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은 자, 그 존재의 이유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2. 27. 17:04

꽃자리의 종횡서해(5)

은혜 받은 자, 그 존재의 이유

앨버트 칸의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1889년 바르셀로나의 한 고서점, 열세 살의 파블로 카잘스가 먼지와 곰팡이로 뒤덮인 악보들 사이에서 기적과도 같은 발견을 한다. 빛바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필사본, 바흐 사후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사멸된 이 곡은 천재 첼리스트의 손에 운명처럼 쥐어지고 그가 25세 되던 해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연주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것이 이 책을 읽기 전, 천재적인 첼리스트라는 것 외에 내가 파블로 카잘스에 대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이나마도 그를 소개하는 TV의 어느 문화 교양 프로그램에서 얻어들은 것이었다. 잊혀졌던 바흐의 필사본, 사멸된 곡의 부활, 먼지 더미 속의 악보 속에서 바흐를 알아본 열세 살 소년의 맑은 눈 등이, 음악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무척이나 신화적으로 다가오는 인상적인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으로 첫머리를 연다(카잘스의 음악을 모르면서도 나름대로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책을 펼 수 있었던 근거가 책을 펴자마자 간단히 부인되자 사실 조금 허탈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가 전혀 근거 없이 떠도는 전설은 아니었다. 그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연습곡으로밖에 인정받지 못하던 이 곡의 음악적 가치를 불과 열세 살 나이에 그 음악적 가치를 꿰뚫어보았고 스물다섯 살에 혁신적인 첼로 주법으로 재해석해 모음곡의 형태로 연주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 사건은 음악사에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분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이어지는 그의 탁월한 업적들에 대한 숭배는 이 에피소드를 보다 더 극적인 쪽으로 비약시켰던 것이다.

 

 

“한 예술가의 생애는 자기 이념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1876년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한 카잘스의 삶은 숨가쁘게 이념과 분쟁의 파국을 헤쳐나가야 했던 백여 년 유럽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특히 유럽 역사의 가장 큰 아픔이자 상흔으로 남아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스페인 내전을 직접 겪었으며, 파시즘의 압제에 항거해 망명 생활을 선택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유럽 역사의 현장이었다.

스페인보다는 에스파냐 사람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그는, 에스파냐 왕정 통치 아래 있었지만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부단히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해온 카탈루냐 사람이었고, 그의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왕실과 귀족들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된 음악가였지만 독립을 바라는 조국의 열망을 잊지 않았으며 평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공화주의자였다. 에스파냐의 공화 정부가 프랑코에 의해 침탈당하자 카탈루냐와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프랑스의 프라드에 망명한 그는 모든 공식 활동을 거부하고 망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는 프랑코 정권이 지배하는 에스파냐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자국의 이익 때문에 프랑코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나라에 대한 연주 활동을 거부했다. 그의 안위를 염려한 각국의 명망가들과 음악가 동료들이 안락한 망명지와 후한 조건의 연주회 등으로 그를 움직이려 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세계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음악가로서 자신의 책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은 곧 나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술가는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특별한 감수성과 지각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예술가의 목소리는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124쪽).

또한 그는 인간의 신념이 생각으로 지니고만 있거나 말로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현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연주자가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의 연주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것과, 신이 부여한 음악가의 책무이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최대의 무기인 악기를 내려놓고 침묵함으로써 오히려 존재적 저항을 시도하는 것이다. 카잘스는 이 두 가지 방법을 자신의 상황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신념에 맞게 실행하였다.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예술가의 목소리는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면 예술가 역시 하나의 육체 노동자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 수월한 연주는 최고의 노력에서만 나오는 결과입니다. 예술은 노력의 산물입니다”(117쪽).

카잘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는 누가 보아도 내추럴 본(Natural born) 천재 예술가이다. 십대 소년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싸구려 카페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 연주를 해도 ‘꼬마’의 소문을 듣고 멀리서 청중들이 몰려들고, 전통적인 첼로 주법과 손의 위치 등을 무시하고 자신이 연주하기 편한 자세로 첼로를 다루어도 매번 그의 연주에 감동한 교사는 연주법을 교정하라 하지 않았으며, 보잘것없는 그의 출신과 초라한 차림새를 비꼬던 브뤼셀의 콧대 높은 음대 교수도 그의 단 한 번의 연주에 무릎을 꿇었다. 유럽의 왕실들과 막역한 친분을 쌓고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며 최고의 무대를 연출했던 그로서는 늘 연주를 위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굳이 노동자에 비유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노동자라 칭한다.

“내가 예술가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면 역시 하나의 육체 노동자입니다. 나는 일생 내내 그래왔어요”(117쪽).

그도 예술가의 자질로서 무엇보다 직관과 감성 그리고 그것을 깊이 있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지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직관과 감성의 실현이 결국은 부단한 노력과 단련된 육체적 노동의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음악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확고했다. 자신이 예술 노동자인 만큼 그리고 음악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예술이어야 하는 만큼, 청중의 범위도 귀족이나 교육받은 지성인,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잘 사는 사람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동자도 음악을 듣고 연주하며 향유할 엄연한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정적인 시혜를 베푸는 무료 자선 음악회의 형태로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의 자긍심을 살려주면서 그들에게도 음악을 향유할 수 있게 지혜를 짜낸 것이 바로 노동자 음악회였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합니까?”라고 묻는 노동자 대표들에게 그는 대답했다. “당신들이 하지요.” 당시(1928년) 환율로 따져 약 100달러 미만의 월급을 받는 사람들로 제한된 회원들이 일 년에 1달러씩 모아서 음악회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카잘스가 제공하고 자신도 연주하고 다른 독주자들도 섭외하는, 형식과 내용이 제대로 갖추어진 프로 음악회였다. 그는 이렇게 개최된 제1회 노동자 음악회를 회상하며 말한다.

“2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회장에 모였습니다. 소박한 차림의 남녀들이 연주회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올랐습니다.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환호는 그때까지 내가 받은 그 어떤 박수갈채보다도 의미가 컸습니다.”

에스파냐 왕실은 물론이고 영국과 브뤼셀 등 유럽 왕실들 그리고 백악관의 존 F. 케네디 부처 앞, 세계 14개국에 중계되는 유엔 회관에서 연주했던 그가 1달러의 기금으로 마련한 노동자 음악회의 감흥을 그 어떤 갈채보다 벅차고 각별한 것으로 전하는 모습은, 위대한 음악가이기 이전에 진정한 형제애를 가진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은혜는 어디에 있는가

자서전을 써 보라는 몇 번의 권유에 “내 생애가 자서전을 써서 기념할 만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라고 답했던 카잘스. 그런 그를 잘 알고 있는 작가 앨버트 칸은 이 책을 통해 ‘예술과 인간적 가치 사이의 뗄 수 없는 친화력’이라는 믿음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 생애에 걸쳐 최우선으로 삼았던 사람의 모습으로 그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자칫 현학적이거나 잰 체하듯 읽힐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깊이 있지만 어렵지 않게, 어둡고 무거웠던 시대의 진술이지만 따뜻하고 정감 있게, 단호하지만 흥분하지 않고, 확고하지만 부드럽게 옮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앨버트 칸이 보여주고자 했던 휴머니스트 카잘스에 대한 접근 방식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이루어 놓은 일들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대한 천재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해치는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형제에 대한 도리를 지켜온 카탈루냐 사람 카잘스의 삶은 조용히 묻는다. 자신의 재능을 형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천재 예술가에게만 부여된 책무인가를.

이 땅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백을 빙자해 노골적으로 ‘받은 은혜’를 자랑하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벼이 드러내진 않아도 자신의 ‘받은 은혜’에 내심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 옆 사람을 은근히 얕보는 사람은 더욱 많다. 그 은혜의 섭리를 회중 앞에서 공공연히 떠들면서도, 그것조차 특권으로 향유하거나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물어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읽는 이 순간, 은혜 받은 자의 책무와 그것을 마땅히 사용해야 할 곳을 아는 사람의 자리는 어디인가.

김경실/<아름다운 날> 출판사 편집장

posted by

침묵 읽기, 침묵 말하기, 침묵하기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2. 12. 17:31

꽃자리의 종횡서해(4)

침묵 읽기, 침묵 말하기, 침묵하기

-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줄 알았던 책이 되살아나는 걸 보니 여간 기쁘지 않다. 이 책을 이미 읽었던 이들이 바로, 이 책의 부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8년 만에 재쇄에 들어가면서 역자가 붙인 글이다. 이 책이 얼마나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긴 침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다시 소리 없이 부활했는지, 짧지만 명쾌하게 설명하는 글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책에도 운명(사실은 앞이든 뒤든 생년월일을 명확히 박는 까닭에 사주라고 하지만, 매체의 특성상 다소 광범한 언어로 대체한다)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 책으로 말하자면 깊은 수도원의 은둔자처럼 존재하지만 눈이 밝은 사람들은 용케 찾아내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지내다가, 기력이 쇠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되는 순간이 오면 무심한 듯했던 그 오랜 친구들이 새삼스럽게 정열을 되찾아 열렬히 구애하여 다시 회생시키는, 희미하지만 생명선이 긴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이를테면 ‘고전의 운명’ 말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 침묵

‘침묵’에 대해 읽고 공감하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긴 말을(문자 역시 소리 큰 말이다) 해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것은 마치 늘 ‘기도에 대해’ 읽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기도’는 하지 않는 것과 혹시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침묵의 세계》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침묵이란 그저 말하기를 그만둠으로써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침묵은 단순한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며,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면 스스로 옮아갈 수 있는 어떤 상태 이상의 것이다”(15쪽).

저자인 침묵의 사람 막스 피카르트는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은 세상으로 난 창을 모두 닫고 홀로 있을 때 느껴지는 막막한 존재감이나 고립감과 다르며, 주관적인 고독과도 엄연히 구분된다.

“침묵이 작용하는 세계에서 고독은 주관적인 것에 달려 있지 않으며 주관적인 것에서 유래되지 않는다. 고독은 어떤 객관적인 것으로서 인간 앞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 자신의 내부 속에 있는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침묵으로서 인간 앞에 존재하고 있다. 옛 성자들이 고독 속으로 들어가서 마주쳤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침묵의 객관적인 고독이었고, 그래서 그들 자신의 내적 고독은 객관적인 고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성자는 그 객관적인 고독을 그것이 제삼자로부터 온 것인 양 받아서 가졌고, 그것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았다. 따라서 성자의 고독은 오늘날의 “내적” 고독처럼 긴장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그것은 침묵의 위대한 객관적인 세계와 그 객관적인 세계의 고독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그러나 고독이 다만 인간의 내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은 고독에 의해서 소진되고, 고독에 의해서 수축된다”(65-66쪽).

그는 침묵을 단순히 소리 없는 상태로 인식하지 않는다. 침묵은 하나의 독자적인 현상이며, 독립된 전체이며, 그 자신으로 인하여 존립하는 어떤 것이며, 모든 것에 존재하며 그 자체이기도 하다. 피카르트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모든 물자체로부터 인식한 침묵의 세계는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이며 완전한 세계이다.

그러나 뒤이어, 피카르트는 굴곡 없는 낮은 목소리로 탄한다. 침묵하는 실체를 가지지 못한 인간은 오늘날(이 오늘날은 1940년대 말을 가리킨다. 그때와 지금의 오늘날은 또 얼마만한 간극이 있는가) 매순간마다 그 앞에 제공되는 지나치게 많은 사물들로 인해 압박을 받게 되었다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세계에서 침묵은 사물과 소음에 속박당하고 말았으며, 무언과 진공 상태가 침묵으로 행세한다고. 실로 침묵은 지속적인 소음의 흐름 속에 나타난 어떤 구조적인 결함처럼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어도 영혼 속에 사물들의 침묵하는 형상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인간의 정신은 대상을 단순히 자기 눈앞에 보이는 대로 사실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의 운동을 통하여 대상을 초월하여 나아간다”는 후설의 지적처럼 막스 피카르트는 정신의 폭과 침묵의 폭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침묵의 폭은 정신이 폭넓어지도록 일깨우는 자연으로부터의 경고로 받아들인다.

“침묵의 모습”에서 시작해 “말 속의 침묵”, “자아와 침묵”, “인식과 침묵”, “사물과 침묵”, “시와 침묵”, “침묵이 없는 세계”, “침묵과 신앙” 등등 침묵과 관련된 32개의 사색의 편편들은 길지 않지만, 수심 깊은 곳에 추를 드리우고 있는 침묵의 언어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묵직하게 잡아당기며 함부로 빠져나올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침묵의 세계》에서 가벼이 발을 뺄 수 없는 이유가 재미나 감동 때문은 아니다.

재미있는 책을 수식할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어 단숨에 읽어버렸다”이다. 그러나 달려가는 재미보다 멈추어 보는 쪽에 기울어 있는 이 책은 단숨에 읽을 수도 없고, 감히 말하지만 단숨에 읽어서도 안 된다. 이 책을 읽는 데에는 문자를 읽는 데 들이는 시간 이상의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줄거리 파악해 가며 처음부터 차곡차곡 읽을 책도 아니다. 늘 같은 자리에 두고 비오는 날 익숙한 손잡이의 우산을 펼치는 마음으로 읽으면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도 이 책에 혹은 몇몇 문장이나 관통하는 정신에 대해 토를 달거나 몇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다만 32개의 방을 가진 《침묵의 세계》는 그 자체로 깊고 무궁하게 열려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세계, 침묵

‘침묵’은 사실 ‘우리’와 멀어 보인다. 우리는, 기도는 이야기하되 침묵은 멀리한다. 우리 울타리에서 상용화된 언표가 아닌 것이다. 침묵이라는 말 그 자체가 주는 이질감은 아마도 침묵이 가 닿는 궁극의 지점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있지 않은가 싶다. 의식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자아와의 마주섬 혹은 무의식에까지 무한대로 펼쳐지는 자아의 확장, 침묵으로 가 닿을 수 있다고 말해지는 그곳이, 오직 그분을 만나고, 다만 그분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의 목적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도의 길은 여러 갈래로 나 있고 그 끝에 구원이 있다. 침묵의 세계 역시 굴속처럼 어둡고 깊게 나 있어 쉽게 들어서기가 망설여지지만 걸어봄직한 길 중 하나다. 그래서 이 책이 고전의 운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말하는 것들, 소음

무엇에서나 침묵을 발견하고 어디서나 침묵의 얼굴을 찾았던 저자 막스 피카르트는 1888년 독일의 슈바르츠발트 지방에서 태어나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의학부 조교수를 거쳐 뮌헨에서 개업한 의사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 문필 활동을 하다가 1965년에 영원한 침묵의 세계에 들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으로부터의 도주』(1934), 『우리 속의 히틀러』 (1964), 『인간과 그의 얼굴』(1952) 등이 있다.

피카르트는 오로지 자기 내면에만 갇혀 사유했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너무 한 사람의 목소리에만 의존해 지루해질 만하면 “강철 화살들이 가득 찬 화살통, 단단하게 감겨진 닻줄, 날카로운 음, 약간만으로도 대기를 찢어놓는 청동 나팔, 그것이 히브리어다. 히브리어는 조금밖에 할 수 없지만, 히브리어로 말하는 것은 망치로 모루를 치는 것과 같다”(르낭)와 같은 위트 넘치는 인용과, 유머를 위해서는 “끝없는 쾌활함이 필요하며, 자기 자신의 모순을 완전히 초월하여 그 모순 속에서 괴롭고 불행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라는 헤겔의 유머관을 얻어들을 수도 있다.

군데군데 과문한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눈에 띄지만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고, 대부분은 친절한 역자가 뒤에 색인을 붙여 놓아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정도의 간단한 정보는 얻을 수 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이 시대 저명한 생물학자 중 한 분은 꼭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책들을 그런 대로 읽을 수 있었는데 희곡은 끝까지 읽는 걸 포기했다고 어딘가에 썼다. 등장인물에 따라 다른 목소리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감 없는 사실이라면 그분에게 《침묵의 세계》 읽기는 또 다른 고역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리 내어 읽으면 전혀 다른 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을 읽기 위해 내는 시간 자체가 곧 침묵일 수 있다. 문자가 소리라고 했지만 그것은 정말 많은 뜻을 품은 채 침묵하고 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다. 만일 침묵이 어렵다면 이 책을 읽는 것 그 자체가 침묵의 훌륭한 연습이 될 것이다.

침묵은 정지해 있는 것 같으나 가만히 자신을 밀고 가는 힘이다.

자, 이것으로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마치자.

이제… 침묵이다….

김경실/<아름다운 날> 편집장

posted by

세상이 소란을 피워도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2. 5. 16:41

꽃자리의 종횡서해(3)

세상이 소란을 피워도

- 자끄 러끌레르끄의 《게으름의 찬양》, 《무지의 찬양-무보수의 찬양》 -

인간을 무한경쟁과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현대 문명에 대해 평범한 사람들의 반발이 시작되었다. 느림의 미학이 이제는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고 문명의 풍진을 훌훌 벗어던진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헬렌과 스콧 니어링은 이 시대의 교양이 되었다. 느림과 소박함, 자연으로의 회귀를 일깨우는 책들은 크게 몇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종교적 영성에 입각해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책들이다. 요즘 꾸준히 팔리고 있는 법륜 스님의 《인생수업》, 한 때 서점가를 휩쓴 베트남 출신의 승려 틱 낫한의 《화》, 《평화로움》 등의 저서들, 달라이 라마의 강론과 수상집들, 아직은 가톨릭 내에 머물고 있어 안타까운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우화와 신앙 에세이(《종교박람회》, 《개구리의 기도》, 《행복으로의 초대》) 류가 그것이다.

둘째는, 조금은 감성적인 글 솜씨로 독자를 사로잡는 수필들로 피에르 쌍소의《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남덕현의 《슬픔을 권함》 등이 일반 대중에게 느림과 소박함의 미학을 널리 전하는 전도사 역할을 해내고 있다.

셋째는,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인디언의 지혜와 삶의 철학을 모은 책들이다(《빠빠라기》, 《인디언의 복음》). 그리고 굳이 분류하기 뭣한 책들(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노자 이야기》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이현주 목사의 강해와 에세이, 전우익·권정생·윤구병 등 소로우나 니어링에 비견될 이 나라 멋진 선비들의 이야기), 생태학적 관점에서 쓰인 책들(《월든》, 《오래된 미래》, 《간디의 물레》)도 빼놓을 수는 없겠다.

진정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멈추어 자기를 성찰하고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진리는 위대한 스승들이 누누이 설파하고 종교적으로 추구해 온 바이지만, 현대 문명의 폐해와 인류의 비극적 미래를 적시하며 느리게 살자고 주창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가 본격적이다. 그 물결이 우리 사회에 전파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전보 한 통 쳐서 일체의 일을 사양했어야 옳았던 것을…

그런데 여기 소개하는 인물은 50년을 거슬러 올라간 1936년에 《게으름의 찬양》이라는 제목을 달고 느림의 미학을 읊어나간다. 그의 이름은 쟈끄 러끌레르끄. 1891년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그의 연보를 살피자면 1911년 20살의 나이로 법학박사, 3년 뒤 철학박사, 다시 3년 뒤 사제 서품을 거쳐 루벵대학교 강단에서 일생을 보냈고 가톨릭 쇄신운동에 헌신했다. 여기서 러끌레르끄의 학위나 학위 취득 시의 나이에만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들은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쓴 책임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젊은 날에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벨기에 자유학술원 회원에까지 이르는 법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신부가 어떻게 게으름과 무지를 찬양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깐깐하고 보수적인 벨기에의 기득권층 한복판에 머물며 어떻게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것이 알고 싶어야 한다.

그의 책에서는 피에르 쌍소 류의 현란한 수사가 춤추지 않는다. 풍부한 감성과 서정이 목을 빼어 노래하지도 않는다. 니어링에게서 읽던 모질고도 단호한 결별이 번뜩이는 것도 아니다. 그가 우리를 이끄는 힘은 유쾌한 단순무식이다. 러끌레르끄가 1936년 11월 벨기에 자유학술원에 입회하면서 동료들의 환영사에 답한 인사말을 책으로 낸 《게으름의 찬양》은 이런 빈정거림으로 시작한다.

“여러 어른의 재치 있고 심오한 말씀을 다 듣고 난 이제, 이 학술원-배울 학(學)자 달린 것이면 무어든 멀리하기를 일삼는 이 모임-에 제가 들게 된 보답으로 게으름의 찬양이나 한마디 드려볼까 합니다.”

“왜 하필 그런 연제를 골랐는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프로이트는 아마 ‘리비도’ 때문이라 하겠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그런 알아듣지도 못할 말은 제쳐놓고 그저 주님 따라 마음이 넘쳐흘러 입이 열렸다고나 해두겠습니다.”

보라, 얼마나 무식 단순하여 힘이 넘치며 또한 결의에 차 있는가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더 단순무식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전보 한 통 쳐서 일체의 일을 사양했어야 옳았던 것을… 나오지도 않는 말귀를 애써 다듬어가며… 아무래도 모순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놈의 제목 밑에 무슨 소리를 달아야 할지 그야말로 죽을 노릇입니다.”

맞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 중 상당 부분은 ‘아니오’라고 뿌리치고 거절했어야 할 것을 기회를 놓쳐 혹은 미련과 욕심 때문에 그러지 못한 데서 비롯되지 않던가. 왜 뿌리치지 못했던가 후회한다고는 하지만, 그는 그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미 이르러 있음을 들키고 만다.

 

                      

 

러끌 레르끄에게서 사사한 장익 주교( 《게으름의 찬양》의 역자)는 후기에서 자신이 전해들은 일화를 소개하는데….

“연구소 이층 창문으로부터 느닷없이 책, 신발, 옷가지, 기타 잡동사니가 무슨 난리라도 난 듯 요란하게 마당으로 마구 쏟아져 내려오더랍니다. 아래층에 사시던 동료 교수가 깜짝 놀라 무슨 변이 일어났는지 조교를 올라가 보라고 시켰는데… 러끌레르끄 교수가 윗도리를 걷어붙인 채 마냥 물건을 내던지고 계시기에 까닭을 물은즉… ‘훨훨 다 털고 허허롭게 살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살다보니 주체할 수도 없이 가득 차 쌓여 몽땅 버리는 중일세. 이것 저것 고르고 가리다 보면 도로 뭣이 많아져서 우선 이렇게 던져놓고, 이따가 내려가서 다 치울테니 걱정 말게’ 하며 호방하게 웃으시더랍니다.”

그래도 동양 문화권에 몸담고 사는 우리로서는 이 정도의 이야기는 실천은 못해도 주워듣기는 많이 들은 바다. 도가에 속했거나 선종에 몸담은 스승이나 선사의 일화들이 넘쳐나다 못해 책으로 묶여서 책방에 가면 발에 치일 정도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다. 너무 많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새를 처음 본 꼬마가 넋을 잃고 하루 종일 새만 바라본 저녁, 아빠가 ‘그건 새라는 날짐승 중에 참새라는 건데 이런 깃털을 갖고 이렇게 날고 이런 걸 먹는단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다음 날 꼬마는 ‘아 저거, 난 알아. 저게 참새야’라며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이치다.

옛 가르침에 이르기를 “그 지혜에는 미칠 수 있겠으나 그 어리석음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可及其智 不可及其愚) 하였으니 한편으로는 수우(守愚)라고도 하여 어리석음을 지킨다고 한다.

이것은 겸손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설령 현명하여 깨달음의 경지에는 이르러도 그것을 넘어선 어리석음의 경지에는 미처 이르지 못해 깨달음의 티를 벗지 못할까 저어하는 심원(深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러끌레르끄 교수가 이층 창문으로 내던진 것이 그저 너저분하고 쓸모없이 쌓이기만 하는 잡동사니와 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사념을, 사념에 빠지는 자기 자신을 집어던진 것이다. 그 정도면 벨기에 식의 소신공양쯤은 되리라.

“이젠 그만 배우기: 생각하기.” 러끌레르끄가 두 번째 책에서 시종 붙잡고 있는 화두가 이것이다. “이 세대에 있어서 위험한 것 가운데 하나는 창조적 노력 없이 교육을 받아들인 졸업장 인생들 자신입니다. 또 다른 위험의 하나는 나날이 전문화해 가는 지식인들로서 자신들의 학문을 점점 더 협소한 영역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한 인간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서 가지런히 늘어놓으면 얻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부스러기의 집합일 뿐입니다.”

“세분화한 학문, 분석적 방법은 어리석은 선언의 위험… 현미경으로 아무리 보아도 영혼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만족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그런 식자들의 선언 말입니다.”

학문이란 인간을 잡아 먹는 것입니다

그가 어찌 알았겠는 가만은 이 소리는 공자요 또한 노자다. 공자는 “군자(君子)는 불기(不器)’라고 하였고, 노자는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되는데 그러므로 큰 만듦은 쪼개지 않는다, 곧 대제(大制)는 불할(不割)’이라 설파하였다. 기(器)는 그릇이니 통나무를 쪼개서 만드는 것이라 이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게 되어 도(道)를 따르는 이와 군자는 쪼개고 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자연 그대로 놓아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교육은 이용가치를 중심으로 해서 쪼개고 쪼개어 잘디잔 아이들을 만들고 그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그 경쟁은 대학 입학 허가서를 얻기 위한 쟁투로 이어지고, 대학 졸업장으로 이어지고, 학파와 학벌로 이어진다.

러끌레르끄는 탄식한다.

“학문이란 인간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식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좋은 것인데 인간은 지식의 노예, 졸업장의 노예, 혹은 계획의 노예, 방법의 노예가 될 위험을 안고 삽니다.… 하기사 예수 때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는 현인이 아니라고 부정했습니다. 까닭인즉 예수가 자기들 문하에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고, 바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의미하고, 이 인간성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생기요 창조력이며 노력의 의미이며 그 개성 자체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저도 남들만큼이나 졸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졸업장과는 상관없는 데서 얻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탐구하되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참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그 뒤에는 삼조 승찬(三祖 僧璨)의 신심록(信心銘)이 절로 따라오지 않는가. “위대한 도는 골 아프도록 어려운 게 아니다. 모든 것이 명료해 숨길 것이 없다.”(至道無難… 洞然明自) 거기에 도오겐(道元)도 한마디 붙이리라. “진리를 배운다는 건 자기를 배우는 것이고,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유럽의 법학자에게 우리는 무(無)와 공(空)이라는 낱말까지 요구할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러끌레르끄는 단순과 느림, 무지를 통해 어디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일까?

세 번째 글, 무보수의 찬양에 이르러 그는 “모든 것의 귀착점은 아름다움입니다. 미(美)는 존재의 광채입니다. 진(眞)에도, 선(善)에도 미(美)는 있습니다”라고 주창한다.

“사람들은 계산을 합니다. 그러나 삶의 아름다움은 계산하지 않는 순간에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소용되는 모든 것들은 참말로 아무데도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유용한 것은 씁쓸한 맛을 남기는데 까닭은 그것이 다른 것에 이를 때에만 유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에 소용됩니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어디에 씁니까? 양심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평화를 갖는다는 건 어디에 쓰며 행복하다는 건 또 어디에?…”

하나님은 찬란할 정도로 무용하신 분

나의 오류를 인정해야겠다. 이것이 무(無)가 아니고 이것이 공(空)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그렇구나, 스승께서 이르시던 말, “텅 비어 있음… 내게는 고요하고 다른 이에게는 아름답습니다.” 바로 그거였구나!

러끌레르끄는 그리고 나서 한 번 더 우리를 놀라게 한다.

“하나님은 찬란할 정도로 무용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처음이시고, 그분은 당신 뒤에 당신이 섬길 만한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에도 유용할 수 없는 분입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셨는가요?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홀로 처음이시며, 그분을 앞서는 것은 없으며, 목적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분 앞에 도달해야 할 목적으로서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그분 없이 설명되지 않을 것이나 세상을 설명하는 데 소용이 되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자 이르시기를 “…마구 두루 섞여서 두루뭉실한 물건이 있는데 하늘과 땅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어 고요하고 쓸쓸하다.… 천하만물의 어머니라.… 비어 있음을 철저히 뚫어보고 고요함을 착실하게 지키면 만물이 함께 번성하되 나는 그 돌아감을 본다. 뿌리로 돌아옴을 일컬어 고요함이라 하고, 고요함을 일컬어 존재의 운명으로 돌아감이라 하고 존재의 운명으로 돌아감을 일컬어 실재라 하고, 실재를 아는 것을 일컬어 깨달은 밝음이라 한다….”

러끌레르끄는 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쟈끄 러끌레르끄의 두 책은 자그마한 소책자여서 보통 책으로 치자면 두 권을 다 합쳐 50쪽 분량이다. 그에게 어울리는 분량이라고나 할까. 책에 담긴 삶의 통찰과 경륜으로 그는 말년에 작은 오두막 한 채를 지었다. 그 집에 처음 들어가던 날의 신기함과 청량함을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첫 번째 책 말미에 현관문이 있다. 꼭 들어가 보시길

변상욱/기독교방송 대기자

.

posted by

눈시울을 붉히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2. 5. 08:11

 

꽃자리의 종횡서해(3) 

눈시울을 붉히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

- 홍순명의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

 

새로운 세계관과 시대 정신

우리는 파우스트라고 하면 으레 19세기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작품을 연상한다. 이 작품을 괴테의 창작인 줄로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중세 말기 이래 수많은 작가들이 파우스트를 주제로 다양한 버전의 작품을 썼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괴테의 파우스트뿐이다. 괴테의 인생관과 우주관, 종교관에 의해 재구성된 그 파우스트만이 영속적인 생명력을 얻고 불멸의 고전이 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파우스트에 다양한 버전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전설과 민담에도 다양한 이본(異本)이 있다. 예를 들면 춘향전의 경우 현재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 무려 70여 종에 달하는 이본이 전해지고 있고, 심청전은 현재 공개된 이본만 경판 4, 안성판 1, 완판 7, 필사본 62종이 된다.

풀무학교 홍순명 선생의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2)는 심청전, 흥부전, 선녀와 나무꾼(1), 홍길동전, 춘향전(2)을 새롭게 고쳐 쓴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수많은 이본들이 사소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결같이 봉건적인 낡은 가치관을 담고 있어 의미 있는 차별성을 보기 어려운 반면, 홍순명 선생의 작품은 21세기의 새로운 세계관과 시대 정신에 맞춰 새롭게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이본들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

새롭다기보다는 실로 환골탈태라는 말이 적절할 정도이다. 재창조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 더욱이 홍순명 선생이 이 작품들에 불어넣은 사상은 일개 백면서생이 탁자에 앉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위대한 평민을 모토로 40년 넘도록 충남 홍성의 풀무학교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낸 실천적 교육 철학에서 길어 올려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감히 홍순명 선생의 우리 고전 재창조 작업이 괴테의 파우스트에 필적할 정도로 한국 문학사에서 현격한 차별성을 갖는 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새 춘향전>의 방자, 기독교 사상가

<새 춘향전>에서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익히는 학문이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공리공론뿐으로 백성들에게 소용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과거를 포기한다. 그리고 전남 강진으로 가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는다.

특이한 것은 <새 춘향전>에서 방자가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촐랑대는 어릿광대가 아니라 할아범으로 불리는 관아의 노복으로 등장한다. 비록 천한 신분이나 가슴에 위대한 신앙과 사상을 품은 기독교 사상가이다. 심지어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던 다산 정약용도 그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말할 정도이다. 노예 신분으로 고대 로마의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홍순명 선생의 풀무학교가 추구하는 위대한 평민이란 이런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할아범의 실명은 기독교 사상가답게 일원’(一源)이다. 이름을 풀면 하나의 근원이 된다. 남원 부사 변 사또의 악정을 고발하는 괘서를 담벼락에 붙였다가 밀고자의 고발로 옥에 갇힌 그는, 장독(仗毒)으로 죽기 직전 이몽룡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도련님, 죽는 날은 내가 주님 품안에, 사랑의 나라에 새로 태어나는 날이구만이라. 죽음 끝에 새 삶이 시작된다면 마다할 이가 누가 있겠능기요. 그리고 우리 이런 고생은 주님의 고생과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지라우. 우릴 모두 사랑한 것밖에 아무 죄도 없는 귀한 그런 분의 고생의 한 귀퉁이라도 참여하게 하니 주님 고맙지라우.

이몽룡이 할아범일원의 무덤 앞에서 춘향의 손을 꼭 잡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차별이나 계급 없는 사회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 <새 춘향전>의 마지막 장면이다.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야말로 모든 바람직한 일이 이루어질 출발점이고 귀착점이기 때문이다. 몽룡은 세상이 바로 되려면 자기 자신부터 앞장서서 그 새로운 길을 찾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화주의자, 홍길동

<새 홍길동전>은 임진왜란 무렵을 시대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관군의 추적을 피해 산 속으로 은신한 길동 일행은 세상에서 행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실천한다. 귀틀집을 짓고, 제각기 가진 재주대로 숯을 굽고, 호미와 낫을 만들고, 옹기를 짓고, 벼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길동은 임진왜란에 참가했다가 본대에서 벗어난 일본 군인 고쇼(高紹) 형제를 만난다(나중에 고쇼의 동생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뜻밖에도 두 사람은 일본에 사는 백제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침략자 도요토미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조선 땅에 흘러들어와 숨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한다. 일본이 군인 세상이 되면서 중국, 조선, 일본의 동아시아 3국 역시 문화와 교역이 아닌 전쟁과 침략의 관계로 변했다는 것이다. 비록 강제 동원된 것이기는 하나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임진왜란에 참가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털어놓는다.

일본인 고쇼가 평화주의적인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일본 불교의 한 갈래인 정토종(淨土宗)의 영향이 컸다. 그것은 전란과 기근, 가난과 무지 속에 힘겹게 사는 민중에게 교의나 계율 같은, 스스로를 닦는 수양이나 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처를 믿고 그 이름을 외면 구원된다는 타력(他力)의 신앙을 가르치는 불교 교파였다.

길동 일행과 고쇼 남매는 전란이 한창인 시기에 산속에서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그들은 관군의 계속된 추적에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일본으로 함께 떠나면서 고쇼 남매와 길동 일행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 이렇게 만나 함께 지내고 고생한 인연이 기가 막힌 것 같소. 앞으로도 우리 인연이 대를 두고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오.”

정말, 우리가 이 싸움판에서 형제처럼 지냈다는 게 꿈만 같아.”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감정적 앙금이 적지 않은 두 나라 국민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쾌하게 보여 주는 대화가 아닌가!

 

신앙의 인연으로 만나는 <새 심청전>

<새 심청전>에서 심청이 태어난 곳은 마한의 남대성주(南大城州), 그러니까 지금의 전남 곡성이다. 청이의 아버지 심학규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해서, 동네 아이들에게 중국의 초기 경전과 의학, 농사 같은 기초 학문을 가르쳤다. 심학규는 죽은 친구의 아들 가성을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면서, 가성이 장성하면 데릴사위로 삼을 생각을 한다.

쇠가 산출되는 덕분에 중국과 교역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했던 그 평화스러운 골짜기에 어느 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고구려와 싸우면서 쇠가 필요해진 백제의 군대가 심청의 마을로 몰려온 것이다.

주둔군의 횡포가 심해지자, 학규는 군관에게 항의한다. 술 취한 한 군인이 학규를 대장간의 숯불 속으로 떠밀어 버리고, 눈이 까맣게 짓물러진 그는 더 이상 앞을 못 보게 된다. 분이 삭지 않은 백제군은 청이까지 중국 상인들에게 팔아넘긴다. 하지만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면서도 군인들과 상인들을 위해 기도한다.

물에 빠진 심청은 한 중국 어부의 손에 목숨을 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상꿔공(相國公)이라는 인품 좋고 학식 있는 중국의 향촌 지도자를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고향에 두고 온 가성을 생각했지만, 먼 타향에서 가성의 생사 확인조차 할 수 없었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상꿔공과 혼인을 하여 행복하게 살면서도 심청은 고국의 아버지와 고향 산천을 잊을 수 없었다. 심청은 진흙으로 관음상을 빚어 동네 옹기 가마에서 구웠다. 세 손가락 크기의 좌상이었다. 관음상 뒤에 심청은 고향과 지금 살고 있는 곳,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글씨를 새겼다. 심청은 해마다 자기가 파도에 실려 온 날이 되면 관음상을 백 개씩 만들어 바다로 띄워 보냈다.

이렇게 몇 해가 흘렀을까, 심청의 고향 부근 바닷가에 사는 성덕(聖德)이라는 처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으러 중국에 간 오빠 현도(顯道)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심청이 흘려보낸 관음상을 발견한다. 성덕은 관음상을 움푹 팬 굴 속에 안치하고 오빠가 도를 깨치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빈다.

한편 가성은 백제군에 끌려가 중국의 요서(遼西) 지방 해변 초소에서 근무하다가 심청이 바다에 흘려보낸 관음상을 발견한다. 관음상 뒤에 쓰인 심청의 소식을 읽은 그는 그 길로 근무지를 이탈해 심청을 찾아 떠난다. 몇 해가 지난 후 심청의 남편 상꿔공은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동쪽 나라에서 온 젊은이가 준 인삼을 먹고 병석에서 일어난다.

그 젊은이는 바로 가성이었다. 가성은 주둔지에서 도망친 후 천이백리 길을 걸어 천신만고 끝에 심청의 마을에 도달했으나 심청은 이미 결혼하여 두 남매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가성은 여러 해 모진 고생을 하며 심청의 마을까지 오는 동안, 품에 간직한 관음상과 심청을 겹쳐서 대했다. 그러나 이제 심청에 대한 마음을 접고 오직 자비로운 관음보살 앞에 기도할 뿐이었다. 상꿔공 역시 이 모든 사정을 다 헤아려 알게 되었다.

상꿔공은 생명을 구해 준 가성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친정 아버지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청을 생각하여 아들과 함께 고향 길에 오르도록 주선해 주었다. 때마침 고향 가는 배편에는 동국 마한 땅 출신의 한 스님이 타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현도였다. 한 배를 탄 심청·가성·현도 세 사람은 고향 땅에 상륙한 후 먼저 현도 집에 들렀다.

현도와 성덕 두 남매의 감격적인 해후가 있은 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네 사람의 인연이 참으로 기이했다. 성덕 처녀는 심청이 보낸 관음상을 고향 바다에서 건져 가까이 모시며 오빠의 무사 귀환을 축수했고, 가성은 중국 땅에서 그 관음상을 발견하고 심청이 살던 곳으로 달려갔다. 현도는 동생이 축수하던 그 관음상을 만든 사람(심청), 성덕과 같이 우연히 바닷가에서 관음상을 발견한 사람(가성)과 한 배를 타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같은 신앙의 인연으로 네 사람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한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평민들의 자연에 뿌리내린 건실한 삶

<새 춘향전>, <새 홍길동전>, <새 심청전>에서 우리는 몇 가지 공통된 주제들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참신한 생각을 품고 행동에 뛰어들도록 만든 결정적 요인이 종교 신앙이었다는 점이다. <새 춘향전>에서는 일원의 기독교가, <새 홍길동전.에서는 고쇼의 정토종이, 그리고 <새 심청전>에서는 심청’, ‘현도등의 관음 신앙이 그 역할을 했는데, 이 모든 종교들은 교리나 형식에 얽매어 구름 속 진리만을 찾는 신앙이 아니라,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게 해주는 산 신앙이었다.

다음으로 <새 홍길동전><새 심청전>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삼국의 선린과 우애를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외교 용어에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도 있지만 국가 사이에는 가까운 곳일수록 적대적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대부분 정치 지배자의 야욕에 의해 빚어진 왜곡된 감정이기 십상이다. 홍순명 선생이 재창조한 고전들은 우리가 후손들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평화주의를 배울 필요가 있으며, 이웃 나라들과의 평화로운 사귐은 정치 지배자들이 아닌 평민들의 자연에 뿌리내린 건실한 삶을 밑거름으로 해서만 가능한 일임을 전편에 걸쳐 누누이 강조한다.

보수적인 독자들 중에는 홍순명 선생의 이러한 고전 재창조 작업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의 시제(時制)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전통이란 결코 박제된 것이 아니다.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며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품고 있는 이상과 그 실천은 작은 실개천이 모여 커다란 강을 이루듯이 새로운 전통을 형성한다.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전통을 앞장서 만들어 나가고 있는 홍순명 선생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박상익/우석대학교 교수

 

 

 

 

 

 

 

 

 

 

 

 

 

 

posted by

예수는 하나님의 심장이다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1. 31. 09:11

꽃자리의 종횡서해(2)

  예수는 하나님의 심장이다

-마커스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

 

기독교의 심장에는 심장의 길, 곧 우리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변화시키는 오솔길이 있다. 기독교의 심장에는 하나님의 마음, 곧 우리가 변화되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열정이 있다. 기독교의 심장에는 하나님의 열정에 참여하는 삶이 있다”(340).

패러다임 변화

욕먹는 게 아픈 게 아니라, 욕을 먹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더 아프다.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어느 교회가 수천억을 들여 교회를 짓고 그 후유증으로 내홍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온다. 사정이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사정이 바깥사람들에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소설가 이승우의 <연금술사의 춤>에 나오는 공본영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너희들, 십자가를 끌어내려 목에다 걺으로써 탐욕스런 육체를 장식하듯 음란하고 부패한 영혼에다 종교를 장식하는 너희들, 예배 행위를 무슨 친교 모임이나 고상한 취미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너희들. (), 너희의 썩어문드러진 영혼의 무덤을 은폐하기 위한 회() 외엔 아무것도 아닌, 너희들의 타락을 더 어떻게 참으랴.”

신랄하다. 그런데도 유구무언이다. 소설에서 이야기의 화자는 황금빛 십자가를 보며 “‘십자가가 지향하는 초월성과 황금이 가리키는 속물성간의 저렇듯 무리 없는 접합, 그 부조화한 간통이 이 시대의 초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이 땅에서 쇠퇴하고 말 것인가? 많은 이들이 내놓는 전망은 우울하다. 겨울숲보다 더 황량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나르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보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심장이 차가워졌다는 말이다. 멎기 직전이다. 차가워진 심장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을 붙좇던 삶에서 돌이켜 본()을 꼭 붙들어야 한다. 그 본을 붙잡기 위해서는 좋은 길 안내자가 필요하다.

지난 주 타계한 오레곤 주립대학의 종교와 문화 교수이면서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였던 마커스 보그의 책 기독교의 심장(The Heart of Christianity)은 우리가 참고해도 좋을만한 지도이다. 역자가 ‘heart’의 번역어로 핵심이 아닌 심장을 택한 것은 어쩌면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절박함과 아울러 교회를 새롭게 할 길을 찾았다는 기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의 심장은 무엇인가?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9)

이 책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2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신앙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 차원들을 밝히는 동시에 성서, 하나님, 예수라는 기독교 전통의 심장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2부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중생, 하나님의 나라, 죄와 구원, 수행, 다원주의의 문제 등이다.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저자는 보수주의적 기독교자유주의적 기독교를 나눴던 지금까지의 구분법은 급변하고 있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본다. 현대 이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과학, 역사학, 종교 다원주의,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지평 가운데서 사고할 것을 요청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시대마다 재구성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런 과제를 수용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해서 저자가 채택한 용어는 '과거의 패러다임''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두 패러다임을 가르는 기준은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성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본다. 성서무오설은 이런 관점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은 성서를 '사실적-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신앙도 내적인 변화보다는 '믿는 것'이 중심이 되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내세에 집중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패러다임이 기독교 고유의 전통이라는 사람들의 통념을 뒤집는다. 이러한 기독교 이해 방식은 사실은 현대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 분기점이 된 것은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는 사실성을 참됨의 기준으로 보았기에 성경의 참됨을 주장해야 하는 이들은 성경의 언어를 사실의 언어로 제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은 기독교 고유의 전통이라기보다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라 말할 수 있다(30). 저자는 이런 기독교 이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성서에 대한, 그리고 기독교적 삶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특색을 역사적’, ‘은유적’, ‘성례전적’, ‘관계적’, ‘변혁적이라는 다섯 가지 형용사를 가지고 설명한다.

 

                                

 

새로운 신앙의 세 기둥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전에 저자는 신앙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다양한 층위의 의미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는 동의로서의 신앙(faith as assensus)이다. 이것은 교리나 신조 등에 대한 동의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반대어는 의심혹은 불신앙이다.

둘째는 신뢰로서의 신앙(faith as fiducia)이다. 신뢰는 '철저한 맡김'이다. 불안과 공포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55)이 곧 신뢰이다. 반대어는 불신(mistrust)’이지만 이것은 늘 걱정염려로 나타난다.

셋째는 충실함으로서의 신앙(faith as fidelitas)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책임적 신앙으로 표현된다. 반대어는 배신(infidelity)’이고 성서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상숭배이다.

넷째는 보는 방식으로서의 신앙(faith as visio)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련된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궁극적인 무대를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은총이 넘치는 것으로 본다.

이 네 가지 이해 방식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서로를 보충해 주기도 한다. 신앙의 중층적 의미를 천착하고 있는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이다. 흔히 '믿음'이란 불확실한 주장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나는 믿는다에 해당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나의 심장을 바친다”(69)는 뜻이다. 믿는다는 말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을 봉헌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믿는다는 말이 어떤 선언이나 명제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한정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이다.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신앙은 심장의 길이다”(71)

성서는 기독교인의 기초 문서이고 정체성 문서이고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기독교 전통의 심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성서가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 곧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라고 본다. 따라서 성서는 상대적이며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진 문서이다. 성서는 기록될 당시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했기에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해석자들은 본문을 산출하고 전승해온 공동체에게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신앙 공동체는 역사적 기억은유적 이야기를 결합시켜 자기들의 하나님 체험을 전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은유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은유를 통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은유적 언어 속에 내포된 사람들의 내밀한 체험을 읽어내는 해석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성서는 또한 성례전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례전이란 거룩함을 전달해주는 유한하며 물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매개물(visible mediator)”(96)이다. 성서의 말씀은 성령이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말씀하시는 수단이 된다”(97).

저자에게 있어 하나님은 실재의 심장이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고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이상’, 실재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 종교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하지만 신을 원본 없이 존재하는 그림자, 곧 시뮬라크르로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는 하나님이 실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아주 확고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신의 실재를 증명하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그는 신의 실재를 암시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신의 실재를 집단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세계 종교들, 다양한 종교 체험에 대한 보고가 그것이다. 현대 물리학도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사람과 비슷한 인격적 존재로 보는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다. 그는 범재신론(panentheism)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둘러싸고 계신 영으로서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분이다. 저자가 보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보상으로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군주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자비의 길로 초대하는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다. 기독교는 요구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관계와 변화에 관한 것이다(129).

예수는 하나님의 심장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하나님의 계시를 일차적으로 한 인격(a person) 속에서 찾는다는 점”(131)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의 예수 중심성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죽음을 통해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라고 믿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부활절 이전의 예수를 유대교 신비주의자, 치유자, 지혜의 스승, 사회적 예언자, 하나님 나라 운동의 창시자로 본다. 그에게 부여된 기독론적 칭호들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진술이 아니라 부활절 이후의 예수 체험에서 비롯된 고백들이다. 기독론적 표현들은 실체에 대한 지시가 아니라 뭔가를 가리켜 보인다는 측면에서 은유적이다. 따라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예수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는 고백은 성전의 용서 독점권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독점권을 부정하는”(156) 체제전복적 은유이다. ‘라는 고백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정치적 차원을 잃어버린 한국교회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새로운 삶의 여섯 기둥

기독교 신앙의 심장을 붙든 기독교인들의 삶의 특색은 변화이다. 성경은 옛 사람에 대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켜 중생이라 일컫는다. 물론 중생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영적-인격적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보다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어지는 옛 자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과 존재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저자는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중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실재를 환기시킴으로써 나는 때때로 존재의 가벼워짐을 느끼는데, 이것은 나의 자기집착과 짐처럼 느껴지는 감금상태에서 벗어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도록 부름받고 있다”(189).

이처럼 거짓 자아로부터 벗어나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함께 아파하는’(compassion) 연민이라 할 수 있다. 연민은 생명을 낳고, 양육하며, 포옹하는 마음이다(195).

마커스 보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적-사회적-정치적 변화와 관련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억압적이고 인습적인 사회 체제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예수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가 일상화되고 종교가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기존 체제를 부정한다. 하나님 나라는 탈세계적 비전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을 변혁시키는 강력한 비전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옹호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담론은 오늘도 힘으로 지배하려는 제국의 담론에 맞서 의료 보장, 환경 보존, 경제정의, 힘의 남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영적인 변화와 더불어 정치적인 변혁 모두를 강조한다(230).

기독교인의 삶이 관계를 맺는 삶이며 변화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얇은 곳”(thin places)이라는 표현이다. 저자는 닫힌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간적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얇은 곳이란 실재의 두 차원 사이의 경계선이 부드러워 서로 스며들고 투과할 수 있게 되는 장소(241)를 상징한다. ‘장소라 말했지만 그것은 자연 혹은 광야처럼 지리적 공간일 수도 있고, 문학과 예술일 수도 있고, 인생의 한계상황인 질병이나 고통 혹은 애도의 순간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런 얇은 곳을 통해 활동하신다. 예배는 얇은 곳을 창조하는 일이다. 신앙을 통한 마음의 변화, 곧 자아가 하나님과 신성함에 대해 열리는 것을 가리켜 저자는 '마음의 부화(孵化)(238)라 일컫는다. 부화된 마음의 특색은 공감의 능력이며,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저자는 죄와 구원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이 때로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죄는 휴브리스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멀어짐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인간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성서가 제시하는 이미지 곧 눈멂, 유배상태, 묶임, 닫힌 마음, 굶주림과 목마름, 길 잃음 등을 포괄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죄에 상응하는 이미지는 용서인데, 용서라는 단어가 과연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일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행위의 결과인 경우도 있지만 사회에 의해 부과되거나 구성된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죄와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순간 우리는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 눈을 감고 내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구원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온전함’, ‘치유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고, 성서에서 중심적 모티프가 되는 이야기들은 한결 같이 새로운 백성,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구원이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276)라는 말이다.

기독교인의 삶이 관계를 맺는 것이고 또 변화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꼭 필요한 것은 수행’(practices)이다. 신앙과 행위를 구분했던 개신교 전통은 수행을 소홀히 해왔다. 하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서, 양육되기 위해서, 함께 아파하며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 길을 살아내기 위해서(288) 수행은 필수적이다. 저자는 매우 실천적인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수행의 기본은 교회에 소속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현대 문화가 제시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의 비전을 확증하는 기억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기도, 명상, 묵상, 독서, 봉사, 일상의 성화에 참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존재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 시대

이제 남은 질문이 있다. ‘내적 변화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면, 믿음이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왜 하필 기독교인인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다른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다양하다. 하지만 거칠게 범주화하자면 종교에 대한 절대주의적 이해와 종교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로 나눌 수 있겠다. 종교에 대한 절대주의적 이해는 구원은 오직 우리에게만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은 자기 경전과 교리들을 절대화함으로써 종교적 배타주의의 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다른 종교를 대화의 파트너로 보기보다는 개종의 대상으로 본다. 종교간의 충돌은 당연하다. 종교에 대한 환원주의적 입장은 종교를 인간이 만들어낸 것(invention)”으로 간주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만든 것은 강력한 심리적 및 사회적 필요성 때문”(319)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오류일 따름이다.

저자는 종교를 성례전적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종교는 인간의 구성물이지만 신성한 하나님체험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에서 환원론과 구별된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에게 오래된 종교들은 모두 절대적인 것의 매개자이지, ‘절대적인 것자체가 아니다”(325). 이 말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교가 신성한 실재를 가리키고 참된 삶의 을 가리킨다면 왜 우리는 꼭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객관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대답을 할 뿐이다. 기독교전통과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준 오솔길인 동시에 친숙한 생활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고백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헌신과 사랑의 표현이다. 신앙의 언어는 고백이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란의 소지가 많지만 이것이 마커스 보그의 고백이다.

반지성적이고 독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오늘의 교회는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신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뜨거운 심장이 교리와 신조라는 차가운 심장으로 대체되면서 기독교는 삶의 변화와 역사 변혁의 종교가 아닌 비정치적인 종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커스 보그는 상투적인 신앙언어의 외피를 벗기고, 그 언어 속에 담긴 생동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도전적이지만 개인의 신앙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적실하게 느껴진다. 신학적 토론이 증발되어 버린 채 상투적인 신앙 언어만이 앵무새처럼 되뇌어지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은 이제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 정직하게 재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posted by

‘천사’가 일깨워준 새로운 삶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1. 27. 08:04

꽃자리의 '종횡서해'(1)

  ‘천사’가 일깨워준 새로운 삶
- 마사 베크의 《아담을 기다리며》 -

 

몇 해 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개인적 체험이라는 작품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원래 사소설(私小說)적 전통이 뿌리 깊은 일본이기 때문에 조금 덜 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의 이색적인 자기 고백이 담겨 있는 이 작품이 당대의 국내 독자들에게 준 충격과 감동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작가 개인의 가장 내밀하고도 직접적인 경험을 담은 이 소설의 내용은, ‘뇌 헤르니아라는 기형의 병을 앓고 있는 장애 아이를 키우는 버드라는 사내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에 혹이 달린 아이는 뇌수술을 받지 않으면 곧 죽게 된다.

장애아를 살려 키울 것인가, 아니면 미필적 고의로 죽게 내버려둘 것인가? 이때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한 생명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부담을 느낀다. 결국 주인공은 수술을 결정하게 되고 장애아인 아이를 살려 돌보게 된다. 실제로 오에 겐자부로가 장애인인 아들을 키우던 개인적 체험이 반영된 이 작품은, 그 과정에서 느꼈을 법한 한 인간의 번민과 고통이 소설의 직접적인 내인(內因)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감동과 공감을 자아낸 바 있다.

여성 칼럼니스트 마사 베크(Martha Beck)의 자전적 회상록 아담을 기다리며는 여러 면에서 개인적 체험을 환기하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아이를 갖게 되고, 그 태아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것을 알게 되고, 그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산고 속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부의 고통스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 이 작품은 철저하게 작가의 실제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제삼자의 눈에는 휴머니즘의 발현으로 보이는 이 같은 부모의 헌신과 애정이 실은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망설임과 안간힘의 결과라는 것을 두 작품은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 체험에 나타나는 개인적 결단의 과정에 비해 아담을 기다리며는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근원적이고 신성한 존재와 그로 인해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가 변화하는 과정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자신이 집착하던 가치나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가치에 이르는 감동적인 전신(轉身)의 서사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이 작품과 개인적 체험이 갈라지는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결 밝고 활력에 차 있다. 이 작품을 종교적 각성의 한 은유(隱喩)로 읽을 수 있는 까닭도 이러한 활력과 전신의 에너지 때문이다.

하버드의 엘리트 학생 부부인 마사와 존이 두 번째 아기를 임신하게 된다. 산과 검사 결과 뱃속의 아기인 아담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임신 중절을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숱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고통과 절망, 불안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 인해 그들 부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치들과 하나하나 결별한다. 그리고 그 동안 살아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눈을 떠가게 된다. 아담을 기다리며는 이처럼 주인공 마사와 존이 그들의 아들 아담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자기 발견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흐름은 시간의 선형적(線形的) 구조를 따르고 있지 않다. 작가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여러 풍경과 삽화들이 그때그때의 기억의 충실성에 의해 순서 없이 나열되고 있다. 아담을 가지기 전, 아담을 가진 후, 아담을 낳던 때, 아담을 키우면서 등의 시간이 뒤섞여서 일정한 배열 원리 없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담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삶의 변화의 여러 결을 보여주려는 데 작품의 초점이 있지, 장애아를 키우면서 삶을 극복해 가는 휴먼 다큐식의 서사에 중심이 있지 않다. 그런데 이들이 그토록 힘든 고통을 감내하면서 기다린 아담은 누구인가?

먼저 아담은 태어날 때부터 다운증후군을 앓은 선천성 장애아다. 그는 고개가 한편으로 기울고, 입은 헤벌어지고, 혀가 늘어져 나오고, 눈은 초점을 잃”(121)은 외관을 하고 있는, 어찌 보면 한 가정에 근심과 한숨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존도 처음에는 임신 중절을 생각하게 되고, 주위 사람들도 그들 부부의 자기 성취를 위해서 아담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것을 권면한다. 그러나 아담을 가지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들 부부의 신비한 경험들, 예컨대 집에 화재가 났을 때 마사를 구해준 손길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인형 조종자)’의 도움을 통해 그들은 생활이 전적으로 나 아닌 누군가의 통제하에 있다는 기괴한 기분”(61)을 느끼게 된다.

따스한 이웃들,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 펑펑 울고 마는 그들 부모의 애정도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몫을 한다. 이 순간 그들이 기다리던 아담은 장애아로부터 신성한 존재로 탈바꿈된다. 결국 아담을 통해 만나고 알게 된 이러한 신성한 존재들과의 신비로운 소통을 통해 너무나도 논리적인 사람”(33)이었던 마사는 자신이 내 자식인 이 아이는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것, 내가 그를 정상적인 아이로 만들려고 애쓰며 겪는 고통에 대해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79)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반복되고 있는 마사의 가혹한 구토증은 이러한 발견과 변화에 따르는 고통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가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그들의 생을 고통으로부터 축복으로 이끈다. 그래서 마사는 아담은 그를 갖기 전에 내가 느낀 어떤 것도 능가하는 행복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사물의 핵심을 보는 것,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장미뿐만 아니라 관목들까지 냄새를 맡아보는 것에서 오는 것”(84)이라는 고백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존 역시 황량한 황무지 대신에 온갖 가능성이 충만한 세상에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을 버리고 과거의 싸움터로 돌아가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그건 전혀 바랄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290)라는 변화를 겪는다. 이 모든 것이 아담이 가져다준 신비로운 은총이다. 그만큼 조그만 기적들이 항상 아담 주위에서 일어난다는”(109) ,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그 모든 교육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해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 내 아들에게서 배웠다는 것”(123), “아담에게는 사물의 외면적 일상성을 꿰뚫고, 그것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마술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202)는 것에 대한 일련의 귀중한 발견이 뒤따르면서 그들의 생은 변화한다.

이 책의 부제가 “A True Story of Birth, Rebirth, and Everyday Magic”인 것을 참조하면, 이들 마사와 존의 삶은 탄생과 재탄생 그리고 매일 일어나는 마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일상적 마술이 아담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조그만 기적들의 다른 이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가운데 마사가 고통 속에서 듣게 되는 신성한 음성과, 특별히 마사가 진통의 혼몽중에 바라본 공중에 서 있는 한 쌍의 맨발”(302)은 예수 그리스도의 감각적 형상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생의 극한에서 만나게 되는 신의 음성과 손길과 맨발, 그것들은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은 아주 틀린 말이다. 사랑은 지상에서 오직 하나 우리에게 서로를 가장 정확하게 보게 해주는 것이다”(234)라는 발견을 통해 그들 부부를 궁극적인 사랑의 힘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초점은 이제 사랑에 가 닿는다.

우리의 짧고 덧없는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고립된 자신을 벗어나 손을 뻗쳐 서로에게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힘과 위안과 온기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인간이 하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사는 것이다.”(147)

그래서 이 손을 뻗쳐 서로에게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힘과 위안과 온기를 발견하는 능력은 자연스럽게 사랑의 힘으로 이어진다. “방안의 그 물리적 존재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과 함께 온 사랑이었다. 나는 빛나는 사랑의 물결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그 사랑은 땅 위의 모든 고통이 조그만 흠집도 낼 수 없는 그렇게 강한 사랑이었다”(302)는 발견은 그래서 이 책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이룬다.

책의 서문에서 김종철 교수가 베크 부부는 그들 자신이 이 세상에 전혀 새로이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소중하고, 무엇이 하찮은 것인가 하는 데 대하여 근원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랑으로의 변화를 일컫는 증언이다. 그 근원적 깨달음을 던져준 아담은 결국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강림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형식이 된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와 선천적 장애아이자 뭇사람들에게 진귀한 은총을 주고 있는 아담은 이 순간 하나의 육체로 통합된다. 이처럼 이 책은 크게는 종교적 발견의 서사, 작게는 한 인간의 가치의 중심이 전이되는 자기 탐색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장애인 문제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고 있다. 장애아를 돌보는 것은 휴머니즘이라는 인간 본위의 실천이 아니라, 신성한 힘에 의해 주어진 은총의 일부라는 생각으로의 전환을 이 작품은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이 같은 풍경은, 생의 재앙을 생의 복으로 변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과 은총을 함께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이른바 아이비리그(Ivy League)’에 속해 있는 엘리트들의 맹목에 가까운 삶의 태도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함의도 띠고 있다. 하버드를 이루고 있는 풍경은 치열한 경쟁과 엄청난 속도, 지독한 자기 중심성이다. 특히 존이 존경해 오던 유능한 사업가인 카버나 하버드의 저명한 학자이자 교수인 고우트스트록에 대해 존이 치르는 존경과 경멸의 엇갈림은, 그 자체로 성취 중심의 지식인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는 전회(轉回)의 장면이다. 고우트스트록 교수가 존에게 한 암흑시대가 아직 가장 명석한 정신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군”(221)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불문율처럼 전제하는 이성 중심, 효율성 중심, 자기 본위의 상상력을 그대로 드러내주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성적·기능적·자기 중심적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한계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읽은 호킹이나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읽은 틸리히의 견해를 존중한다면, 그리고 원천적으로 종교적 체험이 어떤 거룩한 실재와 접촉하는 성스러움의 경험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베크 부부가 겪은 신성한 존재와의 만남은 종교적 체험의 일부를 이룬다. 종교적 경험의 현상학적 특징이 자기 부정을 통하여 새롭게 자기를 재긍정 하는 통과제의적 과정을 겪는 데 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되기 때문이다. 베크 부부는 아담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엄청난 고통 속에서 찾았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아담은 그들 부부를, 우리 모두를 새로운 존재가 되게끔 인도한 천사였다. 말 그대로 하늘이 보낸 사자였다.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