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313 길을 잃으면 땅에서 길을 잃으면 저 위를 바라본다 동방박사들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이 땅에 내려오신 어린 왕을 찾아가던 사막의 밤길처럼 하늘 장막에 써 놓으신 그 뜻을 읽으려 밤낮 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저 하늘이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내 안으로 펼쳐진 이 커다란 하늘이었다 숨줄과 잇닿아 있는 나의 이 마음이다 마음대로 행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다는 그 마음 날 여기까지 이끌어준 모든 새로운 길들을 비춘 마음속 하늘 2021. 10. 3. 문향(聞香) 하얀 박꽃이 더디 피고 하얀 차꽃이 피는 시월을 맞이하며 하얀 구름은 더 희게 푸른 하늘은 더 푸르게 무르익어가는 이 가을 하늘이 먼 듯 가까운 얼굴빛으로 다가오는 날 들음으로써 비로소 열리는 하늘문을 그리며 문향(聞香) 차꽃의 향기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올해도 감사히 모든 꽃들이 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음은 꽃들을 둘러싼 없는 듯 있는 하늘이 늘 쉼없는 푸른 숨으로 자신의 향기를 지움으로 가능한 일임을 2021. 10. 1. 푸른 명태찜 한가위 명절 마지막 날 늦잠 자던 고1 딸아이를 살살 깨워서 수운 최제우님의 유허비가 있다 하는 울산 원유곡 여시바윗골로 오르기로 한 날 번개처럼 서로의 점심 때를 맞추어 짬을 내주시고 밥도 사주신다는 고래 박사님과 정김영숙 언니 내외 끓는 뜨거운 돌솥밥과 붉은 명태찜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간직했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언니와의 첫만남에서 서로가 짠 것도 아닌데 둘 다 윤동주와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똑같이 챙겨온 이야기 그것으로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우리는 단번에 첫만남에서부터 바로 자매가 된 이야기 동경대전에 나오는 최수운님의 한시를 풀이해서 해설서를 적으신 고래 박사님의 노트 이야기 청수 한 그릇 가운데 떠놓고 모두가 둘러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천도교의 예배와 우주의 맑은 기운을 담은 차 한.. 2021. 9. 28. 석 삼 방문이 활짝 열리며 아들이 바람처럼 들어와 누웠는 엄마 먹으라며 바람처럼 주고 간 종재기 푸른 포도 세 알 누가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누가 한국 사람 아니랄까봐 피 속에 흐르는 석 삼의 수 더도 덜도 말고 석 삼의 숨 하나 둘 셋 하늘 땅 사람 2021. 9. 27. 용담정 툇마루 경주 구미산 용담정 툇마루에 앉으며 먼지처럼 떠돌던 한 점 숨을 모신다 청청 구월의 짙은 산빛으로 초가을 저녁으로 넘어가는 구름으로 숲이 우거진 좁다란 골짝 샘물 소리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수운 최제우님의 숨결로 용담정에 깃든 이 푸른 마음들을 헤아리다가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달을 보며 빌던 정성과 만난다 시천주(侍天主) 가슴에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이란 몸종이던 두 명의 여인을 한 사람은 큰며느리 삼으시고 또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으신 하늘처럼 공평한 마음을 헤아리다가 용담정 산골짜기도 운수 같은 손님이 싫지 않은지 무료한 마음이 적적히 스며들어 자리를 뜨기 싫은데 흙마당에 홀로 선 백일홍 한 그루 아직 저 혼자서 붉은 빛을 띄어도 마땅히 채울 것 없는 마음 그릇에 모실 만한 것이란 초가을.. 2021. 9. 26. 가을잎 푸른 하늘 길 없는 길을 하얀 뭉게 구름 흘러가는 가을날 푸른 무화과잎 소리 없는 소리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아직은 뿌리가 깊어 손인사 하듯 제자리에서 흔들릴 뿐 눈물처럼 떨군 가을잎 한 장 가을 바람이 좋아 얼싸 안으며 돌아 발길에 부대끼다 흙먼지로 돌아가도 이 땅이 좋아 푸른 하늘처럼 2021. 9. 16. 말 한 톨 내려주신 말 한 톨 어디에 두어야 하나 글을 아는 이는 종이에 적어두고 글을 모르는 이는 가슴에 심더라 종이에 적어둔 말은 어디로 뿌리를 내려야 하나 가슴에 심어둔 말은 잊지 않으려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다가 마음밭으로 뿌리가 깊어져 제 육신의 몸이 곧 말씀이 되어 마음과 더불어 자라나고 단지 말을 종이 모판에 행과 열을 맞추어 가지런히 글로 적어두었다면 다시금 마음밭에다가 모내기를 해야 할 일이다 말이란 모름지기 마음을 양식으로 먹고 자라나는 생명체이기에 마음밭에 뿌리를 내린 말의 씨앗에서 연두빛 새순이 움터 좁은길 진실의 꽃대를 지나는 동안 머리를 하늘에 두고서 발은 땅으로 깊어져 꽃과 나무들처럼 너른 마음밭에 저 홀로 서서 꿈처럼 품어 꽃처럼 피울 날을 기다리는 말 한 톨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2021. 9. 9. 오늘의 잔칫상 딸에게 차려줄 때에는 모양새에 신경을 써야 하고 아들에게 차려줄 때에는 양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차려주신 오늘이라는 밥상은 나날이 잔칫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입맛 하나 하나를 다 만족시켜 주는 자연, 그 얼마나 신경을 쓰셨으면, 심지어는 변화하는 우리의 입맛에 발 맞추어, 자연의 진화라는 방법으로 거듭 새로운 잔칫상을 차려 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새롭게 차려 주신 하루라는 잔칫상에 오늘도 행복한 잔칫날입니다. 어디서부터 눈을 두어야 할 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 지 2021. 9. 8.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나의 익숙한 산책길은 이 방에서 저 방을 잇는 강화마루 오솔길 하루에도 수없이 오고가는 이 산책길에 내 가슴 옹달샘에선 저절로 물음이 샘솟아 지금 있는 일상의 집이지만 물음과 동시에 낯선 '여긴 어디인가?' 나의 가장 먼 여행길은 집에서 일터를 오고가는 아스팔트 순례길 날마다 오고가는 이 여행길에 무엇을 위하여 달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숨구멍으로 보이던 마음을 펼치어 언제나 가슴으로 산과 하늘을 가득 맞아들인다 나의 입산 수행길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오르는 시멘트 돌층계 틈틈이 오르는 입산 수행길에 오르는 걸음마다 고요한 숨으로 평정심을 지키려는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되돌아오려는 이러한 내 안의 '나는 누구인가?' 2021. 9. 6.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