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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님께

예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by 한종호 2017. 12. 8.

김기석 목사님께(2)


예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리운 김기석 목사님, 무더운 날씨에 고생 많으셨지요? 예수도 우리처럼 불면의 여름밤을 지새우지 않았을까요? 다시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예수는 가을보다 봄에 더 열심히 활동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가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묵상에 잠긴 예수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예수는 어떤 주제로 일생을 고뇌하였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믿음과 이해의 관계가 중요한가


그리스도교 한쪽에서는 여전히 믿음과 이해의 관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를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것이지요. 성서학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고 여러 학문의 질문과 시대정신의 요청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인간 이성을 존중하고 발휘하는 모습은 현대를 사는 지식인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 이해하기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은 주제입니다. 마땅하고 옳은 관심입니다만, 그 모습에서 한편으로 아쉬움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의 핵심 메시지가 과연 믿음과 이해의 관계인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몰두해왔지만 세상을 변혁하는 게 신학에서 더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불의한 세상에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하나님나라를 만드는 데 애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믿음과 정의의 관계라고 표현할까요. 예수 따르기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습니다.


믿음과 이해 또는 믿음과 정의. 예수 이해하기와 예수 따르기. 모두 연결되는 주제겠지요. 믿음의 내용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불의한 세상을 올바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예수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모두 마땅하고 옳은 질문입니다.


성서 내용의 깊은 면모를 맑은 샘에서 길어내시는 김기석 목사님, 저는 믿음과 이해 그리고 예수 이해하기를 그리스도교에서 준결승이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결승전에 진출하고 싶은 사람은 그 전에 준결승을 거쳐야 하겠지요. 준결승전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결승전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음과 이해의 관계를 깨닫지 못하거나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믿음과 정의, 그리고 예수 따르기를 시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 준결승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에 결승전은 믿음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예수 따르기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준결승을 통과한 사람이 결승을 포기하면 안 되겠지요. 믿음과 이해의 관계 그리고 예수 이해하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춘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습니다. 믿음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예수 따르기라는 결승전을 포기한 사람이겠지요.


믿음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예수 따르기는 믿음과 이해 그리고 예수 이해하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과 이해 그리고 예수 이해하기를 먼저 다루고 그 다음에 비로소 믿음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예수 따르기로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그리스도교 핵심 메시지의 순서와 중요성에서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순서와 중요성을 정확히 식별하지 못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준결승을 결승처럼 착각하는 사람도 있고, 준결승을 통과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결승을 다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예수의 핵심 가르침을 잘 나타내는 비유 하나를 보고 싶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27절 말씀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길을 떠나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저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당신은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마가복음 10:17-27).


목사님,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 시대 유다교에서 유행하던 화두입니다. 누구나 그 주제로 묻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중차대한 질문에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예상 밖의 답이 예수에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계시다, 예수는 구원자시다. 삼위일체, 은총. 이신칭의’ 같은 아주 묵직하고 심각한 주제를 예수는 업급 해야 온당하지 않았습니까? 좀더 그럴 듯한 답변은 어디 없습니까? 그 가난 같은 주제보다 죄, 죽음, 고통 같은 좀 더 철학적이고 고상하고 품격 높은 주제가 그리스도교에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교가 겨우 가난 같은 사소한 것을 주제로 삼다니요.


예수님은 다시 말합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낙타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짐승이었습니다. 바늘귀는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구멍입니다. 가장 큰 짐승이 가장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유다교 가르침을 뒤집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서로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라거나 깨달으라는 말도 아니고,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라니요? 영원한 생명을 묻는 조직신학 질문에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회교리 답을 제안했습니다. 우문현답 같기도 하고 현문우답 같기도 합니다. 예수의 이 답변을 듣고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예수를 버리고 떠나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은 살인하지 않기보다 어렵고, 부모 공경보다 어렵다는 뜻이 혹시 아닐까요? 그 사람의 태도보다 제게 더 큰 충격은 예수의 답변에 예수의 제자들이 깜짝 놀랐다는 사실입니다. 부자는 당연히 하늘나라에 쉽게 들어갈 것이라고 제자들은 그동안 믿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불평하는 제자들은 예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이 같은 말씀을 유추해보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부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성서 구절일 것입니다. 부자들이 가장 싫어해야 마땅할 종교가 곧 우리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김기석 목사님, 대한민국 어느 부자가 그렇게 생각합니까? 교회나 성당에서 부자들이 수모를 겪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기나 할까요? 부자 성도들이 교회에서 쥐 죽은 듯 근신하는 풍경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의 이 날카로운 말씀을 무디게 해버린 슬픈 역사가 그리스도교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습니다. 부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세상의 온갖 신학자들은 오늘도 갖가지 묘수를 짜내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버림받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부자들에게 미움 받는 것은 참기 힘든 종교인들은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놀란 제자들처럼, 지금 한국 개신교에서 예수의 답변에 화들짝 놀라는 목사, 장로, 신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자 신자들은 하늘나라에 마땅히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신자, 장로, 목사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믿으면, 교회 다니면 마땅히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는 신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약성서를 다 뒤져도 부자가 복을 받는다는 구절이 하나도 없어도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교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질문에서 우리 상상 이상으로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교에서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아마 가장 엄중한 주제일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든 이해하기 못하든, 받아들이든 받아들이기 싫든, 불편하든 불편하지 않든 간에,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교에서 온당하게 취급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보다는 죄의 문제, 구원받는 방법의 문제가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 같습니다. “죄 많은 내가 자비로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는 루터와 바울에게 공통된 주제였다고 우리는 알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과연 그런 고뇌를 우리처럼 심각하게 했을까요? 예수에게 죄의 주제가 그렇게 심각하고 중요했을까요? “불의한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혹시 예수는 이런 주제로 고뇌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죄의 문제보다 불의의 문제가 예수에게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에게는 죄의 문제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예수는 죄인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선 것 같습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인 나’보다 ‘불의한 세력 앞에 선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의 평생을 일관하는 화두 아니었나요? 우리는 죄인을 더 묵상할지 모르지만,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 묵상하지 않았을까요?


목사님께 드리는 편지에서 저는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신자들이 가장 중요할지 모르지만, 예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에 오는 신자가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의 제일 대상자라는 진실을 재확인하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김기석 목사님, 제 수다가 너무 길었습니다. 제 어설픈 생각에 대해 목사님의 친절하신 가르침을 기대합니다. 종교개혁 오백주년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저는 개신교에서 좋은 감동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더 건안하시고 더 건필하시길 빕니다. 하나님을 찾아 걷는 길에서 만난 신앙의 형제로서 목사님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여름 청파교회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만남이 그립게 떠오릅니다.


김근수/전 가톨릭 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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