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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님께

다만 노을이 되어 내일 아침의 빛나는 태양을 도울 뿐입니다

by 한종호 2017. 12. 18.

김기석 목사님께(10)


다만 노을이 되어 내일 아침의 빛나는 태양을 도울 뿐입니다


목사님의 편지 잘 읽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따르고 쳐다보는 양으로서는 참 가슴 뭉클한 편지였습니다. 따를 지팡이나 바라볼 막대기 찾기가 이리도 쉽지 않은 시대에 드문 반가움이요, 감동이었지요. 책을 받아 들고 무릇, 목사의 편지란 뻔한 스토리가 펼쳐질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생각했기에 이내 지루한 상상을 떠올렸지요. 하지만 문장마다 진정성이요, 소박하면서도 해박한 사유의 깊이와 연민이 일렁이는 글을 대하며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사람을 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음이요, 시대를 바라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음이요,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글이었습니다.


이따금 제게 비친 목사님의 마음은 거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 직설적인 것보다는 은유적인 것, 극단적인 것보다는 유연한 것에 기운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그토록 선한 천성과 함께, 어떤 후천성이 보태진 대목도 찾아졌습니다. 예컨대 양심을 잃고 폭력에 중독된 작금의 행태에 관하여는, 불의를 담지 못하는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분노 같은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 용산참사 현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평화 운동가들과 함께 추모와 평화의 결의를 다졌던 시간 기억나시지요? 그곳에 검소하고 간편한 배낭을 등에 지고 점퍼차림으로 걸어오시는 목사님을 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서지도 않았고 생색을 내거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어떤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저 참여하고 마음을 보태는 한 인간으로서의 겸손한 태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모습이 김기석이라는 목회자 특유의 이미지로 제게는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참혹한 세상의 현장 앞에서, 사악한 권력이 저지른 만행 앞에서 한 종교인으로, 한 목회자로, 한 인간으로 바람처럼 걸어 들어온 것이지요. 치밀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요, 거사를 도모할 의사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그분의 길을 따라 그냥 걷고 있는 이 지구의 선한 신앙인으로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도’와 ‘레’사이의 수많은 음을 무시하는 시대


어제 저녁엔 단원고등학교를 다녀왔습니다. ‘기억교실’을 이전(존치)하는 문제를 놓고 유가족과 경기도교육청 안산교육청 그리고 중재위원회의 서른다섯 번에 걸친 회의 끝에도 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 전야제를 했지요. 이 행사의 진행을 맡아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30년 세월 비교적 남다른 경력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저로서도 이 난감한 시간을 지나가기가 퍽 어려웠습니다. 민망하고 무기력하며 분노와 슬픔에 젖은 무대였지요.


개인적 고백을 좀 하자면, 2005년부터 일해 왔던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라는 사단법인의 사태가 꽤 심각하고 추악하게 이르러, 10여년 세월 이 땅에 평화박물관을 지으려는 꿈으로 모금공연을 해왔던 저로서는 여간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단법인社團法’이 ‘사단법인私團法人’으로 변해버린 어이없는 사건이지요. 소위 ‘진보’라는 얼굴의 민낯을 보게 되는 참담한 일입니다. 또한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노래동네’에는 공연이라는 것이 사라졌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상업을 목적으로 하는 곳은 다르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인간’과 ‘역사’를 안고 노래하는 노래 진영에는 웃고 노래하기가 조심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치 유난스러운 올여름처럼 정지된 시간입니다.


어젠 평생을 한반도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일해오신 고 박형규 목사님의 장례식장에서 조가弔歌를 불렀습니다. 북쪽의 땅 개성이 열렸던 날, 함께 기쁨으로 다녀왔던 정이 아니어도, 이 땅에 기독교의 후배들에게 삶 그 자체로 보여주셨던 청년 같은 푸른 생애 앞에 노래밖에 드릴 것이 없는 것을 송구하게 여기며 다녀왔던 길입니다. 94세의 노스승은 돌아가시기 전 며칠 동안을 스스로 곡기穀氣를 끊으시고 그 고결한 삶을 최후의 시간까지 행하셨다고 합니다. 사악한 독재정권들은 ‘긴급조치9호’, ‘민청학련사건’ 등의 사건을 조작하여 수차례 투옥과 온갖 고문으로 옥죄었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던 자유인이었습니다. 어이없게도 이 사건은 40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법정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런 이 땅에서 노래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한 문장이 또 들어옵니다. ‘해 저문 빛이라도 있으니 고맙다’라는 글입니다. 언젠가 노래하는 선배가 집에 놀러와 다짜고짜 ‘미안하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선배는 몇 년 전, 저의 25년 기념공연에 격려의 글을 보냈지요. “그는 그 오랫동안 이 세상에 들어가 그늘을 걷어내는 노래를 했다”고 써주었습니다. 노래동지들이나 뜻을 함께하는 분들이 가끔씩 던지는 이런 위로의 말이 사실 제겐 ‘해 저문 빛이라도’ 같은 것입니다. 글쎄요, ‘버티고’ 있다고 말씀 드려도 될는지요?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라는 물음에는 지금 답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노을이 되어 내일아침의 빛나는 태양을 도울 뿐이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의 사역은 ‘빗금철폐(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거룩/속됨, 의인/조인, 부자/빈자. 선/악, 미/추 등)’라는 목사님의 표현은 단호하고 깔끔한 비유입니다. 그러면서 흑과 백을 가르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회색빛사회에서 살겠다고 속내를 내비치셨지요? 관습이 만들어놓은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사신 예수를 우리는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문득 떠오른 시구詩句가 있습니다. 신동호 시인이 17년 만에 낸 시집에 담긴 글이지요. “농현弄絃은 국악엔 있고 삶엔 없다.” ‘도’와 ‘레’사이의 수많은 음을 무시하는 시대와 관행과 인간들에게 던지는 묵직한 경고입니다. 빗금을 철폐해야 마땅한 종교가 빗금을 재생산하고 또 생산해대는 이 시대를 울어봅니다. 이 눈물이 평화를 데리고 오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의 귀한 편지를 어느 날 또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래서 꽉 찬 책꽂이이지만 보이도록 넣어두겠습니다.


오늘 아침 본 영화에서 외국의 한 어린이가 들려준 독백을 쓰며 인사를 드립니다.


“학교로 가는 길은 참 멀어요, 두 시간 정도 걸리지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학교를 갑니다. 중앙로로 가거나 골목길로 가거나 목적지는 같아요. 그러나 그게 크게 다른 점이죠.”


목사님, 설마 그게 희망은 아니겠지요?


홍순관/ 가수, 평화운동가, 《나는 내 숨을 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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