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306 해바라기 응달진 씽크대 주방 집기들이 아파트 베란다로 다 나왔다 물속에서도 물기를 머금을 줄 모르던 집기들이 모처럼 누워서 축 늘어져 해바라기를 한다 어떻게 햇살을 담뿍 머금었는지 눈이 부시도록 빛을 내뿜는 걸 아름답게 바라보면서도 해바라기 씨앗처럼 까만 점이 생길까 샛노란 꽃잎처럼 피부가 탈까 쓸데없는 걱정부터 앞서는 나는 아직 멀었다 살면서 해바라기 한 번 실컷 못하고서 그늘진 눈가에 실주름만 진다 해를 등에 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해바라기처럼 8월의 햇살에 익어가며 씨앗에게 자릴 내어주는 꽃잎과 밭고랑을 닮은 굵은 주름살 앞에 늘 부끄러운 마음의 골마다 주름이 진다 2021. 8. 12. 무딘 나를 흔드는 것은 무딘 나를 흔드는 것은 스쳐 지나는 꽃바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느라 머문 당신의 고요한 눈빛입니다 닫힌 귀를 열리게 하는 것은 간지럽히는 꽃노래가 아니라 우리 사이를 빈틈 없이 채운 당신의 평온한 침묵입니다 2021. 8. 11. 우리의 숨은 하느님 나는 마음을 보며 산다 하늘을 보듯 마음을 본다 눈빛에 깃든 마음을 말투에 깃든 속내를 보이지 않지만 있는 숨은 마음을 보는 일 성경에서 본 '너희는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는 고려팔만대장경을 두 글자로 함축하면 '마음(心)'이라는 예수가 끊임없이 가리킨 마음 '마음으로 범한 일은 범한 일이라'는 이처럼 숨은 마음을 보여주는 말씀들은 스러지려는 나를 일으켜 태우는 불꽃이 된다 마음을 보는 일은 마음을 지키는 일 마음을 지키는 일은 숨을 바라보는 일 하루 온종일 놓치지 않는 숨줄 생의 숨줄을 붙드는 기도 숨을 바라보는 일은 온전함과 하나되는 일 숨을 바라보는 일은 나의 리듬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순례길 너와 나가 둘이 아님을 서로가 숨으로 하나될 수 있음을 아는 평화 나를 온전하신 그분 .. 2021. 7. 21. 숨 그리고 숨쉼 숨을 쉰다 숨을 쉰다 숨은 쉬는 일 숨은 쉼이 된다 너무 빨라지지 않도록 너무 가빠지지 않도록 숨으로 고삐를 매어 몸과 마음의 황소를 길들이는 일 숨을 쉬는 순간마다 숨은 쉼이 되는 일 숨은 몸에게 쉼을 준다 성성적적(惺惺寂寂) 깨어서 숨을 바라보는 일이 오늘 하루 나의 주업무 나머지 몸을 위해 먹고 사는 모든 일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처럼 따르는 부업일 뿐 숨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숨이 중용을 잃지 않도록 숨을 쉬는 일 숨은 쉼을 준다 영혼의 탯줄인 숨줄에 매어 순간과 순간을 새롭게 살아간다 고요한 숨은 우리의 본래면목 숨은 우리의 하느님 숨을 쉰다 숨을 쉰다 2021. 7. 18. 춤 그리고 멈춤 하늘과 땅 사이 숨으로 피어나는 춤 비와 바람의 북장단이 울리면 가슴이 들썩인다 발뒤꿈치에서 움터 손끝으로 흘러 춤으로 피어나는 숨 춤은 멈춤에서 시작하여 멈춤으로 끝나는 숨 춤을 찰라로 쪼개면 멈춤의 이어짐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 신에게 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춤은 화목 제물이 되는 스스로 온전한 춤은 온전한 사랑 안에 머물러 비로소 쉼을 얻는 멈춤 바깥에서 헤매이며 구하기보다는 멈추어 안으로 시선을 거두는 기도 한 점 숨으로 머무는 고요 침묵의 기도와 사랑의 숨쉼 꽃과 나무의 춤 그리고 멈춤의 평화 사람의 본래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의 숨 2021. 7. 17. 열 감지기가 울렸다 열 감지기가 울렸다 가게 문 입구에서 37.4도 순간 나는 발열자가 된다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에어컨을 틀지 않았던 것이 원인임을 스스로 감지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집 안에서는 선풍기를 돌리고 창문을 조금 열어둔다 차 안에서는 뒤에 창문 두 개를 다 열고 보조석 창문을 반쯤 열고 운전석 창문은 이마까지만 내린다 비록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맺히더래도 여름인데 몸에서 땀이 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이런 나는 가족들 사이에선 꼰대가 되기도 하고 밖에선 발열자가 되어서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인도 델리의 재래 시장인 빠하르간즈 5월로 접어들던 무렵의 무더위를 몸이 기억한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선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무더움 그곳의 초여름 더위는 무더움을 넘어.. 2021. 7. 16. 멈춤 두 다리를 포갠 꽃잎의 평화 허리를 세운 나무의 고요 하늘을 머리에 인 고독이라는 가장 커다란 방을 채우는 침묵이라는 가장 커다란 울림 멈춤의 흙그릇에 머무는 숨 2021. 7. 15. 오두막 숲으로 울타리를 두르고 산새 소리에 새벽잠을 깨우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는 집 나무와 나무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내려앉는 집 월든 숲속 소로의 오두막 법정 스님의 오두막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 초의 선사의 일지암 다산 초당 초가집과 막사발과 박꽃 그곳에서 나뭇가지 줏어 모아 불을 때서 밥 해먹고 입던 옷 기워 입고 침묵으로 밭을 일궈 진리의 씨앗 한 알 품고서 없는 듯 있는 바람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오두막에서 맞이하는 저녁 그 이상을 꿈꾸어 본 적 없이 어른이 되었는데 지금 내 둘레엔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 2021. 7. 13. 삼 세 번의 평화 진입로로 끼어드는 찰라 측방 거울을 스친다 속도를 늦추는 차가 보이면 얼른 진입을 한 후 삼 세 번 비상등으로 뒷차에게 보내는 신호 속도를 늦추어줘서 고맙다는 뜻 그러면 신기하게도 뒷차는 알아들었다는 듯 우리는 사이좋게 달린다 그리고 가끔은 횡단보도 중간에서 보행 신호등을 놓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때도 비상등으로 삼 세 번 이 순간 도로가 멈추고 뒷차가 고요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걸음 속도에 삼 세 번이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러면 또 삼 세 번 또 삼 세 번 삼 세 번 한 점이 되어 숨을 고르면 인도에 올라서서 평화의 숨을 고르신다 하늘 땅 사람 가슴에는 늘 삼 세 번의 숨이 머문다 2021. 7. 9.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3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