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4)
공부는 구도행위
영생의 교리도 준비되었다. 그리고 그걸 확증할 수 있는 종교적 의례(제사)도 구비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구도의 길일 것이다. 다시 꼼꼼하게 문제를 정리해보자. 유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가족의 영생이다. 매우 상식적인 문제풀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가족 단위로 가게 되면 존속의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문 차원에서 생육하여 번성해야 한다. 이건 생활이 아니라, 종교요 신앙의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래야 영생하는 거니까.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한 해결책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이 역시 어려울 것이 없다. 생존의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보다 좋은 삶의 환경을 구축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과제를 처리해야 하나? 뭐 크게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온다.
“가문의 영광!”
누구보다도 질 좋은 환경에서 확고한 가족적 영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문은 영광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명예도, 평판도, 그리고 경제적 환경도 풍요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해당 가문에 속한 구성원들이 보다 더 잘 후손들을 이어갈 수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해야 가문이 영광을 얻을 수 있겠는가?’일 것이다. 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세상에 나서서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다. 그때 이름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가문이 것이요, 집단의 것이요, 공동체의 것이다. 따라서 가문의 성(姓)을 가지고 입신하여 양명했으면, 그건 혼자가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된다. 그래서 유교 사회의 사람들은 기를 쓰고 양명할 가능성이 높은 가문의 구성원에게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는(전문 용어로 ‘몰빵하는’) ‘종교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나보다 항렬이 낮고, 나이가 어리고, 덩치가 조그마해도 입신양명의 가능성이 ‘그에게’ 있다면 모든 가문의 수혜를 몰아주게 된다. 그리고 ‘그’가 얻어낸 양명의 명예를 ‘모두가’ 공유하려 한다. 아니 당연히 그것은 공유되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 양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했던가!
(출처: Derek Winchester (https://www.flickr.com/photos/derekwin)
이제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고 또한 느껴질 것이다. ‘가문의 영광’, ‘입신양명’, ‘출세’, ‘급제’ 등등 유교 사회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들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와 무게를! 이들 모두 영생을 위한 사회적 기재요 개인과 집단을 위한 윤리 되겠다. 그래서 유교 사회에서는 무섭게 가문의 영광을 위해 매진한다. 그래서 모든 사회적 행위의 최전선에 ‘공부’가 자리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 사회의 문제가 도드라진다. 공부. 바로 그 공부 때문이다. 우리는 공부를 종교적 구도 행위의 하나로 각인하며 살아왔다. 그것을 지금 의식의 수준에서 알아채고 있는가는 뒤로 물리더라도 말이다. 이미 오래도록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안 누군가가 똘똘한 머리를 지녔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데 전혀 거리낌 없는 에토스 속에 살아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생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 사회에서 공부는 일종의 구도 행위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공부로 성공해야 가문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국가는 모두에게 공평한 영생의 길을 제공하기 위해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디자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과거’라는 국가 시험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유교 사회는 과거를 매우 치밀하고 공을 들여 관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각 가문은 나름대로의 현실적 선택과 판단을 하게 된다. 이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남녀의 성별 선택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 과거란 국가 고시는 오직 남자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 사회의 남성 중심적 사고를 이념적 성차별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건 신앙의 문제요, 형이상학적 구도에서 나온 선택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유교 사회에서 여성도 공적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남존여비’란 사회적 기재는 이미 오래전에 화석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짐이 지금 우리사회에서 보이지 않는가. 각종 국가고시마다 수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많은 여성들. 그리고 심심치 않게 매체에 오르내리는 여성 경영권자와 명사들의 일거수일투족. 이제 서서히 한국사회의 성차별도 줄어들 것이다. 바로 공적 자리 획득에 성적 제한이 없어져가기 때문이다.
그 다음 기회 균등의 원칙이 보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건 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가문의 영생을 위한 종교적 구도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기계적 평등에 세심한 배려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거이다. 과거는 원칙상 천인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응시할 수 있는 국가 시험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모두가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 시험인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경제적 후원을 담보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양인신분보다는 양반 가문에서 더 많은 합격자를 배출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은 조선 시대 양반이란 계급은 혈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획득신분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혈연으로 세습되는 신분은 왕족 외에는 없다. 임금 외에 다른 모든 관직은 각자의 역량을 통해 획득한 신분이다. 따라서 양반들은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적잖은 투자와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고, 양인들은 양반신분으로 들어가 가족적 영생을 확증받기 위해 더더욱 ‘잘난 놈 몰아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회의 균등이 사라진 과거제도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조선조 말 빈번해진 과거의 타락은 국가쇠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사회는 공부에 대한 공동체적 신앙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제 공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개인의 신앙적 책무가 된다. 왜? 그래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대의 유산은 고스란히 후대 사회에도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가지는 무게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너도 나도 계층별로 큰 차이 없이 공부에 매진하고, 몰두하고,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적어도 수백 년에 걸쳐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체득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은 한국에서는 신앙의 문제이다. 매번 입시철만 되면 이 땅위의 모든 종교를 대동단결하는 힘이 신앙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무교 등 가릴 것 없이 한마음으로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정성으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며 진행되는 이러한 (공부가 마련해준) 사회적 행위를 구도행위 외에 다른 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 지경이니 공부가 가문의 영속을 보장하는 구도행위라는 것이 결코 가볍게 들리지는 않으리라.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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