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1)
쿨하게 종교읽기
나는 종교학자이다. 그러다보니 만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로부터 종교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은데, 그 이유는 질문을 던지는 많은 이들이 보이는 마음가짐과 자세 때문이다. 종교학은 가급적 있는 그대로의 종교를 이해하고자 객관적 자세를 유지하는 경험학문이다. 따라서 종교학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가급적 종교를 ‘읽으려’하지, 그것을 ‘전’하거나 그들 사이의 ‘우열을 논’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종교학자들이 만나게 되는 많은 질문은 후자인 경우가 많다. “어떤 종교가 진짜이냐?”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 가장 높으냐?” 등등.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런 성향은 도드라진다. 서구사회만 하더라도 종교학적 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어 종교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설명이 사회적 합의를 해 가는데 큰 장애가 없는데 반해, 유독 한국에서만 종교하면 곧바로 진리논쟁이나 진리다툼으로 치달아버린다. 그래서 차분하게 종교‘들’의 있는 모습을 읽고 이해하려기보다는 당장에 원하는 방식에 따라 여러 종교들을 ‘줄 세우려’고 한다. 그리고 특정 종교 안에서도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먼저 구분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니 종교관련 논의나 담론은 쉬 정치적으로 흘러가버린다.
이런 형국이니 정갈한 태도로 종교를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자꾸 뒤로 묻힌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균형 잡힌 종교읽기는 간단치가 않다. 이 글은 그런 안타까움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우리 사회의 여러 종교들을 있는 그대로 한번 살펴보자는 자성적 통찰이 이 글을 이끄는 가장 커다란 동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예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해 보자. 왜 우리 사회에서 종교담론은 쉬 진리논쟁으로 치닫는 가? 이는 아마도 ‘종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기초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 이야기를 풀기 전 종교에 대해 몇 가지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한국 사회는 종교를 명사로 읽으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유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등등 다양한 종교를 이 명사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그런데 애초에 이 말은 그런 명사적 뜻보다는 형용사적 쓰임이 더 강했다. 종교란 말의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는 종교적 의례를 대하는 이의 성실한 자세와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란 말의 본래 뜻은 ‘경건’, ‘믿음’, ‘신실’ 등에 더 가깝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이후 서구 사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Christianity)란 단어가 만들어지면서 태도에 집중하던 종교란 단어에 새로운 뜻이 첨가되기 시작했다. 사실 그리스도교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적 종교’(christian religion)란 낱말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란 고유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서구세계에서 종교, 즉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것 말고 다른 것을 찾기가 곤란했다. 그러니 ‘그리스도적 릴리지언’이란 단어가 종교를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썼다는 <De vera religione>는 ‘참다운 종교’가 아니라, ‘참다운 믿음’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가 칼뱅의 저작인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도 ‘기독교 강요’로 번역하기보다는 ‘그리스도적 믿음의 원리’로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을 따른다면, 종교란 단어는 인간의 내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이 단어를 자꾸 외형적인 그 무엇인양 오해해서 바라본다. 인간 내부의 믿음과 신실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종교란 단어가 자꾸 명사적으로 읽히면서 좀체 눈에 잡아둘 수 없는 종교적 동인을 외형적인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하면 교의, 교리, 조직, 체계, 기준 등을 생각하게 되고, 그런 우리의 성향이 계속 종교논의를 진리다툼으로 끌고 가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종교를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보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종교를 논할 때도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떠 올리는 환경이 되어야 좀 더 쿨하게 종교를 읽을 수 있을 길이 열릴 것이다.
또 하나 우리 사회에서 종교담론이 절대화되는 이유로 나는 조선시대의 이단혁파 사조를 꼽고 싶다. 사실 조선왕조는 종교국가였다. 주자학이라는 완결적 사유시스템으로 사회 전반을 통제했던 종교국가가 바로 조선이란 나라이다. 마치 이는 중세의 유럽과도 비슷하다. 중세 유럽이 ‘그리스도 보편국가’(res publica christiana)였던 것처럼, 조선이란 나라는 ‘주자보편국가’라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원적이지 못한 사회였다. 철저히 하나의 이념, 하나의 임금, 하나의 사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했던 사회였다. 그런데 서구가 계몽이란 강을 지나면서 다양성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다원적 사회로의 진입이 가능했던 반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계몽의 강을 넘지 못한 채 중세의 주술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체로서 주장되는 개인을 조직적으로 경험하여 각인된 역사적 인식을 갖지 못한 우리 사회는 여러 점에서 여전히 중세의 왕조적 마인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대통령은 임금이 되고, 개인은 존재치 않으며, 납세자는 신민이 되고, 종교는 절대가 되어야 한다. 왕조 사회의 갑들은 비판과 분석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복종과 순종만 허용될 뿐이다. 그러니 종교도 함부로 읽거나 분석해서는 곤란하다. 무엇이 되든지, 유일한 절대 종교만 찾고, 그것을 숭앙하면 될 뿐이다. 그래서 종교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악바리처럼 ‘절대’, ‘진리’, ‘참’, ‘원조’, ‘보편’을 반복해서 되뇐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생명이라도 된 양. 허나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종교의 본질은 지키고 주장해야 할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있게끔 작동한 ‘내부’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점에서 우리 사회의 종교담론은 방향설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판단이 이 연속된 글의 정확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종교이야기를 진리논쟁이라고 하는 파리통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현상과 역사의 흔적을 추적하여 우리 사회의 종교담론을 쿨하게 바꾸어보자는 것이 바로 이 글의 갖는 소소한 사회적 임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후 진행되는 나의 글은 종교학자의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많은 현상 중, 특히 종교와 관련된 것들을 선택해 그것의 맥락을 종횡에 따라 계보적으로 읽어 공론의 마당에 올리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 사회의 포장 없는 종교의 민낯을 읽게 된다면 이 글의 소임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길용/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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