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께(8)


먹물과 속물 동거시대의 알곡처럼


목사님, 40년 또는 반세기만이라는 불볕더위 속에, 10년은 족히 되는 선풍기마저 고장 난 방에서 목사님의 책,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읽었습니다. 참, 책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읽는 맛이 다릅니다.


마침 박근혜 대통령이 8ㆍ15경축사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을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면서 ‘헬 조선’ 등 세간의 유행어를 매몰차게 비판하던 뒤끝이라 목사님이 펴내신 책의 이 제목부터가 맘에 끌렸습니다. 모두 아는 바대로 ‘헬 조선’이란 유행어는 박근혜 정부 시기에 나온 ‘민중의 소리’인데, 여전히 남 탓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헬 조선’은 자살율 세계1위, 청년실업, 빈부격차, 안보불안, 출산율 세계최저, 부패지수 세계최고 등의 현실에서 생긴 말입니다.

하긴 100g에 수백만 원씩 하는 송로버섯, 바닷가재, 훈제연어, 칠갑상어알 샐러드, 상어지느러미찜, 한우갈비 등으로 오찬을 즐기는 그들에게 ‘헬 조선’은 이해하기 어렵고, 불온하기 그지없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만의 ‘지상낙원’을 모르는 채 ‘더위나 먹으면서’ 사는 99%의 ‘개·돼지’들의 나라가 왕조국가인지 공화국인지 헷갈리게 합니다.



원나라 시대의 학자 김이상金履祥이 “글 읽는 사람을 만나면 그 다섯 가지 맛이 섞여 있어서 재미가 진진하다”고 했거니와 김기석 목사님의 책이 꼭 그렇습니다. 52가지 소제를 빼어난 문장력으로 풀고 동서고금 명저에서 솎아낸 다양한 인용문은 청와대 오찬에 나온 값비싼 메뉴와는 비할 바가 아니더군요.


“문은 인”이라 하여 글은 곧 사람입니다. 글과 책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글 같은 글, 책다운 책을 만나기란 여간 쉽지 않은 터에, 모처럼 ‘인과 문’이 일치한 글을 만났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그의 시를 읽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옳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문은 곧 인’이기 때문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이니까 이런 책을 쓸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이비 문인ㆍ학자ㆍ언론인ㆍ목사ㆍ주교ㆍ승려들이 판치는 시대에 김 목사님은 참 문인이고 신실한 목사라고 생각됩니다. 옛날식으로 하면 참 선비인 거지요. 조선초기의 혁명적 지식인이었던 정도전은 ‘참 선비상’을 다음과 같이 그렸습니다.


첫째, 사는 학지제천지學之際天地하여 음양ㆍ천문ㆍ지리ㆍ생물ㆍ복서卜筮 등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어야 한다.

둘째, 사는 명윤리明倫理하여 오륜을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셋째, 사는 달어고금達於古今하는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

넷째, 사는 지성지본호천명知性之本乎天命하는 성리학자여야 한다.

다섯째, 사는 관인이면서 교육자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시문을 통해 진리를 나누는 벗이어야 한다.

일곱째, 골육지친과 사귀는 벗이어야 한다.

여덟째, 책을 붙잡고 옛것을 뒤적이며 새로운 도덕을 말하는 벗이어야 한다.

아홉째, 생사를 함께하는 벗이어야 한다.

열째, 심장을 가르고 간을 꺼내며 믿게 할 만한 친구여야 한다.


목사님, 한국 사회가 ‘헬 조선’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언론인과 지식인(종교인 포함) 등 이른바 선비들이 제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장차관, 국회의원, 검사, 판사 등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머슴들입니다. 그런데 머슴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설치는 적반하장은 일차적으로는 주인인 국민의 책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의와 진리를 존재의 사명으로 하는 지식인들이 책무를 다하지 않거나 오히려 권력과 유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슴들이 상전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던 겁니다.


고대로 지식인 사회는 먹물과 속물이 동거하기 마련입니다. 대학 사회ㆍ정계ㆍ언론계ㆍ법조계ㆍ종교계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뒤섞여 있습니다. 속물과 쭉정이가 더 설치고 종교계에서는 그 속물, 쭉정이가 더 선지자 행세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대형교회와 사찰을 짓고 권력자를 우상으로 섬기면서 신도들의 지갑을 털지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설교와 설법으로 기복신앙을 부추겨 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묶어둡니다.


목사님은 어찌 보면 평범한 기독교 목사이고 문학평론가입니다. 그런데 혼탁한 시대에는 ‘평범’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지배세력, 주류 패거리에 섞이지 않으면 ‘찬밥’ 신세가 되거나 ‘이단’으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평범함 속에서 진실을 말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고, ‘다섯 가지 맛’이 나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과외의 재미와 지식을 준 ‘인용문’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 자주자주 ‘쉼터’를 만나게 됩니다. 그 쉼터는 때론 사막의 오아시스일 수도 있고, 풍성한 과수원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목사님이 책을 통해 보여준 ‘인용문’ 말입니다. 다양한 책에서 발췌하여 그때그때 제시한 인용문은 과외의 재미와 지식, 신선한 석간수, 엄동의 딸기 맛이 납니다. 마음에 와 닿는 인용문 및 편을 골라보았습니다.


십자군은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한테 손을 내밀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한테서 배우려는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의 공포와 원한을 다스릴 줄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이고 망가뜨리고 태우고 모독하고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들의 도덕성을 무너뜨렸다. 아우슈비츠는 그런 의도된 증오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지만. 서양인이 계속해서 이슬람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 볼 경우 오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카렌암스트롱, 《마음의 진보》, 435-436쪽).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 눈멀 수 있단 말인가? 형제의 흠을 찾아내는 데는 아르고스의 백 개의 눈을 가진 자가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저렇듯 완전히 눈멀 수 있단 말이냐? 저자들은 구름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너그러우라고 호통을 치면서 자신들은 불꽃을 휘두르는 몰록처럼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팔순의 눈먼 노인은 문밖으로 내모는 족속들이다. 탐욕 부리지 말라고 아우성치면서, 금붙이에 눈이 멀어 페루인들을 말살시키고 이교도들에게 짐승처럼 수레를 몰게 한다(프리드리히 폰 실러, 《도적패》, 119쪽).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1-4).


어찌해서 당신들은 여기 수도원에 편히 앉아 가난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빚어진 빵을 먹으면서. 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백성들과는 동떨어져서. 저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는 커녕 고지식한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들 보고 이리떼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어진 목자들이 되라 하셨는데. 어떻게 당신들은 양들을 잡아먹는 이리 떼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들은 가난 속에서 평생도록 헌신적인 삶을 살기로 굳게 맹세하고 또 서약하고서도 당신들이 한 말은 모두 잊어버린 채 안락한 생활을 할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 종교가 뜻하는 모든 것을 다 저버릴 수 있습니까?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어떻게 수도를 한다는 것입니까? 당신들은 겉으로는 당신들의 육신을 죽이는 체하나, 속으로는 당신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세상의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질색인 양하면서도 속마음은 탐욕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스스로백성의 지도자요. 스승이라 자처하나.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들은 강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칼랄 지브린, 《반항하는 정신》, 22-24쪽).


시의적ㆍ감성적인 문장


김 목사님은 또한 대단한 문장가입니다. “보기 좋은 떡은 먹기도 좋다”는 격언대로 아무리 천하의 경륜을 담았대도 글이 난삽하면 읽히지 않지요. 좋은 글이란 읽기 쉬우면서도 논리적이고 시의적이면서 감성적이어야 합니다. 목사님께서 쓴 본문 중에서 몇 대목을 골라봤습니다. 한 번 더 읽고 싶어서입니다.


세상이 온통 부정한 돈 냄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치권에 유입되는 부정한 자금은 가진 자들만의 리그를 조성하는데 활용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돈은 문화계, 경제계, 언론계, 종교계 할 것 없이 모두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는 말씀을 지금처럼 처절하게 실감하는 때가 또 있을까요? 저는 늘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서로 함께’의 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선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돈의 전능을 해체하라」, 130쪽).


지난 시절에는 우리 의식 속에 동두렷이 떠오르는 별들이 있었습니다. 시절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분들이 계시기에 절망 속에 유폐되지 않을 수 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마른 목을 축이는 새들처럼 그분들의 말씀을 경청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권위에 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 정신이 사라졌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지만, 들으려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중력에 이끌릴 뿐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마음이 망실되었기 때문일 겁니다(바라보아야 할 별 하나」, 143쪽).


손이 아름답던 한 사람을 압니다. 예수입니다. 그는 나병에 걸려 사랑하는 이들과의 접촉의 기쁨을 포기한 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열병에 시달리던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기도 하셨습니다. 바다 물결 속에 잠겨들던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 끌어올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깨어났습니다(마주 잡을 손 하나」, 158쪽).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인간을 ‘서로 함께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지낸다는 것이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연애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상대방의 낯선 모습에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 낯섦을 품어 안을만한 여백이 없을 때 불처럼 타올랐던 사랑은 차가운 재만 남긴 채 꺼져 버리기도 합니다. 사랑의 위기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그러한 낯선 모습이야말로 두 사람의 사랑을 크고 깊게 만들기 위한 기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둘이서 함께 걷는 길」, 176쪽).


누군가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큰 사람입니다. 아무리 맞아도 돌이킬 줄 모르는 이들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이 가끔은 “장군죽비가 되어 어깨를 후려치는 것 같았고. 때로는 싸리비로 마당을 정갈하게 쓸어내는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양철북 소리처럼 쟁쟁하게 들려왔다”고 하셨지요? 세월이 흘러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얼굴을 붉히실 때,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저의 말과 삶의 괴리를 누구보다 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을 따라 살아보려는 애는 쓰지만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는 그만 먹으라고 하는 데도 숟가락질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몸과 마음에 밴 습기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고 하여 지레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인생은 ‘오늘’의 점철」, 345쪽).


일상적인 세계, 상식의 세계. 예측 가능한 세계가 무너질 때 삶은 혼돈으로 변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런 무난한 세계에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일탈의 욕망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이런 일탈의 욕망이 없다면 인간 세계는 지루함 때문에 지옥으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타자를 물화시키거나 그의 존엄을 훼손하기 시작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종교는 그런 과도한 욕망을 경계하는 나팔소리여야 합니다. 종교가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할 때 세상 도처에서 괴물들이 나타납니다(인간보다 이상한 존재는 없다」, 215쪽).


의를 살리는 루터의 길을


목사님, 내년 2017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루터가 만크펠트에 있는 부모를 방문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나게 됐는데, 그때 번개가 그의 옆에 있는 숲을 때렸다고 하지요.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자신도 모르게 광부들의 수호성인 안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수도사가 되기를 서원했습니다.


루터는 이와 더불어 어느 날 신약성서 로마서 1장 10절의 “하나님의 의는 복음 속에 나타나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바울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고 ‘의의 길’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위대한 출발이었지요.


김기석 목사님, 종교개혁의 주체이던 기독교(개신교)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시대에, 김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한국기독교 개혁의 선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목사님의 편지 글인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가 루터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를 명백히 할 목적”으로 쓴 ‘95개 조항’과 같이 ‘의에 목마른’ 시대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건필 하십시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김남주 평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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