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
유교도 구원을 말하나?
간혹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난 서슴없이 “유교!”라고 답한다. 그럼 거의 예외 없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현 통계에 잡히는 것으로 하자면, 신도 수에서는 불교를, 그리고 사회적 활동과 영향력에서는 개신교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생뚱맞게 유교라니!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지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천만을 헤아리는 신도를 거느린 불교와 만 명 이상의 교회가 즐비한 개신교를 빼놓고 한국의 종교를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난 현 종교현황도 모르고, 아니면 무시한 채 그저 잘난 체 하기 위해 한국 최대의 종교로 유교를 꼽은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우선 내가 유교를 말한 이유는 내가 사용한 종교란 용어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신, 절대자, 경전, 구원, 깨달음, 교회, 사찰, 사원, 스님, 목사, 법사, 신부, 이맘 등등. 그리고 부르는 이름과 생긴 모양은 다르더라도 종교라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저런 형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 종교학에서는 종교를 꼭 그렇게 정의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폭넓고 광범위하게 종교를 바라본다.
이전에 종교하면 신적 존재나 알 수 없는 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곤 했다. 그런데 경험적 종교 연구가 등장한 이후 종교에 대한 정의가 좀 더 냉정해지기 시작한다. 종교가 신이나 미지의 힘과의 만남이라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집중적으로 취급하게 되는 것은 그런 존재를 만난 후에 생겨난 인간 쪽의 ‘변화’이다. 즉 종교가 가지는 인간학적 의미가 좀 더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절대자나 신적 존재는 인간이 아무리 용쓰고 떼쓰고, 발악을 해도 좀체 규명되거나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는 무엇 무엇을 만난 것이라 이야기 하는 순간, 종교에 대한 설명 자체는 매우 축소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 종교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다. 즉 초점이 인간에게로 옮겨오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제 종교를 규명할 때도 대상이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주체, 즉 인간이 중요해진다. 이런 논리적 전개를 통해 얻어낸 잠정적 결론은 종교는 ‘세계이해’를 위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를 내 지도 교수였던 고 플라쉐(Rainer Flasche, 1942~2009)교수는 ‘세계설명체계’와 ‘삶의 문제 극복체계’로 정리했다.
내가 유교를 종교로 답한 사연에는 바로 저 시스템으로 종교를 보는 현대 종교학의 논리가 들어있다.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고, 또 실존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 시스템으로 요청되는 무엇을 종교라 본다면, 당연히 유교 역시 종교이다. 그런 점에서 유교는 한국 사회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생활종교’라 할 수 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1392~1910)의 영향 탓에 오백년 이상 유교적 가치관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에토스에는 유교의 영향이 없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교의 종교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종교가 세계 설명 체계이고 삶의 문제 극복 체계라 하더라도, 종교라면 빼놓을 수 없는 목적지향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완벽에의 추구’이다. 때론 이를 ‘구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에서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한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죽음’이라 말할 수 있다. 나도 죽고, 너도 죽고, 그도 죽고…. 인간인 이상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리고 안타깝고 불행하게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 아는 바 매우 적다. 그러니 어떤 종교라도 이 죽음의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해결의 결과를 ‘영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생, 영원한 생명. 결국 죽지 않겠다는 것이다. 안 죽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교에서도 영생을 말하는가? 말한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의 영생은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신 안에서의 융합적 동거로 해결한다. 불교에서는 애초에 죽어야 할 실체적 자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해체적 방식을 선택한다. 그럼 유교는? 유교는 영생을 집단적-사회적으로 해결하려 든다. 일단 유교라는 종교의 세계관은 실재론적 성격이 강하기에 유신론적 종교에서 종종 보이는 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서 신을 상정하지 않는다. 유교에서 말하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음양의 조합 중 양의 성격이 농후한 것(혼백에서 따지자면 혼에 가깝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유교는 유물론적 성격이 강하다. 아무튼 유교의 구원에 관한 논의를 좀 더 이어가면, 유교에서는 가족의 연계를 통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출처: Korea.net (www.korea.net))
유교의 세계관은 상식적이기에 사람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또 다른 별세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다. 무언가 이어갈 것이 필요하다. 어떡해? 그때 유교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자손이다. 혈육이다. 핏줄이다. 가문이다. 나는 죽어도 또 다른 ‘나’가 살아남는 시스템. 유교는 이를 통해 자신들만의 구원을 완성시켰다. 따라서 지금의 언어로 유교의 구원을 정리해보면, ‘특정(가문) DNA의 영속적 승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가족이 중시되고, 그 가족을 이루게 되는 ‘결혼’을 소중히 여긴다.
생각해보시라. 아무리 잘나가는 자식을 두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인드에서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어떤 언사를 던지는지를! 또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아이가 없다면 우리는 또 어떤 말로 쏘아대는가! 따라서 유교적 마인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너 언제 결혼할래?” “너 언제 손주 안겨 줄 거냐?”라는 말은 “너 언제 교회 나올래?” “공덕을 쌓아 성불하세요!” 등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종교적 발언이라 할 수 있다.
결혼을 고리로 이어진 가족주의에 기초한 유교라고 하는 종교의 가치관은 지금도 강력하다. 명절 때마다, 집안의 대소사 때마다 발길을 원적으로 돌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에토스는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아닌 바로 유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는 이를 사회적 제도 속에 깊게 각인시켜 놓았다. 나는 죽어도 집단은 살리기 위해 항렬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름에서도 성을 앞세운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개로 사는 것이 아니라, 김씨, 이씨, 박씨로 산다. 내가 죽어도 나와 같은 항렬의 인척들이 있음으로 우리 가문은 영속하고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가문의 영속을 확인하는 축제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우리는 이를 ‘제사’라 부른다. 돌아가신 선조의 기일이나, 설날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가문의 영생을 축하하는 의례, 그것이 바로 제사이다. 그런 점에서 유교의 생명부는 족보라 할 수 있다. 가문의 영속을 문헌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 그들의 종교적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족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교의 에토스는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매우 강력한 힘으로 작동되고 있다. 그러니 유교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라고 할 수밖에.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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