시가들의 핵심에는 그들의 시적 상상력이 있다고 했다. 학문으로서 성서학을 연구했던 나는 칼릴 지브란의 《예수의 생애》를 읽고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브란의 문학적 상상력은 그 이전에 내가 읽은 수많은 학문 서적들보다 더 깊은 통찰을 던져 주었다. 그 때부터 나는 신학자보다 문학가의 성서 해석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를 많이 인용했다는 것은 대단한 미덕이 아닐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시인의 심성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시인의 언어로 그것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저자의 설교는 전체로서 한 편의 시와 같다. 저자의 묵상도 마찬가지다. 그는 묵상 중간 중간에 자주 멈춘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묵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이상도 하지. 낯선 이 사나이의 음성에서 고향이 느껴지다니! 그가 건넨 말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의 음성에 실려 오는 따뜻함과 순수함, 그것은 마치 긴 겨울 추위에 지친 이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인 듯싶었다”(49쪽).

저자는 본문을 마주 보기보다는 본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사마리아 여인의 심정이 되어 보지 않고는 저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그는 본문 안으로 들어가 그의 영성으로 맑은 물을 길어 올린다. 실로, 그의 글은 맑은 물과 같다. 자극적인 청량음료와 같은 글들이 홍수로 쏟아지는 현실에 그의 글은 차별성을 가진다. 청량음료는 잠시 만족을 주지만 금새 더 깊은 갈증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 하지 않던가!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사용하여 일상적이지 않은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무뎌지기 쉬운 독자의 정신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가 이렇게 언어에 천착하여 스스로를 연마하는 이유는 말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말을 통해 ‘말씀’ 즉 ‘다바르’에 이르기 위한 그의 치열한 궁구 덕분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다바르, 곧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 말이다. 물 흐드듯 유장하고 나직하지만, 마치 폭포처럼 힘찬 말씀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개념과 논리로 오염되지 않은 말, 본질을 향해 곧장 돌진하는 그 말씀은 낯설지만 거역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127쪽).

 

3.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 쓰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상과 신학과 삶의 자세를 드러낸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영성가다. 하지만 그의 영성은 토마스 머튼의 그것처럼 사회적 관심으로 체화되는 영성이다. 앞에서 내가 해방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해방신학을 통하여 추구하려 했던 것을 지금은 영성을 통해 그리고 문학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길을 바뀌었을지언정 방향은 그대로다.

영성과 정의가 그의 내면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글 전체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요한복음 8장과 9장에 대한 묵상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그는 당시 권력자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권력의 속성과 인간의 탐욕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는 말한다.

“정의에 민감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지고 있다면, 배움을 향한 개방성이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158쪽).

정의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영성은 미신이나 광신과 다르지 않다. 반면, 영성에 뿌리를 두지 않은 정의는 자칫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 ‘홀로 있음’과 ‘같이 있음’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영성과 정의는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묵상과 설교를 읽는 중에 그 아름다운 동행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저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국교회를 향해 아픈 충고를 내어 놓는다.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저자는 이렇게 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묵상하는 동안 가슴 한 켠이 무지근해졌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찾아온 무리들을 가르치고, 해저물면 차마 그들을 그저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 나눠 먹으려는 그 소박한 마음을 이미 부유해진 교회는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어마어마한 교회당을 짓고,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온갖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오늘의 기적에서 이 풀밭 위의 기적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99쪽)

저자가 서문에서 쓴대로 그의 묵상은 “삶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 교회의 삶에서 그리고 이 세상의 삶에서 우직하게 실천하는 것이 묵상의 목적이다. 렉시오 디비나에서 말하는 ‘콘템플라치오’가 결국 이것이다. 읽고(‘렉시오’), 묵상하고(‘메디타치오’), 기도한(‘오라치오’) 말씀이 삶을 통해 그 진실을 드러내도록 맡기는 것이 마지막 단계인 ‘콘템플라치오’다.

온전한 서평이라면 부족한 점도 지적해야 하지만, 내가 훈련받은 분야와 저자가 스스로 개척한 분야가 너무 달라서 딱히 부족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묵상을 위해 믿을만한 성서 주석을 꼼꼼히 챙겼음에 분명하다. 그의 묵상은 본문에 대한 성실한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때로 문학적 상상력으로 성서 묵상을 하는 사람들이 본문에 대한 연구 없는 ‘게으른 묵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본문 앞에서 무릎을 꿇기 전에 책상에서 해야 할 숙제의 책임을 다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요한복음 본문을 다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으로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해 보려는 사람에게는 아쉬움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학습을 위한 참고서가 아니다. 설교를 위한 주석서도 아니다. 저자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여 얻는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 마치 깨달음의 이삭들을 모아 놓은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정진에 감사를 드린다. 그는 품격을 잃고 값싼 상품처럼 되어 버린 설교와 묵상에 품격을 입혀 주었다. 기독교 사상을 이 정도로 품위 있고 깊이 있게 풀어낼 사람이 우리 중에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부디, 기독교의 경계선을 넘어 일반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소개할 수 있는 사상가로 그리고 저자로 계속 깊어져가기를 기원한다. 법정 스님이 불교적인 사상으로 다른 종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 소통한 것처럼, 저자도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를 바란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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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빛을 뿌리는 묵상과 메시지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3. 8. 15:30

꽃자리의 종횡서해(7)

말씀에 빛을 뿌리는 묵상과 메시지

-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서평 -

 

1.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의 경험이다. 내 독서 경험의 반경에서 좀 과감하게 판단하자면 그는 이 땅의 목사들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목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목사에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은, 특히 이 땅에서 말씀이 유통되는 지형을 감안할 때, 단순한 칭찬 이상의 함의를 띤다. 그가 매우 섬세하게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하나님 말씀을 공들여 조탁하는 세공술로 전이되어 글과 함께 독자가 한없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감화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고, 겉 폼을 잔뜩 잡고 온갖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는다고 만들어지는 세계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글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간명하고 투명해지고 있다. 뒤틀리기보다 안정된 글의 리듬은 삶을 대하는 그의 정제된 태도를 반영하거니와, 동시에 그의 영성이 하나님의 품에 깊이 안긴 채 유영하고 있는 신호 같기도 하다.

동서양의 고전과 영성가의 명언, 시인의 정제된 시구들이 풍성하게 인용되고 접속되지만 그 모든 인용과 참조의 글들조차 그의 글 속에 용해되면서 온전히 그의 말 가운데 성육되는 진경이 그의 글 가운데 펼쳐진다. 따라서 그처럼 특출하게 글을 조탁하는 솜씨는 타고난 잔재주가 아니라, 그가 성실하게 개척해나간 숱한 책읽기 경험과 삶의 공부, 신앙의 내성을 거쳐 일구어낸 통찰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글쓰기의 진경이 이번에 나온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그가 이전에 펴낸 일반 에세이집과 다르게 이 책은 성경 본문을 화두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그 성경은 이 책에서 요한복음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요한복음 주해나 강해의 성격으로 국한시켜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그는 한국교회 강단에 전혀 색다른 성서 강해나 주해의 실험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색깔은 김기석 목사 고유의 체취로 풍성하면서도 독창적인 요한복음 해석의 보화들로 넘실거린다.

이 책의 구성부터가 흥미롭다. 저자는 요한복음 본문을 중심으로 모두 9장의 설교 메시지를 깔면서 그 전후로 또 다른 9편의 성서 에세이를 배치하는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전자가 경어체로 발견과 각성, 권면과 기원의 형식을 쫓아 요한복음의 행간을 헤집고 있다면, 후자는 평어체로 분석과 해석, 묵상과 성찰의 방식에 따라 본문을 촘촘히 조명하고 있다.

 

 

2.

당연한 지적이지만 그가 보기에도 성경은 그 전문가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지극하게 살아내는 방식으로 성경을 공들여 묵상할 권리가 있다. 흔히 느끼듯, 성경의 묵상은 본문에 압도되어 그 문자적 논리를 따라가는 식물성의 궤적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그렇게 식물적이지 않다. 묵상은 마치 사자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그르렁거리면서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로 맛보기도 하고, 씹기도 하는 것처럼 텍스트와 오감으로 만나는 것이다.”(4-5쪽)

그러나 그렇게 전투적이고 도전적인 성경 묵상의 자세가 오감의 독법을 지나 그의 가지런한 글속에 정돈될 때 그의 말들은 조야한 묵상의 찌끼가 사라지고, 놀라워라, 한 송이 꽃처럼 부드러운 초청과 권유의 메시지로 거듭난다.

이처럼 그의 글쓰기는 묵상의 발톱과 이빨을 생짜배기로 드러내는 만용과 정반대편에서 치열한 도전과 투쟁의 몸짓을 겸손한 말의 품에 쟁여두는 부드러움의 해석학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자기방어적인 변명을 위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설득과 권면을 위한 목회적인 부드러움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의 성경 해석에서 그는 그 말씀에 안주하기보다 모험하며 불편함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신을 내던지는 활공의 길을 택한다. 도저히 기존의 권위자들이 쳐놓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 안주적인 성경 묵상에 도취한 세태를 비판하면서 그는 따끔하게 일갈한다.

“달콤한 말에는 밑줄을 긋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불편하지도 위험하지도 않게 되었다. 빚을 탕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은 현실적합성이 없다며 도외시하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예언자들의 음성은 모른 척 외면해 버린다.”(84쪽)

3.

그렇게 요한복음을 용감하게 읽고 부드럽게 드러낼 때 요한복음의 성육하신 예수는 이처럼 시적인 아우라를 걸치고 재조명된다.

“소란한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는 마치 숲속의 빈 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와 잠시만 함께 앉아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절로 잠잠해지는 사람…”(16-17쪽)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외아들로 오셔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설파하며 ‘함’에 앞서 ‘있음’의 가치를 깨쳐 보여준 게 바로 요한복음의 핵심적 ‘복음’이자 메시지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바람과 같다고 했을 때 그 해당 구절은 바람의 이미지에 대한 풍요로운 상상과 함께 어우러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점입가경을 이처럼 아름답게 제시한다.

“바람의 ‘있음’은 언제나 사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난다. 바람과 만난 나뭇잎은 살랑거리며 설렘을 드러내고, 호수의 물은 바람의 부름에 물결로 응답하고, 바람을 탄 매는 높은 하늘을 유영하듯 난다. 성령으로 난 사람에게는 억지가 없다. 시끄럽지 않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사람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거기 있어 생명을 일깨우는 사람, 그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란다.”(44쪽)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이미지를 상투적인 성령 충만의 경험으로 연계시켜 얼마든지 투박하게 평균치 교인 대중의 인식에 호응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그 상투적인 투박함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공교롭게 그 이미지의 실재를 조탁하여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함을 감추고 사는 그저 그런 사람마저도 신령한 작품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기발한 상상에 의지할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귀찮은 선악과 이야기도 새로운 해석의 돌파구를 연다. 요한복음의 존재론적인 숭고함의 신학적인 기틀 위에서 그가 재조명하는 바, “성경의 이야기꾼들이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려는 것은 도덕적 분별력의 확장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을 척도로 삼는 일의 위험성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본다. 그런 바라봄 혹은 판단이야말로 모든 폭력의 뿌리이다. 예수의 시선은 전복적이다. 가장 거룩한 척 하는 이들에게서 위선을 보고,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서 거룩함을 본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눈에서 ‘티끌’을 볼 때 예수는 그들의 가슴에 있는 ‘눈물’을 본다.”(47쪽)

사소한 듯 여겨지는 지극히 작은 생명 속에서 거룩함과 눈물을 보는 예수의 시선은 곧 이 땅에 일그러진 종교, 특히 기독교의 얼굴에서 위선을 못 견뎌 그것을 뒤집고자 열망하는 저자 김기석 목사의 시선과 잇닿아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종횡무진 요한복음 독법은 이른바 ‘영해’와 ‘알레고리’의 늪에 빠지기 쉬운 본문들에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 메시지의 신선함은 또 신산한 세상살이를 온 몸으로 감내하며 뚫고 가는 이 땅의 대다수 생활인들에게 말씀이 육체로 현전하는 사건을 일상 가운데 온전히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요한복음의 진리는 따라서 형이상학적 초월의 저편에서나 맛볼 수 있는 영적인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적’이라는 관형어 역시 이 땅에서 땀 냄새 나는 하루하루 삶과 동떨어진 내세의 낙원에나 어울릴 법한 그런 묘연한 영혼의 장식품이 아니다. 가령, 예배를 영과 진리 가운데 드려야 한다는 말씀과 관련하여 저자의 해석은 또 다른 파격적 전복의 명징한 실례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함께 느끼고,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기뻐한다. 오늘 우리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이 근심하고 있는데도 우리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이들은 악마적 세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바치는 것이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57쪽)

이와 같은 도저한 헌신의 제자도를 강조하며 이 세상의 악마적 세력과 부대껴 싸우는 투쟁의 의욕을 고취시킨다고 해서 그가 공동체 집단의 제반 운동에 개인의 자율성과 단독성을 저당 잡히는 운동권 이념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고독을 사랑하는 목사이다. 겉멋으로 고독의 폼을 잡는 게 아니라, 그 고독의 영성적 가치에 절절이 눈뜨고 그것을 그의 목회 현장, 일상의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래서 군중을 떠나 홀로 독처하고자 움직인 예수의 동선을 서술한 짧은 한 구절에서도 그는 ‘예수 정신’을 본다.

“예수 정신은 이 ‘혼자서’라는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신앙은 독립, 곧 홀로 섬이다. 홀로 섬이 허락되지 않는 ‘더불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더불어 삶’을 제대로 이루기 위한 밑절미이다.”(102쪽)

이렇게 ‘홀로 섬’과 ‘더불어 삶’을 오가며 그는 요한복음의 내밀한 빗장을 열고 독자들을 초청하며 권한다. 이제 이 땅에서 뱅뱅이질만 하지 말고 제발 도약하여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억압을 초월해보라고. 동시에 그는 이렇게 권하는 듯도 하다.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한 가운데가 바로 구원이 샘솟는 자리이니 먼 데로 한눈팔지 말고 그 일상의 세속에서 예수의 영을 살아내며 눈물 그렁그렁한 이웃들과 더불어 극진해지라고.

4.

이 책을 통해 김기석 목사는 말씀의 빛 속에 넉넉한 포즈로 행복하게 거닐어온 묵상과 성찰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신학과 종교의 지도에 길이 없는 갈릴리의 대지를 걸어 다니며 개척한 하나님 나라의 꿈이 그의 부활과 함께 ‘그 길’이 되고 ‘생명’과 ‘진리’로 꽃피어났듯, 영지주의자, 초월적 신비주의자, 심지어 얼치기 성령주의자 등에 의해 혼돈의 늪 속에 허우적대던 요한복음이 이제 이 책의 생산과 함께 희한하면서도 심오한 진경의 오솔길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보수적인 독자는 새것에 반응이 굼뜨고, 진보적인 독자는 그 새것에 퉁을 놓고 트집을 잡으며 아무것도 아닌 듯 능청을 떨기 쉽다. 김 목사의 글이 너무 순정하고 명징하여 때로 흙탕물 한 바가지를 붓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그 리듬이 너무 안정되어 좀 비틀고 헝클어트리고 싶은 심술이 더러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혼탁한 정신의 망령을 벗고 겸손하게, 천천히 그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로서 나는 제 고깃덩어리 육신의 삶을 넘어서는 숭고한 존재의 의미가 내 안과 밖에 풍요롭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순식간 깨치게 된다.

지금도 이 책을 앞에 두고 괜스레 공손한 자세를 가다듬게 되고 사뭇 경건해진다. 그의 공들인 글 속에서 풍겨오는 삶의 무게가 뻐근하게 전달된다. 내가 걸어온 지난 30년 설교의 이력 속에 한 번도 우려내지 못한 메시지가 이 책을 매개로 상상의 진공을 울리며 파고드는 기미만은 뚜렷하게 감각된다. 정녕,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한복음의 메시지가 이 책의 행간에서 마구마구 피어나며 말씀의 향연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차정식/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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